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포터 시리즈를 이겨보고 싶지 않습니까?
이미 한록이 보낸 <마지막 공연>의 편집본을 보고 온 감독들. 한국 영화계 최고의 감독들이 머리를 맞대고 <마지막 공연>을 수정할 방법에 대해 논의를 시작했다.
“근데, 꼭 무성으로 만들어야 하는 거야? 스토리 자체는 대중적이라서 사운드만 들어가면 흥행은 문제 없을 것 같은데.”
“서감독이 건 조건이 꼭 무성영화여야 한다는 거잖아요.”
“음. 그럼 어렵긴 하네.”
“어...서감독. 서감독이 불만을 가진게 클라이맥스에서 아무리 해도 원하는 장면이 안 나온다는 거지?”
“네. 맞습니다.”
“그럼 부분 무성으로 진행하는 건 어때? 여기. 클라이맥스. 엔딩. 여기만 무성으로.”
“그럼 오히려 임팩트가 줄어들 것 같은데.”
“그...제가 발언해도 될까요?”
“어, 해 봐, 해 봐.”
“임팩트가 문제면, 영화를 계속 흑백으로 진행하다가 무성 파트에서만 컬러로 넘어가는 건 어떨까요?”
“음...사운드가 없는 대신 시각을 극대화한다?”
“...좀 그런가요?”
“괜찮은데?”
‘부분 무성’, ‘흑백 영화’. 한록은 우감독과 <식물>의 박감독이 제시한 방안을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았다.
흑백으로 진행되는 영화. 영화의 마지막으로 넘어갈 때 갑자기 모든 소음이 사라지고, 대신 영화가 컬러로 전환된다.
“보정을 강하게 넣어서 최대한 채도 살리고, 흑백이랑 대비되게 가는 거면 임팩트는 괜찮을 것 같은데요.”
흑백에서 컬러로의 전환. 머릿속에서 절로 그려지는 강렬한 장면에 한록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차후 한국영화의 대표작이 될 <식물>의 감독다운 아이디어였다.
‘나쁘지 않다. 흑백에, 무성이라. 기사가 많이 나올 거야. 거기에 영화제에서 어필하기도 좋고.’
사실 서감독의 영화에 딱 맞는 아이디어는 아니었다. 박감독과 서감독의 스타일이 워낙 다르니까. 하지만 강렬했고, 개봉하자마자 사람들의 주목을 가져올 만한 아이디어는 맞았다.
“서감독은 어때?”
“일단 편집본을 봐야겠지만, 생각해볼만 하네요.”
거기에 서감독도 그 아이디어가 나름대로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여기에 제롬의 활약까지 들어가면...그럼 흥행은 따놓은거다. 협의회 가입은 문제 없다.’
거기에, 무엇보다 제롬이 곧 헐리웃을 뒤집어 놓을 예정이었다. <식물>의 박감독. 서감독의 영화. 거기에 제롬이 가져올 파도까지.
‘그래. 이 정도면 급한 불은 껐다.’
박감독이 내놓은 방안에 한록의 마음에 어느새 안도감이 찾아왔다. 그리고...
‘...아쉽네.’
동시에 아쉬움 역시 들기 시작했다.
한록은 감독도 아니고, 창작자도 아니다. 그러다보니 한국에서 가장 뛰어난 감독 8명이 모인 이 회의에서 할 말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케터의 직감이 무언가 말하고 있었다.
‘분명, 조금 더 좋은 아이디어가 있을 것 같은데.’
바로 <마지막 공연>이 여기서 끝날 영화는 아니란 사실이었다.
한록이 그런 생각에 빠져있을 때. 조감독이 카페의 입구를 보고 외쳤다.
“작가님!”
그리고 조감독의 부름을 받은 상대가 이쪽을 돌아보더니 말했다.
“...한록아.”
임감독이 찾아온 것이었다.
*
한록과 감독들에게로 다가온 임감독. 조감독은 이미 임감독과 안면이 있는 모양이었다. 조감독이 한록에게 물었다.
“한록이면...이팀장님? 두분 아는 사이세요?”
“고향이 같습니다.”
“우와, 강원도?”
“네. 춘천이요.”
“춘천이 닭갈비가 아니라 컨텐츠 명가인가보다. 우리 영화계의 기둥 이팀장님에, 시청률 1위 오작가님까지. 그보다 작가님. 여기는 무슨 일이세요?”
