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살아가자.
“지켜봐 주세요.”
한록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무대에 올라간 우감독.
한록은 얼떨떨한 얼굴로 우감독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우감독이 뭘 준비한 건지, 대체 뭘 기다리란 건지, 감도 잡히지 않는 상황.
그러나 이상하게...
“흐흐흐.”
현차장은 이 상황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차장님.”
“뭐냐고 물어보지 마. 끝까지 지켜봐 달라고 했잖아.”
한록의 말을 막아버린 현차장.
“우린 그냥 지켜보자.”
그 말과 함께 우감독의 소상소감이 시작되었다.
“이곳에서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우감독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 상은 제가, 그리고 <도착지>가 받은 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옥자가 받은 상이고, 여러분이 받은 상이죠. 올 한해 열심히 한 모두에게 상을 줄 수 없으니 <도착지>가 대표로 상을 받지 않았나 합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우감독.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아.’
한록은 그제야 우감독이 준비한 게 뭔지 알 것 같았다.
우감독이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종이 한 장.
바로 한록이 작성한 것이었다.
“우리 주인공들이 보내는 편지입니다.”
우감독이 그렇게 말하며 종이를 읽기 시작했다.
*
일주일 전. 한록이 송 PD에게 요구했던 것.
-PD님. 사전 인터뷰 때 추가했으면 하는 질문이 있어요. 상을 타면 제일 먼저 감사를 전하고 싶은 사람이 누군지 물어봤으면 해요.
-아, 좋네요. 인터뷰 영상에 넣으면 재밌겠어요.
-그것도 있는데...CK에서는 다른 걸 진행하려고 합니다.
-그게 뭔데요?
-상을 타지 못한 사람들한테도 선물을 보내려구요.
한록이 예선전을 준비하면서 느낀 것. 그건 바로 세상엔 정말 좋은 영화가 정말 많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들 열심히 했잖아요. 조금이라도 보상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모두가 자신의 영화에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상식에서 빛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아주 극소수일 뿐이다.
-그러니까, 상을 타지 못한 사람들의 수상소감은 따로 모아뒀다가 선물과 함께 전달하려고 합니다.
한록은 그런 생각으로 자신이 인터뷰하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감독님은 어떤 분에게 가장 먼저 감사인사를 전하고 싶으신가요?
한록의 질문에 우감독이 곧장 대답했다.
-당연히 과장님이죠.
-가족분들이 서운해하시겠는데요.
-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진짜 과장님인걸요.
-저를 빼면요?
-그럼 우리 아들이요.
-그럼 아드님으로 하겠습니다. 전화번호랑, 주소 좀 말씀해주시겠어요?
우감독의 아들을 명단에 적는 한록.
그렇게 하나하나 수상소감을 전할 사람을 적고, 다음 타자인 현차장에게 넘긴 종이가...
“<지구 특공대>의 장감독님. 아내분한테 가장 감사하다고 하시네요.”
지금 우감독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해 여름> 촬영감독 안감독님. 부모님께 가장 먼저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부산열차>의 주인하 작가님. 시나리오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해 준 친구분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바다 마을 아래서>의 안지혁 조명감독님. 고등학교 은사님한테 소식을 전하고 싶다고 하시네요.”
시상식 후보에 올랐지만 상을 타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
그 사람들이 마음을 전하고 싶던 사람들의 이름을 대신 불러주는 우감독.
“...뭐야, 이거...”
“세상에...”
사람들은 깜짝 놀라 입을 틀어막고 우감독의 수상소감을 듣고 있었다.
단 하나의 영화를 위해 일 년을, 아니 몇 년을 달려온 이들. 그리고 오늘의 대상은 바로 그들이라고 말하는 영화 <도착지>. 올 한해 수많은 걸작이 나왔어도, 도착지가 대상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도착지는 누군가의 얘기가 아니라,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두를 위한 얘기기 때문에.
자신이 만들었던 영화의 결말. 그걸 현실로 만들고 있는 우감독.
‘최고의 결말이에요, 감독님.’
아마 오랫동안 기억하게 될 우감독의 모습에 한록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한록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 아직 남아있었다.
한록이 모르는 곳 어디선가 오간 이야기들.
-현차장님.
-네, 감독님.
-차장님은 시상식에서 상을 탄다면 누구한테 수상소감을 말하고 싶으세요?
고개를 든 한록과 우감독의 시선이 마주쳤다.
*
한록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기억 하나가 있었다. 몇 주 전 현차장이 던진 질문이었다.
-이과장. 이과장은 만약 상을 타면 누구한테 가장 먼저 얘기하고 싶어?
