내가 현역일 때가 궁금하지 않은가.
“해리포터를 이긴 기분이 어떠십니까.”
[하루뿐인데요.]
“하루만이 아니게 될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군요.]
한록의 말에 핸드폰 너머의 서감독이 피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언제나 싸늘하던 태도와 달리 서감독의 말투에서는 웃음이 느껴졌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기분이 좋은 것이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났군요.]
해리포터를 이겼다. 영화감독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영광 중 하나이니까.
‘이 사람이 이런 말도 하는군.’
한록이 흐뭇한 표정으로 서감독의 말을 들었다. 이 일을 하면서 가장 즐거운 두 가지 순간. 첫 번째는 관객들이 영화를 보고 나올 때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이렇게 감독들이 기뻐하는 걸 옆에서 지켜볼 때였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수정 요청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록은 서감독이 대단한 결심을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한록이 아는 사람 중 자신을 제외하고 가장 프라이드가 높은 사람인 서감독. 그런 그가 한록의 말을 받아들였고, 막장 드라마 작가의 아이디어를 편집본에 반영했다.
[좋은 아이디어였으니까요.]
오로지 자신의 영화를 위해서.
‘이 사람은 대단한 감독이 될 거다. 아마 영화 역사에 남는 사람이 되겠지.’
-과연, 서감독은 앞으로 어떤 영화를 만들게 될까.
거장의 시작을 지켜보는 기분에 한록이 미소를 지었다.
그때 서감독이 한록에게 물었다.
[다음 영화는 뭡니까.]
그 말에 한록의 머릿 속에 떠오른 영화는 단 하나였다. 회귀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한국영화가 됐던 영화. 한록을 최연소 차장으로 만들어주고 세계적인 시상식을 휩쓸게 해줬던 영화.
‘시간이 됐다.’
이제는 그 영화를 가져올 때다.
하지만 아직 서감독에게 말해줄 수는 없었다.
“죄송합니다. 아직 대외비입니다.”
[네. 발표가 나오길 기다리겠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서감독의 말.
[...하거든요.]
그 말에 한록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곧 연락 드리겠습니다. 감독님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거든요.”
[네. 알겠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렇게 끝난 서감독과의 대화.
한록은 전화를 끊고 창문 밖의 야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반짝거리는 서울의 야경.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어디에선가는 <마지막 공연>에 대한 얘기가 나오고 있을 것이다.
영화를 끝낼때마다 느껴지는 보람. 하지만, 오늘은 거기에 조금 더 특별한 일이 있었다.
한록은 방금전 서감독이 한 말을 떠올렸다.
“죄송합니다. 아직 대외비입니다.”
[네. 발표가 나오길 기다리겠습니다.]
그리고...
[팀장님이 앞으로 어떤 영화를 맡을지 궁금하거든요.]
흥미와 호기심이 담긴 말.
-과연 이 사람은. 이 천재는 앞으로 어떤 행보를 걷게 될까.
아무래도 그런 생각을 하는 건 한록만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곧 다시 만날 겁니다.”
한록이 즐거운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
-하루만이 아닐 겁니다.
<마지막 공연>이 해리포터를 이긴게 하루로 끝나지 않을 거다. 한록의 말은 곧 현실이 되었다.
[9월 3주차 예매율 순위]
[1위. <마지막 공연>]
[2위. <마법사의 전투>]
.
.
.
[서지훈 감독의 <마지막 공연>이 5일 연속 <마법사의 전투>의 매출을 넘어섰습니다.]
<마지막 공연>은 하루만 <마법사의 전투>를 이긴 게 아니었다. 무려 5일이나 매출을 넘어섰고, 결국 9월 3주차에는 예매율 1위를 차지했다.
[이거 트루먼쇼 아님? 한국 영화가? 해리포터를? 이겨? 우리 꿈 꾸는 거 아님?]
[ㄴㅋㅋㅋㅋ저 미국인데 여기 애들이 저보고 다 <마지막 공연> 봤냐고 물어봄..꿈 아님 ㄴㄴ]
[이건 진짜 영화도 영환데 광고가 개쩔었음 ㅋㅋㅋ]
[ㄹㅇ 연말에 광고도 상 하나 받을 듯. 미국 사는데 <마지막 공연> 광고가 신문 2면이었음.]
