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끝까지 지켜봐 주세요.
수상소감을 위해 무대에 오르는 한록.
‘...떨린다.’
수상을 위해 카메라 앞으로 나서는 것. 수십 번이나 TV, 그리고 멀리 관계자석에서 지켜보던 모습이다.
그런데 이제 그 무대에 자신이 올라간다.
도수가 안 맞는 안경을 쓴 것처럼 시야가 어지럽고, 모든 소리가 멀리서 들어오는 것처럼 아득해졌다.
‘그동안 내가 봐왔던 사람들이 전부 이런 경험을 거쳐왔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니 그 사람들이 얼마나 두렵고 또 설렜을지 상상이 갔다.
객석에서 무대로 향하는 5분도 되지 않는 순간. 그 짧은 순간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생각들. 한록이 무대에 오르자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
“CK ENM 최경준 본부장은 30년 이상 영화계에 몸 담으며 한국 영화계의 발전을 이끌어 냈습니다. 또한, 올 한 해 부산 영화제와 방금 감상하신 스크린 MAX 기술 발명을 추진하며 한국 영화계의 위상을 높였습니다. 시상은 한국영화협회 회장 도진형 감독이 시상하겠습니다.”
올해 CK ENM의 성과를 얘기하는 사회자와, 한록에게 다가와 트로피를 내미는 도감독.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도감독이 짧게 얘기한 후 단상을 내려갔다.
이제 무대에 혼자 남은 한록.
무대 위는 생각보다도 더 떨리는 곳이었다. 조명은 너무 강해서 눈을 뜨기 어려울 정도였고, 수백명의 관객들이 자신을 보고 있었으며 수천명의 카메라가 자신을 찍고 있다.
하지만 해야 할 얘기가 있었다.
오늘을 위해 수십일을 준비했던 얘기가 있었다.
한록이 심호흡을 한 번 한 후 입을 열었다.
“올해 CK의 활약을 알아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CK ENM은 앞으로도 부산영화제와 스크린 MAX등 다양한 방식으로 영화계에 기여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간단하게 감사 인사를 전한 한록은 이어질 말을 떠올렸다. 최경준과 준비했던 말이었다.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께 보여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스크린 MAX에 대해 자세히 말하고 와. 어떤 기술이고, 언제 상용화 될 거고, 어디에 설치될지 말이야.
제롬과 최경준에게 말했던 것처럼, 스크린 MAX를 통해 해외팀의 출범을 알릴 생각이었던 한록.
하지만 이 자리에 올라와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지금 해야 할 말은, 그리고 한록이 해외팀 출범에서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따로 있었다.
‘송PD님.’
한록이 무대 아래의 송PD와 시선을 교환했다. 송PD가 고개를 끄덕였고, 한록이 입을 열었다.
“지구 특공대.”
그 말에 다시 한번 시상식장의 바닥이 <지구 특공대>의 아스팔트로 바뀌었다.
“삼일의 삶.”
아파트 위로 밀려드는 바닷물.
“부산 열차.”
이어서 바닷물에 번지는 핏물.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록의 말과 함께...
“수면.”
다시 한번 핏빛 갈대밭으로 물든 시상식 전체.
1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눈앞에서 계속 변화하는 시상식장의 모습. 그 모습에 기자들이 미친 듯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시상식장은 카메라 셔터와 플래시 소리로 가득 채워졌다.
[앞으로 가!]
[지금 발표 장면 찍어.]
“물러나세요!”
거기에, 무대 앞까지 다가와 한록의 사진을 찍는 기자들.
한록은 그 사이에서 제롬을 바라보았다.
‘이 장면은 내일이면 전 세계로 퍼질 거다.’
전 세계 영화인 모두가 CK ENM이란 곳을 알게 되는 순간. 지금 이 순간을 위해 한록이 준비한 비장의 무기. 그건 이 시상식도, 스크린 MAX 기술도, CK가 보여줄 엄청난 재력도 아니었다.
그건.
“자랑스러운 CK ENM의 영화들입니다.”
한록이 준비한 영화들 그 자체였다.
‘나는 우리의 영화가 자랑스럽다.’
‘그러니, 이 영화들을 들고 당신을 만나러 가겠다.’
무대 아래의 제롬과 한록의 시선이 마주쳤다.
제롬에게.
이 곳에 모인 외신기자들에게.
그리고. 앞으로 자신의 영화들을 볼 모든 사람들에게.
“그럼 다음 영화로 찾아뵙겠습니다.”
한록이 인사를 건넸다.
*
수상소감, 혹은 선전포고를 마친 한록.
‘끝났다.’
그런 생각을 하며 한록은 멍하니 무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곳에는...
“오랜만에 기립박수가 나왔군요!”
윤감독. 장감독. 우감독. 그리고 한록이 담당했던 영화의 제작진들이 모두 일어나서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들을 보며 한록은 생각했다.
