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우러 왔습니다, 팀장님.
“대면 감사 시작하겠습니다.”
성팀장의 말과 함께 시작된 감사. 그때 누군가 허락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잠깐.”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정부장. 그리고-
“회장님!”
하태준이었다.
하정엽도 영향을 발휘하지 못하는 감사팀의 감사. 그 곳에 함부로 문을 열고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CK그룹의 회장인 하태준뿐이었다.
“회장님, 여기는 어쩐 일로...”
“그만. 감사 시작해.”
성팀장의 말에 하태준이 냉정한 목소리로 답했고, 정부장이 끌어온 의자에 앉았다.
‘내 회사에서 일어난 일이 어떻게 끝나는지 지켜보겠다’는 하태준의 눈빛.
그 눈빛에 한록과 문오석은 생각했다.
지금 이 자리는 한록의 시상식에서 문제가 있었는지 증명해야 하는 자리가 아니다.
이 자리는.
“...그럼 감사 시작하겠습니다.”
상대의 공격에서, 내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회장 앞에서 증명해야 하는 자리다.
누가 잘못을 했는가. 그리고, 누가 싸움에서 이기는가. 그걸 목격하기 위해 직접 감사에 참여한 하태준.
그렇다면...
-시작부터 제압해야 한다.
둘 모두 그런 생각을 했을 때.
“감사 전에 말씀드릴게 있습니다.”
문오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얘기는 차차 듣도록 하겠습니다.”
성팀장이 문오석을 말렸으나, 문오석은 신경도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이한록 팀장은 원래 한국영화대상이 지불해야 하는 20억의 제작비를 우리 회사에 부담시켰습니다. 또한, 외주 업체 선정과정에서도 똑같은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문오석 본부장. 차례를 지켜서 얘기하세요.”
“제작업체 선정 당시 여러 개 업체에서 컨택을 햇으나, 이한록 팀장이 ‘원하는 업체가 따로 있다’며 제안을 거절했다고 합니다.”
“문오석 본부장.”
“그리고 이한록 팀장은 이에 반발하는 인사들을 해외팀에서 제외시켰습니다. 직위를 남용해 회사에 큰 손해를 끼치고, 이를 지적하는 조직원들에게 불이익을 준 것입니다.”
“문오석 본부장. 마지막으로 경고하겠습니다. 그만하세요.”
“그리고 이 모든 일에 증거가 있습니다.”
그 말에 문오석을 말리던 성팀장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문오석에게 물었다.
“어떤 증거입니까.”
문오석이 잠깐 시선을 돌려 한록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의 증언입니다.”
그 말에, 문오석의 옆에 앉아있던 양차장이 입을 열었다. 시상식에서 <상처>와 관련된 소식을 문오석에게 전달했던 사람이었다.
“예선전 이전에 다수의 방송사가 CK에 협업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이한록 팀장이 꼭 KBC와 협업을 해야한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양차장.
“영상제작에 20억이나 들었던 것 역시 내부에서 의혹이 있었습니다. 다수의 업체가 15억 이하의 가격을 제안했으나 이한록 팀장이 가장 높은 가격을 제시한 업체를 선정하였습니다.”
그 옆의 염과장.
“이한록 팀장과 KBC 예능국장이 사적으로 만남을 가진 것을 본 사람이 있습니다.”
그 옆의 나팀장까지.
문오석의 사람들. 그리고 한록에게 악감정을 지닌 사람들. 그들이 없는 얘기를 지어내고, 사실을 부풀려서 한록을 비난하기 시작한다.
가장 시청률이 높을 방송국을 선정하기 위해. 가장 완성도가 높은 업체를 선정하기 위해 한록이 고려했던 사정들. 회의에서 모두 얘기했던 부분이었으나, 이제는 그 말에 거짓이 섞여서 한록을 공격하고 있었다.
회귀 전과 똑같은 상황이 한록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었다.
‘늘 똑같이 구는군.’
그 모습에 한록이 잠시 눈을 감았다.
*
굳은 표정의 한록. 주의깊게 사람들의 말을 기록하는 성팀장과 감사팀.
그리고 아주 차가운 표정의 하태준까지.
하태준의 표정을 보고 문오석이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가슴부터 시작되는 이 잔인하고 즐거운 감각.
‘승기가 돌아왔다.’
이한록을, 그리고 최경준을 죽일 수 있는 순간은 바로 지금이다.
그렇게 판단한 문오석이 입을 열었다.
“자세한 내용을 증언해줄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그 말에 문오석이 영도를 바라보았다.
*
‘현주훈. 김유선은 믿을 수 없다.’
며칠 전 문오석이 감사를 알리는 문자를 받고서 했던 생각.
현차장과 유선은 자신의 말을 따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답을 들었음에도 알 수 없는 의심이 피어올랐다.
