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215화 (196/263)

너희가 원하는 게 바로 이런 거지?

[보통 성격이 아니군요.]

한록의 말을 전해들은 닉이 낮게 웃었다. 닉의 미소에 제롬이 물었다.

[닉도 마음에 드는 광고였습니까.]

제롬의 말에 닉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무성영화를 단점이 아니라 장점으로 보이게 만든 광고였어요. 그리고 다른 것보다 침묵을 위해서 저만큼의 돈을 쓰다니. 결단력과 고집이 대단하군요.]

[맞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절대 스카웃을 받지 않더군요. 몇 번이나 나한테 오라고 말했지만 통하지 않았죠.]

[앞으로도 통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그래도 계속 시도해볼 겁니다.]

닉의 말에 제롬이 답했다. 웃으며 말했지만, 제롬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있었다. 제롬이 닉에게 말했다.

[그래서, 우리 ‘카드’를 써줄만 합니까.]

제롬의 ‘카드’. 제롬이 한록에게 제안한 것이자, 한록의 마지막 한방. 하지만 제롬은 이 카드를 쉽게 꺼낼 생각이 없었다.

[<마지막 공연>이 정말 해리포터 시리즈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이 카드는 정말 완벽한 순간에만 꺼내고 싶으니까.

제롬의 말에 닉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한록의 마케팅을 되짚어 보며 말했다.

[광고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더 할 말이 없죠. 그리고, 그 뒤의 행동도 좋았습니다. 광고만으로 해리포터 시리즈를 이기는 건 불가능하죠. 한도 그걸 알고 있을 겁니다. 그래서 매진이라는 이슈를 만들기 위해 상영관을 극도로 줄였군요. 사실, <마지막 공연>의 오늘 매출은 해리포터의 절반도 안 됩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이 대단한 광고와 매진이란 글자만 기억할 겁니다.]

한록의 마케팅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닉. 그가 한록의 마케팅에 대한 평가를 내렸다.

[광고는 천재적이었고, 전략은 영리했습니다.]

[그래서, 결론은?]

[하지만 이걸로 해리포터를 이겼다고 말할 순 없을 겁니다.]

슈퍼볼에서, 오로지 침묵을 위해 600억을 태운다. 한록의 광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발상이었다.

[여기서 끝나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실제로 관객수를 넘지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아무리 천재적인 광고를 가져와도 해리포터를 넘을 수는 없다. 그게 바로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시리즈가 가진 힘이었다.

그리고...

[한도 같은 말을 하더군요.]

그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건 한록이었다.

제롬의 말에 닉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래서 전화가 왔군요. 우리의 ‘카드’를 써달라고 부탁하려고요.]

[아뇨. 그 반대였습니다.]

[반대라니요?]

[걱정하지 말라고 전화를 했더군요. 아직 무기가 하나 더 남아있다고. 우리 카드를 쓰기 전에 반드시 확신을 주겠다고.]

[그 무기가 대체 뭐죠? 이제 더 이상 해볼만한 건 없을텐데.]

닉의 말에 제롬이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한록의 말을 전했다.

[관객의 선택.]

**

같은 시간, 한국. 서감독과 통화를 하고 있는 한록.

“3일 후부터는 상영관이 늘어날 겁니다. <해리포터>와 비슷한 규모입니다.”

슈퍼볼 광고로 이목을 집중시켰고, 상영관을 극도로 줄여서 이틀연속 매진이라는 신기록을 만들어냈다. 일반적인 마케팅으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걸 해본 상황.

[그럼 매진은 기대하기 어렵겠군요.]

“아뇨.”

하지만 여기서 끝날 거였으면 한록이 천재라고 불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제부터는, 정말로 한록과 서감독의 영역.

“이제부터는 영화의 재미가 모든걸 결정할 겁니다.”

천재들의 영역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

다음날 저녁.

[하. 내가 결국 여기에 왔군.]

수염을 길게 기른 백인 남자. 빅터.

그가 <마지막 공연>의 상영관 앞에 서 있었다.