어쩌면, 정말...
‘지금까지, 전부 오늘을 위해서 달려온 거다.’
오늘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은 자신일지 모른다고.
“감사합니다. 이한록 팀장이었습니다.”
한록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
한록이 무대 아래로 내려오자, 이연옥이 얼른 달려와 한록에게 꽃을 내밀었다.
“내가 상을 못 타면...그럼 지금이 제일 좋은 기회 같아서. 그동안 고마웠어요.”
이제 무대를 경험해봤으니, 수상을 기다린다는 게 얼마나 무섭고 떨리는 일인지 알게 된 한록. 이제는 더 이상 ‘무조건 당신이 상을 받을 거다’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만약 상을 못 타셔도 당신은 훌륭한 배우다.’
대신 그런 말을 하려 할 때, 이연옥이 먼저 입을 열었다.
“못 타도 괜찮아요.”
[지금부터 여우주연상 후보를 발표하겠습니다. <맥박>의 이정화. <화가의 서재>의 유시윤. <도착지>의 이연옥.]
“그럼 다른 꿈을 꾸면 되니까.”
그 말과 함께 이연옥이 아주 환한 미소를 지었다.
[여우 주연상은 <도착지>의 이연옥 배우입니다.]
아주 아름다운 미소였다.
*
이연옥은 수상을 위해 무대로 올라갔고, 한록은 의자에 앉아 이연옥 수상소감을 지켜보았다.
무대 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우감독, 그리고 제작진에게 감사인사를 전하는 이연옥. 그녀의 모습은 정말 빛나는 배우 그 자체였다.
‘아름답다.’
그 장면에 흠뻑 빠진 한록과, 그런 한록을 지켜보던 제롬. 제롬이 박수를 치며 한록에게 물었다.
[나를 한국에 부른 게 이것 때문입니까. CK의 선전포고를 보여주기 위해서요.]
[아뇨. 더 좋은 영화를 헐리웃에 가져가겠다는 걸 보여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요. 영화인으로서 아주 재밌겠단 생각이 드는군요.]
씩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한록과, 마찬가지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제롬. 그가 얼굴의 미소를 지우지 않고 말했다.
[그리고 경쟁사 사장으로선 가만둘 수 없는 일이지. 각오하는 게 좋을 겁니다.]
한록의 선전포고에 대한 제롬의 응답. 그에 대해 한록이 답했다.
[네. 제롬도 기대하고 계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한록이니까.’
한록이 늘 해오던 말이고, 많은 사람의 신뢰를 얻어낸 말이었다. 그러나 한록은 그 말을 하는 잠깐 말을 멈췄다.
오늘은 어쩐지 조금 다른 말을 하고 싶었다.
무대 위에서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수상소감을 말하는 이연옥. 그리고, 오늘 하루 자신을 행복하게 해준 수많은 영화들. 한록의 자부심이자, 한록이 너무나 사랑한 것들. 한록이 이 자리에 있게끔 버티게 만들어준 것들.
[왜냐하면, 저는 정말로 대단한 영화들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것들이 있다면 더 이상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그래.]
한록의 말에 제롬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네의 꿈이 어디까지 통할지 지켜보지.]
*
올해의 장면상, 공로상, 거기에 여우주연상까지. 시상식은 이제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제 대상의 최종 후보를 공개하겠습니다.”
사회자의 말과 함께 무대 뒤 스크린에 나타난 대상의 후보작들. 스크린에는 한국 영화 협회의 회원들의 인터뷰 장면이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비평가. 감독. 배우 등 모두 세계적인 영화제에서 두 번 이상의 수상을 한 전문가들로, 그들은 대상 후보에 오른 영화에 대해 심도깊은 토의를 나눴다.
그리고 그들의 선택은-
“대상의 최종 후보작은 <도착지>와 <수면>입니다.”
<도착지>와 <수면>.
<수면>의 등장에 기자들이 다시 미친 듯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남우주연상. <수면>의 박하성.”
“작품상. <수면>.”
그리고 이어진 순서에서 <수면>이 한국영화대상 최초로 8관왕을 달성하자, 다시 인터뷰 영상이 시작되었다.
<올해의 대상은 수면입니다. 다른 영화와는 비교도 할 수 없죠.>
<‘도착지’는 그저 영화에 대한 얘기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어떤 영화를 바라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현상이었죠.>
<가장 좋은 영화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수면’이라고 말하겠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가장 오래 사랑할 영화가 뭐냐고 물어보면 ‘도착지’라고 답할 겁니다.>
<‘도착지’가 감동적이라면 ‘수면’은 충격적이었죠. 그런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치열하게 이어지는 토론의 현장. 그리고, 각자가 선택한 영화에 투표를 하는 한국영화협회의 사람들.
“올해 대상에 대해서는 한치의 양보도 없는 토론이 오갔습니다.”
