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182화 (163/263)

직장인이 가장 행복해하는 순간.

최경준과의 대화를 마친 한록은 마케팅 부서로 향했다.

오늘은 드디어 해외팀으로 자리를 이동하는 날. 그 전에 중요한 짐들을 먼저 챙겨두려는 것이었다.

해외팀의 본격적인 업무가 시작되는 첫날. 마케팅 부서에 등장한 한록을 보고 정부장이 보인 반응은...

“너 넥타이 어디갔냐?”

작은 놀라움이었다.

“헉.”

그 말에 자신의 가슴을 만져보는 한록. 확실히, 늘 하고 다니던 넥타이가 없었다.

“머리도 좀 부스스한데?”

거기에 평소와 달리 흐트러진 모습까지. 한록을 바라보던 현차장이 물었다.

“이팀장. 오늘 지각했지?”

“...아뇨. 8시 59분에 왔습니다.”

“어디 아픈 거 아냐?”

“그건 아닙니다. 그냥 아침에 늦게 일어났습니다.”

“왜? 무슨 일 있었어?”

언제나 여유있게 회사에 도착하던 한록이 8시 59분에 허겁지겁 사무실에 뛰어들어왔고, 거기에 넥타이까지 빼먹고 왔다. 현차장은 한록에게 분명 무슨 일이 있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어제 감사가 힘들어서요.”

“...그 정도였나? 끝날 때 표정은 나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영도랑 끝나고 술 한 잔을 해서...”

“이팀장 술 엄청 세잖아.”

정말 순수한 호기심, 그리고 걱정으로 한록에게 계속 질문을 던지는 현차장.

현차장의 잔혹한 질문들에 한록이 깊은 침묵을 지켰다.

“........”

“아프면 연차 써. 이제 눈치 볼 사람도 없잖아. 급한 건 나한테 맡겨두고.”

“.............”

계속 이어지는 현차장의 걱정에 더 이상 사실을 숨길 수 없게 된 한록. 한록이 결국 무거운 입을 열었다.

“...어제 밤에 잠을 못 잤습니다.”

“아파서? 감기인가? 혼자 사는데 아프면 어떡해.”

“아뇨.”

“그럼?”

한록이 부끄러워하는 얼굴로 말했다. 그 이한록도 잠을 못 자게 만드는 날.

“...설레서요.”

오늘은 해외팀의 첫 업무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

그날 오후. 드디어 16층에 해외팀을 위한 세팅이 마련되었고, 해외팀 주요인력들이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정부장과 최대리, 그리고 하대리, 송과장. 거기에 새로 배치를 받은 현차장과 유선. 한록을 비롯해 총 20명 정도의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해외 팀에 자리를 잡았다.

아직 모든 인원이 자리를 옮긴 것도 아니고, 두 차례나 더 인원 확충이 남아있다. 게다가 외부에서 스카웃 한 직원들은 아직 입사도 하기 전인 상황.

[16층은 해외팀에게 배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이제 ‘팀’이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모양새가 나왔다.

새로운 팀.

새로운 자리.

새로운 직위.

모든게 새로워진 상황에서, 상무이사로 승진을 하게 된 한록.

그가 하게 될 일은 바로!

“마케팅 파트, 회의실로 이동해주세요. 회의 시작합시다.”

“네...”

오늘도 어김없이 마케팅 회의를 소집하는 것이었다.

*

“해외팀의 목표는 하나입니다. CK의 영화를 세계적으로 알리는 것.”

회의실 앞에 선 한록. 한록이 PPT에 띄워진 세계지도를 보며 말했다.

의욕이 넘치는 젊은 팀장의 말에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얘기에 집중했다.

“다만, 지금 당장 전 세계를 노리기에는 우리가 가진 경험이 너무 적어요.”

하지만 첫 출범 작품으로 세계를 뒤집어 놓는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얘기였다.

'그게 가능하면 내가 <식물>을 베니스 영화제에 데려가려고 그렇게 애를 먹었을 필요가 없지. 회장님의 미국 진출 꿈도 진작에 이뤄졌을 거고.'

한 나라, 그것도 모국에 먹힐만한 영화를 선보이는 것과 전 세계 모두가 좋아할 영화를 선보이는 것은 완전히 다른 난이도의 일이었다.

