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208화 (189/263)

앞으로 벌어질 칼부림에 CK를 끌어들이겠다는 것이었다.

오랜 인연을 만났어도. 괴로운 과거를 떠올려도. 시간은 흐르고 어김없이 아침은 오는 법.

날이 밝았고, 한록은 임감독을 집으로 데려다주었다.

“야, 밥 먹고 가라니까?”

“그럼 회사 늦어.”

“그래도 아침을 거르면 어떡해! 키 안 큰다!”

“내가 형보다 큰데?”

“...암튼! 가지 말고 기다려!”

“얼마나?”

“10분.”

“늦어.”

“5분!”

“알았어. 기다릴게.”

그렇게 한록에게 아침을 먹이겠다며, 열심히 토스트를 만들기 시작하는 임감독. 그리고 열심히 칼질을 하는 임감독과 한록 사이에 연결된 실.

그 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두껍고 따뜻했다. 여태 한록과 얽힌 실 중 가장 든든하게 엮인 실. 한록에 대한 임감독의 애정이 변치 않았다는 뜻이었다.

“자, 가면서 먹어.”

“응. 고마워.”

“밥 잘 챙겨먹고. 연락 잘하고. 앞으로 자주 전화할테니까 받아. 알았지?”

“그럼...”

“영화 얘기 하면 전화 안 할 거야! 가라!”

하지만 임감독은 여전히 영화에 대한 얘기를 거부했다.

밝게 웃으며 한록을 배웅하는 임감독. 한록은 운전을 하며 임감독에 대해 생각했다.

‘분명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다.’

한록에 대한 애정도 여전하다. 거기에, 한록에게 ‘미안하다’고 얘기하던 모습까지. 임감독 역시 영화에 미련이 남은게 분명했다. 하지만 다시 영화를 만들 수 없는 사정이 있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한록 또한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시간이 필요하겠지. 천천히 얘기해보자.’

언제가 되었든, 이 영화는 반드시 다시 만들어질 것이다.

그 생각을 하며 한록은 엑셀을 밟았다.

**

그로부터 한달 후. 회사로 출근한 한록.

“팀장님. <마지막 공연> 가편집본 나왔어요.”

최과장이 한록에게 소식을 하나 전해왔다. 가제 <마지막 공연>. 무성영화로 만들기로 결정한 서감독의 신작. 그 영화의 가편집본이 나왔다는 것이었다.

“...이거 상 엄청 받겠네요. 3대 영화제 중 하나는 무조건 대상 받을거 같아요.”

최과장이 <마지막 공연>의 가편집본을 보고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직 1차 편집본도, 2차 편집본도 아닌 가편집본이다. 그러나 최과장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한록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역시. 감독님 선택이 맞았어. 이건 무성영화로 개봉해야했다.’

<마지막 공연>은 서감독이 대중성도 포기하고 정말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만든 영화였다. 작품성에서는 따라올 영화가 없는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매출은 기대하기 어렵겠지?”

하지만 현차장의 걱정 역시 사실이었다.

<마지막 공연>은 음악 영화였고, 그 점이 서감독이 무성영화로 만들겠다고 결정한 이유기도 했다.

영화 엔딩부의 마지막 장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 펼쳐지는 장면이었으나 그 어떤 음악도 서감독이 생각하는 ‘천상의 음악’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서감독은 아예 무성영화를 선택했다.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관객 본인이 상상하는 가장 아름다운 음악을 떠올리게 하기 위해.

하지만 음악 영화에 음악이 없다니. 당연히 대중성 부분에선 엄청난 감점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제작부가 서감독쯤 되는 급의 감독을 그렇게 말린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마지막 공연>은 매출보다는 수상에 집중합시다. <수면>과 <시험>이 꽤 흥행에 성공했으니까, 이제 어느정도 CK의 대중성은 증명됐습니다. 이제는 작품성을 보여줄 때죠.”

“하긴. 이제 우리가 잘 하는 걸 보여줄 때지.”

영화. 그리고 영화사의 급을 증명하는 두가지 요소. 매출과 수상. 한록은 이제 수상에 집중하며 CK라는 회사를 증명할 생각이었다.