“CK 방송국이랑 미팅이 있어서요.”
“아, 그렇구나. 인사들 해. 여기는 오지한 작가님. 다들 <공주와 기사> 알지?”
“어! 저도 그거 봤습니다.”
“저희 와이프랑 딸이 작가님 팬이에요.”
“어유, 감사합니다. 보면서 욕은 안하세요?”
“...쪼끔 하긴 하는데...”
조감독의 말에 윤감독과 우감독이 반갑게 임감독에게 인사를 건넸고, 임감독이 넉살좋게 인사를 받았다.
‘...이제 정말 작가로 알려져 있구나.’
어린시절, 함께 영화를 만들던 형이 감독들에게 막장드라마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는 모습. 그 모습에 한록이 괜히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감독님들은 잔뜩 모여서 뭐하시는 거예요?”
“서감독님 신작에 대해서 회의 중이었어.”
“아.”
한록의 말에 임감독이 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사실, 한록이 임감독에게도 미리 서감독의 영화를 보여줬던 것이었다.
아무리 욕을 먹는다 해도, 지금 임감독은 한국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드라마 작가다. 어쩌면 대중성 측면에서는 여기 모인 누구보다 뛰어난 사람인지도 몰랐다.
“어라. 오작가님한테 도움을 좀 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리고 그 생각을 한 것은 한록만이 아니었다. 조감독이 한록에게 물었다.
“팀장님. 혹시, 회의에 외부인이 참여하는 건 좀 그런가요?”
“아뇨. 공식적인 회의가 아니니 괜찮습니다.”
“역시, 우리 팀장님.”
한록처럼, 임감독에게 아이디어를 얻고싶은 것 같은 조감독. 조감독이 한록의 말에 익살스럽게 양 엄지를 들어보였다.
“작가님. 혹시 시간 되세요? 괜찮으면 저희랑 얘기 좀 하실 수 있나?”
“그게...”
임감독에게 회의에 합류할 것을 제안하는 조감독. 임감독이 망설이자, 조감독이 덧붙였다.
“아이, 이것 때문에 이팀장님이 얼마나 고생중이신데. 고향 후배 한번 도와주세요.”
“저...”
한록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임감독의 눈이 흔들린다.
“오작가님 대본 보면 뭔가, 영화를 잘 아는 분 같더라고.”
거기에 조감독의 정확한 지적까지.
“저는 우리끼리만 얘기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대답은 임감독이 아닌 서감독에게서 나왔다.
“전문가가 아닌 분에게 물을 내용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그렇지. 내가 생각이 짧았네.”
날카롭게 말하는 서감독. 한 마디로 ‘영화계 사람이 아니면 빠져라’라는 말이었다. 오만한 말이지만, 동시에 맞는 말이기도 했다.
막장 드라마의 작가와 한국의 대표 영화 감독들. CK가 인수전으로 방송국을 가져오지 않았으면 애초에 만남조차 없었을 부류였다.
“네, 저는 도움 안 돼요.”
거기에 임감독 역시 밝게 웃고 있으나 확실한 거절의 말을 건넸다.
-형. <마지막 공연> 봤어?
-안 봤어. 나 이제 영화 안 한다 했잖아.
임감독은 한록의 부탁마저 거절했었다. 그런 임감독이 이 자리에 낄 리가 없는 것이었다.
“아...네. 음, 제가 괜한 말을 했네요.”
“아니에요. 대신 다음에 술자리 있으면 꼭 불러주세요.”
“어휴, 그럼요.”
“그럼 가보겠습니다. 감독님, 영화 기대할게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모두에게 인사를 한 임감독. 임감독이 한록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미안하다, 한록아.”
그리고 임감독은 카페를 나섰다.
“내가 욕심이 앞섰나보다. 미안해, 서감독. <공주와 기사>가 미국에서도 인기라고 들었거든.”
“괜찮습니다.”
“오작가님한테도 죄송하네.”
조감독은 괜히 임감독을 끌어들인게 미안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한록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미안하다, 한록아.
그렇게 말하며 카페를 나서던 임감독.
그 눈빛은, 그러니까...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는데.’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
**
“그러면, 일단 흑백 영화. 그리고 부분 무성으로 가편집본 보내겠습니다. 다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렇게 우감독과 박감독의 아이디어대로 끝난 회의.