“그러니 시작은 가장 중요한 곳부터 시작합시다. 우리의 첫 목표는 일단 미국을 공략하는 겁니다. 한국 영화가 얼마나 먹히고, 어떤 부분에서 강점을 가지는지 확인하는 거죠. 그래서 제가 선택한 영화는 <시험>입니다.”

한록이 말과 함께 PPT 화면을 넘겼다. 그러자 곤룡포를 입은 임금에게 좀비들이 달려드는 <시험>의 포스터가 나왔다.

“최대리님.”

“네.”

한록에게서 바톤을 이어받은 최대리가 얘기를 시작했다.

“헐리웃의 반응을 예상해보려고 실험을 하나 했어요. 미국의 그래픽 아티스트인 척 계정을 하나 만들었고, 영화인 걸 밝히지 않고 CK 영화의 컨셉스케치들을 인터넷에 올렸죠 <놈놈놈> 같은 블록버스터 액션 영화랑, <시월>같은 로맨스 영화, 그리고 <시험>까지요.”

한록이 청문회로 묶여있는 사이 최대리에게 부탁했던 것. 그건 바로 <시험>에 대한 작은 실험이었다.

“<시험>은 한국 역사를 바탕으로 한 사극이니까 반응이 좋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사람들이 가장 재밌어 보인다고 하더라고요. 최근 <부산열차>가 반응이 좋았으니까요. 특이한 좀비 영화를 찾는 사람들이 아직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최대리의 미국을 대상으로 한 실험을 통해 선정된 영화 <시험>. 최대리가 인터넷의 반응 몇 개를 추려서 말하기 시작했다.

“대체적으로 ‘서양권이 아닌 좀비 영화가 보고싶다’ ‘옷이 멋지다’ ‘옛날 배경이라서 좋다’는 말이 많더라고요. <시험>이 사극이라서 사람들이 싫어할 줄 알았는데, 그 반대예요. 오히려 배경 때문에 더 흥미를 가지는 것 같아요.”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좀비 영화’라는 점에서 사람들의 눈길을 끈 <시험>. 그러나 문제가 있다면...

“오, 그래? 개봉하면 많이 들어올까?”

“아뇨.”

“왜?”

현차장의 말에 최대리가 답했다.

“댓글 결론이 이거 거든요. ‘넷플릭스에 이런 게 나왔으면 좋겠다.’”

“아...”

그 말에 현차장이 탄식을 내뱉었다.

넷플릭스.

소규모 영화의 희망인 동시에, 절망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스트리밍 서비스. 아니...

“넷플릭스는 못 이기지...”

이제 어엿한 영화회사 중 하나.

넷플릭스가 보편화 된 후, 사람들은 영화관에 가는 것을 크게 줄이기 시작했다.

넷플릭스만 있다면 집에서, 원하는 시간에, 거의 비용을 들이지 않고 영화를 볼 수 있다. 그러다보니 ‘영화관에서 영화를 봐야하는’ 이유가 크게 사라진 것이었다.

“<시험>은 특이한 영화니까 더 불리하죠. 재밌을 거란 확신이 없잖아요. <시험>에 관심있는 사람도 비싼 돈 내고 영화관 가는 것보다, 기다렸다가 극장에서 내리면 넷플릭스에서 보는 걸 선택할 거예요.”

액션. 블록버스터.3D. 시리즈물. 혹은, 엄청난 재미가 보장된 대작.

그에 해당되지 않으면-

‘기다렸다가 넷플릭스로 보지, 뭐.’

사람들은 이제 모든 영화가 넷플릭스에 들어오길 기다린다.

그렇게 손익 분기점을 넘기지 못한 영화가 벌써 여럿이었다.

“넷플릭스한테 뺏길까봐 3억을 주고 사 온 시나리오입니다. 이대로 넷플릭스 좋은 꼴만 만들어줄 순 없죠.”

그래서 이번에 한록이 설정한 목표는 바로 ‘넷플릭스를 이기는 것’.

“<시험>은 개봉이 끝나고 넷플릭스로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사람들에게도 영화관에서 보거나, 아니면 볼 수 없다고 알릴 거고요.”

영화관에서 보거나.

아니면, 아예 영화를 볼 수 없거나.

그 둘 사이에서 사람들을 영화관으로 끌어와야한다.

“지금부터 그 방법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시험>의 사활을 건 회의가 시작되었다.

