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이긴다.
시상식 다음날, CK ENM.
[<도착지>의 대상. 예정된, 그러나 예상하지 못한.]
[헐리웃 매체에서 한국영화대상과 스크린 MAX 기술에 대한 보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수면>, 한국 영화 최초 8관왕 기록.]
[서감독의 <수면>, 베니스 영화제 초청.]
회사 전체가 매달렸던 시상식이 드디어 끝났다. 그것도 엄청난 결과로.
“영화사업본부 연말 인센티브 대박이겠다.”
“거기만 나오는 게 아니라, 회사 전체에 지급될 거 같지 않아?”
“우린 완전 업혀가네.”
시상식의 성공으로 한껏 들뜬 CK ENM의 분위기. 그러나, 동시에 회사에는 묘한 불안감 또한 감돌고 있었다.
외근이 끝나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홈쇼핑 사업본부의 3팀의 직원들. 그중 누군가가 곁에 있던 동료들에게 말했다.
“다들 어제 올라온 공지 봤지?”
어젯밤 회사 내부망에 올라온 공지사항 하나.
[영화사업본부 감사 공고]
바로 마케팅 부서, 정확히는 한록과 최경준의 감사에 대한 글이었다.
회사에 감도는 묘한 불안과 긴장의 정체. 그건 어젯밤에 올라온 감사 공지 때문이었다.
‘영화 사업본부의 시상식에 문제가 있다.’ ‘20억의 사용처가 의심스럽다.’ ‘영화사업본부와 KBC에 유착이 있다.’
시상식 직전 퍼지기 시작했던 기사들.
하정엽이 온 힘을 다해 시상식에 대한 기사를 막았고, 시상식은 결국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그 뒤로 의혹들은 완전히 묻혀버린 듯 했으나, 시상식이 끝나자 이제 회사 차원에서 감사가 시작되었다.
“시상식 끝났는데 날벼락이네.”
“내려서 얘기해, 내려서.”
“에이, 뭐. 우리끼린데.”
이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끝나려나.”
“글쎄...”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누구 하나 나가게 될 것 같긴 해.”
누군가가 이 일로 끝을 보려고 하고 있다.
그때 누군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고 사람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애매한 시간에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사람. 바로...
“...팀장님. 안녕하십니까.”
한록이었다.
“안녕하십니까.”
한록의 등장과 함께 침묵에 빠진 엘리베이터. 모두가 한록의 눈치를 보느라 분위기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만큼 한록의 표정은 차갑고 싸늘했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가 마케팅부서가 있는 15층에 도착했고, 한록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하...”
한록이 사라지자 기다렸다는 듯 한숨을 쉬는 홈쇼핑본부의 직원.
‘대체 이한록은 무슨 생각이려나?’
한록이 나타나기 전 그가 가졌던 의문. 그런데 한록을 보자 그 궁금증이 조금 해결된 것 같았다.
닫혀가는 엘리베이터 문 너머로 보이는 한록의 얼굴. 그 얼굴은 각종 의혹으로 감사를 받는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얼굴이었다.
지나치게 차분하고 냉정한 한록의 얼굴.
그 모습을 보고 감사팀 직원은 생각했다.
이 일을 수면 위로 끌고 온 사람. 자신에 대한 논란에 불을 지피고, 관련자들을 소환한 사람. 누구도 빠져나가지 못할 판을 만든 사람.
이 일로 끝장을 보려는 사람.
‘이한록이었다.’
그 사람은 바로 한록인게 분명했다.
*
[감사가 진행되는 동안은 점심시간 이후로 출근을 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직원과의 교류는 금지됩니다.]
어제 저녁 한록에게 수신된 감사팀의 문자.
한록은 지시대로 1시가 넘어 회사에 출근했다.
“팀장님. 아침에 오니까...짐이 다 비워져 있었어요.”
그리고 한록의 책상은 이미 깨끗이 비워져 있었다.
어제 문자가 오기 전 감사팀이 미리 들이닥쳐서 짐을 가져간 것이 분명했다.
