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강한 영화가 등장했다.
[당신이 아니라, 당신의 능력을 믿습니다.]
<좋은 대답입니다.>
한록의 답에 제롬이 짧게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지금부터 하는 얘기를 믿을지, 말지는 CK ENM의 선택입니다.>
**
제롬이 한록에게 건넨 조언. 그것은...
<한. ‘마지막 공연’의 개봉이 언제입니까.>
[10월입니다.]
<그렇군요. 그때가 되면 워너 브라더스가 개봉을 방해하려 할 겁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고 그대로 개봉하세요.>
<10월이 되면 워너 브라더스는 영화를 제대로 개봉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닐 겁니다.>
자신이 워너 브라더스를 무너뜨리리란 사실이었다.
‘역시.’
제롬과의 대화를 끊은 한록은 생각에 잠겼다. 제롬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한록은 미래를 알고 있으니까.
제롬은 모든 것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진실을 얘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고, 나머지는 한의 몫입니다. 한이라면 정말로 워너브라더스를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한록에게 꽤나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좋아.’
무성영화로 세계 최고의 영화사들과 싸워라.
누군가는 말도 안 되는 얘기라 하겠지만, 그걸 위한 발판이 하나 둘 쌓여가고 있었다. 개봉 당시의 상황. 배우. 마케팅. 영화의 흥행엔 모든 것이 영향을 미치니까.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영화였다. 그리고...
“네, 서감독님. 이한록 팀장입니다. 만나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제는 그 영화를 완성할 때다.
**
30분 후. 서감독과 한록이 한록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서감독이 한록에게 물었다.
“두 번째 편집본은 누가 만든건지 궁금하네요.”
서감독이 말하는 건 임감독의 아이디어로 만든 편집본이었다. 서감독의 얼굴에는 약간의 흥분, 그리고 불쾌함이 담겨있었다. 아무래도...
“마음에 드십니까.”
“나쁘지 않았습니다.”
임감독의 아이디어가 꽤 마음에 든 듯했다.
그 모습에 한록이 미소를 지었다. 세계적인 감독이, 임감독의 영화를 인정하고 있다. 그 사실에 본인 역시 기분이 좋은 것이었다.
“유명한 감독이 아니라고 하셨죠. 정확히 어떤 분입니까.”
그리고 이제는 조금 거북한 진실을 밝힐 때였다.
“사실은 카페에서 만나셨던 오작가님이 제안한 아이디어입니다.”
“...<공주와 기사>의 오작가님 말입니까?”
“네.”
한록의 말에 서감독의 표정이 굳었다. 잠시 후, 서감독이 말했다.
“내 영화를 막장 드라마 작가에게 보여줬단 말입니까?”
서감독은 화가 난 얼굴이었다.
**
“분명 감독한테 보여주겠다고 했을 텐데요.”
“예전에는 영화를 만드시던 분이었습니다.”
“지금은 아니지 않습니까.”
자신의 영화에 엄청난 프라이드를 가진 서감독.
그런 서감독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영화를 보여주고, 수정할 부분은 찾는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결심을 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상대가 막장 드라마 작가라니. 서감독은 그 사실에 분노했고,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감독님도 마음에 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혼란스러운 건 그 영화가 마음에 들었다는 사실이었다.
“...네. 그랬죠.”
감독으로서의 자존심. 그리고, 임감독의 편집본을 봤을 때 느껴지던 흥미와 쾌감. 그 두가지 감정이 서감독의 마음 속에서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한록은 서감독의 그런 고뇌를 알고 있었다.
“감독님. 저랑 다시 한 번 보고 결정을 내리는 건 어떠시겠습니까.”
‘일단 한 번 더 보고 생각해봐라’라는 한록의 말. 그 말에 서감독에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내가 왜?’라는 의문이었다.
‘내가 왜 영화를 수정해야하지?’
‘내가 왜 막장 드라마 작가의 말을 들어야 하지?’