[진작 보러 오자니까. 표 구하기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재미 없을 것 같았단 말이야.]

결국 슈퍼볼의 광고에 설득당해 <마지막 공연>을 보러오게 된 빅터. 그러나 그의 얼굴엔 아직도 약간의 의아함과 고집이 남아있었다.

[대체 뭘 만들었길래 그런 광고를 내보냈나 보자고.]

그가 약간의 앙금을 가지고 상영관 안으로 향했다.

**

‘그래, 얼마나 대단한 영화인지 한 번 볼까.’

팔짱을 끼고 자리에 앉은 빅터. 잠시 후, 스크린에서 <마지막 공연>이 상영되기 시작했다.

한 무명 피아니스트가 서서히 인기를 얻어가고, 마침내 명성을 얻어 빈 오케스트라와 함께 공연을 하는 내용을 담은 <마지막 공연>.

‘...재밌긴 하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빅터의 앙금은 점점 작아져갔다. ‘무성 영화니까 재미없을 거야’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완벽한 서감독의 영화.

‘...하지만 소리가 있었으면 더 재밌었을 거야! 음악 영화가 소리가 없는게 말이 돼?’

그리고 빅터의 마지막 자존심은 <마지막 공연>의 엔딩에서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영화의 엔딩 장면. 빈 오케스트라의 공연이 시작되는 그때. 갑자기 화면이 흑백으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주인공이 나타난 순간. 주인공이 피아노 의자에 앉고 건반에 손을 올린 순간. 주인공의 연주가 시작되는 순간...

‘아. 여기서 음악이 나오면 정말 좋을텐데.’

-빠밤!

그 순간 거짓말처럼 음악이 들리기 시작했다.

2시간 30분의 침묵을 깨는 주인공의 피아노 소리와 그 위에 겹쳐서 쌓이는 오케스트라의 음악. 그 음악과 함께 화면이 다시 컬러로 전환되었다.

아름다운 음악과, 화려한 색채. 관객들이 음악영화에 바라는게 뭔지 정확히 알고 있는 듯한. 마치 지금까지의 침묵은 오로지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고 말하는 듯한.

-너희가 원하는 게 바로 이런 거지?

라고 묻는 듯한 마지막 장면.

마지막 장면이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빅터는 그 자리에서 소리칠 수 밖에 없었다.

[그래. 내가 원한게 바로 이런 거라고!]

**

무성영화로 음악영화의 정수를 만들어낸 서지훈 감독. <마지막 공연>이 평범한 무성 영화가 아니란 사람들의 후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건 그냥 예술 영화가 아니야. 당장 뛰어나가. 졸아도 되니까 마지막 장면을 봐. 무조건 봐. 당장 봐!]

[서지훈이 우릴 속였어.]

[<마지막 공연>은 이 시대 최고의 음악 영화다!]

영화 마케팅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사람들의 입소문이 퍼져나간다.

-안나. 다음 주에는 뭐 볼까?

-그 무성 영화. 슈퍼볼 나온 거. 그거 재밌대.

입소문이 퍼지고.

-이거 무성영화치고는 꽤 재밌잖아.

-그 정도가 아냐. 끝내주잖아!

퍼지고.

-이번 주말에 영화보러 갈래?

-좋아. 해리포터?

-그건 봤어. <마지막 공연> 보자.

퍼지고.

-<마지막 공연> 보러갈래?

-그 무성영화?

-아니.

-이거 음악 영화래.

퍼져 나간다.

끊임없이 올라가는 <마지막 공연>의 예매율.

그렇게 <마지막 공연>이 <마법사의 전투>의 예매율의 70%에 도달했을 때. 한록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 기사가 나갔으면 합니다.]

그 상대는...

<좋습니다, 한.>

제롬이었다.

CK를 위해 ‘카드’를 써야할지, 말아야할지 논의하던 제롬. 하지만 모든 건 한록이 말한대로 됐다. 한록의 말이 맞았다. <마지막 공연>은 이제 정말로 해리포터의 경쟁자가 되어 있었다.