‘내가 실수를 했을 수도 있다.’
‘이런 일에 넘어올 녀석들이 아닐 수도 있다.’
정보를 수집할수록 들려오는 현차장과 유선에 대한 칭찬. 그것들을 듣고 있자면, 자신이 사람을 잘못 골랐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한록이 생각보다 믿을만한 녀석들을 곁에 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문오석을 이 자리에까지 올려주었던 그의 감과 안목. 그것들이 위기상황에서 비상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유선. 현차장이 생각보다 좋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생각보다 한록을 신뢰하고, 그래서 한록의 편에 설 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영도는 아니지.’
하지만 김영도는 그럴 만한 사람이 못 된다.
한록에 대한 얘기를 들을 때 영도의 눈에서 보이던 질투심. 그 질투심을 보는 순간 문오석은 생각했다. 김영도는 절대 한록에 대한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없다. 김영도는 자신의 유혹을 거절하지 못한다. 김영도는 올바른 선택을 하지 못한다.
김영도는 고작 이 정도의 인간이니까.
‘평생 질투하던 사람. 그 사람한테 네 손으로 복수할 기회를 주마.’
“증인은...”
문오석이 영도를 보며-
“김영도 주임입니다.”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
회장의 앞에서, 온 회사가 얽혀있는 비리를 밝혀야하는 입장에 처한 영도.
몇 번이나 상상하고 연습했던 순간임에도...
‘무섭다.’
두려움과 부담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실수가 있다면. 문오석이 이 싸움에서 이긴다면. 모든게 성공해도, 회장의 눈밖에 조금이라도 난다면.
‘이 회사, 아니 이 업계에서 다시는 발도 붙이지 못할 거다.’
어느새 영도의 마음을 가득 채운 두려움.
하지만 그럼에도 말해야한다.
‘영도야. 할 수 있어.’
한록이 곁에서 자신의 손을 잡아주고 있었으니까.
그 사람에게 정말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약속했으니까.
한록을 보고 있던 영도가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문오석을 바라보았다.
‘너는 절대로 사실을 말하지 못해.’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 자신이 성장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 그래서 누군가를 배신할 거라 말하는 사람. 그런 그에게.
“문오석 본부장의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줄 때였다.
*
‘...김영도.’
영도의 말에 크게 당황한 표정의 문오석. 그런 문오석의 앞에서 영도가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이 일을 꾸민 건 문오석 본부장입니다. 이한록 본부장이 해외팀에서 저를 제외했으니, 그에 대한 보복을 할 기회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제게도 똑같은 제안을 했습니다.”
“저도 똑같은 제안을 받았고, 그래서 감사에서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영도의 말에 힘을 실어주는 현차장과 유선까지.
상황은 문오석의 예상과 전혀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현차장, 유선이 노선을 바꿀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했다. 그러나 영도가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처음 듣는 얘기입니다. 김영도 주임이 이한록 팀장과의 친분 때문에 거짓말을 하고 있군요.”
상황을 파악한 문오석이 재빠르게 발을 뺐다. 어차피 지금 이뤄지는 모든 대화는 누군가의 주장일 뿐, 아무런 증거가 없다는 사실을 파악한 것이다.
문오석의 말처럼, 이 일에는 어떤 증거도 없다. 이 일은 그저 사람들의 말로 진행되는 진흙탕 싸움이었고, 조금만 실수를 하면 패배해버리는 게임이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내 편을 들어주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 나서주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자신이 보답할 차례다.
그런 생각 속에, 여태 침묵을 지키고 있던 한록이 입을 열었다.
“증거가 있습니다.”
“또 누군가의 증언입니까?”
“아뇨.”
그리고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며 말했다.
“부정할 수 없는 진짜 증거입니다.”
한록이 품에서 꺼낸 것은 파일 하나. 그리고...
[안녕하십니까. CK ENM 이한록 팀장입니다.]
[한국신문 이남주 기자님 맞으십니까.]
문오석의 사주를 받은 기자와의 대화가 담긴 녹음기였다.
*
“문오석 본부장이 영화사업본부에게 타격을 입히기 위해 여론을 조작했다는 증거입니다.”
한록의 말과 함께 시작된 녹음파일.
[안녕하십니까. CK ENM 이한록 팀장입니다. 기자님이 시상식에 대해 작성하신 기사를 확인했습니다.]
[...용건이 뭡니까. 기사 내용에 불만을 얘기하시는 거라면, 언론 탄압으로 보도를...]
[그런 말을 하실 상황이 아닐텐데요.]
한록이 기자의 말을 자르며 답했다.