1년이 넘는 시간동안 헐리웃이라는 세계 최고의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쳤던 해외팀. 이제 해외팀도 조금은 쉬어갈때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한록이 해외팀 모두에게 말했다.

“영화가 워낙 좋으니 수상은 당연할 겁니다. 당분간은 좀 편하게 갈 수 있겠어요.”

-그리고 그 생각은 착각이었다.

며칠 뒤. 최과장이 한록의 사무실 문을 두드리고 말했다.

“팀장님. 제롬한테서 연락이 왔어요.”

“제롬이요? 용건이 뭐라고 합니까??”

“빅6를 무너뜨리고 싶으면 전화하래요.”

이 업계에 ‘편하게’ 라는 건 존재할 수 없는 말이니까.

**

최과장을 내보내고 제롬에게 전화를 건 한록. 제롬 역시 한록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지 바로 연락을 받았다.

<한. 실비아를 보낸 사람이 누군지 알고 싶지 않습니까.>

제롬의 첫마디에 한록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 빅6중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수면>의 GV를 방해하기 위해 나타났던 실비아.

닉이 그 소식을 한록에게 전해주었으나, 범인은 알려주지 않았다. 제롬은 지금 그 일을 꾸민게 누군지 말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시작부터 재밌는 얘기를 하시는군요. 알려주실 겁니까?]

<워너 브라더스 픽처스 입니다.>

‘누군지는 말해줄 수 없다’고 말하던 닉과 달리, 시작부터 범인이 누군지 알려주는 제롬. 제롬의 태도에 한록은 확신했다.

‘제롬이 움직이려는 거다.’

회귀 전. 신생 영화사임에도 불구하고 설립 5년만에 빅 6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제롬의 스튜디오B.

스튜디오 B가 그렇게 엄청난 위치에 올라갈 수 있었던 건 제롬이 엄청난 영화들을 한 번에 개봉했기 때문이었다.

마침 빅6가 부진을 겪고 있을 때, 스튜디오 B에서 향후 10년간은 얘기가 나올 영화들이 개봉했다. 거기에 세계 최고 마케터 닉 해리스가 붙었다. 제롬의 영화들은 연일 박스오피스를 갈아치우며 기록을 세웠고, 스튜디오 B에는 세계급의 투자사들이 붙기 시작했다. 세계적인 감독들이 하나같이 제롬의 회사와 계약을 맺은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새 빅 6가 아니라 빅7이 되어버린 헐리웃. 성공비결을 묻는 질문에 제롬은 이렇게 답했다.

-시기가 좋았습니다. 스튜디오 B의 기대작들이 한꺼번에 개봉한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때 헐리웃은 모두가 스튜디오B에 집중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영화계의 모두는 알고 있었다. 그건 운, 시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때 마침 빅6가 모두 내부적으로 문제를 겪고 있었거든요. 영화를 제대로 개봉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죠.

그 ‘문제’를 만들어내서 빅6를 꼼짝도 못하게 칼부림을 한 사람이 바로 제롬이었으니까.

제롬 앤더슨.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영화 제작자 중 한명. 그러나 그의 실체는 따로 있었다.

한록. 아니, 최경준과 하정엽도 명함을 내밀지 못할 정도로 대담한 사업가이자 헐리웃을 자기 손바닥 위에 올려둔 사람. 그게 제롬의 본모습이었다.

‘제롬이 칼을 뽑았구나. 회귀 전보다 몇 년은 빠르다.’

그가 회귀 전보다 훨씬 빨리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려 하고 있다.

[이 얘기를 제게 전달해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단순한 호의.>

[제가 그 말을 믿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거짓말은 아닙니다.>

[제대로 된 이유는 따로 있지 않습니까.]

그 목적은, 빅6를 쓸어버리기 위해.

<맞아. 내 편이 필요하거든.>

그리고 CK는 제롬의 편으로 선택되었다.

LA 필름 포럼. 1년에 한번 영화계 초거대기업들과 정부가 모여 영화업계의 미래에 대해 논의하는 곳으로, 사실상 영화계 대부분의 의사결정이 이뤄지는 곳이었다.

