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199화 (180/263)

네. 협박 맞습니다.

[우리는 세 번째 광고를 준비중입니다. 오늘 12시에 공개할테니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한록의 용건은 간단했다. 바로 ‘아직 끝이 아니다’라는 선전포고.

[사과할 의향이 있다면 연락하세요.]

그리고 이 일을 적당히 끝낼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었다.

[용건이 있다면 상영중단을 결정한 사람 말고, 그 상급자가 전화주시기 바랍니다. 끊겠습니다.]

<잠깐만->

조셉이 외쳤지만, 한록에게서 대답은 없었다.

<...끊어졌어.>

한록이 벌써 전화를 끊어버린 것이었다.

*

그리고 시간이 조금 흘러 12시. 영화관 프로젝트의 새로운 광고가 공개되었다. 이 광고의 주인공은 바로 서감독이었다.

광고 속, 영화관에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서감독. 누군가가 서감독에게 물었다.

[<수면>이 유니버설 스튜디오에 의해 상영이 중지되었단 게 사실인가요?]

[네. 맞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유니버설 스튜디오는 세계에서 가장 큰 영화사 중 한 곳이잖아요.]

세계 2위의 영화사가 행한 엄청난 갑질. 그에 대한 소감을 묻는 질문.

[맞아요. 유니버설 스튜디오는 정말 큰 회사고, 엄청난 수의 영화관을 보유하고 있죠.]

[그 영화관을 다 뺏겼으면 타격이 크겠어요. 유니버설 측으로부터 영화관을 돌려받길 원하나요?

[아니요.]

[왜죠?]

누군가의 질문에 서감독이 화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거긴 내 영화를 상영할 자격이 없으니까요.]

*

<엄청 쿨하잖아!>

<서감독이라면 저럴만하지.>

<멋지네. 그래서 저 사람이 만든 영화가 뭐라고?>

광고가 공개되자, 한국인들이 그런 것처럼 미국인들 역시 서감독의 매력에 환호하기 시작했다.

<‘수면’은 타임지에 선정된 영화잖아. 그걸 상영 중단했다고?>

<그러니까, 우리가 유니버설 때문에 ‘수면’을 못 보게 생긴 거라 이거지?>

<대체 왜 그런 거야?>

그리고 <수면>과 유니버설 사이의 이야기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에 유니버설의 영화가 개봉하는데. 이것 때문인가?>

<‘수면’이 견제돼서 그랬다고? 유니버설 쪽이 제작비가 10배는 더 큰데.>

<하지만 이것 외엔 다른 이유가 없어.>

이제는 유니버설의 기대작이자, LA씨어터에서 제외된 영화에 대한 얘기마저 사람들 사이에서 끌려나오고 있었다.

‘...일이 점점 커지고 있다.’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유니버설의 플래닝 총책임자, 제이슨 모리아. 그가 자신의 비서에게 말했다.

[지금 당장 CK에게 연락해.]

[제이슨. 안 그래도 CK가 사과할 생각이 아니면 연락하지 말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하.]

모든 상황을 예상한듯한 CK의 태도에 제이슨이 인상을 찌푸리고 미간을 짚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의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럼 사과하겠다고 전해.]

이제 칼자루를 쥐고 있는 건 자신들이 아니라 CK란게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이었다.

*

[CK의 총 책임자와 연락을 나누고 싶습니다.]

유니버설 측에서 온 요청. 이번에는 조셉처럼 다짜고짜 전화를 거는게 아니라, 미리 논의할 내용에 대해 메일을 보내왔고, 시간 약속까지 잡아왔다. 거기에 총 책임자를 요구하기까지.

실무진끼리의 피 터지는 싸움은 끝났고, 이제 ‘책임자들끼리 상황을 끝내자’라는 의사표시였다.

“이제 거의 다 끝났군.”

한록의 연락을 받은 최경준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수고했네. 마무리는 내가 하겠네.”

승리를 직감한 최경준이 한록에게 말했다. 그리고 잠시 후. 무언가가 떠오른 듯한 얼굴로 한록을 보며 말했다.

“아니, 이번엔 자네가 해 보는게 좋겠군.”

그리고 한록에게 제안을 하나 건넸다.

*

“...제가 유니버설의 책임자와 연락을 하란 말씀이십니까?”

“그래. 유니버설 측에서 사장 대리급을 요구했네. 자네 정도면 조금 부족하더라도 결격은 아니지.”

“하지만 저는 이런 일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 해봐야지. 자네도 이제 임원 아닌가.”

실무진이 아닌 임원으로서, 모든 상황을 정리하라. 그런데 그 상대는 세계 2위의 영화사 유니버설이다.

임원으로서 데뷔하기엔 너무 스케일이 커진 상황.

“이 일을 잘 끝내면 헐리웃은 절대로 자네 이름을 잊지 못하겠지.”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CK는 헐리웃에서 내세울 간판이 필요해. 할 수 있겠나.”