‘내가 왜. 나보다 영화를 더 잘 만드는 사람이 어딨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그 편집본은 정말 좋았는데.’
계속 떠오르는 임감독의 편집본에 대한 생각.
“...지금 내려가죠.”
결국 서감독의 입에서 나온 것은 허락이었다.
고뇌 끝에 나온 허락. 그 허락에 한록이 작게 미소를 지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그럽시다.”
그리고 둘은 시사회실로 향했다.
**
지하 1층의 대형 시사회실로 향한 한록과 서감독. 지금 둘이 있는 곳은 <수면>과 <도착지>가 겨루던 CK예선전이 실시되던 곳이었다.
한록이 <마지막 공연>의 가편집본을 틀었고, 임감독 버전의 편집본이 상영되기 시작했다.
“...”
조용히 편집본을 감상하는 서감독과 그런 서감독을 지켜보는 한록. 영화가 중반까지 진행되었을 때 서감독이 한록에게 말했다.
“팀장님은 일 보세요. 저는 한 번 더 보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한록은 서감독을 내버려두고 밖으로 향했다.
네시간이 흐른 뒤 한록은 다시 시사회실을 찾았다. 그러나 아직 영화는 끝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서감독이 다시 한 번 영화를 재생한 것이었다. 서감독은 무려 세 번이나 임감독의 편집본을 감상하고 있었다.
한록은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시사회실을 빠져나갔고, 서감독의 연락이 온 후에야 다시 시사회실로 향했다.
“생각할게 많으셨나보군요.”
앉은 자리에서 내리 6시간 동안 임감독의 편집본을 지켜본 서감독. 한록의 질문에 서감독이 말했다.
“이 편집본을 거절할 이유를 찾고 있었습니다.”
아주 솔직한 대답에 한록이 작게 웃었고, 다시 한 번 서감독에게 물었다.
“찾으셨습니까.”
“아뇨.”
그리고 이번에도 서감독은 솔직한 대답을 내놓았다.
-음...서감독님이 이걸 받아들이실까 걱정이네요.
임감독의 편집본이 도착했을 때 최과장이 했던 말.
최과장만이 아니라, 해외팀 모두가 서감독이 막장 드라마 작가의 수정본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한록은 사람들과는 생각이 달랐다.
‘예전의 서감독님이 아니야.’
서감독이 예전의 그 서감독이었다면. 늘 자신의 영화가 옳고, 그래서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박감독의 수정사항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서감독은 박감독의 편집본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임감독의 편집본 역시 6시간을 지켜보았다.
자신의 눈앞에 앉은 사람. 세계에서도 인정받는, 엄청나게 오만한 천재 감독.
“팀장님은 이 편집본이 제 영화보다 더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자존심을 꺾어야 하는 이유 한 가지 뿐이다.
“네.”
“왜죠?”
그리고 한록은 그런 천재가 자존심을 꺾을 수 있는 유일한 이유를 알고 있었다.
“감독님이 이걸 바탕으로 더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갈망이었다.
한록의 말에 서감독이 스크린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스크린에서는 막장 드라마 작가가 손댄 자신의 영화가 나오고 있었다.
프라이드가 하늘을 찌르는. 자기 영화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자기보다 영화를 잘 만드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는.
그래서, 언제나 더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어하는 천재 영화감독.
그가 오랜 침묵 후 말했다.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영화에 반영하겠습니다.”
서감독의 말에 한록은 과거를 떠올렸다. ‘내 영화가 정답이다’라고 말하던 서감독의 모습. <도착지>를 보고 ‘나와 다른 영화도 있을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하던 서감독의 모습. 그리고 바로 지금까지.
영화에 대한 애정과, 좋은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욕망. 그로 인해 끊임없이 성장하는 이 사람을 지켜보는 것이 정말 즐겁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생각 끝에, 한록이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감독님. 감독님은 세계적인 거장이 되실겁니다.”
