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번쯤 거절해도?
한록이 회의실에 모인 해외팀을 보고 말했다.
“<마법사의 전투>가 아무리 소규모라 해도 제작비가 <마지막 공연>의 20배입니다.”
해리포터 시리즈의 외전인 <마법사의 전투>. 기존 해리포터 시리즈가 모두 끝난 후 마법 세계를 다룬 영화로, 헐리웃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꽤 작은 규모의 영화였다.
가장 최근의 해리포터 시리즈의 제작비가 6천억이었고, <마법사의 전투>는 천억이었으니 팬서비스용으로 만들어진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상대는 해리포터다.
“그래. 제작비는 20배고, 팬덤은 만 배 정도는 되겠지.”
현차장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전례없는 흥행기록을 가지고 있는 영화, 해리포터 시리즈. 아무리 팬을 위한 소규모 영화라도 다른 영화와는 비교할 바가 못 된다. 다른 모든 제작사들은 <마법사의 전투>와 경쟁을 피하기 위해 개봉날짜를 미루거나, 앞당겼다.
'그래. 회귀 전에도 <마법사의 전투>는 크게 성공했지.'
한록이 보기에도 그건 현명한 선택이었다. 회귀 전. <마법사의 전투>는 제작비가 크지 않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세계 박스오피스에서 10위라는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영화 자체도 좋았고, 해리포터 시리즈가 가진 위력이 대단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CK는 오히려 <마법사의 전투>와 정면으로 붙을 것을 선택한 상황.
-CK에게 던져진 미션. 무성영화로 해리포터를 이겨라.
“불가능한 얘깁니다.”
한록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한록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하지만 하루 정도는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한록이 사람들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해리포터는 전 세계 모든 사람이 기다리는 영화입니다. 그런 영화가 개봉하면 어떻게 될까요.”
“다들 개봉하자마자 보러가겠지...?”
“네. 그겁니다.”
한록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현차장. 현차장만이 아니라 모두가 ‘그래서?’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하.”
한록의 말을 알아들은 것은 최과장 뿐이었다.
“틈을 노리자는 거군요.”
“네, 맞습니다.”
최과장의 말에 한록이 답했다.
한록이 화이트보드에 V자를 그리고 현차장에게 말했다.
“보통 기대작은 비슷한 관객 추이를 보입니다. 첫째주에 가장 관객이 많고, 7일차쯤 되면 관객이 줄어들죠. 이미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다 영화를 봤기 때문입니다. 그 뒤에는 영화 성적에 따라 다르죠. 영화가 재밌다면 입소문을 타서 서서히 관객이 늘어나고, 영화가 재미없다면 그대로 사장됩니다.”
“그래, 그렇지.”
“그러니까 우리는 여기를 노리는 겁니다.”
V자의 가장 아래쪽에 점을 찍는 한록.
“이미 해리포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영화를 다 봤을 때. 그리고, 아직 입소문이 나기 전에. 그 하루나 이틀. 그 하루쯤은 우리가 해리포터를 이길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올해 최고의 기대작을 이길 수도 있는. 아니, 올해 최고의 기대작에만 시도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래. 하루쯤은 이길 수도 있겠지. 대단한 기록일거고. 근데 그게 뭐가 중요한데? ‘해리포터를 이겼다.’ 그 타이틀이 그렇게 중요해? 그걸 따내서 어쩔 건데?”
그러나 한록의 말에 정부장이 반기를 들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매출이지, 해리포터를 이기고 말고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하루는 이길 수 있겠지. 그래도 사람들은 해리포터를 보러 갈 거야.”
“네. 사람들은 해리포터를 보러가겠죠.”
하지만 한록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왜냐하면.
“그리고 그 옆에 걸린 ‘해리포터를 이긴 영화’ 라는 <마지막 공연>의 포스터를 보고 생각할 겁니다.”
-음...
-우리 다음 주에는 저거 볼까?
영화 시장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니까.
오늘 영화관에 와서 만족한 사람은 다음 주에도 그 기대를 가지고 새로운 영화를 보러 온다. 그게 바로 영화시장이 돌아가는 방법이었다.
“<마지막 공연>이 해리포터를 이길 정도로 재밌는 영화라는 사실. 해리포터가 끝이 아니라, 다음주에는 이 영화가 있다는 사실. 그 사실만 알려주면 사람들은 알아서 영화를 보러 올 겁니다.”
한록의 말에 정부장이 얼굴을 찌푸렸다. 한록은 해리포터의 관객을 뺏어오자는 말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인기의 낙수효과를 가져겠다는 말.
‘해리포터는 하루만 이기면 된다.’ ‘그렇다면 해리포터를 보러 온 사람이 다음주에는 <마지막 공연>을 보러 올거다.’