하지만 한록은 여전히 임감독의 표정이 신경쓰였다. 한록이 서감독에게 물었다.
“감독님. 영화를 한 사람한테 더 보여줘도 되겠습니까.”
“누구 말입니까?”
“유명하진 않지만...제가 잘 아는 감독입니다.”
“...”
한록의 말에 서감독은 잠시 답이 없었다. 유명하지도 않은 사람한테 자신의 영화에 고칠 점이 없는지 물어보겠다는 한록의 말. 그 사실에 다시 한 번 서감독의 자존심이 무너진 것이다.
하지만 한록은 서감독을 아주 오래 지켜봤고,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이 사람은 한록이 아는 그 눈구보다 자존심이 세고, 고집불통이지만...
“네. 하세요.”
동시에 그 누구보다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내가 이래서 당신을 좋아합니다.’
서감독의 말에 한록이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서감독에게 말했다.
“네. 아마 좋은 방법을 가져올 수 있을 겁니다.”
**
“형.”
[엉.]
그리고 몇시간 뒤. 한록이 임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답을 알고 있는 것 같은. 그러나 절대 입을 열지 않으려는 임감독.
“오늘 술이나 마실까?”
한록은 임감독의 입을 열 방법을 알고 있었다.
**
그날 저녁. 임감독이 한록의 집에 도착했고, 입을 벌리고 집을 둘러보았다.
“...이게 대체 몇 평이야? 너 나보다 많이 버는 거 같다?”
“별로 안 넓은데.”
“위치가 강남이잖아! CK 돈 엄청 주나보네?”
“내가 좀 많이 받아.”
“이한록, 이 자식...진짜 많이 컸다. 많이 컸어.”
늘 한록을 시기하거나, 질투하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정말 흐뭇한 표정으로 미소를 짓는 임감독. 임감독의 미소에 한록마저 마음이 따뜻해질 정도였다. 한록이 임감독에게 고마움을 담아 말했다.
“형. 위스키 괜찮지?”
그렇게 2시간 후.
“나 집...집에 갈래...”
한록의 따뜻한 마음이 담긴 위스키에 임감독은 벌써 거실 바닥을 기어다니고 있었다.
“자고 가.”
그리고 태연한 목소리로 말하는 한록.
‘충분히 취했군.’
임감독의 모습을 살피던 한록이 때가 됐다고 판단했고, TV를 틀었다. TV화면에서는 <시네마 천국>이 나오기 시작했다.
임감독이 눈을 가늘게 뜨고 TV를 보다가 말했다.
“...옛날 생각나네.”
매일 밤 임감독의 방에서 컴퓨터, 혹은 TV로 영화를 틀어두고 얘기를 나누던 둘. 그리고 지금. 임감독의 말처럼 마치 임감독의 집에서 살던 시절 같은 모습이었다.
한록이 TV에서 나오는 <시네마 천국>을 보며 말했다.
“형. 옛날에 저거 보고 형이라면 무조건 토토를 살릴거라고 했잖아.”
-나라면 저기서 음악을 넣었을텐데!
-저기서는 원테이크로 갔어야지. 원테이크로 가다가, 범인 나오는 순간 딱 끊는 거야.
임감독은 감독 꿈나무답게 영화를 보는 내내 ‘나라면 이렇게 했을텐데’란 말을 달고 살고는 했다. 그게 한록이 임감독에게 <마지막 공연>을 보여준 이유기도 했다.
“...너어. 그걸 아직도 기억해?”
“당연하지. 형이 한 말이잖아.”
“이 자식...아직도 애야.”
한록의 말에 임감독이 눈이 감겨가는 와중에도 웃음을 흘렸다. 아주 먼 옛날 자신이 했던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한록이 새삼스레 귀엽게 느껴졌던 것이었다.
“그때 우리끼리 <쇼생크탈출> 편집해보겠다고 한 건 기억나?”
“기억나지...이상한 짓 하다가 우리 집 컴퓨터 터졌잖아.”
“<트루먼 쇼>도 갑자기 공포 영화로 바꿔보고 싶다고 했었고.”
“야, 그건 꽤 창찬 받았어...교수님이 좋아하셨다구.”
과거에 대한 얘기는 아무리 나눠도 끝이 없었다. 그만큼 두 사람이 많은 시간을 보내왔고, 많은 영화를 함께 봐왔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시네마 천국>의 전설적인 엔딩 장면이 가까워졌다. TV를 지켜보던 한록이 임감독에게 물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 토토를 살려야 한다고?”
