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벤져스 출동!
한록이 입을 열자 검은색 실 하나가 순식간에 뻗어 나와 한록의 눈앞에 멈춰 섰다.
‘하정영이다.’
하정엽의 동생 하정영의 실이었다.
뱀처럼 탐색하듯 한록을 둘러보는 하정영의 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놀라서 말을 잃었을만한 광경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
하지만 이미 하정엽의 실을 지켜본 적이 있는 한록. 후계자 자리를 눈앞에 두고 하씨 가문의 자제들이 자신을 압박하리란 건 이미 예상한 것들이었다.
하정영의 실이 눈앞에서 한록과 마주보고 있고, 다른 임원들의 실이 그 뒤에서 군대처럼 버티고 있다.
-자. 우리 앞에서 한 번 입을 놀려봐라.
그렇게 말하는 듯한 실들을 눈앞에 두고 한록이 말을 잇기 시작했다.
“이미 협의회에서 가입 거절로 결정이 난 상황입니다. 이번에는 가입에 실패했다는 걸 인정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겠습니다. 다만, 2차 정기회의에서는 가입이 승인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은 떨어졌는데 2차 회의에선 가입할 수 있다는 보장이 있나요?”
하정영이 피식 웃으며 한록에게 물었다. 하정영의 실이 이제는 한록의 어깨를 타고 올라왔다.
“현재 개봉 예정인 서지훈 감독의 <마지막 공연>을 유성영화로 전환해서 매출을 극대화시킬 겁니다. 매출을 만들 수 있다면, 상대쪽에서 거절할 명분이 없을 겁니다.”
한록은 최과장과 최경준의 말을 둘 다 선택했다. 회귀 전 유성영화로 개봉 된 <마지막 공연>은 작품성을 잃는 대신 대중적으로 크게 성공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공연>을 사랑한다는 걸 알고 있는 한록. 한록 역시 최대리처럼 <마지막 공연>을 통해 협의회에 가입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걸 알고 있는 것은 한록 뿐이었다.
“어찌 됐든 이번엔 실패했군요.”
또 하나의 실이 등장해 한록의 목을 감았다. 하정엽의 형, 하정진의 실이었다.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을 정도로 목을 짓누르는 실의 압박. 하정진의 실이 하나 더 나타나더니 하정엽의 발목을 감기 시작했다.
어찌나 강렬한 실인지, 실이 보일리 없는 하정엽마저 불편한 기색으로 손을 내려 자신의 발목을 쓰다듬었다.
-넌 여기서 죽여버리고.
한록의 목을 조르고.
-넌 다시 아래로 처박아주마.
하정엽의 발목을 끌어당기는 하정진의 실.
그리고.
“하정진 사장님.”
하정엽과 한록이 한 ‘약속’이 시작되었다.
“실패한게 아니라,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한 겁니다.”
입을 연 것은 하정엽이었다.
**
어제. 하정엽은 한록과 따로 독대를 하였고 한록에게 질문을 하나 던졌다.
“그 말 지킬 수 있겠습니까.”
하정엽이 되물었던 말이자 한록이 한 약속. 그 약속은 바로...
“정말로 회장님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겠습니까.”
‘이 일을 수습해주겠다’는 말이었다.
“네.”
후계자 자리까지 넘볼 수 있을만큼 회장이 관심을 가지던 프로젝트. 그 프로젝트가 눈앞에서 실패해버렸다. 하지만 한록은 그럼에도 ‘회장의 마음을 가져올 방법이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방법이 있다.’
오늘 하정엽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한록을 놀라게 했던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하정엽의 목과 손목에 감긴 아주 굵은 검은색 실이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목을 조를 수 있는. 그리고 언제든 손목을 끌어당겨 앞으로 끌어줄 수 있는 검은실.
단 한 번도 직접 본 적은 없으나, 그 굵기와 기운만으로 이미 알 수 있었다.
‘이건 회장님의 실이다.’
하정엽의 목을 조르는 실. 하태준은 이 일에 분명 화가 났다.
그러나 동시에, 하정엽의 손목에 감긴 실.
모두의 예상과 달리 아직 하태준은 하정엽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방법은 있다.’
“사장님.”
“네.”
“<퀸>때의 일을 기억하십니까.”
한록의 말에 하정엽이 얼굴을 찡그렸다. 하정엽이 갑자기 담당자를 바꾸라고 말해 한록이 회사를 떠날 뻔 했던 프로젝트, <퀸>. 그건 명백히 하정엽의 실수였다.
“네. 그때는 미안했습니다.”
하정엽이 다시 한 번 그때의 일에 대해 사과했다. 부하가 치부를 꺼내와도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인정을 하는 모습. 하정엽은 확실히 그 일에 대해 반성하는 모습이었다.
