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196화 (177/263)

나 좀 멋진 선배였지?

유선과의 대화 후 바로 정부장을 찾은 한록. 대부분이 퇴근한 시간이었지만 정부장은 아직 자신의 자리에 남아있었다.

“닉의 제안을 거절하겠다고?”

“네. 대신 다른 방식을 시도해보려 합니다.”

닉의 제안과는 다른 한록의 아이디어.

“...여기까지입니다.”

“괜찮네. 서감독 신작까지 생각하면 이 쪽이 훨씬 더 괜찮아 보인다.”

“그러면 닉의 아이디어는 보류하는 걸로...”

정부장은 한록의 아이디어를 듣고 긍정적인 반응을 내놓았으며...

“안 돼. 닉이 제안한 걸로 가.”

한록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제 아이디어가 마음에 안 드십니까?”

“아니. 이한록이잖아. 알아서 잘 하겠지. 내가 걱정하는 건 다른 문제야.”

“어떤 문제 말씀이십니까.”

정부장이 한록을 만류하는 이유.

“이거 실패하면 네가 전부 독박 쓴다.”

그건 바로 한록을 걱정하기 때문이었다.

“상대가 유니버설이고, 우리도 위험한 상황이야. 그런데 닉 해리스의 아이디어를 거절했다가 실패하면? 아니. 조금이라도 만족스럽지 않게 끝나면? 그럼 분명 본부장님이 너한테 책임을 물을 거다.”

“제가 책임져야 할 일 맞습니다. 책임질 수도 있고요.”

“네가 잘 할 거란 건 알아. 그래도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어. 세상에 백퍼센트가 어딨어?”

정부장의 태도는 완고했다. 한록의 능력은 신뢰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록이 위험한 일을 하는 걸 두고 볼 생각은 없기 때문이었다.

“닉 해리스가 좋은 아이디어를 던져줬잖아. 굳이 네가 나설 필요 없어.”

“이건 사람들의 부정적인 감정을 자극하는 마케팅입니다. 이런 마케팅을 할 순 없습니다.”

“우리가 자원 봉사하냐? 그런 것 까지 신경 써야 해?”

“실적에도 영향을 미칠 겁니다. 단기적으로는 관객수가 나오겠죠. 하지만 <수면>은 악평을 받을 거고, 신작까지 그 꼬리표가 따라붙어서 흥행에 방해가 될 거예요. 서감독님의 신작은 올해 최고 기대작 아닙니까. 그걸 이렇게 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럼 너랑 우리 회사의 안전은 그냥 버려도 되고?”

좋은 마케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의 한록과, 팀이 위험해지지 않길 바라는 정부장. 서로의 생각이 워낙 명확하고, 그 근거 역시 납득가능하다.

‘...부장님은 생각을 바꾸지 않으실 거다.’

그렇다면 이제 더 이상의 설득은 불가능했다.

한동안 이어진 침묵. 한록이 깊은 생각 끝에 입을 열었다.

“부장님. 저는 이런 마케팅을 하고 싶진 않습니다. 사람들의 결핍을 자극하고, 영화에 해가 되는 마케팅을요. 이런 마케팅을 하려고 여기에 온 게 아닙니다. 하지만 이건 제 욕심이 맞습니다.”

“알긴 아네.”

“그리고 닉 해리스의 마케팅이 장기적으로 CK에게 부정적 결과를 가져올 것이란 생각 역시 진심입니다. 그리고 이건...”

한록이 정부장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제 욕심이 아니라, 해외팀 팀장으로서 내린 판단입니다.”

더 이상의 설득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한록이 정부장에게 던진 마지막 말. 그건 팀장으로서 자신의 판단을 존중해달라는 말이었다.

자신보다 스무살은 어린 후배. 그러나, 이제는 상사가 되어버린 후배. 그 후배가 자신의 선택을 인정해달라 말한다.

그 말에 정부장은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선택을 알 수 있었다.

‘물러나야 할 때가 왔다.’

눈앞의 한록이 너무나 젊어서. 상무이사라는 자리까지 올라갔지만 여전히 자신에게 조언을 구하고, 자신의 주장을 존중해줘서. 그래서 잊고 있던 사실이 있었다.

