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206화 (187/263)

나 그 약속 지키러 왔어.

“전화를 걸었는데, 성우형이, 아니, 임성우 감독님이...”

한록의 말.

“네.”

침을 삼키는 최과장.

“임성우 감독님이 아니었어요. 동명이인이라고 합니다.”

“...”

그리고...

“지금 이거 말하자고 술을 퍼먹인 거예요?!”

진노한 최과장.

“이 미친 인간이! 소주를! 4병을 먹이고! 다른 사람이었다고?! 저 집에 갑니다! 퇴사할 거예요!”

평소의 능글맞은 모습과 달리, 아주 솔직하게 한록에게 욕을 퍼붓는 최과장.

최과장이 비틀거리며 가방을 붙잡고 일어났다. 최과장은 확실히 많이 취한 것 같았다.

“그래도 전화 받으신 분이 임감독님과 아는 사이라고 근황을 전해주셨는데 말이죠. 집에 가시면 못 들으시겠네요.”

“...근황이 어떻대요?!”

“집에 가신다면서요.”

“이것만 듣고 갑니다!”

한록의 말에 최과장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한록이 웃음이 터질 뻔한 걸 참고 최과장의 잔에 물을 따라주었다. 최과장이 한록의 표정을 보더니 말했다.

“...팀장님. 지금 저 놀리고 있죠?”

“네.”

“아니라고도 안 해요?!”

“맞으니까요.”

“진짜 이런 인간인 줄 몰랐네. 빨리 얘기나 하세요, 이한록씨.”

이제 완전히 예의는 내려놓은 최과장. 덕분에 한록 역시 편하게 얘기를 시작했다.

“성우형이 드라마작가가 됐대요. 필명으로 활동하고 있어서 몰랐네요.”

“어...잘 되셨네요.”

“그렇죠.”

“무슨 작품을 쓰시는데요? 우리도 아는 건가?”

“네. <공주와 기사>요. 필명은 오지한이라고 하네요.”

“<공주와 기사>랑 오지한 작가면...”

최과장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한록을 바라보았다. 술로 가물가물한 와중에도 떠오르는 오지한 작가라는 이름.

시청률 15%. 검색어 1위. 쓰는 드라마마다 히트를 치는, 엄청난...

“그 막장 드라마 작가요?”

막장 드라마의 작가였다.

“그...사돈이랑 불륜하는 그 드라마요?”

“네.”

“...팀장님. 그런 스토리 좋아하셨어요? 팀장님이 리메이크 하고 싶다는 그 영화. 그것도 이런 내용이에요?”

“아니에요.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은 전혀 다른 내용입니다. 좋은 영화예요.”

“그런데 그 분은 갑자기 왜 그런 걸 쓰신대요?”

한록 역시 가졌던 의문이었다. 그리고 ‘오지한’이라는 이름으로 검색을 해보다가 알게 된 내용.

-작가님이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는 무엇인가요?

-시청률이요.

“돈 때문이죠.”

바로 세상 모든 질문의 답이었다.

임감독이 대학 졸업반이 되었을 때. 사업실패로 거의 야반도주를 해야 했던 임감독의 집.

그리고 지금 임감독이 받고 있을 수억의 원고료.

-한록아. 나는 말이야. 누군가를 위로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그렇게 말하던 사람이 순식간에 변할만한 이유는 역시, 언제나 돈 때문이었다.

-형. 우리 이 영화 다시 만들어보자.

한록은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임감독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어쩌면, 한록이 알던 사람과는 많이 달라져 있을 수도 있는 임감독.

“...그래서 어떻게 하실 거예요. 연락해 보실 거예요?”

한록의 마음을 눈치챈 최과장이 물었다. 한록은 한동안 답이 없었다. 긴 침묵 후 한록이 최과장에게 물잔을 내밀며 말했다.

“일단 물 좀 드세요. 술 깨셔야죠.”

“...네.”

아무래도 진지한 얘기를 하려는 것 같은 한록의 태도. 그 모습에 최과장이 물잔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물을 꿀꺽꿀꺽 마시더니 말했다.

“...술이잖아!”

그 말이 그날 최과장이 한 마지막 말이었다.

**

그리고 다음날. CK ENM.

“팀장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유선씨.”

