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176화 (157/263)

이건 반드시 미국으로 가져가야 해.

[시상식이 재미가 없으신 모양입니다.]

제롬에 대한 한록의 대답.

[그렇지. 설마 한이 감사인사를 받는 모습을 보게 하겠다고 우리를 부른 건 아니리라 믿어.]

그리고, 한록과 제롬의 대화에 끼어든 알렉산드로 감독.

‘멋진 장면’을 기대하는 두 거장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한록이 입을 열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대체 언제쯤 나오는 건데?]

[음...]

그때 들린 사회자의 목소리.

“지금부터 <올해의 장면상> 시상이 있겠습니다.”

그 말에 한록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바로 지금이요.]

*

‘윤일. 대체 네가 말한 재밌는 건 언제 나오는 거야?’

제롬과 똑같은 마음으로 이 시상식을 지켜보는 누군가. 객석에서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앉아있는 이 사람은 바로...

‘설마 나 윤일한테 속은 건가?’

최대리의 부름에 한국으로 달려온 한국계 미국인 기자 로렌이었다.

-최윤일이 자기가 아는 모든 기자를 불러 모았대.

헐리웃에서 한동안 이슈가 됐던 화제.

-아주 작정한 것 같던데. 평소 보내던 메일이 아니었어.

-어땠는데?

-그냥 한 줄이었어. 와서 보라더라.

-정말? 아무 내용 없이?

-응.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설명도 안 해줬어.

-대단한 걸 준비했나본데.

-그러니까. 내 주위는 일단 가본다더라.

많은 사람들이 최대리의 메일을 궁금해했고, 그 때문에 결국 한국에까지 도착했다.

‘그렇게 메일 보내놓고 이게 끝이야? 혹시 <수면>이 상 잔뜩 받아가는 거 찍어가라고 부른건가? 그럼 다시는 안 온다.’

분명 엄청난 걸 보여주리라 기대했는데, 예상과는 다른 시상식에 최대리에게 이를 갈고 있는 로렌.

‘차라리 <수면>이 패배하는 걸 보여주던가. 이건 너무 뻔하잖아.’

그녀의 마음과는 다르게 무대 위에서는 역시 <수면>이 후보에 오른 시상부문이 보여지고 있었다. 이번에 진행될 부문은 올해의 장면상.

“<올해의 장면상>은 한국영화대상에만 있는 부문으로, 100퍼센트 관객 투표로 인해 선정되는 유일한 부문입니다. 올해는 총 5만명의 관객이 올해 개봉한 영화 중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을 선정해주셨습니다.”

올해의 장면상은 한국영화대상의 명물 중 하나로, ‘올해 한국 영화 최고의 순간은 언제였는가’를 꼽는 부문이었다. 오로지 관객의 투표로 선정되기 때문에, 어찌보면 대상만큼의 파급력을 가진 부문이기도 했다.

‘당연히 <수면>의 오프닝이겠지. 빨리 넘어가라.’

로렌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다음 순서를 기다렸다. <수면>의 오프닝 영상인, 영화의 주인공인 어머니가 갈대밭에서 광기 어린 춤을 추는 장면. 그 장면이 너무나 유명했기에 누가 상을 받을지 이미 예상이 가는것이었다.

‘재밌는 게 하나도 없군. 알았으니까, 빨리 <수면>이 대상을 받는 걸 내놔. 아니면 윤일이 준비했다던 장면을 내놓던가.’

그리고 로렌이 시상식에 따분함을 느낄 때...

“올해의 장면상은 조금 특별한 방식으로 수상작을 발표하겠습니다.”

사회자의 말과 함께, 시상식장의 모든 조명이 꺼졌다.

“뭐야?”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로렌. 로렌의 곁에 있는 기자들 역시 당황해서 서로를 돌아보았다.

“뭐야? 방송사고?”

[왜 조명이 꺼진 거야? 방금 저 남자가 뭐라고 한 거야?]

그리고 당황한 사람들 사이에서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

“후보작 발표하겠습니다. <삼일의 삶> 12번째 씬, 바닷가 항해.”

그 말에 무대 뒤편의 스크린에 <삼일의 삶>의 선장이 바닷가에서 시를 읊는 씬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

‘파도?’