항상 상대를 때려눕히던 한록의 전략과는 조금 다른 내용.
‘...괜찮은데?’
그런데, 그 말이 상당히 설득력 있게 들린다.
언제나 정면으로 싸우고, 반박이 불가능할 정도의 승리를 거두는 한록. 그렇기 때문에 한록이 ‘해리포터와 싸우겠다’고 했을 때도 정부장은 큰 불안함을 가지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해리포터를 이기겠다는 건지. 대체 어쩌자고 해리포터와 같은 달에 개봉을 하겠다는 건지. 한록의 생각이 도저히 짐작이 안 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부장은 참고 기다렸다.
한록이 ‘해리포터와 동시에 개봉하겠다’고 말했을 때. 정부장이 최경준에게 한 말.
-전 그 녀석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싫은가?
최경준의 질문과...
-아뇨. 기대되죠.
예전과는 조금 달라진 정부장의 답.
‘이제 이런 것도 할 줄 아는군.’
어느새 많이 변한 자신과 한록. 그 모습을 생각하며, 정부장이 한록을 보고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한 번 가보자.”
**
“<마법사의 전투> 개봉 6일차. 그때가 월요일이라 관객수가 가장 적을 겁니다. <마지막 공연>의 모든 마케팅을 그 때에 맞춰야 합니다.”
모든 마케팅을 단 하루에 집중한다.
그걸 위해서는 앞으로 모든 부분이 톱니바퀴처럼 움직여야 한다. 사실상, 한록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최과장님. 9월까지 FK 픽쳐스와 계약 가능하시겠습니까.”
하지만 한록에게는 아주 유능한 부하들이 있었다.
모두가 나간 회의실. 한록이 최과장을 따로 불러서 서류를 하나 내밀었다. 한록이 준 서류를 읽은 최과장이 단호하게 답했다.
“이미 계약 다 끝났을 걸요. 절대 불가능하죠.”
“예산이 600억이면요?”
600억. 한록이 꺼낸 액수에 최과장이 다시 한번 물었다.
“<마지막 공연> 제작비가 50억인데, 마케팅 예산이 600억이라고요?”
“네.”
“그럼 매출이 북미에서만 500억은 나와야 해요.”
“해 볼만 합니다.”
“정말로? 자신 있어요?”
“네.”
한록의 ‘자신 있다’는 말. 그 말에 최과장의 얼굴에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최과장이 한록에게 물었다.
“그래도 이미 계약 다 끝났을 거예요. 이제 와서 따오긴 힘들텐데.”
“하지만 최과장님이라면 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저도 불가능한 건 있어요.”
“아뇨, 하실 수 있습니다.”
“절 그렇게 믿으세요?”
“네.”
“아이고야.”
한록의 말에 최과장이 앓는 소리를 하며 이마를 짚었다. 하지만, 최과장의 반응과는 다르게 한록의 손목을 감는 실. 아주 산뜻한 하늘색 실이 의미하는 것은...
“그럼요. 해볼만하죠.”
기대감과 흥미였다.
**
최과장과의 대화가 끝난 후, 유선을 찾은 한록.
“사무실에 가서 얘기할까요?”
“네!”
둘은 한록의 사무실로 향했다. 한록이 맞은 편에 앉은 유선에게 물었다.
“유선씨. 저는 몇 점짜리 상사인가요?”
“어...100점이요!”
“100점 만점인가요?”
“10점 만점이에요.”
갑작스런 질문에도 곧장 대답하는 유선. 정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듯한 답이었다. 그 고마운 답에 한록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럼 지금부터 점수 좀 깎겠습니다.”
“...네!”
“<마지막 공연>의 광고를 기획했어요. 내용은 다 나왔으니까, 유선씨가 거기에 캐치프라이즈를 만들어주면 좋겠어요.”
한록이 유선에게 부탁한 것은 <마지막 공연>의 마케팅을 위한 캐치프라이즈를 만들어달라는 것. 그 말에 유선은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원래 캐치프라이즈는 마케팅팀이나 대행사에서 만드는 것이고, 유선 또한 여태까지 많은 캐치프라이즈를 만들어왔다.
거기에, 광고의 전체적인 내용은 한록이 이미 다 만들어왔다. 그런데 이미 여러 번 해 온 일을 가지고 한록이 ‘점수를 깎을 일’이라고 하니 의아한 것이었다.
“그게 왜 점수를 깎는 일인가요?”
“이번에는 쉽게 통과되지 않을 거거든요.”
“괜찮습니다!”
