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189화 (170/263)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자신에게 맡기라’는 현차장의 말.

그 말에 한록은 예전 일을 떠올렸다. 한록이 <삼일의 삶>을 맡을 당시, 어떻게 윤감독을 설득해야하나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너무 혼자 끌어안고 가지마, 이과장.’

그때도 지금과 똑같은 조언을 해준 현차장.

그런 현차장은 이제 조언을 넘어, 한록에게 꼭 필요한 도움을 주려 하고 있었다.

한록에 대한 현차장의 신뢰, 그리고 애정이 보이는 순간.

그걸 알기에 한록은 쉽게 현차장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러면 차장님이 너무 많이 희생하셔야 합니다.”

“아니, 그게 아니지. 내가 손해보는 게 아니야. 나는 내 포지션을 찾은 거야.”

한록의 말에 고개를 젓는 현차장.

“솔직히 말해서 말이야. 내가 마케팅으로 최대리를 이길 순 없어. 하지만 파트장한테 필요한게 마케팅 능력만 있는 건 아니잖아?”

현차장은 예상치 못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 파트 사람들이랑 얘기 끝났어. 일이 좀 늘어도 첫 출범이니까 조금만 노력해보자고. 대신 이번 일 끝나면 최대리네 파트 쪽에서 일 덜어줄 거라고 했지. 다들 알았다고 하더라. 그리고 최대리랑도 합의 봤지.”

자신이 만들어온 성과를 말하는 현차장.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와 다르게 힘이 담겨있었다.

“이게 내가 잘하는 거야. 사람들 설득하고, 조율하는거. 이팀장 일을 대신하진 못해도, 이팀장이 일만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거.”

바로...

“어때. 최대리랑 싸워볼만 하지?”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었다.

후배와 같은 위치가 됐다는 것에 대한 열등감과, 막강한 상대에 대한 두려움. 그러나 그 대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방법을 선택한 현차장. 현차장이 그 어느 때보다도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대로 한 번 가보자, 이팀장.”

한록은, 그런 그가...

“차장님.”

“응?”

“역시 멋있으시네요.”

정말로 닮고 싶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

그렇게 현차장이 나서준 덕분에 현지 일정을 진행할 수 있게 된 해외팀.

“차장님. 이거 가져가세요.”

“이게 뭔데?”

“은서 선물이요. 은서가 문 안 열어주면 어떡해요.”

한록은 앞으로 매일 야근을 하게 될 현차장을 걱정해서 잔뜩 선물을 사왔다.

“에이, 뭐 이런 걸 가져와. 이팀장은 일에만 집중해. 그러라고 내가 직무대리를 하는거잖아.”

하지만 이런 선물이 현차장의 희생에 대한 대가가 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한록도 알고 있었다. 현차장에게 감사함을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

“최대리님. 회의 합시다.”

바로 이번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는 것이었다.

*

최대리와 회의에 돌입한 한록. 회의에 참여한 사람은 둘뿐이었다.

“이번 일은 할 수 있는 한 우리 선에서 끝냅시다. 다른 사람들은 지금 일만으로도 힘들 거예요.”

현차장, 최대리, 그리고 한록. 세 사람이 최대한 팀원들에게 일이 내려가는 걸 막기 위해 한 결정이었다.

“<시험>에 대한 반응은 좋아요. 조선시대 좀비라는 소재가 잘 먹히네요. 한복, 갓, 말, 이런 것들이요. 미국 영화에선 볼 수 없는 포인트에서 반응이 좋네요. <저주의 새벽>과 비교광고에 흥미를 가지는 사람도 많고요.”

최대리의 말에 한록이 답했다.

“<시험>과 <저주의 새벽>을 비교할만한 지표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이미 두 영화의 비교광고에 큰 흥미를 가진 상황. 하지만, 넷플릭스 영화와 극장영화의 비교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넷플릭스 영화는 그 접근성 때문에 관객의 단위수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었다.

“관객수가 아니면...역시 코믹콘이겠네요.”

한록의 말에 답하는 최대리. 그 말에 한록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코믹콘은 미국에서 주최되는 세계 최대 규모의 대중 문화 행사였다. 만화나 영화, 게임 회사들이 행사에 참여해 이벤트를 하거나 소식을 알리고, 팬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의 옷을 따라입거나, 이벤트에 참여한다.