한록은 자신의 상사였다. 그것도, 자신보다 능력이 몇 배는 더 뛰어난 상사.

“...그래. 네 생각이 맞겠지. 네가 원하는 대로 진행 해.”

정부장은 생각했다.

여기서 물러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에 널리고 널린 나이 많고 무능한 어른이 되어버린다. 여기까지다. 내 몫은 여기까지다.

그래. 여기까지다.

“앞으로 내가 반대해도 신경쓰지 마라.”

나는 여기서 물러나야 한다.

*

그렇게 끝난 한록과 정부장의 대화.

“...감사합니다.”

“퇴근 안 하냐.”

“내일 본부장님한테 보고 드리려면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래. 나도 좀 더 하다 들어갈 거다.”

대화는 잘 마무리되었다. 정부장은 고집을 부리지 않았고, 한록은 상사의 권위로 정부장을 찍어누르지 않았다.

나이 많은 부하와, 젊은 상사의 대립.

그 대립치고 둘의 대화는 상당히 온화하게 끝났고, 그건 정부장과 한록이 서로에게 가진 신뢰 때문이었다.

“...이팀장. 표정이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로의 마음에 남은게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니었다.

과거에도 한록은 빠른 승진으로 동기, 선배들보다 먼저 차장이 되었고, 그건 사람들이 한록에게서 등을 돌리게 만든 주된 이유였다.

‘정부장님은 그럴 분이 아니야.’

하지만 오늘 정부장이 보여준 반응은 한록에 대한 질투나 시기 같은 게 아니었다. 그 증거로 한록의 손목에는 정부장과의 실이 아직 연결되어있었다.

한록이 걱정하는 것은...

‘...부장님도 많이 속상하시겠지.’

이제는 상사가 된 부하의 명령을 들어야 하는 정부장. 그 사실이 정부장에게 어떤 상처를 줄지가 걱정이 되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아니긴. 무슨 일 있는 것 같은데?”

한록을 계속 지켜보던 현차장이 보다 못해 질문을 던졌다.

‘닉 해리스의 아이디어 대신 새로운 마케팅 전략을 짜야한다’며 자신을 부른 한록. 그런데 한록이 영 회의에 집중하지 못하니 걱정이 된 것이었다.

“이팀장. 내가 멋진 상사 되고 싶다고 한 거 기억하지? 빨리 털어 놔. 내가 멋진 상사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 같다.”

한록이 부담을 가지지 않도록 자신의 얘기를 꺼내며 다정하게 묻는 현차장. 현차장의 말에 한록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

“제가 상사인데요.”

“...그건 넘어가고!”

말 한마디로 한록의 기분을 풀어버린 현차장.

현차장은 언제나 한록이 가장 믿는 사람이었고, 동시에 한록과는 다르게 세심하게 남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 차장님이라면...’

“차장님. 사실은 방금 전 정부장님과 대화를 하고 왔습니다.”

망설이던 한록이 결국 현차장에게 정부장과의 일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

“그래, 그런 일이 있었구나. 고민 될 만 하네.”

한록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는 현차장. 현차장 역시 한록을 상사로 두고 있기 때문에 정부장의 마음에 공감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 하는 일이야.”

그러나 이 일에 대해 현차장은 의외로 냉정한 답변을 내렸다.

“이팀장이 상사인데, 부장님 눈치 보느라 결정을 바꿀 순 없는 거지. 그걸 감당하는 건 정부장님 몫이니까 이팀장은 신경쓰지 마.”

아주 현실적인 말을 하는 현차장. 한록이 현차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현차장님 말이 맞아.’

현차장의 말처럼, 이 일은 한록이 승진을 하고, 사회생활을 하는 이상 계속 벌어질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상대를 신경 쓴다면 분명 제대로 된 결정을 내릴 수 없으리라.

하지만 그래도 정부장의 마음을 외면하고 싶진 않았다.

‘...어렵다.’

현차장의 명쾌한 답에도 쉽게 생각을 끊지 못하는 한록. 팀장이 되니, 확실히 예전처럼 본인의 능력만 믿고 설치고 다닐 수는 없었다. 그렇게 행동하면 상처받는 사람이 너무 많아진 상황.