그리고 LA필름 포럼 협의회는 필름 포럼에 올라갈 안건을 만들기 위해 영화사들이 논의를 하는 곳이었다.

필름포럼협의회는 필름 포럼과 달리, 빅6가 아니라 미국 영화계에서 나름의 위치가 있는 영화사들이면 협의회에 가입해 의사표시를 할 수 있었다.

필름포럼협의회에 가입하는 것만으로도 헐리웃에서는 꽤나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된다. 바로 필름포럼협의회에서 진행되는 회의에 의결권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었다. 이 의결권으로 결정된 내용이 빅6와 정부에 전해지고, 법률이 되고 정책이 된다.

'외국 영화사 중 필름포럼 협의회에 가입된 영화사는 7곳 뿐이다.'

그런 곳에 CK ENM이 이 협의회에 가입할 수 있도록 추천해주겠다는 제롬의 말.

CK ENM은 한국, 아니 세계에서 8번째로 미국 기업이 아닌데도 필름포럼에 가입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건 엄청난 영광인 동시에...

[회의에서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란 말이군요.]

<맞습니다.>

앞으로 벌어질 칼부림에 CK를 끌어들이겠다는 것이었다.

‘빅 6를 적으로 돌려라.’

제롬의 말에 숨은 뜻이자, 미래를 보고 온 한록만이 알고 있는 진실. 제롬의 말은 거의 헐리웃 전체를 적으로 돌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록은 제롬의 말에 쉽게 동의했다.

[알겠습니다.]

왜냐하면.

<생각보다 쉽게 수락하는군요.>

[좋은 기회이니까요.]

<네. 한의 생각이상으로 그럴 겁니다.>

한록은 이 싸움의 승자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

<필름포럼협의회에서 연락이 오면 신청서를 제출하세요.>

[알겠습니다.]

제롬의 말에 따라 필름포럼 협의회에 가입 신청서를 제출한 한록.

-1차 심사에 합격하였습니다. 정기회의에서 2차 심사를 마치고 결과 알려드리겠습니다.

필름포럼 협의회에서는 상당히 긍정적인 답변을 보내왔다.

“이거...거의 통과란 거지?”

회원 모두의 투표를 거치는 1차 심사와, 빅6만 참여하는 정기회의. 사실상 1차심사에서 통과된 회사를 2차 심사에서 거절하는 경우는 없었다.

다시말해, CK의 필름포럼 협의회 가입이 거의 확실시 된 상황.

[CK ENM, LA 필름포럼협의회에 가입 유력.]

[해외제작사로는 일본, 그리스, 이탈리아, 프랑스에 이어 한국이 8번째 국가이다.]

[CK ENM이 해외팀 설립 1년 만에 놀라운 성과를 보이고 있다.]

[<시험>과 <수면>의 재개봉이 예매율 1, 2위를 기록하고 있다.]

신문에는 연일 해외팀의 성과에 대한 기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CK ENM 해외팀의 무패신화. 성공요인은 이한록 팀장?]

[삼십대 초반의 나이로 CK ENM 최연소 임원이 된 이한록 팀장. 최근 CK ENM은 이한록 팀장체제로 개편 되었고, 3배 이상 매출이 성장하였다.]

[해외팀의 헐리웃 진출과, <시험>과 <수면>의 연이은 성공. 이는 모두 이한록 팀장의 결단이었다는 소문이 전해진다.]

“이거 우리가 내보낸 거야? 이팀장이 이런 걸 허락했을 리가 없는데.”

“우리 아니네요. 신문사에서 자체적으로 쓴 기사 같아요.”

CK가 홍보를 위해 기사를 내보낼 필요도 없이 알아서 올라오기 시작하는 기사들.

[LA필름포럼????ㄹㅇ??]

[ㄴ필름포럼말고 협의회요]

[ㄴㄴLA필름포럼 협의회????ㄹㅇ??]

[오...필름포럼 협의회면 정말 대단하네요. 요즘 CK 영화가 좋긴했죠.]