*

“좀비영화로 유명한 헐리웃 스타를 섭외하는 건 어떨까요? <시험>이 영화관에서 볼 만한 작품이라고 직접 말하게 하는 거죠.”

“유명한 사람이 말한다는 것 만으로 사람들이 설득되진 않을 겁니다,”

“한국에서 미리 개봉하고, 사람들이 재밌어하는 반응을 수출하면요?”

“영화관으로 끌어오는 유인책이 될 순 있겠죠. 하지만 효과가 크진 않을 겁니다.”

모두 열과 성을 다해 참여하고 있는 회의. 그러나 의욕적으로 의견이 나오는 것에 비해, 막상 ‘이거다’ 라고 할 만한 아이디어는 보이지 않았다.

“으음...어렵네. 넷플릭스를 이겨야 한다니.”

영화계의 동반자이자 영원한 숙적, 넷플릭스. 그 넷플릭스를 물리치고 사람들을 영화관으로 끌어와라.

‘대체 어떻게 해야하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한록의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 그리고 핸드폰을 확인한 한록의 얼굴이 밝아졌다.

“이팀장. 무슨 일 있어?”

잘 풀리지 않는 회의와, 그 회의 중 무언가를 보고 반색을 하는 팀장. 그런 한록의 모습에 현차장이 큰 기대를 가지고 물었고, 한록이 답했다.

“네.”

“뭔데?”

그리고 한록의 답은.

“점심시간입니다.”

직장인이 가장 행복해하는 순간을 알리는 것이었다.

*

“아직 11시50분인데. 벌써요?”

“네. 우리 팀도 좀 빨리 나가는 걸로 합시다.”

최대리의 어리둥절한 얼굴에 답하는 한록. 이건 한록이 아주 오래 전부터 꿈꿔오던 일이었다.

-이과장. 상무이사 되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게 뭐야?

-점심시간을 늘리고 싶습니다.

CK ENM은 회사가 몰려 있는 강남 한복판에 위치해있었고, 그만큼 점심시간마다 식당들은 전쟁통이나 다름이 없었다.

‘10분 일찍 나오면 평양옥에 갈 수 있다.’

‘하지만 10분 늦게 나오면 분식집이다.’

고작 10분 차이로 오늘의 메뉴가 결정되는 강남 근무 회사원의 삶. 그래서 몇몇 부서는 부서장의 재량으로 조금 일찍 자리를 비우는 걸 허락해주었다.

‘때 되면 나가라.’

하지만 냉철한 걸로 유명한 정부장에게 융통성이란 존재하지 않았고, 마케팅 부서 사람들은 늘 허겁지겁 달려나가 점심을 먹고는 했다.

“다들 식사하러 가세요. 빨리요.”

그리고 정부장의 상사가 되자마자 점심시간을 늘려버린 한록.

“...진짜 일찍 보낼거냐?”

“네.”

회의실에서 나선 한록이 해외팀으로 향해 점심시간을 알리자, 자리에서 내부 안건을 처리중이던 정부장이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한록의 답에 정부장의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요즘 애들이란.’

이란 말이 적혀있는 듯한 정부장의 얼굴.

“난 다 끝내고...”

그리고 정부장이 ‘난 됐어’라고 말하려 할 때-

“부장님. 오늘은 저희랑 같이 드시지 않겠습니까.”

“...너희랑?”

“네. 저희랑요.”

한록이 비장의 카드를 하나 꺼냈다.

*

며칠 전, 정부장을 제외한 마케탕 부서 사람들의 대화. 한록의 말에 현차장이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물었다.

-진짜? 진짜 점심시간 10분 당길 거야? 정부장님이 싫어하실 거 같은데.

-어쩔 수 없습니다. 밥이 더 중요하죠.

-그래! 이제 이팀장이 상사잖아. 그냥 눌러버려! 밥도 눈치 보면서 먹게 하고, 나 정부장님한테 아주 쌓인게 많았어!

-...차장님 원래 이런 스타일이셨나요?

-흠, 큼.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밥 얘기 앞에 순간 진심을 말해버린 현차장. 그가 얼른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정부장님은 아마 시간 지키실 거 같은데. 사람들한테 신경쓰지 말라고 말해놔야겠다.

-아뇨, 부장님도 달라지실 겁니다.

-엉? 어떻게?

그 말에 대답을 한 건 한록이 아니라 유선이었다. 유선이 아주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점심시간을 즐기는 법을 알려드리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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