그 말과 함께, 영상에는 다양한 심사위원들이 나와서 인터뷰를 하기 시작했다.
<‘도착지’입니다.>
<제 선택은 ‘수면’입니다.>
<‘수면’.>
<‘도착지’에 한 표를 주고 싶네요.>
영상은 정확히 표가 반으로 나뉘도록 수면과 도착지의 투표자를 교차편집하였고, 그때마다 영상 중간에 위치한 투표수가 한 표씩 바뀌고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통에 <도착지>와 <수면>의 티켓을 넣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영화협회의 회원들.
그리고, 영상에 한국영화협회의 마지막 회원이 등장했다.
“이번 대상 결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담당했던 분입니다.”
바로...
“<수면>의 서감독님.”
서감독이었다.
*
“...아무리 한국영화협회 회원이어도 그렇지. 이거 반칙 아니야?”
서감독의 등장에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하는 현차장. 하지만 한록은 현차장의 말을 들으며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와 동시에 인터뷰 화면에서 아주 작게 한록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서감독과 인터뷰를 했던 사람은 한록이었고...
“차장님. 조금만 기다려보세요.”
한록은 이 일의 결과를 알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서감독님. 자기 소개 부탁드립니다.]
[한국영화협회 27번째 회원이자 <수면>의 감독입니다.]
서감독의 인사와 함께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
인터뷰 당시를 회상하는 한록.
한록의 첫 질문은-
“감독님은 <도착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도착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한록의 질문에 서감독은 망설임없이 답했다.
“여전히 똑같습니다. 좋은 영화죠. 하지만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전과 조금도 변하지 않은 서감독의 태도. 하지만 한록은 이 사람이 어떤 결정을 할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GV 결과가 나왔을 때, 객석을 바라보던 서감독.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듯한 그 눈빛을 지켜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록은 모두가 궁금해하는, 그리고 자기 자신도 가장 궁금해하던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예선전에선 <수면>이 이기지 않았습니까. 그때 무슨 생각을 하셨나요?”
그 말에 서감독이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도착지를 선택한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의 반짝이는 눈빛.
자신의 영화를 볼 때와는 너무나 다르지만, 영화에 흠뻑 빠져있다는 것만은 분명히 느껴지는 눈빛들.
그 눈빛을 보면서 든 생각은...
“재밌는 경험이었죠.”
새로운 깨달음이었다.
그 말은 들은 한록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타고난 천재. 자기 영화가 최고인 줄 아는 시건방진 인간. 그건 모두 서감독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한록은 서감독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이 사람이 어떻게 지금 아시아에서 가장 사랑받는 감독이 되고, 5년후에는 한국 최고의 영화감독이 되었냐면. 어떻게 이렇게 훌륭한 영화를 만들 수 있었냐면.
“내가 왜 졌을까.”
끊임없이 고민하고.
“사람들은 왜 도착지에 투표 했을까.”
탐구하고.
“이 말도 안 되는 거짓말들을.”
무언가를 보며...
“내 영화에 가져온다면 어떻게 될까.”
언제나 새롭게 성장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 말과 함께, 서감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끔은 거짓말도 나쁘지 않죠.”
그리고 <도착지>의 티켓을 집어들었다.
*
서감독의 믿기지 않는 선택에 모두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서감독!”
깜짝 놀라 옆 테이블에 앉은 서감독의 이름을 부르는 우감독. 다리를 꼬고 앉아서 화면을 보고 있던 서감독이 우감독과 시선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자, 서감독이 우감독을 향해 말했다.
[올해의 대상은...]
언제나와 같이 무표정으로.
“축하해요, 선배님.”
아주 건방지게.
“제 영화가 더 좋았어요.”
늘 그렇듯 거만하게.
그리고 그보다 더...
“하지만 선배님 영화도 좋았어요.”
솔직하게.
[<도착지> 입니다!]
사회자의 말과 함께, 여기저기서 쿵쿵 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의자를 뒤로 넘기는 소리.
“<도착지>의 우감독님. 축하드립니다.”
시상식에 모인 모두가 기립박수를 하는 소리였다.
*
‘해냈다. 성공했어.’
사람들 사이에 섞여 누구보다 크게 박수를 보내고 있는 한록.
오늘. 바로 이 순간. 지금을 위해 달려왔던 수 많은 사람들. 그리고 시간들.
그 모든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고, 가슴이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이제 다 끝났어.’
이제 모든 게 끝났다. 즐거움은 잠시. 다시 내일을 준비하고, 달릴 준비를 하자.
그렇게 한록이 벅차오른 마음을 정리하려는 그때-
우감독이 한록에게 말했다.
“팀장님. 감사합니다. 이제 저희가 보답할 차례입니다.”
“저 끝까지 지켜봐 주세요.”
그리고 한록을 지나쳐 무대에 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