‘어떻게 해야 하지?’

그렇게 한록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구원투수가 나타났다.

“이팀장. 아직도 걱정 돼?”

“네.”

한록이 가장 신뢰하고, 의지하는 사람. 이런 일을 이미 겪어 본 사람.

“그럼 나한테 맡겨 볼래?”

현차장이었다.

*

한 시간 후. 현차장이 정부장에게 말을 걸었다.

“부장님. 저 오늘 술 한잔 사주시면 안 됩니까?”

*

저녁 8시. 회사 근처 고기집으로 향한 정부장과 현차장.

고기와 함께 술이 나오자, 정부장이 현차장의 술잔에 소주를 따라주며 말했다.

“이직? 퇴사? 부서 이동? 절대 안 돼.”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뭔데?”

“오늘 이팀장이랑 얘기를 좀 길게 하시던데.”

“...이팀장한테 들었냐?”

“네. 제가 해달라고 조른 거니까 너무 뭐라고 하진 마세요.”

“그 녀석 입 무거운 거 누가 몰라.”

그 말과 함께 술을 들이키는 정부장. 정부장의 얼굴에는 참을 수 없는 씁쓸함이 쓰여 있었다.

“그래서, 술은 왜 사달라고 한 건데?”

“그냥요. 잘난 후배 둔 선배들끼리 앞으로 대처방안이나 얘기 좀 해볼까 해서요.”

“대처방안이라. 그런 게 어딨어.”

“왜요. 열심히 이팀장 밀어줄 수도 있는 거고, 아니면 우리끼리 합세해서 밀어낼 수도 있는 거잖아요.”

“밀어낼 생각은 있고?”

“절대 없죠. 이팀장한테 어떻게 그래요.”

“그러면서 말은..”

현차장의 넉살좋은 말에 정부장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잠시 후 솔직한 심정을 말했다.

“대처방안이라. 나도 이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정부장의 허심탄회한 말에 현차장은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나는...여기서 최고가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머리 속에는 그 생각밖에 없었는데.”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한 날에도 평소처럼 근무를 한 정부장. 그의 목표는 회사에서 최고가 되는 것이었다.

돈, 명예. 권력. 제 한 몫을 다 해나가고 있다는 자부심. 그런 것들이 정부장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고, 자기 자신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이제는 새파랗게 어린 놈이 내 상사가 됐네. 그런데 그 놈이 나보다 능력도 좋아.”

하지만 어느 순간 그 모든 것들이 멀어지는 순간에 도착해버렸다.

“나 아직 한창이야. 본부장님보다도 젊다고. 본부장님도 아직 현역이잖아. 나도 더 잘할 수 있어. 더 달릴 수 있다고.”

아직도 갈 길이 먼데. 아직도 더 하고 싶은 게 많은데. 아직도 해낼 수 있는 게 많을 것 같은데.

“그런데 이제 더 달릴 곳이 없네.”

하지만, 그 모든 게 자신의 착각이었을지 모른단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

“부장님.”

“어.”

정부장의 아주 솔직한 속내. 그걸 듣고 있던 현차장이 입을 열었다.

“진짜 젊으시네요.”

“...뭔 소리야?”

“차장 넘어가서 본인 입으로 더 뛸 수 있다고 하는 사람 처음 봤어요. 전 오래 전에 지쳤거든요.”

대기업에서 부장까지 살아남은 승부사 정부장과, 그런 정부장과 달리 아주 오래 전부터 숨죽이며 살아온 현차장.

정부장과 현차장은 너무나 다른 사람이었고, 정부장은 항상 현차장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늘 정부장은...

“그런데 어떻게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 거냐?”

처음으로 현차장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꼭 최고가 되는 게 회사를 다니는 이유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그러면 뭐. 2등 하려고 회사 다니냐?”

“2등도 너무 힘들지 않아요? 부장님 왜 이렇게 젊으신 거예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우리보다 더 뛰어난 친구들이 계속 나타난다는 거. 언젠가 그 친구들이 우리를 뛰어넘을 거라는 거. 우리가 못해서 그런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일이라는 거. 그게 현실이라는 거죠.”