로렌의 발 아래로 파도가 치기 시작했다.

*

“지금 물 들어오는 거야?”

“뭐야? 피해야 해?”

당황스러운 목소리의 관객들과 기자들. 그리고 그들 사이로 들어오는 파도. 그건...

“이거 영상이잖아?”

바로 바닥에 설치된 LED 패널에서 나오는 영상이었다.

파도가 치는 바다를 완벽하게 구현한 영상. 자세히 보지 않으면 영상이라고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으며, 객석은 마치 바다 위에 떠 있는 것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이번 <올해의 장면상>은 현장에 설치된 영상과 함께 후보작을 발표할 예정입니다.”

“야, 바닥 찍어. 바닥!”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이건 뭐야?]

[앞으로 계속 바닥에 영상이 나올 거래!]

사회자의 말에 상황을 파악한 기자들이 얼른 객석을 향해 카메라를 돌렸다.

모든 불이 꺼진 시상식장. 그곳에서 파랗게 빛나며 관객들 사이로 흘러가는 파도. 마치 바다 위에 떠서 <삼일의 삶>의 장면을 보고 있는 듯한 관객들.

‘...윤일. 제법인데?’

시상식에서 한번도 보지 못한 광경에 로렌 역시 혀를 내두르며 이 장면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두번째 후보작. <지구 특공대> 17번째 씬. 빗속의 정우.”

그리고 사회자의 목소리와 함께 바닥의 영상이 바뀌기 시작했다. 바닥에 설치된 LED패널에서는 파도가 사라지고, 이제 비가 내리는 아스팔트가 나오고 있었다. <지구 특공대>의 한 장면이었다.

“세번째 후보작. <수면>의 오프닝씬. 갈대밭.”

다시 한번 영상이 바뀌었고, 이제 바닥에서는 갈대밭의 흙과 갈대의 뿌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수면>의 오프닝 영상. 중년 여성이 갈대밭에서 춤을 추는 장면이었다.

영화의 명장면들을 완벽히 재현한 바닥의 패널.

관객들의 발 밑에서 파도가 치고, 비가 내리고, 갈대밭이 춤을 춘다.

마치 영화 속 그 장면처럼.

[...한이 준비한 게 이거군요. 재밌네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제롬이 한록에게 말했고.

[아뇨. 이 정도였으면 당신을 부르지 않았겠죠.]

한록이 답했다.

그리고 제롬이 반문하려는 찰나. 바닥에서 나오던 <수면>의 갈대밭과 <삼일의 삶>의 파도. 긜고 <지구 특공대>의 아스팔트 영상이 사라졌다.

다시 어둠 속에 뒤덮인 시상식장. 숨막히는 어둠 속에서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

“올해의 장면상. 수상은...”

“<수면>입니다.”

그 말과 함께 무대 뒤 스크린에 <수면>의 오프닝 장면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수면의 OST가 흘러 나왔다.

[바닥 또 바뀔 거야. 이 장면 찍어.]

[영상 나오는 순간 잡아야 해!]

외신 기자들은 바닥의 패널이 바뀔 걸 예상하고 바쁘게 사진을 찍을 위치를 잡기 시작했다.

‘무조건 영상이 나오는 순간을 잡아야 한다. 바닥이 영상으로 물드는 순간을 찍어야 한다.’

그런 목적으로 카메라를 바라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로렌. 그녀와 최대리의 눈이 마주치자, 로렌이 최대리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였다.

‘의심해서 미안. 역시 윤일이야.’

그러나 최대리는 로렌의 행동에 바닥을 가리키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다시 손을 들어 무대 뒤의 스크린을 가리켰다. 마치...

‘거기가 아니야.’

‘저기를 봐야 해.’

그런 말이 담겨있는 듯한 몸짓.

최대리의 손짓에 로렌이 홀린 듯 고개를 들었다. 기자들은 지금도 로렌의 곁에서 카메라에 코를 박고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곧 <수면>의 영상으로 바뀔 바닥의 패널을 찍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영상은 그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수면>의 오프닝 장면이 나오고 있는 무대 뒤 스크린. 그곳에서...

‘영상이 스크린 밖으로 나오고 있잖아.’