한록은 소주 4병을 마시고도 완벽한 모습으로 회사에 출근을 했다. 하지만 최과장의 자리는 비어있었다. 한록이 물잔에 속아 반쯤 기절한 최과장을 집에 데려다준 게 새벽 3시였으니 그럴만도 했다.

“오늘 최과장님 출장이십니다. 아마 모레까지요. 알아두세요.”

“네? 아...네!”

최과장의 연차를 위해 적당히 거짓말을 해둔 한록. 그러나, 한록의 예상은 이번에도 틀려버렸다.

“저 안 죽었습니다.”

점심이 지나자 최과장이 한록의 사무실을 찾아온 것이었다.

“그래서. 막장 드라마 작가이신 임감독님한테 어떻게 하실 겁니까.”

어제 대화 중 기절했던 것 치고는 둘의 대화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최과장.

“필름 안 끊기셨군요. 취한 척만 하셨어요.”

“척이라뇨? 죽을 뻔 했던 건 맞아요.”

아무래도 최과장 역시 한록에게 약간의 속임수를 썼던 모양이었다.

최과장의 발칙한 트릭에 한록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 계획에 조금 어긋났지만, 애초에 최과장에게라면 할 수 있는 얘기였기 때문이었다.

“임감독님이랑 영화를 만들었던게 10년도 더 전이라고 했죠? 그러면 많이 변하셨을 거예요. 팀장님을 기억 못하실 수도 있고요, 연락을 귀찮아하실 수도 있어요. 팀장님은 반겨도, 그 망했다는 영화 얘기는 싫어하실 수도 있고요. 막장이니 뭐니 해도 지금 잘나가는 드라마 작가니까.”

최과장의 말에 한록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록 역시 생각하던 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럼에도.

“그래도 연락하셔야 해요. 안 그러면 후회할 겁니다.”

그래도 임감독을 만나야했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한록의 말에 최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몰라도, 두려워도, 그래도 물러서지 않는 한록의 모습. 최과장은 한록의 답을 이미 예상한 듯 했다.

용건이 끝난 모양인지 최과장이 한록의 사무실을 나서며 말했다.

“제가 이래서 팀장님을 좋아하지. 어제 일은 봐드릴게요.”

그 말에 한록 역시 웃으며 답했다.

“네. 저도요.”

**

최과장이 떠난 후, 혼자 남은 한록.

한록은 <공주와 기사>의 영상을 보고 있었다.

서로에게 소리를 지르는 등장인물들. 말도 안 되는 전개와 대사. 시청자게시판을 꼬박 채운 악평까지.

그 드라마에서, 임감독의 예전 모습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성우형.’

한록은 임감독과의 과거를 떠올렸다.

15년 전. 그러니까, 한록이 15살이고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얼마 안 되던 시절.

한록과 어머니, 그리고 한서는 갑자기 기운 가세에 반지하방으로 이사를 갔다. 그리고 임감독은...

-한록아. 저녁 먹고 가라.

그 주인집의 아들이었다.

임감독은 한록과 7살 차이의 대학생으로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방학 때마다 강원도로 내려오던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첫 어린이날. 한서에게 아버지의 빈자리를 느끼게 하고싶지 않아 인형을 선물했던 한록. 임감독은 그런 한록의 모습에 마음이 아픈듯한 얼굴이었다.

-너 임마. 어린 녀석이...

-앞으로 네 어린이날 선물은 내가 챙겨줄게.

그리고는 한록의 손을 잡고 함께 영화관에 갔던 임감독.

그렇게 임감독은 한록의 아버지, 그리고 형이 되어주었고, 한록은 영화감독을 꿈꾸던 임감독을 따라서 영화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고...

-형.

-응.

-저도 사람들한테 저런 영화를 보여주고 싶어요.

임감독과 함께 봤던 어떤 영화 때문에 한록은 이 길을 걷게 되었다.

‘...옛날 얘기지.’

회상에 잠겨있던 한록은 추억에서 깨어나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오지한 작가님 번호입니다. 010-XXXX-XXXX]

한록이 송PD를 통해 알아낸 임감독의 번호. 이 번호의 주인이 이제는 어떤 사람이 되었을지 두려웠다.