“...응. 여전히.”
언제나 영화에 대한 얘기는 피해오던 임감독. 그가 술기운과 과거에 대한 그리움에 젖어 고개를 끄덕였고, 한록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물었다.
“그럼 서감독님 영화는?”
‘분명 봤다.’
임감독은 서감독의 영화를 ‘보지도 않았다’고, ‘이제 영화는 안 만든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록은 그게 거짓말인걸 알고 있었다. 임감독은 분명 영화를 봤다. 그리고 어떻게 바꿀지마저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라면...부분무성으로 만들었을 거야.”
한록의 예상은 적중했다.
거의 잠에 들기 직전인 임감독이 술기운에 내놓은 대답. 그건 박감독의 답과 같았다. 그러나-
“그리고...”
“그리고?”
“....했을 거야.”
임감독에게는 아이디어가 하나 더 남아있었다.
말을 마치고, 책상 위로 엎어진 임감독.
어느새 잠이 든 임감독을 보며 한록은 머릿속으로 임감독이 말한 장면을 떠올렸다.
상상한다.
-나라면.
-나라면 마지막 장면을 이렇게 만들었을 거야.
임감독이 상상한 그 장면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음악이 아름다운 무성영화]
이 영화를 어떻게 마케팅할지.
완벽한 장면. 완벽한 영화. 완벽한 마케팅.
좋은 영화를 만났을 때 늘 느껴지는 짜릿함이 등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자신의 마케팅을 보고 궁금증을 참을 수 없을 관객들. 그들이 마침내 영화관에 앉았을 때 느낄 감동. 그 모든 것이 생생하게 눈앞에 떠오르는 모습에, 한록이 임감독에게 말했다.
“고마워, 형.”
그러나 쓰러진 임감독은 답이 없었다. 한록이 아무런 말이 없는 임감독의 등에 대고 다시 한 번 말했다.
“우리 영화도 기다리고 있을게.”
그 말에도 역시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
그로부터 일주일 후.
“팀장님. 요청하신 가편집본 도착했습니다.”
임감독이 제안한 방식으로 새로 편집본을 만든 한록.
그리고 다음날.
“협의회에 메일 보냈습니다. 답장 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한록에게 소식을 전하는 유선.
그리고 또 다음날.
“서감독님 30분에 도착하신대요.”
박감독의 편집본과, 임감독의 편집본을 보기 위해 CK에 도착한 서감독.
그로부터 1시간 후.
[두 번째 편집본은 누가 만든 겁니까?]
한록에게 도착한 서감독의 문자와....
“팀장님. 제롬이 팀장님과의 미팅을 요청합니다.”
기다리던 연락.
**
한록의 예상처럼 협의회에 보낸 메일은 곧장 제롬의 귀에 들어갔다.
[무슨 일입니까, 제롬.]
으로 빅6가 개봉하는 영화들의 매출을 넘겨보겠다. 그렇게 된다면 가입을 받아달라고 보냈더군요.>
[네. 그랬습니다.]
<‘마지막 공연’에 상당히 자신이 있는 모양이군요. 좋습니다.>
한록의 말에 제롬이 수화기 너머로 낮게 웃음을 흘렸다.
자신의 계획을 확실히 하기 위해 CK에게 연락을 건 제롬. 그가 마침내 용건을 꺼냈다.
<올해 워너 브라더스의 해리포터 시리즈가 개봉합니다.>
해리포터 시리즈.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영화 시리즈이자, CK를 견제하기 위해 기자를 보낸 워너 브라더스 스튜디오의 작품이었다.
그리고...
<한 번 이겨보고 싶지 않습니까?>
헐리웃을 뒤흔드는 남자, 제롬 앤더슨의 타겟이었다.
‘역시. 이제 움직이는군.’
이미 예상한 질문에 한록이 미소를 지었다.
완벽한 영화. 완벽한 마케팅. 그리고, 제롬 앤더슨이 가져올 영화계를 뒤흔들 사건.
‘자. 준비는 끝났다.’
그렇다면.
[이기고 싶습니다. 이길 자신도 있고요.]
<그렇다면 방법이 있습니다.>
한 번 시작해보자.
<한. 나를 어디까지 믿습니까?>
제롬이 한록에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