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죽는지, 사는지, 제 눈으로 지켜보고 싶거든요.
최대리가 내민 것은 유니버설 스튜디오와의 쿼터 계약 서류.
다시 말해, 유니버설 스튜디오 측에서 UP씨어터의 모든 상영관에 일정 비율로 CK의 영화를 걸어주겠다는 계약서였다.
“수수료 40%. 해외 배급사 말고, 미국 국내 배급사 기준으로 받아왔어요.”
거기에 파격적인 조건까지. 아마 최대리가 온갖 방법으로 마가렛을 설득했을 게 분명했다.
‘고생 많았겠네.’
안 봐도 뻔한 장면에 한록이 진심으로 말했다.
“대리님. 정말 잘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LA씨어터 일은 신경 쓰지 마세요.”
“...”
그 말에 들켰다는 표정을 짓는 최대리.
‘역시.’
역시나, 한록의 생각대로였다.
유니버설 스튜디오와의 일이 자기 탓이라고 말하며 계속 야근을 하던 최대리. 최대리는 한록이 몇 번이나 아니라고 말해도 여전히 이 일이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것이었다.
“제가 계속 신경쓸까봐 마가렛한테 연락해보라고 하신거죠? 어쩐지 너무 쉽게 알았다고 하시더라.”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실제로 결과물도 나왔고요.”
그래서 한록은 최대리를 위해 기회를 줬고, 최대리는 그 보답으로 기대 이상의 결과를 가져와 주었다.
마치 한록의 손바닥에서 놀아난 듯한 기분에 최대리가 못 당하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한록에게 물었다.
“그래서 어떤가요. 실수를 만회할 만큼의 결과였나요?”
“네. 앞으로 열 번 정도 더 실수해도 만회할 수 있는 결과네요.”
최대리의 귀여운 말에 한록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이런 일 신경 쓰지 마세요.”
그리고 그 말에 최대리가 한록을 빤히 바라보았다.
몇 번이나 자신을 위로해주는 말. 최대리는 그 말에 결코 동의하지 않았다. 여전히, 이 모든 일이 자신의 실수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래도...
“고마워요, 팀장님.”
저 말에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
그렇게, 영화관 프로젝트에 적극적으로 합류하기로 한 유니버설 스튜디오.
<...유니버설 스튜디오가 합류하겠다고요? 순위를 바꿔달란 뜻 아닌가요?>
[아뇨. 그런 일이 통하지 않을 거란 것 정도는 그 쪽도 알고 있습니다. 대신 관객들 앞에서 반성하는 모습을 보일 기회를 달라네요.]
<그 정도는 받아들일 수 있죠. 우리 조합의 파워를 증명하는 일이기도 하니까.>
다행히, 가장 크게 반발하리라고 예상했던 뉴욕협동조합 역시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합류에 동의의 의사를 밝혀왔다.
그렇게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합류가 결정되자, 영화관 프로젝트 역시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첫 주에 UP씨어터 뉴욕에서 서감독님의 GV를 진행하고 싶습니다. 자리를 만들어주세요.]
뉴욕의 최대 영화관인 UP씨어터 뉴욕. 그 곳에서 서감독의 GV일정을 잡은 한록. 무료 상영 때문에 사람들이 잔뜩 몰려들 때 최대한 서감독이란 사람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최악의 영화관을 발표하겠습니다. 유니버설 스튜디오측이 여기에 직접 참석해 수상소감을 밝히는 게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유니버설 스튜디오에게도 이미지 쇄신의 기회이기도 했다.
<네. 최대한 큰 관으로 배정하겠습니다.>
각자의 목표를 가지고 GV를 준비하는 CK와 유니버설 스튜디오.
‘유니버설 스튜디오와 CK가 손을 잡았다’는 얘기는 순식간에 헐리웃 전체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요한. 들었어요? 이번에 CK가 유니버설 스튜디오랑 일한다고 해요.]
[유니버설 스튜디오가 아니라 넷플릭스겠지.]
[아니에요. 유니버설 스튜디오 맞아요.]
