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207화 (188/263)

그 말과 함께 모든 일이 시작되었다.

한록과 임감독. 함께 영화를 보며, 멋진 영화를 만들고 싶단 꿈을 키워오던 사람들. 그 사람들이 이제 유명한 작가와 영화계의 거물이 되어 만났다. 그리고 그 중 한명이 ‘다시 영화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에 대해, 임감독은...

“그래!”

아주 쾌활하게 수락 의사를 밝혔다.

“나 이번에 진짜 기깔나는 대본 쓰거든? 사람들이 엄청 좋아할 거야. 안 그래도 영화화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거 판권 너희 바로 줄게. 싸게 가져가.”

“형.”

“아, 사실 넷플릭스에서 영화화하자고 먼저 제안 왔는데. 무조건 너희한테 넘길게. 한록이가 영화 만들자는데 형이 가만있을 수 있나.”

“성우형.”

“그거 진짜 인기 많을 거야. 죽고, 죽이고, 아주 난리도 아니거든. 드라마는 아이돌 잔뜩 집어넣어서 외국 팬들도 끌어올 건데. 영화도 그렇게 하는게 나을 거야.”

“형. 나 형 드라마 판권 사가겠다는 거 아니야. 나랑 같이 영화 만들자고 얘기하는 거야.”

신이 나서 말하는 임감독의 말을 끊고 답하는 한록. 그러자 임감독이 씩 웃으며 말했다.

“그건 좀 어렵겠는데. 난 이제 영화 안 써.”

“왜?”

“돈이 안 되잖아.”

그리고 임감독은 한록이 이미 짐작하던 답을 내놓았다.

“나 드라마 하나 쓰면 1억 받거든? 근데 영화는 아니잖아. 몇 년 시나리오 쓰고. 또 몇 년 촬영하고. 그렇게 나와도 쪽박이지. 어휴. 그런 걸 왜 해. 안 해, 안해.“

임감독의 말은 한록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말이었다. 돈 대신 꿈을 쫓아라. 예술가는 원래 배가 고픈 거다. 한록 역시 그런 말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궁금한게 하나 있었다.

“형. 형이 쓰는 드라마. 마음에 들어?”

사람을 위로하는 영화를 만들고싶다던 임감독의 말. 그런 사람이 막장 드라마를 쓰는 것에 만족하는지.

“아니. 쓰기 싫어 죽겠어!”

“그럼 왜 쓰는 거야?”

그런데 왜 계속 그런 대본을 쓰는지.

“돈이 되잖아. 그럼 써야지.”

“이제 정말 영화 만들 생각은 없어?”

“응.”

예전의 꿈은 잊은 것인지.

“그럼 나랑 한 약속도 지킬 생각 없었던 거야?”

그 약속은, 이제 자신만 기억하고 있던 것인지.

한록의 질문에 임감독이 답했다.

“응.”

**

“이하안로옥. 너 이 녀석. 성공했네에.”

“형. 안전벨트 메.”

식사를 마치고 한록의 차에 탄 한록과 임감독. 한록은 술을 마시지 않았으나, 임감독은 식사 중 마셨던 와인 몇잔으로 벌써 취해버린 상황이었다.

“형. 집이 어디라고?”

“강원도...춘천시....”

“우리 집으로 간다.”

한록은 옛 주소를 부르는 임감독의 말을 끊고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한록은 운전을 하면서 오늘 임감독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나 혼자 그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나.’

실패작으로 남은 둘의 영화. 그걸 완성하자는 말. 한록이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온 약속이었으나, 임감독은 그 약속을 모두 잊은 듯이 행동하고 있었다.

‘...형도 많이 변했구나.’

돈 때문에 원하지도 않는 글을 쓴다는 임감독의 말. 한록은 그 말에 반대하지 않았다. 꿈보다 더 중요한게 생계니까. 다만 많은 게 변했고, 이제는 자신의 꿈이 이룰 수 없는 약속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계속 드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

“한록아.”

“응.”

“미안해.”

이 사람이 정말 변한 게 맞는지란 의문이었다.

**

집에 돌아와 임감독을 손님방에 눕힌 한록.

“한록아...너 정말 요만했는데...언제 그렇게 큰 거야...키는 왜 또 그렇게 컸어...”

