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밥값 했습니다.
서감독과 함께 회의실로 들어간 한록. 한록이 바로 얘기를 시작했다.
“유니버설이 사과를 했어요. <수면>은 모든 영화관에서 상영될 겁니다.”
“그래서요.”
“관객들을 평가할 이유가 없어졌다는 뜻입니다.”
‘관객들을 평가하는 마케팅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라고 말했던 서감독. 그러나 한록의 말을 들은 서감독은...
‘이제 와서?’
큰 감흥이 없었다,
‘닉 해리스가 제안한 마케팅이라고 들었는데. CK가 왜 이걸 취소한 거지?’
이 마케팅과 관련해 CK 내부에서 오간 얘기들과, 한록의 고민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는 서감독.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오해가 생겨났다.
‘나 때문이군. 내 비위를 맞춰주려고.’
서감독은 한국 영화계에서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고, 대부분의 영화사들은 서감독과 좋은 관계를 만들고 싶어했다. 서감독은 한록도 자신과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싶은 것이리라 짐작한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서감독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 말했다.
“마케팅은 팀장님 영역이죠. 저 때문에 마케팅을 바꿀 필요는 없다고 말했을 텐데요.”
“감독님 때문에 바꾼 게 아닙니다. 이건 다른 회사에서 제안한 마케팅이고, 저도 이 마케팅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계속 말씀드립니다. 저는 팀장님 마케팅에 간섭할 생각 없습니다. 이 일이 앞으로 CK와의 업무에 영향을 끼치지도 않을 겁니다. 그리고...”
서감독이 한록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러신다고 해서 팀장님에 대한 생각이 바뀌지도 않습니다.”
단호하고, 차가운 목소리였다.
‘이미 늦었다’는 서감독의 말. 그러나 한록은 그 말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답했다.
“그런 건 바라지도 않습니다.”
서감독이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아니, 애초에 그런 건 신경도 쓰지 않았다는 듯한 한록의 답. 미처 생각하지 못한 답에 이번엔 서감독이 질문을 던졌다.
“그럼 왜 결정을 바꾸신 겁니까.”
“저도 계속 말씀드렸습니다. 애초에 원하지 않은 마케팅이라고요. 이제 다른 방법이 생겼을 뿐입니다.”
“팀장님은 마케팅을 하는 분 아닙니까. 어떤 식으로든 영화가 유명해지는 걸 바라실 텐데요.”
너무나 당연한 서감독의 질문. 그 질문에 한록이 약간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서감독에게 물었다.
“감독님. 저랑 대화를 하는게 싫으신가보군요.”
“네. 맞습니다.”
“그럼 여기까지만 설명드리겠습니다. 감독님. 감독님은 영화를 만드는 것에 프라이드를 가지고 계시죠.”
“네.”
“그럼 왜 다른 사람도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은 못하십니까.”
“그게 무슨 말입니까.”
“감독님처럼 저도 마케터로서 해야할 일을 했을 뿐이란 말입니다. 감독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좋은 마케팅을 하고 싶어서요.”
한록이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서감독에게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저도 제 일에 프라이드가 있거든요.”
*
한록이 문을 열어주었으나, 서감독은 회의실을 나가지 않았다. 서감독은 방금 전 한록이 한 말을 곱씹고 있었다.
배우. 감독. 스탭. 심지어 제작부도 아닌 너무나 평번한 회사원, 한록.
그런 사람이 천재라 불리는 영화감독 앞에서 ‘나도 당신만큼이나 내 일에 프라이드가 있다’라고 말한다.
‘거짓말이다.’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한다고 저런 말을 하냐.’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그 모습이. 그런 말을 하는 눈앞의 이 남자가...
“네. 제가 오해를 했습니다.”
아주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
한록과의 대화 후, 신작에 대한 논의를 위해 제작부로 향한 서감독.
“저희 측 의견은 변함 없습니다. 조금만 더 대중성을 고려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여전히 조율이 되지 않는 제작부서와의 의견차이. 그때 제작부서가 서류를 가져오기 위해 자리를 비웠고, 혼자 남은 서감독은 이전에 한록이 했던 얘기를 떠올렸다.