“50번쯤 거절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도 통과되지 않을 수 있어요. 유선씨 기획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곳에 외주를 넣을 거예요. CK기획이나, 광고제작사들한테요. 600억짜리 광고라 적당히 넘어갈 수 없거든요.”
한록의 말에 유선의 표정이 굳었다. 한록이 ‘점수를 깎아먹을 일’이라고 말한게 이제 이해가 가는 것이었다.
무수히 많은 수정을 요청하겠다. 그건 괜찮다. 하지만 광고의 예산이 600억이다. 유선은 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 말도 안 되는 부담이 몸을 짓누르기 시작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지금은 유선씨가 이 일에 적임자라고 생각해요. <마지막 공연>을 가장 잘 아는 사람 중 한명이니까. 하지만 제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을 찾을 거예요.”
열심히 매달린 일이 아무 성과도 없이 끝날 수도 있다는 것.
그렇게 된다면, 과연 좌절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다정한 목소리로 냉정한 말을 전하는 한록. 한록이 유선에게 물었다.
“그래도 하고싶어요?”
600억짜리 광고의 캐치프라이즈를 만들 수 있다. 유선에게 온 엄청난 기회이자...
“아니. 할 수 있겠어요?”
시험.
한록의 말에 유선의 눈이 흔들렸다.
‘할 수 있을까?’
‘과연 내가 제대로 할 수 있을까? 팀장님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괜히 내 욕심 때문에 일정을 늦추는게 아닐까? 처음부터 다른 사람을 찾으라고 해야하는 거 아닐까?’
수없이 머릿 속을 채우는 고민. 그 고민 끝에, 유선이...
“해보겠습니다.”
결정을 내렸다.
**
[네, 조안. 말씀하세요.]
-새벽 3시. 미국과의 시차 때문에 자다 깨서 전화를 받는 최과장.
“임팩트가 없는 것 같네요, 유선씨.”
“네...! 알겠습니다!”
-한록에게 캐치프라이즈를 거절당한 유선.
[네. 어렵다는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추가 요금을 지불하겠습니다. 100억이요.]
-누군가와 흥정을 하는 최과장.
‘이게 아니야!’
‘...아니야, 괜찮아. 다시 해보자!’
-책상에 엎드렸다가 다시 일어나는 융선.
“최과장. 벌써 출근한 거야?”
“아뇨. 퇴근합니다.”
-낮밤이 바뀌어서 하얗게 질린 얼굴로 퇴근을 하는 최과장.
‘못 하겠어.’
‘못 하겠어.’
‘못 한다고 했어야 해. 지금이라도 그렇게 말해야해.’
‘여기까지야.’
-좌절하는 유선.
“최과장. 오늘은 들어가. 내가 연락 받을게.”
“네, 감사합니다.”
-최과장 대신 사무실에 남은 현차장.
[얘기가 다르네요. 추가 요금을 내면 구매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누군가와 말다툼을 벌이는 최과장과...
“아니야. 할 수 있어.”
-울면서 글을 쓰는 유선.
“<마지막 공연> 해리포터랑 동시에 개봉한다며. 그런데 왜 아무런 소식이 없지?”
“뭐라더라. 마케팅을 뭐, 광고 하나에 집중한다고 하던데.”
“광고 하나에?”
“어. 예산을 다 거기다 쓰겠대.”
“와, 그거 실패하면 어쩌려고 그래? 깡도 세네.”
“이한록이 늘 그렇지.”
“그래도, 광고 하나에 돈을 쏟아 붓겠다고 한 적은 없잖아. 그거 실패하면 진짜 팀 사라지는 거 아니야?
-CK에 퍼지는 의심과
[CK ENM이 <마지막 공연>을 <마법사의 공연>과 동시에 개봉하겠다고 밝혔다.]
[한 동양인 남자가 해리포터에게 도전장을 던졌다.]
[CK ENM, ‘해리포터를 이기고 협의회에 가입하겠다’라고 발언.]
[미국 영화계는 이에 ‘CK가 불가능한 꿈을 꾸고 있다’고 밝혔다.]
-야유.
“요즘 해외팀 분위기 이상하던데.”
“왜?”
“최과장은 회사 안 나오고. 그...김유선인가. 유진인가. 걔는 맨날 숨어서 울고. 다른 사람들도 맨날 야근하고.”
“운다고?”
“응. 김차장이 화장실에서 들었대.”
-그리고 소문.
“이팀장. 요즘 최과장이 너무 힘들어 보여.”
그 모든 것을 보다 못한 현차장이 팀원들을 위해 한록을 찾아왔을 때. 한록은 조용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최과장: 슈퍼볼 계약 끝났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광고, 슈퍼볼.
최과장이 이번에도 약속을 지킨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