그리고...
“알고 있습니다.”
서감독의 말에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
한 달 후. <마지막 공연>의 최종 편집본이 도착했다.
“과장님. 시사회실에서 보고 옵시다.”
<마지막 공연>의 완성본을 보기 위해 사시회실로 내려간 한록과 최감독. 완성본은 박감독과 임감독의 아이디어가 적절하게 섞인 내용이었다.
그 서감독이 다른 사람의 조언을 따라 내용을 바꾸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놀랄만한 일이었으나, 더 놀라운 건 따로 있었다. 최과장이 말했다.
“스타일이 좀 바뀐 것 같죠?”
바로 <마지막 공연>의 느낌이 조금 바뀐 것이었다. 텍스트가 꽉 차 있고, 차가운 시선이 느껴지는 서감독 특유의 영화 스타일. 그런데 편집이 서감독의 정제된 스타일과는 달리 꽤나 거칠어져 있었다. 한록이 최과장에게 답했다.
“마지막 장면에 맞추려고 그러신 것 같네요.”
박감독과 임감독의 아이디어를 반영한 마지막 장면. 그 장면을 위해 영화 전반에 박감독과 임감독의 스타일이 반영된 것이었다.
“어때요?”
한록이 물음에 최과장이 자신이 들고온 파일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최과장이 들고 있는 것은 CK ENM이 영화 개봉 전 영화를 평가하기 위해 사용하는 심사지였다. 그러나 최과장의 심사지는 텅 비어있었다.
“음...”
CK ENM에서 최고의 안목을 가진 최과장. 그가 <마지막 공연>에 내린 평가는...
“제가 평가할 수준이 아니죠. 이제 진짜 거장이시네요.”
평소 거의 하지 않는 극찬이었다.
“사실, 서감독님은 이미 거장이시긴 한데. 거기서 더 발전할 부분이 있었다는게 정말 신기하네요.”
최과장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고 한록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한록 또한 영화를 보면서 최과장과 같은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한록은 서감독이 최종 완성본을 보냈다고 전하며 한 말을 떠올렸다.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반영해서 영화를 수정한 것. 서감독은 이제 그 경험을 두고 ‘좋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걸출한 영화를 보내주었다.
“몇 년 지나면 어떻게 되시려나.”
“글쎄요.”
최과장의 말에 한록이 즐거운 마음으로 대답했다. 천재라 불리던 감독이, 이제 또 다른 방식으로 성장하고 있다. 과연 그가 이 길의 끝에서 어떤 감독이 되어있고, 또 어떻게 성장할까. 그 미래는 한록이 보고 온 5년후와는 많이 다를 것이 분명했다.
‘미래가 문제가 아니지. 당장 <마지막 공연>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군.’
아니, 먼 미래가 아니라 <마지막 공연>이 사람들에게 어떤 반응을 얻을지마저 알 수 없는 상황.
끝없이 성장하는 천재. 그의 첫 변화를 지켜본 한록.
‘감독님. 이제 제 차례입니다.’
한록은 그 변화를 사람들에게 보여줄 생각이었다.
**
그로부터 2주 후. <마지막 공연>의 언론 시사회가 진행되었다.
[예술, 그 이상.]
[이제 서지훈 감독이 넘어야 할 것은 자기 자신 뿐이다.]
[한국의 거장이 또 한번 변화를 선보였다.]
예상한 것처럼, 반응은 엄청났다. 거의 모든 평론가와 기자들이 <마지막 공연>에 대해 찬사를 보냈다. 이미 예술성에선 따라올 사람이 없는 서감독의 야심작. 거기에 차후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영화가 될 <식물>의 박감독이 참여했다. 영화전문가들이 마음을 뺏기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서지훈 감독의 영화는 완벽했다. 그렇다면, 이제는 다른 질문이 남는다.]
[과연 CK는 이 영화로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영화계의 관심은 이제 CK에 몰리기 시작했다.