다정하지만, 뼈가 있는 현차장의 말. 현차장의 말에 정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회사를 다니다보면 모두가 어느 순간 알게 되는 진실. 하지만...

“나는 아닐 줄 알았어.”

그만큼 외면하고 싶은 사실이었다.

“그래. 이제 다른 녀석들이 날 뛰어넘을 일만 남았지.”

정부장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소주를 들이켰다.

이제 더 이상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수 없다는 것. 그 사실을 알면서도 매일 출근을 해야한다는 것. 그게 회사원이라는 것. 그 모든 것이 오늘 하루만에 정부장에게 현실로 다가온 것이었다.

매일 승리로 자신을 증명했는데, 이제 눈앞에 남은 것은 패배뿐이다. 정부장이 술을 마시며 혼자 중얼거렸다.

“...이렇게 계속 뒤처지기만 할 거면...뭘 위해서 회사를 다녀야하는지 모르겠네.”

“뒤처지기만 하는게 아니라 다른 선택지도 있잖아요.”

그리고 정부장을 바라보던 현차장이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무슨 선택?”

엘리트인 정부장과 달리, 아주 오래 전부터 이 고민을 마주해온 현차장. 그리고 그가 한록을 만나고 내린 결론.

“이제 우리가 멋진 상사, 능력있는 팀장이 될 일은 없지만. 그래도 남은 포지션이 있어요.”

“그게 뭔데?”

모든 일을 해결하는 멋진 상사. 팀을 책임지는 멋진 리더. 그런 사람이 될 순 없더라도.

“좋은 선배가 되는 거요.”

그래도, 다른 존재로 남을 수는 있다는 생각이었다.

“치고 올라오는 젊은 놈들 도와주고. 사고치지 않게 챙겨주고. 힘든 거 있으면 들어주고, 할 수 있으면 바꿔주려고도 해보고. 내 위치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거 하고. 그러다가 저도 그 녀석들 도움 좀 받고. 그렇게 회사 다닐 수도 있는 거죠.”

승리가 아니라도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다른 방법. 뒤처지는 게 아니라, 남을 돕는 것.

“그 녀석들이 어디까지 가나 지켜보고, 저는 그 옆에 서 있는거요.”

그래서 새로운 방식으로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

“...그 옆에 서 있는다라.”

정부장이 현차장의 말을 조용히 곱씹었다. 패배만 남은 것이 아니다. 다른 방식도 있는 거다.

다른 방식으로 목적지에 도착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기 시작했다.

생각에 잠긴 정부장을 보고 현차장이 슬쩍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부장님. 이팀장이 부장님 많이 걱정해요.”

“그놈이? 왜?”

“오늘 일 때문에 기분 상하셨을까봐 걱정하더라고요.”

“그 놈도 참 여려. 그런 거 신경 쓰면서 어떻게 일을 하려고 해?”

“아직 어리니까요. 이팀장 지금 서른살이라고요.”

“그래도 팀장이란 놈이 이런 거에 흔들리면 어떡해?”

그리고 현차장은 정부장이 흔들릴 수 밖에 없는 말을 했다.

“그러니까 부장님이 도와주셔야죠.”

그 말에 정부장은 방금 전 현차장이 한 말을 떠올렸다.

자신이 평생을 바친 이 회사. 이 곳에서 더 이상 길은 없다고 느낄 때. 그럼에도 회사에서 이뤄나갈 수 있는 것. 쓸모없지 않은 존재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

멋진 상사.

강한 리더.

그리고...

“...그 녀석이 내 도움이 필요하려나.”

좋은 선배.

*

그날 밤. 정부장은 소파에 앉아서 생각에 잠겨있었다.

아직 영화가 삼류산업 취급을 받을 때. 그때 회사에 처음으로 입사한 자신. ‘영화도 예술이 될 수 있단 걸 보여주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던 신입사원 시절.

파벌 싸움에서 밀려 지방으로 발령이 났던 차장시절.

최경준의 부름에 부장으로 돌아온 얼마 전.

‘이제 남은 것은 임원뿐이다’라며 의지를 불태우던 시절과, 바로 지금. 한록이라는 후배를 눈앞에 두고 좌절한 자신.