[영화도 2면에 못 올라가는데 광고가 2면 실화냐]
[요즘 CK 광고 맛집임]
[두유노 클럽 불러와 빨리]
[bts 손흥민 그리고 서지훈]
[ㄴ서지훈 맨 앞으로 당기자]
[ㄴ그럼 쏘니는?]
[ㄴ손서지흥민]
[ㄴ둘다 안 남았는데]
<시험>과 <수면> 모두 헐리웃에 멋진 데뷔를 했지만, ‘해리포터를 이긴 영화’라는 타이틀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것. 그 자랑스러운 기록에 영화 커뮤니티만이 아니라 대다수으 매체에서 <마지막 공연>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보다 더 난리가 난 것은 미국이었다.
[워너 브라더스의 패배. 그리고 한국의 문화침공.]
[개봉 2주차에 해리포터 시리즈를 이긴 영화는 <어벤져스> 시리즈 뿐이다.]
[하지만 최근 한국의 작은 영화가 이 일을 이뤄냈다.]
[<마지막 공연>은 미국 전 지역의 매진 기록, 예매율 1위를 이뤄냈을 뿐만 아니라, 베니스 영화제에서의 수상마저 예상하고 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영화가 무성영화라는 것이다.]
[작품성. 관객수. 마케팅. 한국 영화의 그 모든 것이 헐리웃을 위협하고 있다.]
아예 평론까지 쓰면서 <마지막 공연>과 한국 영화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하는 헐리웃. 이제 정말로, 한국 영화는 장르의 한 갈래가 된 것이었다.
해리포터를 이긴, 압도적인 작품성의 무성 영화.
누구도 가질 수 없는 칭호를 달게 된 <마지막 공연>.
“워너 브라더스 이 놈들, 요즘 왜 이렇게 조용하지?”
“뭐라고 발언한 만한 상황이 아닐 겁니다. 제롬이 터뜨린 폭로를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바쁠테니까요.”
“아, 맞아. 어제 뭐 하나 더 터졌더라. 시리즈물 흑인 배우한테만 출연료를 미지급했다고 하더라.”
<수면>을 방해하기 위해 일부러 기자를 보냈던 워너 브라더스.
평소 같았으면 어떻게든 <마지막 공연>이 해리포터를 넘는 걸 저지하려 하겠지만, 지금은 회사 전체가 제롬의 인종차별 논란에 휘말린 상황이었다.
<마지막 공연>은 경이로운 기록으로. 워너 브라더스 스튜디오는 정치인, 시민들의 비판으로 하루종일 뉴스에 올라오는 상황.
한록의 말처럼 워너 브라더스는 아무런 손도 쓰지 못하고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2주 후.
[9월 박스오피스 순위]
[1위. <마지막 공연>]
정말로.
정말로 <마지막 공연>이 9월 박스오피스에서 해리포터를 이기고 1위를 달성해버렸으며...
[제임스. 협의회에서 독촉 메일이 왔어요.]
[뭐라고 하는데?]
[‘워너 브라더스의 인종차별 행위에 협의회 측에서 징계를 가할 예정이다’ 래요. 그리고...]
[그리고?]
[‘조속히 CK ENM의 협의회 가입에 동의서를 보내라’라고 왔어요.]
[젠장, 젠장. 젠장!]
“팀장님. 좋은 소식이 왔네요.”
“뭔가요?”
“직접 읽어보시는게 좋겠어요.”
[수신인: CK ENM 해외팀 팀장]
[협의회 가입의 건.]
[협의회 회원들의 만장일치에 의하여]
[CK ENM의 미국영화포럼협의회 가입을 요청합니다.]
드디어 CK가 이 전쟁에서 승리했다.
*
[CK ENM이 외국 기업으로서는 8번째로 협의회에 가입했다.]
[한국에서는 최초, 아시아에서는 3번째 쾌거이다.]
[이는 CK ENM이 헐리웃을 이끄는 영화사 중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연일 뉴스에 보도되는 협의회의 가입소식.
그 소식은 역시 CK의 회장과 후계자들에게도 전해졌다.
매월 마지막에 열리는 전사회의. CK의 후계자, 하정진이 현재 CK가 가장 주력하는 프로젝트에 얘기하는 순간.
“CK 식품의 영국 진출건에 대해...”
“조용. 다 아는 소리는 넘겨.”
하태준이 하정진의 말을 자르고 신문을 던졌다. 신문 1면에 보도된 것은 CK ENM의 협의회 가입기사였다.
“이 얘기부터하지.”