“형. 취했으면 좀 자라.”

술에 취해서 계속 헛소리를 하는 임감독. 그의 모습은 대학생 시절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 모습을 보니 자연스럽게 옛 기억이 떠올랐다.

강원도에서 임감독과 함께 보내던 학창시절. 임감독이 꿈에 들떠있던 젊은시절.

그리고, 가장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절.

**

그 어떤 말로도 위로가 불가능한 순간이 있다.

한록의 15살이 그랬다.

[너는 나처럼 살지마라.]

그 말을 남기고 가족을 등지고 사라져버린 아버지. 혼자서 어린 두 자식을 돌봐야 하는 어머니. 그 사이에서 한록 역시 강제로 어른이 되어야했다.

기업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기 위해 아등바등 전교 1등을 노리고, 아직 어린이집에 다니는 한서를 키운다.

성적에 대한 압박.

가난한 집에 대한 열등감.

동생을 보살펴야 한다는 책임감.

어머니에 대한 안쓰러움과,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15살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지만, 유일한 친구인 영도에게도 마음을 터놓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 귀에 들어갈까봐 걱정이 됐기 때문이었다.

‘참을 수 있다. 참을 수 있어.’

스스로를 달래며 버텨오던 나날들.

-한록이는 정말 어른스럽네.

-네가 있어서 다행이다.

든든한 아들과 멋진 오빠로. 그렇게 지내왔던 한록.

“오빠. 아빠는 언제 볼 수 있어?”

“...나중에.”

“나중에 언제?”

“아주 오래 뒤에.”

“얼마나 뒤에?”

“한서가 어른이 되고 다 크면. 그때.”

“으응....”

“한서야. 아빠가 보고싶어?”

“응. 많이 보고싶어. 오빠는 안 보고싶어?”

“나도 많이 보고싶어.”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마음은 무너지기 마련이다.

**

“한록아. 저녁 먹으러 와라.”

그날, 한록의 집 문을 두드린 임감독. 한록이 임감독의 노크에 문을 열더니 고개를 저었다.

“배 안 고파.”

그리고 한록의 답에 임감독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한록아. 너 울어?”

한록의 눈가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던 것이다.

“아니. 괜찮아. 고마워, 형.”

그렇게 문을 닫아버린 한록. 그러나 임감독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한록의 집 앞에 서 있었다.

‘...분명 운 것 같은데?’

한록은 늘 어른스럽고, 지나치게 의젓한 타입이었다. 그런 한록이 울기 직전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엄마! 포도 사온 거 줘봐! 빨리!”

결국 임감독은 다시 한록의 집 문을 두드렸다.

“야, 밥 먹기 싫으면 포도 먹어라. 맛있더라.”

“괜찮다니까.”

“아니면 햄버거 사줄까? 나갈래?”

“형. 미안해. 그냥 가.”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말하는 한록. 한록의 말에 임감독은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뭐라고 말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니, 그 어느 말로도 한록을 위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살다보면 그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순간들이 있다.

그리고 한록에겐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인게 분명했다.

“와줘서 고마워.”

“잠깐만!”

한록이 문을 닫으려 했고, 그때 임감독이 문을 붙잡고 말했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순간. 눈앞에서 울고 있는 어린 소년.

“영화 보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록을 혼자 둘 순 없었다.

**

“싫어.”

“한 번만 보자.”

“그냥 가. 나 괜찮아.”

“내가 보고 싶어서 그래. 보자! 어! 한번만 보자!”

한록에게 거의 빌다시피 하며, 한록을 자신의 방으로 데려온 임감독. 임감독은 컴퓨터로 영화를 재생했다.

“나는, 어...기분 안 좋으면 이 영화 보거든. 그럼 기분이 좀 나아져.”

임감독이 튼 영화는 <내 여자친구와 함께>. 교통사고로 여자친구를 잃은 남자 은수에게 어느날 여자친구의 유령이 찾아오고, 같이 하루를 보내는 내용이었다.

한록을 위해 선택한게 분명한 영화의 내용.

그에 대해, 한록의 생각은...

‘...집에 가고싶다.’

그저 혼자있고 싶을 뿐이었다.