최경준의 말에 한록이 잠시 망설였고-

“네. 할 수 있습니다.”

명쾌한 답을 내놓았다.

*

그렇게 최경준의 사무실에서 유니버설의 연락을 기다리는 한록.

“유니버설의 플래닝 디렉터, 제이슨 모리아입니다.”

30분 후 전화가 울렸고, 장비서가 사무실로 들어와 말했다.

“시작하게.”

그리고 최경준은 전화기의 스피커 버튼을 누르는 동시에 한록에게 수화기를 넘겨주었다.

<안녕하십니까, 한. 유니버설의 플래닝 디렉터 제이슨 모리아입니다.>

[CK ENM 해외팀 팀장 이한록입니다.]

‘실수가 있었다.’ 협박과 통보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던 실무진끼리의 대화와 달리, 엄청나게 두루뭉술한 단어선정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유니버설측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있다. 서로 절대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실무진들끼리의 대화와는 상당히 다른 부분이었다.

‘...여기서 괜찮다고 말해야 하는 건가?’

그리고 한록의 고민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최경준이 빠르게 메모를 쓴 후 한록에게 건넸다.

-온화하게 나가되, 숙이지는 말게.

최경준이 적은 글에 한록이 고개를 끄덕이고 답했다.

[네. CK측도 많이 곤란한 상황입니다. 그래도 사과를 위해 전화주셨으니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한록의 말에 제이슨은 답이 없었다.

-대답 하지마.

그리고 이어진 최경준의 메모.

이 정적은, 서로를 탐색하는 정적인 동시에...

-우리가 원하는게 있단 걸 보여선 안 돼.

이 상황에서 진짜 아쉬운 사람이 누군지 판단하기 위한 정적이었다.

<‘수면’은 굉장한 작품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런 영화가 불화에 휘말리게 되어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유니버설도 할 수만 있다면 ‘수면’을 제대로 상영하고 싶습니다.>

결국 먼저 말을 건넨 건 유니버설의 제이슨이었다.

‘정말 여기서 이 일을 끝내고 싶은 거다.’

-우리가 유리하군.

한록의 생각은 최경준과 정확히 일치했다. 최경준이 종이에 짧게 글을 써서 한록에게 전해주었고, 소파에 몸을 기댔다.

-이제부터 자네식대로 진행하게.

드디어 떨어진 허락. 최경준의 메모에 한록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그렇다면 <수면>의 상영금지를 풀어주시기 바랍니다.]

상황을 확인하자마자 원하는 것을 요구하는 한록과, 그런 한록의 요구사항을 냉큼 수락하는 유니버설.

‘성격도 급하긴. 하지만 처음치곤 잘하고 있다.’

여유가 조금 부족하지만, 어쨌든 한록은 아주 빠른 시간내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쟁취했다. 그 모습에 최경준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한록은 여기서 끝낼 생각이 아니었다.

한록이 제이슨에게 두 번째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유니버설의 결정 때문에 <수면>의 개봉 일정에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니버설 측에서 보상을 해주었으면 합니다.]

<어떤 보상 말입니까?>

바로-

[<수면>의 첫 주 개봉은 유니버설 측에서 모두 무료로 진행했으면 합니다.]

첫 주의 개봉을 모두 무료로 진행해달라는 요구였다.

<첫 주의 모든 비용을 유니버설이 부담하고, 무료로 상영을 진행하라는 말입니까?>

[맞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아주 단호하게 말하는 제이슨. 제이슨의 목소리에 소파에 기댔던 최경준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최경준의 눈에 날카로운 빛이 번뜩였다.

이제부터는 ‘진짜’ 임원들간의 대화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강하게.

최경준의 메모.

[우리는 이미 유니버설 때문에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어떻게든 보상을 원합니다.]

<보상은 하겠습니다. 다만 첫 주 무료 상영은 너무 과하다는 겁니다.>

-더 강하게.

최경준의 새로운 메모.

[이건 유니버설의 이미지 개선에도 도움이 될 겁니다. 유니버설이 보상을 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유니버설에게 도움을 주는 일이란 말입니다.]

<이미 끝난 일 아닙니까.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일입니다.>

-더 강하게.

또 다른 메모.

[그건 CK가 끝내기로 결정했을 때 일이겠죠.]

<지금 말씀은 우리를 협박하는 걸로 들립니다.>

처음에 비해 아주 강해진 유니버설의 태도와...

-더 강하게.

[네. 협박 맞습니다.]

한록의 대답.

<...>

한록의 말에 유니버설측은 답이 없었다. 이번엔 최경준이 적어주지 않아도 한록 역시 이 침묵의 알 수 있었다. 이 침묵은 바로 서로를 탐색하는 침묵. 그리고 이번 대화의 승패를 가리기 위한 질문이었다.