[LA필름포럼 협의회가 뭔데 이 난리임? 기사 내려고 어디 또 이상한데 가입한 거겠지 ㅉㅉ]

[ㄴLA필름포럼 협의회: LA필름포럼에서 논의 될 안건을 결정하는 의결기관. 미국 영화계에서 ‘이 정도면 미국 영화계를 책임질만 하다’는 영화사들을 불러모으는 곳이다. 님 댓글 달기 전에 검색 좀 해보셈]

[ㄴCK 요즘 기사 내보낼 필요도 없이 잘 나갑니다. 덕분에 라이벌 회사인 우리는...크흑..ㅠㅠ]

[ㄴㄴ 윗분. CK 이직 스터디 하는데 참여하실래요? 생각있으시면 쪽지 주세요~]

“...나 CK 주식 좀 사볼까?”

“괜찮은데? 이번에 서감독 신작도 CK에서 나온대. 상 좀 받으면 주가 더 오르지 않을까?”

“믿는다, CK...!”

거기에, 무엇보다 대중들의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한국 영화사가 헐리웃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 거기에 그간 CK의 영화가 모두 대중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팀장님. 한국신문에서 인터뷰 요청 들어왔습니다.”

“이번에 사장님이 영화정책 간담회에서 LA필름포럼 협의회 얘기를 하실 건가 봐요.”

해외팀 역시 이런 기회를 놓칠 생각은 없었다. 한록. 최경준. 하정엽. CK ENM의 모든 중역들이 언론 인터뷰를 잡았고, 기사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CK ENM은 대대적으로 필름포럼 협의회 가입을 준비하고 있었고...

“하정엽.”

“네, 회장님.”

“목요일 기업총수 회의에 따라와라.”

하태준 역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 달에 한 번있는 CK 가문의 식사자리. 그 곳에서 하태준이 하정엽에게 중요 회의에 참석하라고 말한다.

“...회장님. 그 회의는 제가 회장님을 수행하기로 했습니다.”

“그랬지.”

“그런데 왜...”

“하정진 네 놈보다 하정엽이 나을 것 같으니까.”

그건 다시 말해, 하태준이 하정엽을 CK의 새로운 후계자로 점찍고 있다는 얘기기도 했다.

한국 영화계. 헐리웃. 그리고 회장의 마음을 뒤흔들고 있는 필름포럼협의회의 가입.

신청 한달 후, 그 결과가 공개되었다.

[발신인: LA필름포럼협의회]

결과는...

[정기회의에서 CK ENM의 가입에 대해 논의하였고, 그 결과를 알려드립니다.]

[2차 심사 탈락으로 LA필름포럼 협의회의 가입이 유보되었습니다.]

거절이었다.

**

해외팀, 아니, CK ENM 전체가 비상회의에 돌입했다.

한록. 최경준. 최과장. 상무급 이사들. 그리고, 하정엽이 모인 회의.

“거절이 확실한 겁니까?”

“다음 정기회의에서 다시 심사해보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 번 탈락시킨 사안을 다시 통과시킬 리가 없습니다”

“이유는 뭐라고 합니까?”

“가입하기에는 성과가 부족하다고 합니다. <수면>, <시험> 두 개만으로는 매출이 부족하다는 거죠. 가입을 원하면 다음 정기회의 전까지 증명할만한 매출을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이팀장. 이걸 예상하지 못한 겁니까?”

제작부 출신의 상무이사 윤이사가 한록에게 물었다. 최근 해외팀과 제작부는 대립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마침 한록을 질책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었다.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필름포럼협의회가 매출 때문에 가입을 거절한 적은 없었으니까요.”

가입이 확실시 된 상황에서, 갑자기 날아온 거절 통보 메일. 거기에 이유는 납득이 가지 않는 내용이다. 그 사실만으로도 한록은 상황이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빅 6가 우리를 헐리웃에서 몰아내려 하고 있군.’

빅 6는 더 이상 헐리웃에 새로운 나라가 진입하는 것을 원치 않는 것이었다.

“이 정도는 미리 예상했어야-”

“쓸데없는 얘기는 그만하고, 대처방안에 대해 얘기하세요.”