[...유니버설 스튜디오랑, 넷플릭스랑, 스튜디오 B랑, AM씨어터가 함께한다고?]
[네.]
[CK는 대체 어떻게 그런 곳들이랑 계약을 하는 거야?]
“유니버설 스튜디오가 머리를 잘 썼군. GV에서 자기들이 잘못했다고 인정하겠네. 이미 사람들은 CK편인데, 그 쪽이 훨씬 낫지.”
“머리를 잘 쓴 건 CK지. 난 이대로 CK에서 해외팀 사라질 줄 알았어.”
“그건 나도 그래.”
“그런데 넷플릭스랑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데려왔다라. 대단한 놈들이야.”
CK. 헐리웃에서는 아무도 알지 못하던 이름이다. 그런데 이제 모든 사람들이 CK와 <수면>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로베타. CK 얘기 들었어요? 우리 영화 개봉 시기가 <수면>과 겹치지 않나요?]
[어...네. 맞아요. 3일 정도 겹치네요.]
[개봉을 미루는 게 낫겟어요. <수면> 무료 상영 때문에 아무도 우리 영화를 보지 않을 거예요.]
배급사.
[<수면> 감독말이야. 저번 영화도 꽤 좋았어.]
[한 번 같이 작업하자고 연락해볼까?]
[...한국감독이랑?]
[왜,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좋아. 연락해보지.]
제작사.
[다음 주에 어디로 갈 거야?]
[당연히 뉴욕 씨어터지. <수면> GV 찍으러 갈 거야.]
[젠장. 내가 가려 했는데.]
기자들.
[<수면>이 드디어 개봉하는군.]
[그게 뭔데?]
[저번에 타임지에서 선정한 올해의 영화야.]
[오, 드디어!]
관객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
[한국 영화 <수면>, LA씨어터에서 상영시작.]
<수면>의 미국 상영이 시작되었다.
*
“아, 지금 당장 LA로 날아가고 싶네.”
뉴욕의 한 카페에서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던 현차장. 현차장이 <수면>에 대한 기사를 보며 중얼거렸고, 그 옆에서 유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LA 씨어터에서 첫 미국 상영을 시작한 <수면>. 그러나 당장 며칠 후에 유니버설 스튜디오와 함께하는 서감독의 GV가 잡혀있었다.
“최대리 혼자 LA에서 괜찮을까?”
“차장님. 최과장님이요.”
“아, 그렇지.”
해외팀이 미국으로 출장을 오기 전 정식 승진 공고가 있었고, 최대리는 이제 최대리가 아닌 최과장이 되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과장이 된 지 며칠도 지나지 않아 최과장은 혼자 LA로 출장을 나가게 되었다. 사실상 최과장이 혼자 LA에서 <수면>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었다.
“문제가 있으면 최과장님이 말씀해주실 겁니다. 저희는 일단 GV에 집중합시다.”
팀원들을 달래보지만, 한록 역시 상황이 궁금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한록은 유니버설 스튜디오와의 일정을 조율하며 계속 핸드폰을 확인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수면>의 미국 최초 개봉이 있기 한 시간 전.
[팀장님.]
최과장으로부터 메시지가 하나 도착했다.
[대성공^^]
LA씨어터 앞에 끝도 없이 줄을 선 관객들의 사진이었다.
*
[한국 영화 <수면>의 미국 상영이 시작되었다.]
[<수면>은 타임지 올해의 영화에 선정되었던 영화로, 최근 CK ENM은 유니버설 스튜디오 가 <수면>의 상영을 거절한 것에 대해 영화관 프로젝트를 진행한 바가 있다.]
[<수면>은 현재 LA씨어터에서 상영중인 외국 영화들 중 최고의 성적을 거두고 있다.]
<나 오늘 ‘수면’을 보고 왔어. XD>
<유니버설 스튜디오는 왜 이 영화를 거절한 거야?>
<이런. LA씨어터에는 앞자리 밖에 안 남았네.>
<다른 곳으로 가. 내일부터는 UP씨어터에서 무료로 상영한대.>
<수면>이 개봉하고 하루쯤 지나자, 인터넷에서 꽤 반응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수면>은 언론, 관객 할 것 없이 큰 호평을 받고 있었다.