하태준의 말에 하정엽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하태준이 지금 가장 집중하고 있는 프로젝트보다, 협의회 가입얘기를 먼저 꺼냈다. 그리고 자신에게 발언권을 주었다. 지금 이 상황에 의미하는 것은 바로.
“잘했다, 하정엽. 아주 멍청이는 아니었군.”
이제 더 이상 자신이 형의 그늘에 가려져 있지 않았다는 걸 뜻했다.
“네 놈은 부하를 잘 뒀어.”
“네, 알고 있습니다.”
하태준의 말에 하정엽이 짧게 답했다. 그리고 한록과 해외팀을 떠올렸다. 자신을 이 자리에 있게 만들어준 부하들.
‘이번엔 뭘 사줄까.’
형이 보내는 싸늘한 시선을 즐기며, 하정엽이 즐거운 생각을 떠올렸다.
**
“사장님이 꽤 기분이 좋으신 것 같더군. 연말은 기대해 봐도 괜찮을 거라네.”
며칠 후, 최경준이 해외팀에게 은근히 전해준 소식.
“인센티브?!”
“승진?!”
“설마 둘다?!”
“사장님이 아니라 산타시네, 산타.”
“나 마흔 셋인데 산타가 선물 주네.”
“안 울고 잘 참았나 봐?”
해외팀 사람들은 뛸 듯이 기뻐했다. 자고로, 선물은 그 정체를 모를 때 가장 기대되는 법이니까.
해외팀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준 협의회 가입소식.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이득을 본 것은 바로 최과장이었다.
[안나. 윤일입니다. 내년 1분기에 남은 광고가 없는지 알고 싶은데요. 혹시 뉴욕 메인스트릿쪽 전광판 남는 거 없나요?]
차기작의 광고 루트를 잡기 위해 전광판을 보유한 거래처에 연락을 넣은 최과장.
CK는 외국기업이었고, 항상 미국 기업들이 광고 지면을 가져간 후 남은 자리를 배정받고는 했다. 그게 미국 기업이 해외 기업을 배척하는 관행이었다.
‘최과장. 요즘 괜찮은 거 맞아?’
‘아뇨. 살면서 제일 힘드네요.’
그래서 최과장은 언제나 지면을 받아오기 위해 열심히 뛰어다녔다.
[협의회에 할당된 전광판이 있어요. 거길 구매하시면 됩니다.]
하지만 협의회에 가입한 이상, 더 이상 거래처들에서 CK를 배척할 명분은 없었다.
CK에게 얌전히 광고 자리를 내어주는 거래처.
[어디인가요?]
[타임스퀘어 바로 옆 스트릿이요.]
심지어 그 위치마저 뉴욕에서 제일 좋은 장소 중 하나였다.
[고마워요. 거기로 잡아주세요.]
침착하게 거래처와의 전화를 끊은 최과장. 최과장이 옆에 앉은 현차장에게 말했다.
“차장님.”
“엉.”
최과장은...
“어디 가입할 협의회 더 없어요?”
감격한 얼굴이었다.
*
“전화 한 번에 전광판을 주더라니까요. 기다리라고도 안 하고, 가격도 절반이에요. 앞으로 광고 잡으려고 야근할 필요도 없고, 돈 두 배로 낼 필요도 없고, 인맥 동원해서 연락할 필요도 없어요. 협의회 최고. 진짜 최고.”
“최윤일. 그만 좀 해.”
그 이후로 계속 협의회에 대해 노래를 부르고 다니는 최과장. 정부장은 지겹단 얼굴이었지만, 한록은 최과장의 마음이 모두 이해가 갔다.
‘힘들었겠구나.’
CK에서 가장 미국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었고, 그러다보니 광고를 따오는 일을 거의 도맡아하던 최과장.
내색을 하지 않는 편이라 다들 몰랐지만 그만큼 막중한 책임을 느꼈을 것이다. 해외팀에서 오로지 혼자서만 이 일을 컨트롤 할 수 있다는 부담감. 그리고...
‘최과장님 발령이 언제쯤이려나.’
자신이 언제 떠날지 모른다는 생각까지.
하태준의 총애를 받아 임원코스를 밟고 있는 최과장.
최과장은 전사를 도는 중이었고, CK ENM과 마케팅 부서도 그 중 하나일 뿐이었다. 회귀 전에는 이 시점에서 최과장은 이미 CK 기획으로 자리를 옮긴 상황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해외팀이 주목을 받고 있기 때문인지 최과장의 거처에 대한 얘기가 나오지 않는 상황.