[그간 기자님이 CK에 대해 작성하신 기사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한록은 이남주 기자가 CK에 대해 작성한 기사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2008년 7월 17일. 홈쇼핑사업본부의 독립에 대해 보도하셨군요. 아직 내부에서 회의가 진행되던 일인데 내용을 유출하셨습니다.]
[그건-]
[얘기 안 끝났습니다. 2009년 9월 2일. 홈쇼핑 사업본부 조직개편 건. 2014년 3월 21일. 공연사업본부의 해외 계약건. 올해 10월 18일 영화사업본부의 시상식건. 모두 회사 내부에서 기밀로 진행하던 일을 기사로 보도하셨군요.]
CK내부에서 진행되던 일을 유출한 기사들.
[2021년 2월 16일. 영화사업본부의 횡령건. 2017년 4월 8일 홈쇼핑 사업본부의 소비자 정보 유출 사건. 2019년 5월 29일 홈쇼핑 사업본부의 블랙리스트 사건.]
한국신문에서 크게 논란을 키웠으나-
[기자님이 보도하셨고, 모두 사실이 아닌 일로 밝혀진 기사들이고요.]
거짓말이 섞여서 작성된 기사들까지.
[누군가 기자님에게 CK의 내부정보를 유출하고 있고, 기자님은 그걸 가지고 가짜 기사를 작성하고 있습니다. 분명 대가를 받으셨겠죠.]
한록의 말에 이남주 기자는 답이 없었다. 자신에 대한 모든 정보를 조사해온 한록.
[여태 뇌물을 받고 기사를 작성하셨단 겁니다.]
이제 더 이상 빠져나갈 틈이 없다는 걸 눈치 챈 것이다.
[기자님에게 제안을 드리겠습니다.]
침묵에 빠진 이남주 기자에게 한록이 말했다.
[첫 번째. 여태까지의 악의적 기사에 대해 정정보도를 올리세요. 그렇다면 이 일은 크게 키우지 않고 넘어가겠습니다. 두 번째.]
[기자님한테 이 일을 사주한 사람이 누군지 밝히세요.]
그 말과 함께, 한록이 들고 있던 파일을 문오석에게 던졌다.
“내일 한국신문에 실릴 정정보도입니다.”
[8일 개재된 CK 예선전에 관한 정정보도를 알립니다.]
[17일 개재된 한국영화대상에 관한 정정보도를 알립니다.]
책상 위로 흩어지는 이남주 기자의 정정보도.
그리고...
[말씀하세요, 기자님.]
[누가 기자님한테 이 일을 사주했습니까.]
[......문오석 본부장입니다.]
녹음기 속, 이남주 기자의 자백이 이어졌다.
*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저한테 누명을 씌우려는 작전입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말하는 문오석. 언제나 침착하고 비열한 그의 얼굴에 오늘 처음으로 당황이 스쳐 지나갔으나, 하태준이 문오석의 말을 자르고 말했다.
“오늘 감사는 여기서 끝내. 문오석은 다른 방으로 데려가고.”
감사대상이 한록에서 문오석으로 바뀌었음을 뜻하는 하태준의 말.
“회장님! 전부 조작입니다!”
상황을 눈치챈 문오석 역시 하태준에게 외쳤으나...
“조용히 하고 감사팀을 따라가.”
하태준은 아주 차갑게 답했다.
“너희끼리 싸움에서 끝냈어야지. 이 일에 회사를 끌어들였군. 그러고도 무사하기를 바라다니.”
하태준의 눈에 담긴 차가운 분노.
그 말에 회의실에 있던 모두가 생각했다.
‘이제 문오석은 끝났다.’
하태준이 이 일의 원인을 문오석으로 판단했고, 문오석이 여기서 어떻게 나오든 돌파구는 존재하지 않을게 분명했다.
“감사는 내가 직접 진행하지.”
하태준이 문오석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그리고...
“이한록.”
이제는 한록을 바라보았다.
“너에 대해 끊임없이 논란이 생기는군. 그건 네가 다른 사람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지.”
하태준이 이 자리에 온 목적. 한록을 시험하기 위해서.
한록은 이제 그 앞에서 자신의 쓸모를 증명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네가 제대로 해외팀을 이끌고 나갈 수 있을거라 증명할 수 있나.”
회장이 자신을 지켜보는 상황. 그 앞에서 자신이 가진 존재 이유를 말해야한다.
회의실에 모인 모두가 침묵 속에 한록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때.
“실례하겠습니다. 김영도 주임이 요청한 참고자료를 가져왔습니다.”
누군가 겁도 없이 감사실의 문을 두드렸고, 허락도 하기 전에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임원에 대한 청문회가 이뤄지고 있는 곳에 거리낌 없이 등장한 한 사람. 그가 회의실에 들어와 한록의 곁에 섰다. 그리고 한록에게 말했다.
“도우러 왔습니다, 팀장님.”
최대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