‘빅 6가 공급한 영화의 매출을 넘는다면 협의회에 가입시켜달라’던 CK의 메일. 그 메일은 이미 영화계 전체에 퍼진지 오래였고, 영화계는 앞으로 벌어질 흥미진진한 싸움을 기다리고 있었다.
[빅6는 이 아시아의 작은 영화사가 협의회에 가입하는 걸 원하지 않는다.]
[이에 CK는 빅6에게 전쟁을 선포했고, 그들이 가진 무기는 천재적인 감독의 걸작 영화 한 편이다.]
[빅 6는 이들의 도전을 받아들일 것인가.]
[과연 이 싸움의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헐리웃의 뜨거운 감자가 된 CK와 빅6의 싸움.
그렇다면 빅 6 역시 가만히 이 일을 두고 볼 리가 없었다.
<마지막 공연>이 공개된 지 며칠 후. 유선이 다급하게 한록을 찾았다.
“팀장님. 확인하셔야할 게 있어요. AM씨어터에서 하반기 편성을 보내왔습니다.”
유선이 가져온 것은 AM씨어터의 하반기 영화 편성표. 원래대로라면, <마지막 공연>이 개봉하는 10월 첫째 주에는 빅6의 아무런 영화도 개봉하지 않았다. 하지만.
“빅6에서 10월 첫째 주에 12개의 영화를 개봉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리고요?”
“9월에는 해리포터 시리즈를 개봉하겠대요.”
이제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영화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해리포터? 당장 개봉일정 당겨야 해!”
전 세계 모든 사람을 영화관에 불러모을 수 있는 해리포터 시리즈의 개봉. 엄청난 강자의 등장에 현차장이 경악한 표정으로 외쳤다.
“하지만 바꿀만한 일정이 없어요. 지금이 6월인데, 8월에 상영하기엔 너무 빠듯하고. 9월은 해리포터. 10월은 영화 12개가 동시에 개봉하잖아요. 11월은 정기회의가 끝나서 협의회 가입이 문제가 돼요.”
현차장의 말에 유선이 하나하나 스케쥴을 짚으며 말했다. 빅6는 CK가 어디로도 도망갈 수 없도록 스케쥴을 만들어 온 것이었다.
“이팀장. 어떡하지?”
그리고, 한록은...
“개봉 일정을 변경합니다.”
“언제로? 11월?”
“아뇨.”
“그럼 언제?”
“해리포터와 동시에 개봉합니다.”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
[제롬. CK가 당신 말을 안 듣네요.]
그날 저녁, 미국. 닉이 제롬에게 신문을 건네며 말했다.
[<마지막 공연>의 개봉을 미룬 겁니까?]
[아뇨. 그 반대요.]
한록이 겁을 먹고 <마지막 공연>의 개봉을 미룬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제롬. 그러나 기사에 나온 것은 정반대의 사실이었다.
<서지훈 감독의 <마지막 공연>. 해리포터 시리즈의 번외편과 동시 개봉>
이 해리포터 시리즈의 매출을 넘을 수 있으리가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날 발표된 CK ENM의 공식 입장.
[나보다 더 하는군.]
기사를 확인하고 웃음을 터뜨리는 제롬.
[우리를 우습게 아는 건가?]
분노한 워너 브라더스.
<9월, CK ENM과 워너 브라더스가 매출 경쟁을 시작한다.>
<서지훈 감독VS해리포터. 승자는 누구?>
CK가 던진 화제에 달려드는 기자들.
천재 감독. 최고의 영화. 든든한 조력자와, 세상의 관심이 모였다.
-그리고, 이제는.
“반응이 꽤 좋군.”
미국의 기사를 확인한 최경준이 한록에게 말했다.
“이제 시작하게.”
-무성영화가 해리포터 시리즈를 이길 수 있게 만드는 세계.
바로 마케팅의 영역이 시작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