자신과의 기억을 모두 잊었을지도 모른다. 같이 만들자던 영화도. 꿈도. 모두 잊어버렸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다시 만나야했다.

둘은 약속을 했으니까.

‘걸어야 해.’

그렇게 다짐한 한록이 핸드폰을 들었을 때. 한록의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010-XXXX-XXXX]

그리고 화면에 떠오른 낯익은 번호.

한록이 전화를 받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CK ENM 이한록 팀장님 맞으십니까?]

“...네. 맞습니다. 누구십니까?”

그리고 상대가 말했다.

[한록아.]

[나야. 성우형.]

**

[송PD가 네 번호 알려줬어. 날 찾고 있다며? 반갑다, 임마. 어떻게 지내? 결혼은 했어? 애는? 아, 아직 그 나이가 아닌가? 아. 어머님은 어떻게 지내셔? 한서는?]

임감독은 한록이 입을 열 사이도 없이 질문을 쏟아냈다. 그러나 임감독의 질문은 전화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끊겨버렸다.

[어...아. 네. 네. 지금 얘기해요. 한록아. 미안하다. 지금 좀 바빠서.]

옆 사람과 얘기를 하는 듯 하더니 한록에게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임감독.

“...그럼 잠시 후에 다시 전화 할까요?”

[아니, 음. 저녁까진 시간이 없을 것 같은데...잠시만요. 통화 잠깐만 할게요.]

한록에게 대답하는 와중에도 임감독의 곁에선 끊임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정말로 바쁜 듯한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임감독과 더 통화를 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아이고, 미안해라, 미안해. 지금 너무 바쁘다. 오늘은 9시까지 계속 미팅이라.]

“그럼 그때 다시-”

그렇게 한록이 아쉬움을 뒤로 하고 입을 열었을 때.

임감독이 말했다.

[혹시 오늘 저녁에 볼 수 있으려나?]

**

“네, 그때 뵙겠습니다.”

[그래! 한록아. 근데 너 말투가 너무 무서워. 어디 사장님인줄 알았어!]

“...그때 보자, 형.”

[그래, 이제야 한록이 같네. 그러자!]

그렇게 오늘 당장 임감독과 만나게 된 한록.

한록은 통화가 끊어진 핸드폰을 보고 생각했다.

한록에게 형이 되어준 사람. 한록에게 꿈을 주고, 희망을 준 사람. 같은 꿈을 함께 꿨던 사람.

‘형은 과연 어떤 사람이 되어있을까?’

설레고, 동시에...

‘내가 알던 형 그대로일까?’

두려웠다.

**

그날 저녁. 한록은 임감독과의 약속 장소인 압구정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얼마나 변했을까.’

‘어떤 얘기를 할까.’

‘혹시 얼굴을 못 알아보면 어떡하나.’

마치 소개팅을 하는 것처럼 떨리는 마음. 그러나 레스토랑의 문을 열고 들어온 한 남자를 보았을 때, 그 걱정은 모두 사라졌다.

“한록아!”

임감독이 예전의 다정한 얼굴 그대로 미소를 지어주었으니까.

**

“야, 이게 몇 년 만이야! 너 얼굴 그대로다. 여전히 잘생겼네!”

“형도 그대로다.”

“아직도 20대 같다는 뜻이지?”

“그럼.”

“이 녀석 사회생활도 할 줄 알고. 진짜 어른 다 됐네!”

기특한 듯 한록을 바라보는 임감독의 눈빛. 임감독이 정말 기쁜듯한 얼굴로 말했다.

“너 CK 팀장 됐다며? 송PD가 너 엄청 잘 나간다고 하더라. 야, 역시 이한록이야. 잘 됐다니 좋다.”

“나도 형 얘기 많이 들었어. 유명해졌더라.”

“어, 그치? 나 완전 잘 나가. 이래봬도 대단한 작가님이라고. 내가 오지한이다, 오지한! 아, 목소리 너무 컸나? 알아보면 귀찮아지는데.”

신이나서 말하다가, 사람들에게 들렸을까봐 다시 소곤거리는 임감독. 임감독은 예전의 다정하고 쾌활한 모습 그대로였다.

“아무튼 야, 정말 보고 싶었다. 연락 줘서 고마워.”