‘제작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이 있어서요. 혹시 문제가 생기면 연락주셔도 됩니다.’
그리고, 오늘 한록이 했던 그 말.
‘저도 제 일에 프라이드가 있거든요.’
그 말을 떠올린 서감독이 핸드폰을 꺼냈고, 한록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서감독과의 대화 후, 해외팀 회의에 참가한 한록.
회의가 한참일때 한록의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인은 서감독이었다.
[팀장님. 신작에 대해 얘기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됐다.’
헐리웃이 한국이라는 나라를 만만치 않은 적수로 인식하고 있는 이때. 서감독의 영화를 다시 한 번 헐리웃에 선보일 기회가 생겼다.
‘<수면>보다 몇 배는 더 유명해질 거다.’
그것도 서감독이 가장 애착을 가진, 그러나 회귀 전에는 제대로 된 빛을 보지 못한 그 영화
[네. 언제든지 가능합니다.]
서감독의 문자를 받은 한록이 미소를 지었고, 곧장 답장을 보냈다.
*
“죄송합니다. 회의 다시 시작하죠.”
서감독과의 문자 이후, 다시 회의에 복귀한 한록. 사실 당장이라도 서감독과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이번 회의에서는 아주 중요한 얘기가 오가고 있었다.
“유니버설의 담당자가 바뀌었다고요?”
“네. 앞으로 존 말고 마가렛 셀버리가 연락준다고 하네요. 유니버설 전체 마케팅 담당자고, 광고 공개 때문에 조율하고 싶은 내용이 있다고 합니다. 그쪽에서 먼저 연락와서 전화통화 완료했습니다.”
“뭐라고 하나요?”
“일단 이번 일은 미안하게 됐대요. 앞으로는 이런 일 없을거라고 했고...곧 공개될 최악의 영화관 광고에 자기들 수상소감을 넣을 수 없냐고 물었어요. 지금 이미지가 너무 안 좋아서 이걸 만회할 기회가 필요하대요.”
담당자를 더 높은 사람으로 바꾸고, 사과를 해온다. 그리고 협조에 대한 요청까지. 사실상 유니버설이 더 이상 CK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송과장이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유, 절대 안 되지. 우리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치를 떨며 말하는 송과장과 그에 고개를 끄덕이는 하대리. 그러나 한록의 의견은 달랐다.
“아뇨, 그렇게 합시다.”
“왜?”
“유니버설이 영화관 프로젝트에 크게 반응할수록 좋습니다. 헐리웃에서 CK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거니까요.”
‘CK를 건드리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교훈을 얻게 된 유니버설과, 그런 유니버설이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자체가 CK의 승리를 보여주는것이라는 한록의 말. 그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수면>도 잘 끝나가니, 유니버설이랑도 좋게 끝내는 걸로 갑시다.”
“네, 알겠습니다.”
“그래. 유니버설이랑 싸워봤자 우리가 손해라니까.”
한록의 말에 동조하는 사람들. 그 중에서도 특히 한록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마가렛'이라는 이름이 나올때부터 한참이나 말이 없던 사람. 바로 최대리였다.
“팀장님. 유니버설이랑 좋게 끝내자는 말, 진심이시죠?”
“네. 왜 그러십니까?”
“그러면 좋은 생각이 하나 있어요.”
한록의 말에 최대리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우리 이제 유니버설이랑 협력해보면 어떨까요?”
*
“아예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라고 제안해 보는 거예요. 발표가 끝나고 점점 개선되는 모습을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보여준다거나. 아니면, 아예 본인들이 거절했던 영화들을 찾아가서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거나 하는 식으로요. 그냥 수상소감을 발표하는 것보다 훨씬 이미지가 좋아지겠죠.”
회사끼리 의견을 조율하는 걸 넘어서서, 유니버설을 본격적인 파트너로 삼아보자는 최대리의 말.