[팀장님. LA 씨어터쪽에서 월말 상영작으로 선정될 수도 있다고 얘기했어요. 이주 정도 지나면 연락 주겠다고 합니다.]
거기에 LA씨어터의 긍정적인 반응까지. 이 정도면 역대 한국 영화 중에서는 최고의 성적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최과장은 그걸 위해 바로 LA에서 뉴욕으로 오는 것을 결정했다.
잠시도 쉬지 않는 스케쥴에 걱정스럽게 묻는 한록.
[저는 지금 공항이에요. 바로 뉴욕으로 갈게요.]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닙니까?”
[해야죠. 빅이벤트가 남아있는데.]
하지만, 최대리가 이렇게 나오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수면>의 가장 중요한 이벤트가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이틀 뒤. 뉴욕 최대의 영화관에서 진행되는 서감독의 GV.
땅에 떨어진 기업 이미지를 회복하기 위해. 그리고 서감독이란 사람을 미국에 각인시키기 위해 유니버설 스튜디오와 CK는 작은 이벤트를 마련했다.
이미 사람들의 관심은 충분했고, 이 GV에서 유니버설 스튜디오와 서감독이 어떤 태도를 보야주는지에 따라 앞으로 <수면>과 CK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었다.
-과연 CK, 그리고 <수면>이 미국 영화계에 자신을 각인시킬 수 있을 것인가.
-혹은 대부분의 영화가 그렇듯 잠깐 빛나고 사라질 것인가.
헐리웃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질문.
[피곤해도 어쩔 수 없죠. 우리가 죽는지, 사는지, 제 눈으로 지켜봐야하지 않겠어요.]
그 질문의 결과가 이제 이틀 후면 공개된다.
*
그리고 이틀 후. <수면>의 무료상영 1일차이자, GV당일.
<문제가 생겼습니다.>
GV를 주관하는 UP씨어터 뉴욕으로부터 급하게 연락이 도착했다.
[무슨 일입니까?]
UP씨어터의 연락에 한록이 다급하게 물었다. 지금 시간은 오후 2시. GV가 열리는 시간은 저녁 8시로, 아직 시간은 한참이나 남아있었다. 그런데 UP씨어터에서 연락이 온 이유는, 바로...
[사람이 너무 많이 몰렸어요. 이미 선착순 입장이 종료되었습니다.]
GV의 성공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
UP씨어터의 연락을 받고 바로 극장으로 향한 해외팀. 그곳에는 UP씨어터의 말처럼 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젠장. 이게 전부 ‘수면’을 보러 온 사람들이야?>
<들어갈 수 있긴 한 건가?>
<내일 오자.>
<내일이면 더 많이 몰릴 거야.>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수면>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팀장님. 트위터에 인증사진이 올라오고 있어요.”
한록에게 핸드폰을 보여주는 최과장. 최과장의 말처럼, 사람들은 지금 이 장소에 모인 사람들을 사진으로 찍어 인터넷에 올리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미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영화가 된 <수면>.
남은 것은, <수면>에 대해 쏟아지는 이 관심들을 한국영화와 서감독, 그리고 서감독의 신작에게로 이어가는 것 뿐이었다.
성공에 대한 기쁨보다는 비장한 분위기가 감도는 해외팀.
지금까지 유니버설 스튜디오와 싸워오며 해 온 모든 일의 결과가 앞으로 반나절이면 공개되기 때문이었다.
“준비는 완벽해요. 이제 GV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한록이 말했을때, 누군가에게서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누구지?’
전혀 모르는 번호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이토록 급한 상황에서 걸려온 전화. 평소라면 당연히 무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핸드폰을 바라보던 한록은 저도 모르게 통화버튼을 눌렀다.
이 전화가 아주 중요한 전화라는 알 수 없는 직감이 든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한.>
[누구십니까?]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아주 낯설었다. 한록이 생전 처음으로 들어보는 목소리. 그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스튜디오 B의 닉 해리스입니다.>
한록의 우상, 닉해리스.
그가 아주 중요한 용건을 가져온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