[그럼 약속대로 ‘로마’에 대한 기사를...]

<아뇨, 한.>

한록의 말에 제롬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빅6를 무너뜨리고자 하는 남자, 제롬 앤더슨. 그리고 자신을 대신해 워너 브라더스에게 너무나 멋진 공격을 해준 한록.

<한을 위해 그보다 특별한 걸 준비했습니다.>

그렇다면 제롬은 그 이상의 보답을 해줄 생각이었다.

**

그리고 다음날.

<워너 브라더스 CEO. 인종차별 발언 논란.>

드디어 제롬의 폭로가 시작되었다.

**

<워너 브라더스의 CEO 제임스 리어티가 ‘마지막 공연’과 서지훈 감독에 대해 인종차별 발언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제임스 리어티는 회의에서 ‘원숭이가 만든 영화’, ‘그런 동양인들한테 질 수 없다’, ‘멍청한 관객들이 중국인이 만든 영화를 보고 있다’ 등의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외에도 제임스 리어티는 이탈리아 영화 <로마>에 대해 ‘유럽 거지들의 영화’, ‘범죄자의 나라’라고 발언하였으며, 여러 배우, 감독들에게 인종 차별 발언을 일삼은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

[대체 어디서 얘기가 샌 거야!]

자신에 대한 기사가 실린 신문을 던지는 제임스 리어티.

헐리웃 최고 기업 CEO가 각종 인종차별 발언을 일삼았다. 연예지만이 아니라 일반 신문마저 제임스에 대한 기사를 보도하고 있었다.

[하필 <마법사의 전투>가 개봉한 이런 때에! 아니, 일부러 지금을 노린거군. 당장 기자들한테 연락해! 전부 기사 내리고, 사과문 올리라고 해!]

[알겠습니다.]

[지금 <마법사의 전투> 점유율은 어떻게 되지?]

[여전히 1위입니다. 딱히 감소세를 보이고 있진 않습니다. 2위인 <마지막 공연>과는 30%이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

비서의 말에 제임스가 꽤 진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이 정도 이슈는 영화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런 생각을 하며 화를 가라앉히는 제임스.

영화는 매우 특수한 상품이어서, 회사나 배우가 잘못을 하더라도 인기에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회사의 잘못 때문에 영화를 보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게 현실이니까.

‘영화사에 대한 불매는 불가능하다.’ 제임스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제임스가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제임스!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이야?]

-영화사에 대한 불매는 불가능하다.

-회사의 이슈는 영화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 모든 건 맞는 말이지만...

[<마지막 공연>의 예매율이 두 배로 뛰었어요!]

상대가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는 명작이라면 얘기가 달라지기 마련이었다.

**

며칠 후 저녁 9시. 한록의 사무실.

어둠 속에서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던 한록이 고개를 들었다. 한록의 노트북에는 헐리웃의 연예지들이 써낸 기사들이 여러 개 켜져 있었다.

<워너 브라더스의 인종차별 파문과 ‘마지막 공연’에 이어지는 응원의 물결.>

<무성 영화로 음악 영화의 역사를 다시 쓰다.>

<‘마지막 공연’이 로튼 토마토 97점을 기록했다.>

<오늘 ‘마지막 공연’이 ‘해리포터’의 예매율을 넘을 것이란 추측이 나오고 있다.>

모두 <마지막 공연>과 <마법사의 전투>에 대한 기사들이었다.

그때, 기사를 확인하던 한록에게 문자가 하나 도착했다. 문자를 보낸 사람은 최과장이었다.

<팀장님. 오늘 최종 예매율 나왔습니다.>

최과장이 보내 온 것은 ‘마지막 공연’과 ‘마법사의 전투’의 예매율 자료였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문자를 확인 한 한록이 최과장에게 답장을 보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잠시 후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익숙한 목소리에 한록이 미소를 지으며 창문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9월 18일. 야경이 아름다운 여름날의 밤이었으며.

“감독님. 해리포터를 이긴 기분이 어떠십니까.”

한국 영화가 최초로 해리포터의 예매율을 넘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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