‘아마 쉽게 발령이 안 나올 것 같은데. 그래도 대비는 해 둬야지.’
한록이 그런 생각으로 최과장을 자신의 사무실로 불렀다.
“과장님. 업무 분장 다시 하겠습니다. 앞으로 광고 업무는 다른 사람들과 나눠서 하세요. 그간 고생하셨습니다.”
“이거 크리스마스 선물 맞죠?”
“네, 맞습니다.”
“제가 본 산타 중 제일 잘생기셨습니다, 팀장님.”
한록의 말에 최과장이 기쁜 목소리로 답했다.
“어려운 일이니까 업무 나눠받는 사람한테 인수인계 꼼꼼히 해주시기 바랍니다.”
“당연하죠. 누구랑 같이 하게 되나요? 이게 은근히 까다로운 일인데.”
“어차피 업무분장 다시 할 거니 최과장님이 판단하시기에 제일 잘 할 것 같은 사람으로 말해주세요. 말씀하신 것처럼 중요한 일이니까요.”
한록의 말에 최과장이 생각에 잠겼다. 미국 시장에 대해 잘 알고, 거래처를 컨트롤 해야하는 광고 매체 구입 업무. 그만큼 상당한 경력과 능력이 요구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최과장이 신중한 목소리로 답했다.
“좀 생각해보고 말씀드려도 될까요?”
“네, 그렇게 하세요.”
그렇게 말하고 최과장을 보낸 한록.
‘누굴 선택하려나.’
거래처를 컨트롤할 수 있는 경력. 거기에 미국 시장을 빠르게 파악하는 시야까지.
과연, 최과장이 자신의 일을 나눠받을 해외팀 최고의 인재로 누구를 선택했을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유선씨? 아니면, 송과장님?’
해외팀의 숨은 보석들을 생각하며, 한록은 정부장을 만나기 위해 해외팀 사무실로 향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의외의 광경을 발견했다.
자신의 책상에서 생각에 잠겨있다가 결정을 내린 듯이 누군가에게로 향하는 최과장.
최과장이 해외팀 최고의 인재로 택한 사람은 바로...
“차장님. 잠깐 얘기 좀 괜찮으세요?”
“엉? 왜?”
“좋은 소식이 있어서요.”
“...표정 보니 아닌 것 같은데?!”
현차장이었다.
“차장님. 앞으로 미국에 광고를 두 배로 걸 수 있습니다. 저랑 같이 미국이랑 전화하면서 낮밤 한번 바꿔보시죠.”
“...왜! 왜 나야!”
“차장님이 적임자 같으시거든요.”
“난 늙고 지쳤어! 이제 10시면 자야해!”
“아직 정정하십니다.”
열심히 현차장을 설득하는 최과장과, 낮밤이 바뀌는 광고 업무를 필사적으로 거절하는 현차장. 그 모습에 한록은 과거의 모습을 떠올렸다.
-현과장님이 존경할 분인가요?
현차장을 대놓고 싫어하던 최과장.
-제가 잘못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생각이 바뀌어서...
“차장님이 아니면 안 된단 말이에요.”
이제 현차장에게 존중과 존경을 보내는 최과장.
“차장님. 앞으로 광고를 두 배로 걸 수 있다고요. 안 기쁘십니까?”
“최윤일. 그 말 백 번은 했겠다.”
“그것 밖에 안 했나요? 이백 번 하려 했는데.”
“이 놈 왜 말을 이한록처럼 하지?”
“...풉!”
그리고 최과장을 나무라는 정부장과, 정부장의 말에 웃음을 터뜨리는 유선까지.
모두에게 무시받던 현차장이 이제 가장 필요한 인재가 되었다.
늘 속내를 보여주지 않던 최과장이 친근하게 팀에 엮인다.
언제나 차갑고 사무적이던 정부장이 먼저 부하들에게 말을 건다.
구과장의 말에 혼자 울던 유선이 이제 상사의 말에 웃을 줄 안다.
‘많은게 변했구나.’
과거와 너무나 다른 팀의 모습에 한록이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그리고 곧 머리를 흔들었다. 그래, 이건 변화가 아니었다. 이건...
‘다들 성장했구나.’
한 팀의 멋진 성장이었다.
그리고 그 팀에는,
“이팀장! 웃지 말고 최과장 좀 데려가!”
자신 또한 속해있었다.
*
며칠 후. 최경준의 사무실을 찾은 한록.
