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181화 (162/263)

서명. 마케팅부 일동.

“도우러 왔습니다, 팀장님.”

어딘가 익숙한 최대리의 말. 그 말에 한록은 며칠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도우러 왔습니다.’

이 말은, 그러니까...

‘<수면>을 대상만큼 유명한 영화로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자신이 시상식 전 최대리에게 했던 말이었다.

최대리는 그 말을 돌려주러 온 것이었다.

*

“감사에 요청하신 자료를 전달하러 왔습니다.”

영도와 눈을 마주치며 말하는 최대리. 최대리를 이 자리로 부른 것은 바로 영도였다.

며칠 전 한록과 최대리는 짧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팀장님. 문오석 본부장님이 팀장님에 대해 물어봤어요.’

한록과 깊게 엮이지도 않았으며, 한록을 대체할 수 있을 유일한 사람, 최대리.

최대리는 한록이 생각하기에도 문오석이 가장 먼저 접근할 만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최대리는 한록에게 문오석이 벌이고 있는 일에 대해 말해주었고...

‘제가 도울 일이 있겠어요?’

오히려 한록을 도와주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아니에요. 대리님은 이 일에 끼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나 최대리의 말에 선을 그은 한록.

현차장, 유선, 영도는 자신과 긴밀한 사이다보니 이 일에 얽힐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 외의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싶진 않았다.

본부장, 그리고 외부 회사와 언론까지 얽힌 일. 자신은 몰라도, 평범한 사람은 이 일에 휘말리면 살아남기가 어렵다는 게 뻔히 눈에 보이기 때문이었다.

‘형. 사람들을 더 모으자. 그 최대리란 사람도 설득해 봐.’

‘영도야. 다른 사람들까지 끌어들이진 말자. 아무리 확실한 증거가 있어도 위험한 일이야.’

그래서 한록은 영도가 최대리를 데려오자고 했을 때도 명확히 거절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영도는 기어코 최대리를 이곳에 데려왔다.

“어떤 자료입니까?”

“이번 사건에 대한 의견서입니다.”

최대리가 한록에게 확실한 도움이 되리란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팀장님. 이걸로 은혜는 갚았습니다.”

한록이 최대리의 파일을 받아들었고, 그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12월 23일. 이번 한국영화대상과 해외팀 구성에 대해 의견을 밝히고자 함.”

최대리가 만들어온 파일. 그건 바로...

“해외팀 선발은 공고에 제시된 기준으로 선발되었으며, 앞으로 두 차례 더 선발과정이 남아있음. 선발과정은 해외팀 구성원들과 논의하에 진행되었으며, 이한록 팀장 개인의 의견이 반영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움. 마케팅부 송윤아 과장 및 하선우 대리.”

항상 한록의 편을 들어주던 마케팅부 송과장과 하대리.

“스크린 X에 활용할 영상을 제작할 때, 평균적으로 소요되는 금액은 3억 선이다. 이번 한국영화대상에서는 4개의 영상으로 20억이 소요되었으나, 이는 제작기한이 일주일임을 감안하였을 때 상식선의 가격이라고 할 수 있다. 마케팅 부서 박철민 과장.”

한록을 오해하고, 그에 대해 미안함을 느끼던 박과장.

“최근 음악사업본부 역시 영상제작에 30억을 사용하였고, 공연사업본부 역시 17억을 사용하였음. 또한 KBC와의 계약 과정 역시 회의를 통해 진행되었으며, 모든 과정이 회의를 통해 결정되었음을 밝힘. 마케팅 부서 최윤일 대리 및 정민석 부장.”

최대리와 정부장. 그리고...

“서명. 정민석. 최윤일. 박철민. 송은주. 하선우 외 마케팅부 일동.”

마케팅부 사람들이었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 이 곳에 없는 사람들마저.

“이에, 위 참고인들은 이번 감사에 대해 이한록 팀장에 대한 지지를 표명함.“

모두 한록을 위해 직접 나서준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한록의 손목에 묶인 실들이 환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정부장. 현차장. 유선. 영도. 최대리. 송과장. 박과장. 하대리. 그들과 엮인 실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빛을 뿜어낸다.

마치 자신들이 여기에 있다는 걸 알리기라도 하듯이.

‘이제는 모든 게 달라졌다.’

회귀 전과 똑같은 상황. 그러나, 예전과는 다르게 자신의 편에 서 준 사람들.

눈이 부실 정도로 강한 빛을 뿜는 실들에 한록은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한록이 하태준을 바라보았고, 기쁨과 자부심, 그리고 벅차오르는 감정들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회장님. 이게 부족한 제가 팀장이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팀원들을 잘 통솔하고 있다는 건가.”

“아뇨.”

그 어느 때보다 빛나는 손목의 실들. 그리고 그 실이 이어진 사람들. 회의실에 모인, 자신의 사람들.

그 사람들을 돌아보며 한록이 말했다.

이제는.