임감독이 자신을 혼자 두지 못한다는 것. 위로하고 싶어한다는 것. 그래서 데려와서 영화를 보여주는 것이란 사실. 그 모든걸 알고 있었고, 그래서 임감독에게 고마웠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이런 영화를 본다고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어차피 다 지어낸 얘기니까. 이건 절대로 현실이 될 수 없으니까.

그걸 알고 있는데도, 그런데도.

[지은아.]

[응. 은수야.]

[보고싶었어.]

[나도 많이 보고싶었어.]

그런데도, 좋았다.

꿈에 그리던 여자친구를 만나게 된 남자. 남자는 여자친구와 함께 놀이공원에 가고, 밥을 먹고, 산책을 했다.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영화 속에서는 현실이 된다. 영화 속에서는 죽은 자가 살아돌아오고, 누구도 슬퍼하지 않는다. 그 사실만으로도 좋았다.

하지만 두시간 짜리 환상이 끝날 때가 다가왔다.

[은수야. 나 가야해.]

영화는 끝나고. 현실은 바뀌지 않고. 소중한 사람은 우리를 떠나고. 우리는 절대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다.

언젠가는 끝날 두 시간짜리 환상과 어떤 말로도 위로할 수 없는 순간들. 그렇다면 왜 영화를 봐야하는가. 이 아름답고 잔인한 환상이 대체 우리에게 무엇을 남기는가.

[잘 있어, 은수야.]

침대에서 잠이 든 남자와, 그 남자의 곁에 앉은 여자. 하루가 지났고, 이제 여자는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여자가 남자에게 속삭였다.

[은수야. 너무 슬퍼하지 마.]

[오늘만 지나가면 다 괜찮을 거야.]

[잊지 못하더라도, 여전히 슬프더라도, 그래도 괜찮아지는 날이 올 거야.]

끊임없이 반복되는 여자의 나레이션. 여자의 나레이션이 점차 작아졌고, 여자는 마침내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잠시 후 남자가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남자는 침대 옆의 협탁에서 종이 하나를 발견했다. 여자의 편지였다.

-언젠가는 끝날 두 시간짜리 환상.

-어떤 말로도 위로할 수 없는 순간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영화를 봐야하는가.

[언젠가는 괜찮아질 거야.]

그럼에도 우리의 삶엔 위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록아. 언젠가는 괜찮아질 거야.”

그럼에도 누군가는 우리를 위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

-언젠가는 괜찮아질 거야.

그 말을 들으니 한록은 이제 모든 게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왜 임감독이 굳이 자신을 데려왔는지. 왜 자신에게 이 영화를 보여주었는지. 이 영화로 무슨 말을 전하고 싶었는지. 왜 이 사람이 영화를 사랑하는지.

어떤 말도 통하지 않는 순간에 무엇이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지.

엔딩 크레딧이 끝날 때까지 화면을 바라보고 있던 한록이 말했다.

“형이 왜 영화를 좋아하는지 알겠어요. 고마워요, 형.”

**

그날 밤. 집으로 돌아간 한록. 한록은 자신의 방에 누워 속삭였다.

“괜찮아질 거야.”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버지가 살아서 돌아오지도, 영화처럼 단 하루 가족을 만나러 돌아오지도 않았다.

“언젠가는 괜찮아질 거야.”

그래도, 괜찮았다.

**

그리고 같은 시간. 임감독의 집.

임감독은 한록의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눈을 감았다, 떴다, 무릎을 세웠다, 내렸다, 계속 몸을 뒤척이는 임감독. 그가 결국 이불을 박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나는 왜 영화를 좋아하는가.’

영화과에 진학했지만 그 말에 대해 깊게 고민해 본 적은 없었다. 아니, 고민했지만 답을 찾지 못했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리라. 하지만 임감독은 오늘 그 답을 알아냈다.

아무 말도 통하지 않는 순간들. 그 순간을 위해. 그 순간에 처한 누군가한테 ‘괜찮다’고 말하기 위해.

-형이 왜 영화를 좋아하는지 알겠어요.

그걸 위해 나는 영화를 만든다.

*

그리고 다음날.

“한록아.”

“응.”

“나 시나리오를 썼는데.”

“응. 그런데?”

“혹시 너 영화 찍을 생각 없어?”

그 말과 함께 모든 일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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