<하실 말씀이 없다면 여기서 끊겠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먼저 입을 연 것은 유니버설이었다.

[네. 생각이 바뀌신다면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전화 감사합니다.]

이제는 상황을 완전히 파악한 한록. 한록이 최경준이 메모를 적어주기도 전에 먼저 입을 열었고, 통화를 끝냈다. 그러자 메모를 적고 있던 최경준이 놀란 눈으로 한록을 바라보며 물었다.

“왜 전화를 끊었지?”

“지금 계속 압박해봤자 효과가 없을거라 생각했습니다. 유니버설측도 회의를 거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내가 메모를 쓰고 있었는데 말이야. 정말 성격이 급하군.”

한록의 켱쾌한 대답에 최경준이 웃으며 답했다. 그리고 자신의 메모를 한록에게 보여주었다.

-여기서 끊어.

최경준의 메모에는 방금 전 한록의 말과 똑같은 말이 적혀있었다.

*

그리고 한시간 후. 유니버설측에서 연락이 도착했다.

한록의 요구를 수락하겠다는 전화였다.

임원으로서 진행한 첫 통화. 그 통화에서 한록은 최경준의 지시를 미리 읽었고, 지시에 앞서 행동했다. 그리고 결국 좋은 결과를 얻어냈다.

‘이런.’

그 모습에 최경준은 생각했다.

한록의 첫 임원데뷔는...

‘기대보다도 더 잘하는군. 곧 내 도움은 필요없어지겠어.’

자신의 생각보다도 더 완벽했다고.

*

결국 미국 전역의 UP씨어터에서도 <수면>의 개봉이 확정되었다.

“처음보다 관이 4배는 늘었네요.”

“거기에 유니버설이 첫 주 무료로 풀어주잖아. 관객수 좀 기대해 봐도 되겠는데?”

유니버설이 무릎을 꿇었단 소식에 해외팀 사람들은 신이 나서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때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 있던 송과장이 한록에게 물었다.

“그럼 영화관 프로젝트는 끝이야? 최악의 영화관은 공개 안하고, 그냥 최고만 뽑고 끝나나?”

“아뇨. 프로젝트는 계속 진행하기로 합의했습니다.”

“그럼 유니버설이 타격이 좀 있을텐데. 애초에 여기서 끝내달라고 연락 온 거 아니었어?”

“다른 회사도 엮인 문제니까요. 대신, UP씨어터가 가진 장점도 함께 언급해주기로 했습니다. 다양성은 부족하지만 미국에서 배리어프리 영화관이 가장 많이 마련된 프랜차이즈라고요.”

“아, 그래. 그래서 첫 주를 무료로 풀어주는데 동의했구만. 어떻게보면 유니버설도 홍보가 되는거네.”

예정대로 영화관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동시에 <수면>의 첫 주 무료 상영을 진행해야 한다. 거기에 <수면>의 막바지 마케팅까지 남아있었다.

“우리는 그럼 영화관 프로젝트랑, 유니버설이랑, 수면까지 홍보해줘야 하네. 엄청 바빠지겠어.”

해외팀은 일이 잘 해결된 만큼 순식간에 수많은 업무를 맡게 되었다.

그리고, CK의 직원은 아니었으나 해외팀만큼이나 많은 역할을 맡게 된 사람이 한명 더 있었다.

“감독님.”

바로 <수면>의 감독. 서감독이었다.

*

영화관 프로젝트의 나레이션을 위해 CK를 방문한 서감독. 해외팀 사무실 앞에서 서감독을 발견한 한록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고, 서감독이 차가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게 묻지 마시고, 팀장님이 알아서 진행하세요.’

‘관객들의 급을 나눠서 받아라’라는 닉 해리스의 마케팅 아이디어. 그 아이디어를 전해 듣자마자 서감독과 한록 사이의 실은 끊어져 버렸다. 서감독이 한록이란 사람 자체에게 큰 실망을 해버린 것이었다.

-그렇다면 <수면>의 개봉이 딱 일주일 남은 이 시점은.

“감독님. <수면>의 마케팅 방식이 바뀌었습니다.”

이제 개봉을 코앞에 둔 <수면>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

“잠시 시간 괜찮으시겠습니까?”

서감독과의 실을 다시 한 번 이어볼 날이었다.

*

“할 말 없다고 했을 텐데요.”

‘마케팅에 대해서 얘기해보자’는 한록의 말. 그 말에 서감독이 차갑게 답하고 돌아섰다. 한록과 더는 할 말이 없다는 의사표현이었다.

하지만 서감독은...

“아뇨. 듣고 싶으신 얘기가 있을 겁니다. 감독님을 위한 마케팅을 준비했으니까요.”

“...날 위한 마케팅이요?”

그 자신만만한 말에 결국 뒤를 돌아볼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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