“제가 부족해도 저를 도와줄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고.

*

‘내 곁에는 믿을 수 있는 동료들이 있다’는 한록의 말.

그 말에 하태준이 의견서를 바라보았다.

[서명. 정민석. 최윤일. 박철민. 송은주. 하선우 외 마케팅부 일동.]

임원이 엮인 감사. 이쯤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몸을 사리기 바쁘다. 그런데 마케팅 부서 사람들은 한록을 위해 적극적으로 의견서를 제출했다.

‘...이런 일은 오랜만이군.’

하태준은 한록의 능력을 알고 있었으나, 동시에 여러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너무 젊은 나이. 지나친 혈기. 자신감, 혹은 자만심. 그로 인한 벌어질 많은 불화들. 예를 들어, 오늘 같은 일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한록의 편을 들고 있다.

한록은 여전히 젊고, 여전히 건방지고, 여전히 여유가 없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한록을 따르고 있다.

한록을 믿고 있다.

“그래.”

오늘 자신의 눈으로 확인한 광경에 하태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사람들 덕분에 살아남은 거다.”

그리고 몸을 돌리더니, 회의실 밖으로 향했다.

“회장님! 감사는-”

“뭘 더 물어봐?”

하태준을 다급하게 따라가서 묻는 성팀장. 하태준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팀장에게 말했다.

“끝내!”

그리고는 회의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

하태준의 등을 바라보던 성팀장이 말했다.

“이번 감사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그리고는 하태준을 얼른 뒤따라갔다.

*

“...형!”

성팀장과 감사팀이 하태준을 따라 나가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영도. 영도는 그간 얼마나 마음 고생을 했는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현차장이 한록에게 말했다.

“이팀장. 수고했어.”

한록을 지나치며 어깨를 두드리는 현차장, 정부장. 그리고 고개를 꾸벅 숙인 유선, 다들 하고싶은 말이 많았지만 영도를 위해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었다.

“정말로...고생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유선이 한록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직 회사생활도 버거울 신입인 유선. 그런 유선이 자신을 위해 나서주었다는 사실에 한록 역시 진심으로 고개를 숙여 답했다.

“고마워요, 유선씨.”

“네, 팀장님.”

그 말에 유선이 어딘가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내일도 회사에서 봬요.”

내일 회사에서 보자.

회사원들에게는 가장 듣기 싫은 말이지만, 오늘은 정말로 듣고싶었던 말. 그 말에 한록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내일 봐요.”

*

모두가 나간 회의실. 영도는 울음을 참기 위해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배고프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한록이 일부러 가벼운 목소리로 영도에게 말을 건넸다. 그러자 영도가 한록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형. 나 잘했지.”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겠다던 말을 지킨 영도. 그런 영도의 모습에 한록이 답했다.

“넌 항상 잘했어.”

길고 긴 악연과, 몇 번이나 자신을 붙잡던 상처들. 그리고 오늘 이 모든 걸 끝내준 영도와 사람들.

그들에게 한록이 진심으로 말했다.

“고맙다.”

*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후 회의실을 나선 한록와 영도.

영도는 짐을 챙기기 위해 사무실로 향했고, 한록은 먼저 로비로 내려왔다. 밖은 어두워져 있었다. 그때 로비에서 한록을 부르는 누군가.

“팀장님. 사람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신다니까.”

최대리였다.

“이거, 요청하신 <시험> 자료요.”

한록에게 서류를 내민 최대리. 최대리는 한록이 없는 동안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그 공백을 채워주고 있었다.

최대리가 내민 서류를 바라보던 한록이 말했다.

“위험한 일인데 왜 끼어 드셨습니까.”

“이럴 땐 고맙다고 해야죠.”

“고맙습니다. 왜 끼어 드신 겁니까.”

“내가 말을 말아야지, 진짜.”

한록의 말에 최대리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일이 잘 끝나지 않았으면 최대리님도 휘말리게 됐을 겁니다.”

“알아요. 저도 알고, 박과장님도 알고, 송과장님도 알고, 정부장님도 다 알아요.”

“그런데 왜...”

“우리도 팀장님한테 도움 받았으니까요.”

한록의 말에 최대리가 산뜻하게 답했다.

일에서 문제가 생기면 가장 먼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 그래서 부서의 해결사로 불리고 있는 한록.

“제가 부채질 하긴 했지만, 강요한 건 아니에요. 다들 팀장님한테 고마운 게 있어서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다음부턴 도와달라고 해요.”

그런 한록한테 모두 조금의 도움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

미처 알지 못했던 사람들의 속마음을 전해들은 한록은 당황한 얼굴로 최대리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최대리가 친근하게 웃으며 한록의 어깨를 쳤다.

“다들 도와주러 올 거예요.”

언젠가, 현차장이 한록에게 했던 말.

‘이대리. 이대리는 속얘기를 좀 해. 힘들다고 말해도 돼. 도와달라고도 해도 되고.’