-제가 상을 탈 일은 없을텐데요.
-아니, 그래도. 만약이란 게 있잖아.
-음...
현차장의 질문에 한록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머니. 한서. 영도. 현차장과 유선. 최대리. 자신을 열심히 도와준 사람들. 그들에게 고맙다고 전하고 싶다.
하지만 그래도 가장 기쁨을 나누고 싶은 사람은 따로 있었다.
-과거의 저요.
한록의 말에 현차장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의외의 대답이네. 본인한테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상을 받는다는 건 아마 마케팅을 잘했다는 거겠죠? 잘했다고, 그간 잘 버텼다고 말하고 싶어요.
-그치. 이과장 고생 많았지.
회사 사람들 모두가 아는 한록과 오과장의 분쟁. 그리고 문오석까지. 그것들을 생각한 현차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과거의 이과장한테. 그간 수고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네. 그리고...
오과장. 문오석. 영도. 회귀 전의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떠올리는 한록.
하지만 이제 자신의 곁에는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고, 영도는 자신과 같은 길을 걷기로 약속했다. 한록이 사람들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아서. 다른 사람들이 한록을 믿어주어서. 한록이 변화해서.
-포기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좌절해도, 포기하지는 않아서.
그래서 한록은 그때의 멍청하고 미련하던 자신에게...
-그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요.
이제는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
우감독과 한록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 우감독이 몇 년동안 이 시상식을 지켜봐 온, 그러나 아무도 말해주지 않던 사람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현차장님 딸, 은서. 아빠처럼 멋지게 자라렴. 유선씨 할머님. 취직 축하드립니다. 정지웅군. 아버님이 항상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한록과 눈이 마주친 채로 말했다.
“마지막으로 포기하지 않아준 당신.”
지금의 한록에게.
“고맙습니다.”
그리고 5년 전의 한록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 말에 한록이 현차장을 바라보았다. 영도, 현차장, 유선, 우감독.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했던 말. 그 말이 아주 오랜 시간을 돌고 돌아서...
“이팀장. 수고했다.”
이제야 한록에게 도착했다.
*
눈부신 플래시. 수백명의 사람들. 그리고 사람들의 박수. 그 속에서 한록은 깨달았다.
회귀 전, 새로운 삶을 살게 된 후, 그리고 지금까지. 후회. 미련. 자책. 괴로움. 그 모든 것을 포함해서. 자신은 언제나.
‘그래. 나는 단 한 번도 잘못된 선택을 한 적이 없다.’
최선을 다했고, 답을 찾으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제 자신을 자랑스러워 해야 한다는 것을.
‘고맙다. 그리고 수고했다.’
한록이 오래 전의 자신에게 말했다.
*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이것으로 2022년 한국영화대상을 모두 마치겠습니다!]
사회자의 목소리. 그리고 박수소리와 함께...
“이제 끝이다!”
시상식이 막을 내렸다.
*
시상식이 모두 끝난 새벽.
“출연진 전부 이동합니다!”
시상식 공식행사인 레드카펫 백스테이지가 남아있었다. 그러나 한록과 CK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향했다.
“이팀장님! 레드카펫 뒷풀이 안 가세요?”
송PD가 다급하게 한록을 불렀지만, 한록은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네. 갈 곳이 있어서요.”
공식 뒷풀이도 생략하고 한록이 향한 곳.
“팀장님, 차장님!”
그 곳은 유선과 하대리가 기다리고 있는 세트장 주위의 술집이었다.
“팀장님. 저 할머니한테 전화 왔어요. 제가 너무 자랑스러우시대요.”
우감독의 수상소감을 듣다가 울었던 것인지, 눈이 퉁퉁 부은 채로 한록을 맞이한 유선.
“진짜 취직 잘했다고. 멋진 회사 같다고. 그래서 제가, 팀장님이랑 하대리님이랑 현차장님이랑. 다 엄청 좋은 분들이라고 얘기했어요.”
“유선씨...”
유선의 말에 한록과 현차장이 크게 감동했으며...
“너희 날 자꾸 잊어버리고 있는데?”
“...부장님 계셨어요?!”
“하여튼 이한록이랑 똑같다니까.”
정부장이 ‘이걸 죽여 살려?’란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레드카펫 백스테이지를 마다하고, CK 팀끼리 자리를 마련한 마케팅부서.
“팀장님!”
그 곳에 <도착지>의 제작진들과 우감독, 그리고 이연옥이 등장했다.
‘우리 진짜 대상타면...그러면 CK분들이랑 우리랑, 다 같이 술 한 잔 해요. 제가 살게요.’