‘과연 어떤 회사의 이벤트에 가장 많은 팬이 참여했는가.’

그 컨텐츠의 영향력을 증명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코믹콘의 이벤트.

마침 <저주의 새벽>과 <시험> 모두가 좀비영화의 대표로 코믹콘에 초청받은 상황이었다.

“코믹콘에서 이벤트 참여자수가 <저주의 새벽>보다 <시험>이 높다는 걸 보여주면 돼요. 넷플릭스 영화랑 비교하려면 관객수보다 그게 더 명확한 지표죠.”

“그럼 최대한 그 전까지 모든 마케팅을 끝내야겠군요.”

“그렇죠.”

코믹콘 전까지 모든 마케팅을 끝내는 것을 목표로 삼은 둘.

목표도 정해졌으니, 이제 남은 것은 ‘미국에 먹힐만한’ 마케팅을 만드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시험>에서 좋아하는 건 정해져있어요. 한복, 칼, 말. 서양 좀비영화에서 볼 수 없는 것들이요. 특히 세자가 말을 타고 좀비떼를 돌파하는 장면이 정말 인기가 많더라고요.”

최대리의 말에, 한록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극장에 나타난 좀비떼.

-그리고, 그걸 물리치는 누군가.

“최대리님. 저 좋은 생각이 났습니다.”

한록이 최대리에게 말했다.

*

“영화관에서 퍼포먼스를 진행하자는 거네요.”

‘영화관에서 이벤트를 열자. 그리고, 모두가 놀랄만한 퍼포먼스를 보여주자’라는 한록의 제안. 그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들은 최대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확실히 재밌어 보여요. 사람들을 영화관으로 데려올 유인도 될 거고, 영화 자체에 대한 어필도 될 거예요.”

사람들이 <시험>에서 좋아하는 요소를 모두 섞은 아이디어를 만들어낸 한록. 한록의 아이디어는 확실히 주목을 받을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한록의 아이디어에는 한가지 문제가 있었다. 바로-

“그런데 이걸 시도해보려면 극장이랑 협의가 돼야 하는데. 쉽게 해주지 않을 것 같아요.”

미국 현지 극장과의 계약체결이었다.

안 그래도 복잡한 회사 간의 계약. 거기에, 한록의 아이디어에는 아주 ‘특수한’ 조건이 달려있었다. 단순히 돈을 많이 준다는 것만으로는 통과될 수 없는 계약. 미국의 현지사정을 잘 알고, 복잡하고 특수한 사정을 상대에게 설득할만한 사람이 필요했다.

그리고 한록은 이 일의 적임자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최대리님이라면 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바로 눈앞의 최대리였다.

그 말에 최대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팀장님은 제가 만능인 줄 아신다니까.”

CK와 극장 사이에서 계약을 체결해야한다. 그리고 해외 업체끼리의 계약. 거기에, 한록이 원하는 아주 특수한 조건까지 성사시켜야 한다.

“아니십니까?”

그걸 과연 ‘할 수 있겠냐’고 묻는다면...

“네, 맞아요.”

아주 자신있게 그렇다고 말할 수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보세요.”

최대리가 바로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

그리고 다음날.

“섭외 완료.”

최대리가 한록의 책상에 파일을 내밀며 윙크를 했다.

*

“<시험>이 첫 개봉하는 영화관이랑 일정을 잡아왔어요. 이제 위에 결재만 올라가면 돼요.”

<시험>의 첫 개봉에 이벤트를 잡아온 최대리.

“시기가 아주 좋네요.”

영화의 첫 개봉, 사람들의 관심이 가장 뜨거울 때였다. 하지만...

“2주 남았군요.”

시간이 엄청나게 촉박했다.

영화관 주변의 거리 통제. 한록의 ‘조건’에 대한 주정부의 허가. 이벤트에 출연할 출연진들의 섭외. 숙소, 항공권, 이벤트 동선까지.

이벤트 전까지 해결해야하는 문제가 수십개는 남아있었다. 예전같으면 모두 한록이 하나하나 처리해야했을 문제였고, 절대로 마감에 맞출 수 없을만한 일정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랐다.

“2주라...빡빡하네.”

한록의 말을 전해듣고 턱을 괴는 현차장.

“그래도 불가능한건 아니죠.”

그에 답하는 최대리.

“제가 좀 더 열심히 할게요.”