한록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약간의 미소를 지었다. 많이 성장한 하정엽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한록은 언제나 하정엽이 하태준을 많이 닮았다고 생각해왔다.
부하의 지적과, 그걸 받아들이는 상사.
“이번에는 사장님이 제 역할을 하실 때입니다.”
한록이 하정엽에게 말했다.
**
“제가 발언을 좀 하겠습니다.”
하정진과 한록의 대화에 끼어든 하정엽. 모두가 하정엽을 바라보자, 아예 하정엽이 손을 들더니 발언을 시작했다.
“이 회의에서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뭐죠?”
하정엽의 말에 답하는 하정영.
하정엽은 어제 한록과 나눈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한록 팀장의 역할을 할 때라니?
-위기를 기회로 바꿀 때란 말씀입니다. 사장님은 지금 질책을 받을 때가 아니라, 칭찬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란 걸 회장님께 보여드리세요.
“CK ENM이 세계에서 8번째로 협의회에 가입할 기회를 얻었다는 겁니다.”
“그건 모두가 알고 있...”
“그렇다면 이렇게 이한록팀장을 청문하는 것처럼 나오진 못했겠죠, 하정영 이사. 여기 있는 아무도 만들지 못한 성과입니다. 여러분이 ENM이 대단한 잘못을 한 것처럼 나오는 상황 자체가 잘못됐단 겁니다.”
하정엽이 하정진의 말을 자르며 답했다. 그러자 하정영이 발끈해서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게 뭐가 중요하죠? 가입은 실패했고, 지금 그걸 어떻게 수습할 거냐고 물어보고 있잖아요.”
“그래서 한 번 더 가입을 시도하겠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럼 지금 당장 CK의 이미지는 어떻게 할 건가요? 동네방네 소문을 내놓고, 거절 당하게 된 지금은요?”
-맞는 말이지만, 제대로 된 대답은 아닙니다. 그 회의는 이번 사건에 어떻게 대처할지 말하는 곳입니다.
-네. 대처방안도 함께 말씀하시면 됩니다.
그러나 이 역시 이미 준비된 것이었다.
“가입이 확실시 되었는데 거절당했고, 협의회에서 한국을 배제하려는 불합리한 결정이었다고 솔직히 입장을 밝히겠습니다. 동시에 그럼에도 한국을 대표하기 위해 다시 한 번 가입을 시도할거라고 말할 겁니다. 그럼 이번 일은 ENM이 가입을 실패한 일이 된 게 아니라 협의회가 한국을 배제한 일로 기억에 남을 겁니다.”
“대중이 ENM의 편을 들 거라고요?”
“네. 맞습니다.”
“그걸 어떻게 알죠?”
“눈이 있다면 알겠죠. 재작년, 작년, 올해, 대중들은 ENM의 영화를 인정했고, ENM이 좋은 영화를 만드는 회사라는 것에 동의하고 있으니까요.”
그 말에 하정영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확실히 지금 사람들 사이에선 ‘ENM 협의회에 가입하는게 당연하다’는 말이 나오고 있었다.
그건 협의회에서 탈락하면 타격이 클 것이라는 말이었지만, 동시에 사람들이 ENM을 그만큼 인정하고 있단 뜻이기도 했다.
“대중들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말을 이은 것은 하정진이었다. 그 말에 하정엽이 차가운 표정으로 답했다.
“네. 형님이면 그렇게 생각하시겠죠.”
3년 연속 불매 이슈에 시달리는 하정진의 회사 CK패션. 그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었다.
하태준의 장남이자 CK의 차기 후계자 하정진. 하정엽과 하정진의 시선이 마주쳤고, 하정진이 말했다.
“할 말 못할 말을 가리지 못하는 편이군요, 하정엽 사장.”
하정진의 말에 회의실의 공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그만.”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하는 회의실. 침묵을 깬 것은 하태준이었다.
“하정엽. 객관적으로 말해. 정말 ENM이 부족한 게 아니라 거기서 트집을 잡고 있는 거냐?”
“맞습니다. 다른 회사들이 가입할 때는 매출을 따진 적이 없습니다.”
“그럼 정당성 확보는 됐고. 인터뷰는.”
“헐리웃이 한국을 배제하는 태도에 화가 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헐리웃은 개척해야할 곳이다, 라고 얘기하겠습니다.”
“샬롯테의 공격은?”
“이 상황에서 샬롯테가 ENM을 위로한다면 좋은 이미지로 남을 수 있을 거라 설득하겠습니다.”
하태준의 질문에 하정엽이 막힘없이 대답했다. 그리고.
“회장님. 이런 얘기보다는 ENM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이뤄냈는지에 대해 집중해주시기 바랍니다.”
이건 질책을 받을 일이 아니라, 대단한 성과라는 걸 직접 언급하는 모습까지.