자신은 최경준이 아니고, 더 이상 현역이 아니다. 이제는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들이 등장한다는 것을, 그들과 함께 해야만 자신에게도 미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할 때가 왔다.

그렇다면, 이한록이란 상대는...

‘이팀장이 부장님 많이 걱정해요.’

“...쓸데없이 착해빠져 가지고.”

미래를 걸어보기에 아깝지 않은 상대였다.

어차피 자신에게 미래가 없다면. 이제는 누군가를 도와줘야 하는 위치가 되었다면.

그렇다면, 그 상대가 한록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좋은 선배라. 낯간지러운 소리나 하고 있고 말이야.”

결정을 내린 정부장이 노트북을 켜서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

다음날 아침. 최경준에게 보고를 올리기 위해 7시에 출근을 한 한록. 그러나 한록보다도 먼저 회사에 도착한 사람이 있었다.

“...부장님?”

정부장이었다.

“왔냐.”

정부장은 아무렇지도 않게 한록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파일 하나를 건네며 말했다.

“본부장님한테 올릴 파일이야. 한번 봐라.”

“이걸 왜 부장님이...”

“본부장님도 네 말에 반대하실 거야. 내가 설득할 테니까 넌 괜히 시간 뺏기지 말고 일이나 해.”

정부장은, 그러니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봐. 최대한 서포트할 테니까.”

전력으로 한록을 돕겠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부장님.”

놀라서 정부장을 바라보던 한록. 한록이 정부장이 건넨 파일을 받아들며 고개를 숙였다.

정부장과 현차장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정부장은 마음을 바꾸었고, 한록을 최대한 돕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 점이 정말 참을 수 없게 고마웠고, 또 힘이 되었다. 한록이 정부장에게 진심으로 말했다.

“걱정하시는 일 없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잘 해보자.”

한록이 정부장에게 인사를 하고, 자신의 사무실로 향하려다가 문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부장님.”

“왜.”

“부장님 같은 분을 만나서 정말로 다행입니다.”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겨우 건넨 말. 그 말에-

“나도 네가 내 상사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정부장 역시 솔직한 답을 건네주었다.

*

정부장과 인사를 마친 후, 복도로 나온 한록. 한록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이번 일에 대해 생각했다.

자신에게 깨달음을 준 유선.

자신을 믿어주기로 결정한 정부장.

그리고 정부장의 마음을 바꿔준 현차장.

‘팀원이 아닌 팀장으로서,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나가야 하는가.’

이번 일을 마주하며 한록에게 계속 들던 생각. 앞으로도 끊임없이 이어질 고민이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 고민이 두렵지 않았다.

자신에게는 멋진 팀원들이 있으니까.

자신이 할 일은, 그들을 믿고 그들에게 최대한의 기회를 주는 것뿐이다.

-서로가 실수를 하면 짚어주는,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는 팀.

서로를 도우며 함께 성장해나가는 팀.

‘그래. 이거다.’

한록이 미소를 지었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며 생각했다.

‘내가 만들어 나가야 할 팀은 바로 이런 팀이다.’

이제는 답을 알 것 같다고.

*

자신의 사무실로 떠난 한록과, 최경준에게 전화를 거는 정부장. 둘은 각자의 답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나 좀 멋진 선배였지?”

복도에서 한록을 지켜보던 현차장이 남몰래 미소를 지었다.

*

사무실에 도착한 한록. 한록은 바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닉 해리스가 아닌 자신의 마케팅을 진행하기 위해서였다.

아직 최경준에게 보고도 올라가지 않았지만, 아이디어가 완벽히 나오지도 않았지만, 이제 그런 건 조금도 걱정되지 않았다.

정부장이 최경준에게서 허가를 받아올 테니까. 멋진 팀원들이 또 자신을 도와줄 테니까.

<오랜만이군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한록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오랜만입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한 번 더 협업을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요.]

한록이 전화를 건 상대는 불과 한달 전까지 CK의 적이었던 회사.

[넷플릭스측 의견은 어떠신가요?]

그리고 이제는 동료가 될 회사, 넷플릭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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