그리고 오늘 최대리와 사람들은 아직도 서툰 자신에게 또 한 번 손을 내밀어주었다.

누군가를 돕고, 또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는 것. 예상보다 훨씬 따뜻하고 든든한 경험에 한록이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최대리님.”

“네.”

“다음에도 도와주세요.”

그 말에 최대리가 아주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요.”

그리고는 한록에게 손을 한 번 흔들더니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

최대리와 인사를 하고, 영도와 만나서 회사 밖으로 향하는 한록.

그 모습을 7층의 구름다리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다.

“회장님.”

하태준. 그리고 감사를 마치고 나온 최경준이었다.

“또 살아남았군.”

“제가 누구입니까.”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하태준에게 답하는 최경준. 그 모습에 하태준이 익숙한 사람을 떠올렸다.

“이한록과 똑같은 말을 하는군.”

“이한록이 저랑 똑같은 말을 하는 거겠죠.”

그렇게 말하며, 최경준 역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한록과 영도를 지켜보던 최경준이 하태준에게 물었다.

“오늘 감사는 어떠셨습니까.”

그 말에 하태준은 오늘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속절없이 무너지던 문오석. 한록의 편을 들던 마케팅 부서 사람들. 태연한 태도로 회의실에 들어오던 최대리. 그리고, 자신의 뒤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음을 말하던 한록.

그들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냐면.

“하정엽 그 놈이 생각보다 보는 눈이 있더군.”

한록을 고른 아들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 녀석이 여기는 자기 회사라고 말했지. 그 말에 체면치레는 했어.”

아니, 사실은 그 이상이었다. 하정엽이 이끌어가는 회사는 여전히 불안했고, 끊임없이 잡음이 생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름대로의 모습을 갖춰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자신이었다면 절대 만들지 못할 모습이었다.

투명한 로비 외벽 너머로 보이는 밤하늘. 그리고, 각자의 길을 찾아 떠나는 최대리와 한록. 그들을 보던 하태준이 말했다.

“새로운 시대가 왔다는 말.”

언젠가 최경준이 했던 말.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몰라.”

이제는 그 말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

그 날 저녁. 모두가 집으로 돌아간 시간.

-철컥.

아주 조용히 한록의 개인 사무실에 들어온 사람이 있었다.

아무도 없는 밤에 한록의 사무실에 찾아와서, 책상 위에 있는 무언가를 뒤지는 사람. 그 수상한 사람은 바로-

[이 시간에 회사를 또 간다고? 형 미쳤어?]

[내일 아침까지 끝내야하는 일이 있어서 그래.]

[미쳤구만.]

한록이었다.

불이 꺼진 어두운 사무실에 앉은 한록. 한록의 책상 위에는 세 개의 파일이 올려져있었다. 오늘 최대리가 전해주고 간 결재서류였다.

과거 한록의 가장 큰 커리어였던 <식물>의 제작비 증액 요청 서류. 한록이 가장 처음으로 미국에 데려갈 영화인 <시험>의 마케팅 계획서. 그리고, 서감독이 기획하고 있는 새 영화의 시나리오.

파일들을 살펴보던 한록이 고개를 들었고, 자신의 불 꺼진 사무실을 바라보았다.

새로운 사무실. 새로운 팀. 새로운 동료.

그리고, 새로운 영화들.

이제는 이전에는 해 볼 수 없었던 도전을 해볼 때다.

‘이제 진짜 시작이다.’

한록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모든 일이 끝난 다음 날 아침.

한록은 최경준의 사무실을 찾았다.

“그간 고생이 많았네.”

최경준이 짧게 인사를 건넸고...

“하지만 이제는 또 달려볼 시기지.”

바로 다음 목표에 대한 얘기를 시작했다.

“<시험>이 내가 아주 비싸게 사온 시나리오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겠지.”

<시험>은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좀비 사태에 대처하는 세자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영화였다.

원래는 넷플릭스에 드라마로 팔릴 뻔한 시나리오였으나, 최경준이 이를 초기에 발견하고 거액을 주고 사 와서 영화로 바꾸었다.

최경준이 엄청난 기대를 가지고 각별하게 생각하는 영화이자, 해외팀의 첫 출범을 알리는 영화.

“<부산열차>가 잘 끝났으니 <시험>에 대한 기대도 꽤 크다네. 어떻게 내 기대를 충족할 생각인가?”

그 영화로 대체 어떤 결과를 만들 것이냐는 최경준의 질문.

그 질문에 한록이 자신있게 답했다.

“<시험>은 넷플릭스를 물리치고 사 온 영화아닙니까.”

“그렇지.”

“그렇다면, 라이벌은 정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설마...”

기대, 그리고 놀라움은 담은 최경준의 말. 최경준의 말에 한록이 답했다.

“네.”

CK 최초의 해외팀. 그곳의 첫 목표.

“<시험>으로 넷플릭스를 이겨보겠습니다.”

그 목표가 방금 설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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