하태준이 의자에 깊숙이 앉아 하정엽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입을 열었다.
“네 놈이 시킨 거군.”
한록에게 던지는 질문이었다.
우려되는 모든 일에 대답을 가지고 있는 하정엽. 뿐만 아니라 하정엽의 태도는 아주 자신감에 넘쳤다.
‘우리가 해낸 일을 인정해라.’ 하태준은 하정엽에게 확신을 불어넣어준 사람이 한록이란 것을 눈치챈 것이었다.
한록이 대답할 새도 없이 하태준이 다시 한번 질문을 던졌다.
“두 번째 가입은 성공할 거라 확신하나 보지?”
질문을 하긴 했지만, 하태준은 이미 한록의 답을 알고 있었다. 한록이 이미 여러번 하태준에게 보여준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자만심에 가까운 확신. 아마 한록은 이번에도-
‘확신하겠지. ’나 이한록이다‘라고 말할 거고.’
“확신한다고 말씀드릴 순 없습니다.”
그러나 한록은 이전과는 다른 답을 내놓았다.
예상하지 못한 답에 하태준이 살짝 인상을 쓰고 한록을 바라보았다. 하태준의 표정을 본 하정영이 재빨리 답했다.
“확신하지도 못하는 얘기를 왜 꺼낸 겁니까.”
“조용히 해. 이한록. 계속 말해.”
하지만 하태준은 한록의 말에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한록이 말을 이었다.
“흥행에 백퍼센트란 없다고 생각합니다. 서감독님은 이미 미국에서도 팬덤이 형성되어있지만, 개봉 당시에는 어떻게 상황이 바뀔지 모릅니다. 무조건 흥행에 성공할 거란 말씀은 드릴 수 없습니다. 다만 그럼에도 최선의 선택이고 가능성은 있기에 말씀드린 겁니다.”
신중하게. 그러나 솔직하게 답하는 한록.
그 말에 하태준이 생각에 잠겼다.
사실 하태준은 이 일에 많이 화가 나 있었다. 하태준의 오랜 숙원이었던 헐리웃 진출. 그걸 공식적으로 인정받는게 바로 협의회 가입이었다. 그런데 그게 눈앞에서 좌절되었다. 화가 났다.
왜냐하면 그만큼 이 일에 기대를 걸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하태준은 마음 속에 그 분노만큼이나 큰 감정 하나를 가지고 있었다. 과연 하정엽이 이 일을 어떻게 풀어나갈지에 대한 궁금증과 기대였다.
-이런 얘기보다는 ENM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이뤄냈는지에 대해 집중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정엽은 오늘 가장 필요한 말을 했으며,
-확신할 순 없습니다. 하지만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록은 평소와 달리 신중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위기의 순간. 그 상황에서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는 CK ENM의 두 남자.
하태준은 그 모습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그 생각과 함께 하태준의 실이 한록에게 달려들었다.
**
이 회의실에 있는 그 누구보다 굵은 실. 하태준의 실이 한록의 눈앞까지 달려왔다. 매서운 바람을 일으키며 달려오는 실에 한록이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눈을 떴을 때 하태준의 실은 머리 위에서 한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직은 부족한가.’
한록이 피식 미소를 지으며 실을 바라보았다. 연결될 듯 말 듯 한록의 머리 위에서 한록을 내려다보는 실. 역시 회장의 실은 쉽게 연결되지 않았다.
“두번째도 실패하면 가만두지 않겠다. 하지만 그 전까진 시간을 주지. 다들 CK ENM에게 협조해.”
“회장님!”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쨌든 하태준의 마음이 다시 돌아섰다는 것이었다.
“다음 안건.”
하정영의 반발을 누르고 하태준이 회의를 강행했다. 한록을 노려보는 하정영. 그리고 아무말 없이 하정엽을 바라보는 하정진.
“다음은 CK 패션의 불매 이슈에 대한 얘기입니다.”
그러나 하정 역시 금방 표정을 바꾸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얘기를 시작했다.
‘끝났다.’
이제 이 회의에서 다시 ENM에 대해 얘기가 나오는 일은 없으리라. 그렇게 판단한 한록이 자리에 앉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한록의 옆자리에 앉은 하정엽이 속삭였다.
“잘했습니다.”
그 말에 한록이 살짝 웃었다. 오늘 칭찬을 받아야 하는 사람. 그러나 억울하게도 칭찬 대신 잔뜩 혼만 난 사람은 따로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한록 역시 그 사람에게 칭찬을 해주고 싶었다.
‘...말해도 되나?’
‘뭐, 이 정도는 괜찮겠지.’
잠시 갈등하던 한록이 종이에 무언가를 적었고, 하정엽에게 보여주었다.
[사장님도 잘하셨습니다.]
“...하!”