“유선씨. 당분간은 저랑 얘기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한록이 걱정어린 표정으로 다가온 유선에게 조용히 말했다. 앞으로 감사가 끝날 때까지는 모든 회사가 한록과 주위 사람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한록 팀장님. 개인 사무실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한록의 말에 유선이 자리로 돌아간 직후, 감사실 직원이 바로 한록을 찾아왔다.
‘이제부터 감금이군.’
말이 좋아서 개인 사무실로 안내지, 사실상 감사가 이뤄지는 동안 사람들과의 접촉을 차단하겠다는 것이다.
오과장이 감사팀에게 끌려서 회의실에 갇힐 때와 같은 상황.
그나마 한록은 임원을 달았기 때문에 ‘개인 사무실로 안내해 주겠다’는 대우를 해주고 있는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한록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감사팀 직원을 따라 사무실을 나섰다.
*
앞으로 한록의 사무실이 될 곳으로 이동한, 아니, 그 곳에 갇히게 된 한록.
회사에 이례 없는 성공을 가져온 직후 누명을 썼다. 그런 상황에서 사무실에 갇힌 한록이 하는 것은...
‘<식물>이 언제쯤 완성되려나.’
앞으로 있을 일들에 대한 생각이었다.
<식물>은 한록이 회귀 후 가장 기대하고 있는 영화였고, 이감독은 부산영화제 이후부터 <식물>의 장편 버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회귀 전, 한국 영화를 전 세계에 알렸던 영화 <식물>. 그걸 사람들에게 다시 보여줄 기회가 왔다. 그것도 회귀 전의 경험과 팀장이라는 든든한 위치를 가지고서.
‘<식물>이 개봉하기 전에 해외팀의 기틀을 다져둬야 한다.’
그러나 <식물>은 아직 제작단계였고, 지금 한록이 준비하고 있는 영화는 <시험>이었다.
‘분명 <시험>도 반응이 좋을 거야. 헐리웃이 좋아할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으니까.’
과거 한국에선 크게 성공했지만, 헐리웃에서는 주목받지 못했던 영화 <시험>. 한록은 그 영화를 이제 세계에 선보일 예정이었다.
‘감사만 끝나면...<식물>을 제작하면서, <시험> 마케팅에 들어간다.’
<시험>으로 하고 싶은 마케팅이 잔뜩 있다. 거기에 제작 권한까지 부여 받았으니 <식물>의 제작에도 참여할 수 있다. 한록이 오래 기다려왔던 일들이 바로 눈앞에 놓여있는 상황.
<시험>을 통해 한국영화에 대해 알게 될 세계의 사람들.
<식물>의 등장에 다시 한 번 열광할 영화계.
제롬.
알렉산드로.
타임 스퀘어와 그 아래에 모인 사람들...
마치 보고 오기라도 한 듯 선명하게 미래가 그려진다.
‘...답답해 죽겠네.’
하지만 지금은 감사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황.
‘빨리 <시험> 미팅 일정부터 잡아야 하는데...’
한록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 사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한록이 허락도 하기 전에 바로 문을 열었다.
“감사와 관련해서 얘기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감사팀장이었다.
*
감사팀장과 소파에 마주 앉은 한록.
회장의 오른팔이자, 회사 사람들 모두가 두려워하는 감사팀의 수장인 성팀장.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한록을 바라보다 말했다.
“이런 일에 자주 엮이시는군요.”
한록에 대한 의혹이 아니라, 한록 그 자체에 대해 묻는 질문.
한록의 자료들에서 아무런 문제도 발견하지 못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록이 성팀장의 말에 답했다.
“왜인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모릅니다.”
“그럼 문오석 본부장님은 왜 감사에 포함되었습니까.”
“그 쪽에서 영화사업본부에 대한 자료를 제시했기 때문입니다.”
“문오석 본부장님은 영화사업본부를 밀어내고 싶어합니다.”
“그건 우리가 알 바 아닙니다.”
“제 업무기록에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신 것 알고 있습니다.”
“그건 문오석 본부장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문오석 본부장도, 저도, 바보가 아니니까요. 감사로 얻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을 겁니다.”