한록에게 트집을 잡으려는 윤이사. 그러나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하정엽이 윤이사의 말을 잘랐다. 윤이사는 하정엽의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해외팀의 활약으로 하정엽이 CK의 후계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는 지금. 그런데 그 상황이 모두 어그러졌다.

이대로 진행한다면 CK ENM과 하정엽의 이미지가 우습게 끝나버릴 수 밖에 없다.

지금 하정엽은 머리 끝까지 화가 난 게 분명했다.

하정엽이 최경준에게 물었다.

“다음 정기회의가 언제입니까.”

“4개월 뒤입니다.”

“서감독의 신작으로 필름포럼이 요구하는 매출을 달성할 수 있겠습니까.”

“서감독님의 신작은 무성영화입니다. 매출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른 영화를 개봉하는 건요.”

“불가능합니다. 다음 영화는 개봉까지 1년 정도 걸립니다.”

그 어떤 방법도 불가능하다. 말 그대로 사면초가. 돌파구가 하나도 없는 상황이었다.

“당장 내일 회장님이 참여하시는 CK 그룹 회의가 있습니다. 거기에 가져갈 방법을 제시하세요.”

하정엽이 모두를 둘러보았으나, 대답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도무지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말하라고 했을 텐데요.”

하정엽의 분노를 감당할 자신이 없는 것이었다.

숨막히는 정적.

“서감독님의 신작에 사운드를 입혀서 상영해야 합니다.”

그 속에서 입을 연 것은 최과장이었다.

“이번 신작이 대중성을 노릴만한 작품은 아니지만, 서감독님은 이미 미국에서 꽤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다시 유성영화로 전환하고, 편집을 대중성 위주로 바꾸면 괜찮은 결과가 나올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원래대로 영화제에서 수상을 노리는 건 어려워질 겁니다. 필름포럼 협의회에 가입하는 걸 실패했다고 인정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번을 노리고 있다고 발표해서 관심을 분산하는 겁니다.”

이어서 말은 한 것은 최경준이었다.

“신작을 유성영화로 전환한다. 실패를 인정하고, 다음 해를 노린다.”

최과장, 그리고 최경준이 내놓은 방안을 다시 말하는 하정엽. 하정엽은 그 어느 것도 마음에 차지 않는 듯한 눈치였다.

하지만 그 외에는 방법이 없었고, 당장 내일 회장에게 결정된 사안을 전달해야했다. 이제는 정말 결정을 내려야할 때였다.

-톡. 톡. 톡.

하정엽이 버릇대로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그리고 손가락을 멈추고, 누군가를 바라보았고...

“이한록 팀장. 어떻게 할 겁니까.”

한록에게 물었다.

모두의 시선 속에서 한록이 입을 열었다.

“저는-”

**

회의가 끝났고, 모두는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하정엽은 자신의 사무실에서 오늘 회의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서감독의 신작을 유성영화로 전환한다.

-실패를 인정하고, 다음 해를 노린다.

최과장과 최경준이 내놓은 대답. 그리고 그에 대한 한록의 답.

생각에 잠겨있던 하정엽이 비서에게 말했다.

“이한록 팀장을 불러오세요.”

하정엽의 앞에 선 한록. 하정엽은 한록에게 ‘왜 이런 일을 예상하지 못했냐’거나, ‘더 좋은 방법을 가져와라’라고 닦달하지 않았다. 대신 단 하나의 질문을 던졌다.

“이한록 팀장. 오늘 회의에서 한 말 지킬 수 있습니까.”

“네.”

그리고 한록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한록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한록에게서 프로젝트를 뺏으려 했던 젊은 사장. 그가 오랜 침묵 후 입을 열었다.

-CK ENM이 만든 최고의 성과가 무너지기 직전이다. CK ENM이 만든 명성. 해외팀. 후계자 자리. 그 모든게 위협받는 지금.

“내일 회의에 참석하세요. 이한록 팀장이 나 대신 이 안건에 대해 발언할 겁니다.”

그의 선택은 한록을 믿는 것이었다.

**

다음날. CK그룹 지주사에서 열리는, CK그룹 산하의 모든 회사가 모인 그룹회의.

“CK ENM 이한록 팀장입니다.”

한록이 처음으로 그 곳에 발을 내딛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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