한록의 쪽지에 하정엽이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
“회의 잘 끝났습니다. <마지막 공연> 재편집 들어갑시다.”
“...살았다!”
전사 회의가 끝나고 한록이 전해준 소식. 그 소식에 현차장이 가슴을 부여잡았다.
“나 여기서 끝나는 줄 알았다...!”
“에이, 무슨 그런 말을 해.”
“송과장도 점심시간에 이직처 찾아보던데?”
“조용히 안 해?”
설립 이후 최대 위기에 아닌 척 하지만 다들 불안해하던 해외팀. 하지만 일단 회장의 분노는 풀 수 있었다.
“근데, 다음 번 가입은 가능한 건가?”
“가능합니다. 서감독님 영화잖아요.”
거기에 이 팀의 정신적 지주인 한록이 괜찮다고 말하고 있다. 이제 남은 것은 <마지막 공연>을 수정하는 것 뿐. 더 이상 걱정할 것은 없었다.
“수정이요? 절대 싫습니다.”
하지만 일은 절대 쉽게 풀리는 법이 없었다.
**
한록은 서감독에게 소식은 전했고, 영화를 편집해야 한다고 말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유성영화로 바꾸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절대 싫습니다.”
그리고 서감독은 단숨에 거절의 대답을 내놓았다.
‘...어떡해?!’
라는 눈으로 한록을 바라보는 현차장. 그러나 한록은 서감독이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태도였다.
“네. 그렇게 말씀하실 것 같았습니다. 무성영화와 작품성은 지키면서 다른 요소를 대중성 있게 바꾸는 건 어떠십니까?”
“그건 좋습니다. 많은 관객이 들어오는 걸 마다할 이유는 없죠.”
‘...다시 살았다!’
“하지만 그게 가능할 거라 생각합니까?”
‘그럼 우리보고 어떡하라고오!’
현차장은 서감독의 말 한 마디에 천국과 지옥을 오가고 있었다. 그러나 심기가 불편한 건 서감독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감독은 지금 전투태셍 돌입해 있었다.
“이미 영화는 다 만들어졌어요. 뭘 어떻게 손을 대겠단 겁니까. 내용이 바뀌는 거라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내용을 바꾸지는 않을 겁니다. 영화가 전부 대중적일 필요는 없으니까요. 마케팅을 할 단 하나의 포인트, 하나의 장면만 있으면 됩니다. 그걸로 어떻게든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러 오게 만들겠습니다. 그게 제 일이니까요.”
“...생각중인 방법이 있으십니까.”
한록의 말에 서감독의 화가 조금 누그러졌다. 한록이 제작부 부장처럼 멋대로 영화를 바꾸는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저는 없지만,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 말입니까.”
“다른 감독님들께 자문을 구해보려 합니다. 조성형 감독님, 임주강 감독님, 성태준 감독님...”
“필요 없습니다.”
한록이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한국 영화계의 거물들이었다. 그러나 서감독은 한록의 제안을 단 칼에 거절했다.
“내 영화에 남들이 손을 대게 만들겠다고요.”
자신의 영화에 누군가가 간섭을 한다. 그 사실을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거절, 아니, 그 이상의 분노를 담은 표정으로 한록을 바라보는 서감독. 그러나 한록에게는 비장의 카드가 하나 남아있었다.
“그리고 <도착지>의 우감독님께도 연락을 드릴 겁니다.”
그 말에 서감독이 잠시 말을 멈추고 한록을 바라보았다.
우감독. <도착지>의 감독이자, 작년 영화대상의 우승자.
-그래.
-이런 영화도 있을 수 있겠구나.
서감독에게 그런 생각을 알려줬던 사람.
우감독이란 말에 서감독이 예전 일을 떠올렸다. 서감독은 여전히 <수면>이 대상을 받았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자신보다 영화를 잘 만드는 사람은 없다고. 누구도 자신에게 조언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우감독님은 언제 부르실 겁니까.”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조금 궁금하기도 했다.
**
일주일 후. <마지막 공연>에 대한 회의를 위해 CK ENM 1층 카페에서 모임이 개최되었다.
<마지막 공연>의 주인인 서감독. 한국에서 가장 천만 영화를 많이 만든 감독인 조성형 감독. 한국 최초 칸 영화제 대상을 수상한 임주강 감독. 서감독의 스승인 성태준 감독. 그리고.
“윤감독님. 오랜만이에요.”
<삼일의 삶>의 윤감독.
“제가 여기 와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식물>의 박감독.
“감독님.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어, 이팀장. 오랜만이야.”
<도착지>의 우감독이었다.
“다들 도착하셨군요.”
7명의 세계적인 감독과 회사원 한명.
“하실 말씀 있으신 분 계십니까.”
그들이 무성영화를 세계적으로 흥행시킬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