빠르게 이어지는 한록과 성팀장의 대화. 감사팀장도, 한록도 알고 있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상대는 허튼 수작 따위는 통하지 않는 사람이다.
“저와 문오석 본부장. 둘 중 하나가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걸 밝혀야 합니다.”
한록의 말에 감사팀장이 한록을 향해 몸을 약간 숙이고 물었다.
“그래서 바라는 게 뭡니까.”
그리고 한록은 준비한 카드를 던졌다.
“대질 감사를 실행하길 원합니다.”
*
몇시간 후.
[12월 18일. 대질 감사 시행.]
한록과 문오석에게 다시 한 번 연락이 도착했다.
*
‘마지막 발악을 하는구나.’
핸드폰을 바라보는 문오석. 자신에게도 대질 감사 요청이 들어왔다. 그건 감사 중 한록이 자신을 언급했다는 걸 의미했다.
‘늦었다, 이한록. 나는 이미 준비가 끝났다.’
하지만 감사팀은 문오석에게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상황.
위기는 지나갔고, 이제는 자신이 공격을 할 차례였다.
“현차장. 본부장실로 와.”
문오석이 현차장에게 말했다.
*
“달라진 건 없어. 현차장은 그냥 내 말에 맞다고 하기만 하면 돼. 무리한 걸 시키진 않을 거야.”
“네, 알고 있습니다.”
현차장은 문오석의 말에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가봐.”
“네.”
현차장이 짧게 고개를 숙이고 문오석의 사무실을 나섰다.
그 후 유선을 부른 문오석.
“...알겠습니다.”
유선의 반응 역시 현차장과 같았다. 문오석의 말에 탐탁치 않다는 듯, 하지만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 문오석이 바라던 반응 그 자체였다.
완벽하게 자신의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는 일들. 멍청하게 감사에서 손을 놓고 있는 이한록. 자신의 설득에 한록에게서 곧장 등을 돌린 사람들.
‘모든 게 완벽하다.’
모든 게 원하는 대로 돌아가고 있었고...
‘역시 이상해.’
그 점이 문오석에게 의아함을 가져왔다.
‘나라면 이한록에게 딜을 걸었을 거야. 이한록의 편에 서고, 대신 해외팀에 자기 자리를 달라고 하겠지. 그런데 아무도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상황이 너무 자신에게 의도한 대로 흘러가고 있다. 그 사실 자체가 문오석에게 의문을 가져왔다. 문오석이 현차장과 유선, 그리고 영도의 파일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한록.’
어쩌면...
‘이 영악한 새끼.’
이 모든 게 한록의 계획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조심해야 해. 이 중 진짜 써먹을 수 있는 녀석은 김영도뿐일지도 모른다.’
문오석이 영도만 남기고 현차장과 유선의 파일을 바닥에 던졌다.
‘그리고...그 녀석.’
‘김영도. 그 녀석. 이 두 놈만 데리고 간다.’
“나야. 잠시 올라와.”
그리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
그날 저녁.
출근 때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을 피해 퇴근을 하라고 지시받은 한록. 한록은 9시가 넘어서야 사무실에서 나올 수 있었다.
아무도 없는 어두운 주차장에 도착하니 옛날 생각이 나기 시작했다.
‘그때도 이렇게 늦은 시간이었지.’
오과장이 회사에서 쫓겨나기 직전, 주차장에서 습격하던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는 한록.
오과장이 그랬던 것처럼 문오석도 자신에게 어떤 짓을 할지 모른다. 아니. 분명 문오석은 오과장보다 더욱 심한 짓을 계획하고 있을 것이었다.
‘...당분간 조심해야겠어.’
그런 생각을 할 때 누군가 한록의 손목을 붙잡았다.
‘역시.’
그리고 한록이 거칠게 상대의 손을 뿌려 치려는 찰나-
“한참 기다렸잖아요, 팀장님.”
최대리가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어왔다.
*
한록이 퇴근할 때까지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 그 사람은 바로 최대리였다.
“부탁하신 거, GH그룹이랑 얘기 끝났어요.”
빠르게 다음 영화인 <시험>을 준비해야 하지만 감사에 발이 묶여 있는 한록.