우감독이 언젠가 했던 약속. 모두가 그 약속을 잊지 않고 찾아온 것이다.
모두가 모이자 현차장이 잔을 들고 넉살좋게 우감독에게 말했다.
“감독님. 건배사 한 번 해주세요.”
“아이, 여기 이연옥 선생님이 계시는데 제가 어떻게 건배사를 합니까.”
“나는 됐어. 이팀장이 할래?”
“부장님이랑 차장님도 계신 걸요.”
“그럼 내가 한다! 도착지로 삼행시 하나 지어왔거든. 여러분, 따라해주세요.”
“현차장. 지금 진심이야?”
시끌벅적하고 즐겁게. 그리고 조금은 유치하게 이어지는 술자리.
“저희 껴도 되는 겁니까?”
그때 누군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한록에게 말했다.
레드카펫 뒷풀이를 거절하고 방송국 근처로 향한 또다른 손님. 그들은.
“우리도 CK랑 같이 일했는데요.”
<지구 특공대>의 장감독. <삼일의 삶>의 윤감독. 그리고 <식물>의 이감독이었다.
감독들. 그리고 <지구 특공대>의 배우와 제작진까지.
사람들은 어느새 술집을 가득 채우고도 자리가 부족할만큼 늘어나있었다. 모두 CK와 한 해를 보내온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모두 한록과 실이 연결된 사람들이었다.
“감독님. 제가 한잔 따르겠습니다.”
“팀장님. 저한테 이러지 마세요. 우리는 건배나 합시다.”
한록의 근처에 앉은 윤감독. 한록이 술을 따라주려 하자, 윤감독이 웃으며 자신의 잔에 술을 따랐다. 그리고 한록을 향해 잔을 들었다.
그러자 우감독과 이감독,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함께 잔을 들었고...
“건배!”
현차장이 아주 즐거운 목소리로 외쳤다.
싸우고, 오해하고, 미워하고, 화해하고, 참고, 마침내 서로를 이해하며 손발을 맞춰온 사람들.
이제는 그 사람들과 함께 술잔을 부딪힌다.
아주 복잡하고 끈끈하게 얽힌 실을 서로의 손목에 묶고서.
“하...작품상은 분명 우리 <지구 특공대>가 탈 줄 알았는데. 서감독 때문에 다 망했어. 그 놈 미워죽겠다.”
“어, 선배. 서감독도 여기 올 거 같다는데요.”
“뭐?! 빨리 오라 그래! 와서 시나리오 어떻게 쓰는지 좀 말하고 가라고 전해!”
“미워죽겠다면서?”
“그건 그거고!”
-그러니 오늘은 즐거운 대화를 하자.
“하대리. 나 들어간다. 카드는 이한록 걸로 긁어라.”
“벌써요?”
“어. 아들이 오늘 시상식 봤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자.
“이감독님. <식물> 진행이 좀 느리게 되고 있죠. 곧 있으면 결재 나올 거예요.”
“팀장님이 그건 어떻게 아세요?”
“다 지켜보고 있거든요.”
-미처 나누지 못했던 얘기를 하자.
“유선씨...나 가야 해...은서가 문 안 열어준단 말야...”
“차장님...할머니가 진짜...진짜 저 취직 잘했다고. 너무 멋진 사람들이랑 일한다고...네? 그러셨어요...차장님...정말 감사해요. 차장님...”
“유선씨...그 말 20번째야. 이런 것까지 이팀장이랑 똑같으면 어떡해...”
-집에 들어가서, 꿈도 꾸지 말고 잠에 들자.
“안녕하세요.”
“헉.”
“어?”
“어...”
“서감독 진짜 왔네?”
“할 말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리고.
“서감독님.”
“네, 이한록 팀장님.”
“수고하셨어요.”
“다음엔 이길 겁니다.”
“아뇨. 저희 곧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어디서요?”
“같은 팀에서요.”
-내일도, 모레도.
한록의 말에 서감독이 피식 미소를 짓더니 술잔을 들고 말했다.
“그러시던가요.”
-누구보다 열심히. 누구보다 멋지게.
그 모습을 보며 한록은 생각했다.
오늘은.
정말로...
“네, 다음에 또 봬요.”
완벽한 하루였다고.
*
-그렇게 또 열심히 하루를 살아가자.
*
그리고 같은 시각. CK ENM.
문오석에게 문자가 한 통 도착했다.
[12/21일 감사팀 방문 예정.]
하정엽이 최근 있었던 일에 대해 본부에 감사를 신청한 것이다.
‘끝이다.’
문오석이 창백한 얼굴로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끝낸다.’
한록 역시 같은 문자를 바라보며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