임감독은 절대 거짓말을 하는 듯한 얼굴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록은 임감독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수 없었다.

사업이 망한 후 이사를 가야했던 임감독의 가족. 한록은 이사 이후에도 계속 임감독과 연락하기 위해 노력했다.

“형. 나 번호 옛날 그대로야. 형이 연락할까봐 안 바꿨어.”

“...응. 그랬구나.”

“그런데 형은 번호 바꿨더라.”

하지만 임감독은 말도 없이 한록과의 연락을 끊어버렸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반갑다는 듯 한록의 앞에 나타났다.

“왜 연락 안 했어, 형.”

“...”

한록의 말에 임감독은 한참 답이 없었다.

임감독이 테이블에 놓인 물을 마셨다. 그리고 드디어 입을 열었다.

“미안해, 한록아. 사정이 있었어.”

“...응.”

그 말에 한록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임감독의 말에 많은 상처가 숨어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한록 역시 아픈 시절이 있었고, 임감독에게 그런 기억을 떠올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연락 닿아서 다행이네. 나와 줘서 고마워.”

“내가 고맙지. 요만했던 녀석이 이렇게 다 커서 날 찾아주고.”

“무슨 할아버지처럼 얘기하네.”

“내가 할아버지는 못 돼도, 이한록 삼촌 정도는 되지 않아? 너 코흘리개 시절에 먹이고, 재우고, 입힌 사람이 누군데. 바로 나 임성우다!”

“나 그때 중학생이었어. 그리고 형 영화 본다고 밥 거를 때 챙겨먹이던 사람은 나였어.”

“...그랬나?”

“영화 본다고 내일 알바 안 간다고 할 때 이제 그만 자라고 한 사람도 나였고.”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늦잠자서 목도리도 못 챙겨갈 때 가져다 준 것도 나였고.”

“...그래. 니가 나 키웠다.”

한록의 말에 임감독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이제 마흔이 가까워지는 나이지만 친근하고, 다정하고, 동시에 어수룩한 모습은 여전히 그때의 임감독 같았다.

“그래도...나도...쪼끔은 형 노릇 하지 않았나?”

“했지. 형이 우리 어머니 대신 입시 상담도 와줬잖아.”

“어어. 강원중학교 전교 1등 이한록씨. 선생님이 네 칭찬 엄청 하셨지. 덕분에 형 어깨 좀 올라갔다.”

그렇게 한록과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임감독. 술이 한 잔 두 잔 넘어갈수록 과거의 얘기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너 <인생은 아름다워> 보고 울었던 거 기억하냐? 그땐 진짜 코흘리개였어.”

“형은 우느라 눈도 못 떴잖아.”

“...응...”

영화 얘기.

“형. 그때 여자친구한테는 차인 거 맞지?”

“...내가 찬 거라니까!”

“그거 거짓말이잖아.”

“그래, 맞아. 그만 물어봐!”

좋아했던 여학생에 대한 이야기.

“거기, 영화관 앞에 돈까스집이 진짜 맛있었는데. 아직도 생각 나.”

“형. 거기 아직 있어. 다음에 같이 가자.”

“진짜?! 아직도?!”

함께 먹었던 음식에 대한 얘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던 어린 시절. 그때 임감독과 함께한, 임감독이 만들어줬던 소중한 기억들. 그때의 얘기를 하니 가슴이 따뜻하게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술보다는 과거에 취하는 시간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묻을 수 없게 된 질문.

“형.”

한록이 임감독에게 물었다.

“...우리 영화 기억하지.”

한록과 임감독이 만든 영화.

-이걸 영화라고 만든 건가요?

그리고 서로에게 상처로만 남은 영화.

“...응.”

어렵게 꺼낸 화제임에도 임감독은 미소를 지으며 답해주었다.

“우리 그거 다시 만들기로 했잖아.”

“응. 그랬었지.”

예전 모습 그대로.

“나 그래서 열심히 했어.”

“그랬구나.”

다정한 목소리. 다정한 말투.

“잘했어, 한록아.”

아주 다정한 눈빛의 임감독.

그 눈빛에 한록이 마저 얘기를 꺼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나 그 약속 지키러 왔어. 우리 영화 다시 만들자.”

이제 약속이 이뤄질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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