의욕적으로 답하는 유선까지.

그들을 보며 한록은 생각했다.

“2주? 그 안에 가능하겠어?”

“네. 충분합니다.”

이 사람들이 있는한, 앞으로 불가능한 일 같은 건 없을 거라고.

*

[피터. 예전 자료들을 찾아봤는데요. 예전에도 이벤트에 동물을 등장시킨 영화가 있는걸요. 왜 우리는 안 된다는거죠?]

극장과의 의견을 조율하는 최대리.

“<시험> 개봉 이벤트 페이스북에 업로드 했습니다. 지금까지 신청자는 2천명입니다.”

이벤트에 참여할 관객들을 모집하는 하대리.

“네. 영화에 출연했던 엑스트라 분들이요. 네. 섭외가 필요해서요.”

<시험>의 제작진과 소통중인 유선.

“아직 결재 안 넘어왔어? 이거 안 되겠네. 내가 재무팀 쪼고 올게.”

그리고 든든하게 사람들을 서포트하는 현차장까지.

해외팀 모두의 활약 덕분에 <시험>의 이벤트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고-

“팀장님. 허가 받았습니다.”

어느새 <시험>의 개봉이 3일 앞으로 다가왔다.

밤 9시가 넘은 시간, 극장과의 계약서를 들고 한록의 사무실을 찾아온 최대리. 최대리가 한록의 책상에 계약서를 올려두고 말했다.

“준비 전부 끝났습니다. 이제 출국만 하면 돼요.”

한록이 원한 모든 조건이 포함된 계약서. 그 계약서를 바라보던 한록이 최대리에게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내일 공항에서 봬요.”

이제 남은 것은 그간 준비했던 일을 보여주는 것 뿐이었다.

최대리가 먼저 돌아간 후, 마지막으로 일정을 검토한 한록.

‘이제 가야 한다.’

시간은 이제 10시가 넘었고, 내일 뉴욕으로 떠나려면 하려면 슬슬 떠날 준비를 해야했다. 한록이 아쉬운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고, 노트북을 챙기기 위해 해외팀의 사무실로 향했다.

“차장님.”

그리고 그 곳엔 아직도 현차장이 남아있었다.

어찌나 일에 집중했는지, 한록이 자신을 부른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현차장. 한록이 현차장에게 다가가 다시 한번 말했다.

“차장님. 안 들어가십니까.”

“어어, 이팀장. 이제 가는 거야?”

“네. 내일 출국 때문에요.”

“고생이 많다, 정말.”

한록을 보고 안쓰러운 듯 말하는 현차장. 그러나 요즘 가장 무리를 하고 있는 것은 현차장이었다. 한록이 현차장에게 진심으로 말했다.

“이 일만 끝나면...앞으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아니, 그 말이 아니지.”

한록의 말에 현차장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앞으로도 많이 도와주세요. 잘 부탁합니다. 그렇게 말해야지.”

그 말에 한록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

그로부터 3일 뒤. 어딘가의 길거리에 서 있는 한록과 최대리, 그리고 하대리와 유선.

“와, 한국만큼 춥네요.”

유선이 추위에 몸을 덜덜 떨며 말했다. 매서운 칼바람과, 그 칼바람을 더욱 강하게 하는 고층빌딩.

“이게 뉴욕 날씨구나.”

그들은 지금 뉴욕에 도착해 있었다.

오늘은 <시험>의 이벤트가 열리는 날이었고, 해외팀은 이벤트가 열리는 영화관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날이 너무 춥네요.”

“그러게요. 이러면 사람들이 많이 안 올텐데.”

걱정을 한가득 담은채로 영화관으로 향하는 해외팀.

“괜찮아요. 온 사람들만 만족해도 성공하는겁니다.”

한록이 그런 말을 하며, 영화관으로 향하는 마지막 길목인 코너를 돌았다. 그러자 눈앞에는-

[차례를 지켜주세요. 위험합니다!]

[앞사람과 간격을 유지하세요.]

[통제구역 밖으로 넘어가지 마세요!]

인도와 도로를 가득 채울 정도의 사람들이 영화관 앞에 모여있었다.

-오늘은 <시험>의 첫 개봉날.

[이벤트는 언제 시작하죠?]

[이벤트 끝나면 바로 <시험>개봉하는 거 맞죠?]

이 곳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시험>을 보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