영상이 스크린 위로, 아래로, 그리고 옆으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

시상식장 벽면으로 보이는 갈대밭.

바닥으로 보이는 갈대의 뿌리와 흙.

마지막으로 핏빛으로 물든 천장의 LED패널.

영화의 한 장면이 된 시상식장.

그리고, 그 한복판에 앉아있는 관객.

CK가 준비하고 있는 체험형 영화관의 시작을 보여주는 장면에...

[...이 미친 인간!]

로렌이 욕설을 내뱉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

천장, 바닥, 그리고 벽면까지. 시상식장의 모든 곳에서 보이는 <수면>의 영상. 서감독이 그 사이로 무대에 걸어 올라가 상을 수여 받았다.

“투표해주신 관객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여러분께 이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어서 기쁩니다.”

당연한 일이라는 듯 수상소감을 하는 서감독. 그리고, 여전히 서감독의 주위와 시상식 전체에서 펼쳐지고 있는 <수면>의 갈대밭.

[제임스, 전체 장면 찍어. 나는 관객 시점에서 찍을게!]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다들 윤일한테 뭐 들은 거 없어?]

외신 기자들은 그 모습을 찍느라 분주하게 시상식을 뛰어다녔다.

영화의 장면이, 스크린에서 뻗어나와 온 벽면을 채우고 있다. 거기에 그 장면은 지금 전세계에서 사랑을 받고 있는 <수면>의 명장면이다.

‘특종이다!’

‘잘 찍어가면 1면에도 실릴 수 있어!’

그 사실이 얼마나 큰 이슈를 가져올지 기자의 직감으로 눈치를 챈 것이다.

이를 눈치챈 것은 기자들만이 아니었다. 날카로운 눈으로 벽을 타고 흐르는 영상을 보던 제롬이 한록에게 말했다.

[한이 보여주겠다고 한 게 이거군요.]

그 말에 한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스크린 MAX식 상영관입니다. 얼마 전 한국에서 개발한 상영기법이죠. 아직 상용 전이지만, 몇 년 후면 이 방식을 활용한 영화가 개봉 될 겁니다.]

스크린 MAX 상영관. CK가 개발한 상영방식으로, 스크린을 영화관 앞쪽만이 아니라 양옆, 천장, 바닥까지 설치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체험형 영화관’이라는 키워드를 생각했을 때 한록이 가장 먼저 떠올린 영화관의 필수요소이기도 했다.

[...]

한록의 말을 듣고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긴 제롬. 그는 지금 이 영화관, 아니 영화계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 중이었다.

‘영화계는 항상 새로운 기법을 바라왔다.’

입체 상영을 뜻하는 3D, 의자의 움직임이나 냄새 등 감각을 자극하는 4D영화. 그런 식으로 영화계가 발전해 온 것은 바로 영화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관객이 단순히 눈앞의 영상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 장소에 있다고 느끼게 하기 위해. 실제로 영화를 ‘체험’하고 있다고 느끼게 하기 위해.

[관객을 영화 속에 집어 넣는다라.]

그리고 이 상영방식은 말 그대로 관객을 영화 한복판에 넣어버리는 방식이었다.

그 어떤 영화라도 극한의 몰입감을 줄 수 밖에 없는 상영방식.

‘...평범한 영화관은 절대로 이 방식을 이길 수 없다.’

[제롬. 이건 반드시 미국으로 가져가야 해.]

같은 생각을 한 것인지, 알렉산드로 감독이 낮은 목소리로 제롬에게 속삭였다.

어쩌면 영화계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는 지금 이 순간.

‘다른 회사들이 보기 전에 먼저 계약을 체결해야 한다.’

[한. 이 부분에 대해 좀 더 얘기를 해봐야겠군요.]

제롬이 빠르게 한록에게 말했으나, 한록은 더 이상 제롬과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

[잠시만요, 제롬. 나갔다 와야 해서요.]

“다음은 공로상 수상이 있겠습니다. 공로상. CK ENM 최경준 본부장. 수상은 CK ENM의 이한록 팀장이 대신하도록 하겠습니다.”

[설명은 무대 위에서 드리겠습니다.]

이제 한록의 차례가 시작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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