-최대리님. 시상식이 끝나면 해주셔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한록은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미리 최대리에게 부탁을 해둔 상황이었다. 그리고 최대리는 한록이 사무실에 갇히자마자 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가 조직 개편 중이라 결재가 미뤄질 수 있다고 말해놨어요. 한달 뒤까지 미팅 일정 미뤄주겠대요. 영상업체들이랑도 미팅 잡았고요. 다음주에 바로 진행하자고 하는 곳도 있던데, 제가 대신 다녀올게요.”
한록이 움직일 수 없는 동안, 대신 열심히 뛰어다녀주고 있는 최대리.
“제가 잘 처리하고 있을 테니까 팀장님은 걱정하지 마세요.”
“걱정 안 해요.”
최대리의 말에 한록이 진심으로 답했다.
최대리는 부산영화제 때는 짜증나는 인간이었고, 예선전에서는 라이벌이었으며, 시상식 때는 동료였고...
“대리님은 제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이제는 일에 있어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 자신과 싸웠던, 그러나 한록이 누구보다 인정하는 사람. 그리고 이제는 한록과 힘을 합쳐서 일하게 될 사람.
지금 당장 자신의 청문회가 잡혀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최대리와 함께 할 일들을 생각하면 두렵기보다는 마음이 들뜨기 시작한다.
“금방 끝내고 돌아올테니까...앞으로 잘해봅시다.”
한록이 기대가 담긴 목소리로 말했고, 그 말에 최대리 역시 기분 좋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럼요. 열심히 도울게요.”
“지금까지도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아뇨. 이걸로는 부족하죠. 저도 도움 많이 받았으니까.”
“무슨 도움이요?”
“<부산열차>도 <수면>도 팀장님이 도와주셨잖아요.”
한록과 함께 했던, 그리고 자신이 애정을 가졌던 영화에 대해 말하는 최대리. 그 얘기를 하는 최대리의 얼굴에선 평소의 장난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최대리는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에 대해 말할 때처럼 보기 드물게 진지한 얼굴이었다.
최대리는 어쩐지...
“저도 제대로 보답해야죠.”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눈치였다.
*
그리고 며칠 후.
한록이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리자 두 세명의 사람들이 한록의 주위를 감쌌다. 감사팀의 직원들이었다.
“팀장님. 같이 올라가셔야 합니다.”
한록이 요청한 대면 감사가 실시되는 것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감사가 이뤄지는 회의실로 향하는 한록.
중간중간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으나, 한록과 감사팀을 보고 아무도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복도. 그리고 회의실에 도착할 때까지.
모두가 한록을 보자 입을 다물었고, 황급히 발걸음을 돌렸다.
숨 막히는 정적과 침묵 속에서 회의실에 도착한 한록.
[회의실 1702호]
그 곳은 과거 오과장의 청문회가 열렸던 곳이었다.
뇌물 의혹. 누명. 대질감사를 빙자한 청문회. 감사팀의 조사. 오과장 때와 똑같은 입장으로 다시 한 번 이곳을 찾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와는 모든 게 달랐다.
“들어가십시오, 팀장님.”
이제 청문회에서 결백을 증명해야 하는 사람이 바로 한록 자신이었다.
감사팀 직원이 문을 열어주었고, 회의실의 내부가 보였다.
회의실 왼쪽에 앉아있는 문오석. 그 옆에 참고인으로 앉아있는 문오석의 사람들. 현차장, 유선, 영도.
-그리고 그들과 연결된 자신의 실.
그 실을 본 순간 한록은 깨달았다.
오과장의 청문회와 가장 다른 점. 그건 청문회의 대상이 한록 자신이라는 점이 아니었다. 그건.
‘내가 이긴다.’
‘아니, 우리가 이긴다.’
이제 자신은 혼자 싸우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야하는 감사.
그리고, 자신의 사람들과 함께 이 곳에 나타난 한록.
사람들의 실이 한록에게 칭칭 얽혀있는 가운데...
“대면 감사 시작하겠습니다.”
성팀장의 말과 함께 감사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