땅에 떨어진 이미지를 회복해야하는 유니버설과, 유니버설을 통해 다시 한 번 미국 영화계에서 이름을 알릴 수 있게 될 CK.
최대리의 제안은 꽤 합리적이었으나...
“...유니버설이 싫다고 하지 않을까?”
세상일은 결코 합리적으로 돌아가지 않는 법이었다.
'바로 어제까지 서로를 죽여버리겠다고 덤비던 회사끼리 손을 잡는다'라는 말에 회의적으로 묻는 현차장. 현차장의 말처럼, 이제와서 유니버설과 손을 잡자는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시도는 해봐야죠. 마가렛이 유니버설에서 꽤 영향력있는 사람이라고 들었거든요. 그리고 상당히 합리적이래요.”
하지만 최대리는 아주 의욕적이었다.
“어때요, 팀장님?”
최대리가 한록에게 물었고, 잠시 생각하던 한록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시도를 해보는 건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최대리님이 한번 연락해보시겠습니까.”
“그럼요.”
모두가 의심스러워 하는 와중 떨어진 한록의 허락. 한록의 말에 최대리가 웃으며 답했다. 씩씩한. 그리고...
“밥값 한 번 제대로 해보겠습니다.”
어딘가 의지가 느껴지는 말이었다.
*
그리고 얼마 후. 최대리가 한록의 사무실에 찾아와 말했다.
“팀장님. 마가렛이 우리랑 일하고 싶대요.”
*
“...벌써 얘기가 끝난 겁니까?”
“쉽지 않았죠.”
장난스레 웃으며 한록의 앞에 앉은 최대리. 최대리가 마가렛과의 통화 내용을 전달해주었다.
“협력하자는 말에 상당히 관심을 보였어요. 그래서 광고는 그대로 진행하고, 대신 유니버설이 그걸 인정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나을 거다. 그럼 우리도 그 점을 부각하겠다고 말했고요. 그것도 알았다고 하네요. 그래서 각자 위에 보고하고 다시 연락하기로 했습니다.”
광고는 그대로 유지하는 선에서, 유니버설과의 완벽한 합의를 받아온 최대리. 최대리가 얘기하는 내내 한록은 감탄하는 시선으로 최대리를 바라보았다. 최대리는 위기관리가 필요한 유니버설의 니즈를 정확히 파악했고, 그걸 파고든 것이다.
‘역시. 대단하다.’
최대리에 대한 감탄. 그리고-
‘대리님이 이 정도로 만들어왔다면, 조금 더 해볼 수 있겠다.’
악독한 생각을 하며 씩 미소를 짓는 한록. 설명을 하느라 한록의 표정을 놓친 최대리가 당연하다는 듯 물었다.
“이대로 진행하면 되죠?”
그리고 이 완벽한 합의에 대한 한록의 대답은...
“아뇨.”
“네...네?”
거절이었다.
“우리가 당한 게 얼만데 여기서 끝을 냅니까.”
한록이 아까 회의 중 송과장이 했던 말을 따라 했다. 사람들을 말리긴 했지만, 한록 역시 유니버설에게 앙금이 남은 상황.
유니버설이 지금 협력을 원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걸 쉽게 내어줄 생각은 없었다.
“지금 우리는 미국에 영화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일이 생긴 거고요. AM씨어터랑 쿼터 계약을 논의 중인데, 수수료를 너무 비싸게 부르고 있어요.”
“그러니까...유니버설한테서 쿼터 계약을 해주겠다는 답을 받아오란 말씀이시죠?”
“네.”
“우리한테서 영화관을 다 뺏어간 회사한테서, 영화관을 내어주겠다는 답을 가져오라?”
“네.”
“그게 가능할 거라 생각하세요?”
“네. 대리님이시잖아요.”
“하...팀장님 무서운 사람이란거 내가 잊고 있었네.”
한록의 말에 최대리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세 시간만 더 기다리세요.”
그리고 정확히 세 시간 후.
“저 밥값 했습니다.”
최대리가 서류를 하나 내밀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