“이거, 얼굴 보기 어렵군.”
“죄송합니다. 외부 일정이 많았습니다”
“아니네. FOX 채널과 인터뷰가 잡혀있다며. 당연히 그 쪽에 집중해야지.”
한록의 말에 최경준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험>, <수면>, 그리고 <마지막 공연>의 어마어마한 성공. 거기에 슈퍼볼 광고까지. 이 모든 걸 성공시킨 해외팀의 수장 한록에게도 어마어마한 관심이 쏟아지는 상황이었다.
“사장님도 자네를 방해하지 말라고 하셨네. 일정이 끝나면 뭘 받고 싶은지 생각해보라고도 하셨고.”
그렇게 최고조의 주가를 달리고 있는 한록. 그의 관심사는 바로...
“그래서 다음 영화는 뭔가.”
“<식물>입니다.”
<식물>이었다.
회귀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한국영화였던 <식물>. 세계의 영화제를 휩쓸었던 <식물>. 한록을 최연소 차장의 위치로 올려줬던 식물.
하지만, 한록에게 <식물>은 언제나 아쉬움의 대상이었다. 오과장에게 치이느라 계획한 마케팅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회귀 직전에는 눈뜨고 <식물>을 뺏기기까지 했던 상황.
‘그때는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이었지.’
‘하지만 이제는 가능하다.’
이제는 정말, <식물>을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났다.
“그래. <식물>에서 원하는 것은?”
“기존 제작비의 세 배가 필요합니다.”
원래는 3부작으로 만들어졌던 <식물>. 그 당시 한록은 그게 좋은 판단이 아니라 생각했다. 하지만 제작에 참여할 권한이 없어서 어쩌지 못했던 상황.
그러나 이제 한록에게는 제작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 한록은 아예 제작부터 <식물>에 참여할 생각이었다.
“그 정도야 언제든지 줄 수 있지. 다만, 자네가 생각하는 결과가 궁금하군.”
이제 한록의 파격적인 행보에 반대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대신 기대를 가질 뿐이다. 최경준의 말에 한록이 답했다.
한록의 커리어에서 가장 빛나는 영화. 그리고 동시에 가장 아쉬운 영화, <식물>.
그걸로 하고 싶은 일은...
“3부작 동시 개봉입니다.”
아마 영화 사상 한 번도 없었던 일.
“아. 좋지. 오랜만에 날 설레게 하는군.”
한록의 말에 최경준이 눈을 가늘게 뜨고 웃더니 말했다. 한록의 말에, 정말로 기대가 생긴 것이었다.
“곧 방송국도 안정화가 끝나네. 그럼 나도 여유가 생기겠지.”
최근 방송국의 국장을 맡고, 방송국을 정착시키느라 영화사업본부에 많은 신경을 쓰지 못했던 최경준. 하지만 이제 방송국도 어느 정도 안정화에 들어간 상태였다.
최경준이 턱을 괴고 한록과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말했다.
“제롬 앤더슨이란 남자가 여기서 끝낼 것 같진 않아. 최근 소규모 영화사들을 위한 법안을 준비하고 있더군. 아마 빅6의 독주 체제를 바꾸려 하겠지.”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걸 우리가 놓치면 되나.”
‘설마...’
묘하게 호전적인 최경준의 반응에 한록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식물>을 다시 한 번 마케팅해보고 싶다. 그건 회귀 후 언제나 한록이 바라오던 일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게 주어질 줄은 몰랐다.
한국 최고의 영화 식물.
헐리웃을 조종할 수 있는 유일한 남자 제롬 앤더슨.
그리고...
“해외팀 초기. <마지막 공연>. 모두 좋았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지금이야. <식물>까지 성공시키면 그 누구도 한국 영화를 무시하지 못할 거네. 앞으로 1년. 그 안에 CK가 빅6도 두려워할 상대라는 걸 보여줘야 하네.”
한국영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최경준.
“이한록.”
“네, 본부장님.”
“내가 현역일 때가 궁금하지 않은가.”
“언제나 궁금했습니다.”
한록이 두근거리는 마음을 누르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최경준이 씩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금의 한국 영화계를 만든 사람.
한록이 아는 사람 중 가장 강하고, 또 뛰어난 사람.
한록. 최과장. 하정엽. 그 모두를 애송이로 만드는 사람.
“그렇다면 이번에 마음껏 활용해보게.”
그가 한록의 손에 쥐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