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175화 (156/263)

자신만 아는 즐거운 미래.

시상식 당일, 오후 5시. 한록, 현차장, 정부장은 시상식으로 향하기 위해 함께 차에 올라탔다.

“안녕하십니까.”

기사에게 인사를 하는 한록. 기사는 정중하게 한록을 맞이했고, 현차장과 정부장마저 승차하자 차는 시상식장을 향해 출발했다.

‘CK ENM 대표로 가는거니 최고급 대우가 필요하겠죠.’

그런 말과 함께, 마케팅부서 사람들에게 운전기사와 회사소유 차량을 붙여준 하정엽.

그래서 지금 마케팅 부서 사람들의 기분이 어땠냐면...

“이팀장. 나 사진 찍어줘. 아빠 이런 사람이라고 은서한테 보여줄 거야.”

엄청나게 기쁘고.

“차장님. 좀 웃으셔야죠.”

“...나 웃음이 안 나와...”

동시에 부담스러웠다.

그렇게 차에서 열심히 사진을 찍은 현차장. 그가 자신이 나온 사진을 바라보다가 한록에게 말했다.

“이팀장도 이제 기사분 붙는대?”

“아뇨, 그건 아직이요.”

“아, 아쉽다. 전무부터구나. 기사분 붙으면 나 가끔 태워줘야 해.”

“차장님도 곧 타게 되시겠죠.”

한록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짓는 현차장. 그가 잠시 후 한록의 말을 이해한 듯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내가? 전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네’라는 표정의 현차장. 현차장은 정말로 자신이 임원이 된 모습이 상상이 가지 않는 듯 했다.

“이팀장, 날 너무 좋게 보는 거 아니야?”

“네. 맞아요. 전 차장님 정말 좋게 봐요.”

“진짜 내가 이팀장처럼 임원되고, 전무까지 올라가고.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그게 말이 돼?”

“네.”

그리고 아주 명쾌한 한록의 답.

“...이팀장은 진짜...가끔 사람을 설레게 한다니까.”

그 말에 현차장이 쑥쓰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자기보다 더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의 말. 그런 말을 들으면...

“나도 좀 더 열심히 해야지.”

누구라도 힘이 나기 마련이다.

무언가 다짐한듯한 현차장과, 그런 현차장을 기분좋게 바라보는 한록. 어느새 차 안에는 훈훈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이 놈들아. 잊어버린 것 같은데 나도 타고 있다.”

그리고 둘의 곁에선 정부장이 혼자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

“...아이, 부장님. 어떻게 부장님을 잊어버립니까!”

“거짓말 하지마라.”

“...솔직히 잠깐 잊어버렸습니다.”

“이한록. 넌 거짓말이라도 해라.”

정부장이 한록의 대답에 어이가 없다는 듯 답했다.

*

시상식장에 도착하니 어느새 해가 져서 어두워져 있었다. 시상식장은 KBC가 보유한 세트장 중 하나로, 앞부분은 원형 테이블이 여러개 마련되어 있고 뒷 부분은 객석이 있는 구조였다.

오늘의 시상 후보기 때문에 앞부분 원형 테이블에 앉은 한록과 마케팅 부서 사람들.

“팀장님. 차장님.”

자리에 앉자, 누군가 다가와서 인사를 했다. 바로...

“감독님!”

<식물>의 이감독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은 한록. 이감독이 멋진 턱시도를 입고 한록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전 부산영화제에서 영화를 그만두겠다고 말할 때와는 전혀 다른 이감독의 모습.

“<식물>이 신인상 후보로 올랐습니다. 그리고 차기작도 CK랑 같이 준비하고 있어요. 팀장님한테도 빨리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이감독은 이제 예전의 우울함이 아니라 기대와 즐거움으로 차 있었다.

그 모습에 한록이 기분 좋게 미소를 지으며 이감독과 악수를 했다.

“<식물> 장편 버전 말씀이시죠?”

“알고 계셨습니까?”

“그럼요. 내년 영화 중 제일 기대하는 영화입니다.”

아주 잘 알다마다. 한록은 그 말을 속으로 삼켰다. 회귀 전 한록은 <식물>시리즈를 3편까지 담당하며, 식물을 칸 영화제에 데려간 사람이었다.

“좀 쑥스럽네요. 그 정도는 아닙니다.”

그리고 눈앞의 이 사람은 곧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영화를 만들 사람이었다.

“아뇨, 그 정도일 겁니다. 저는 그렇게 확신해요.”

“...팀장님 말씀이면...믿어도 될 것 같긴 하네요.”

한록의 말에 반신반의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는 이감독.

가장 사랑받는 영화가 될 <식물>. 그리고 곧 그 영화를 만들게 될 눈앞의 젊은 감독.

“곧 연락드리겠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요.”

자신만 아는 즐거운 미래에 한록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

“팀장님!”

“이한록 과장...아니, 팀장님.”

“이팀장님.”

이감독이 돌아간 이후에도 한록은 의자에 앉을 틈이 없었다. <삼일의 삶>의 윤감독. 그리고 <지구 특공대>의 장감독. <도착지>의 우감독과 이연옥까지.

“꼭 상 받는 거 보여드릴게요.”

수많은 사람들이 한록에게 다가왔고, 감사의 인사와 자신의 포부를 얘기했다.

“네. 기대할게요.”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하나 진심을 다해 인사를 건네는 한록.

[후보자 여러분은 모두 자리에 착석해주시기 바랍니다.]

한록과 사람들의 대화는 안내방송이 나오고, 시상식 직전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한록은 시상식장에 도착한 후 한 시간 반이 지나서야 처음 자리에 앉게 되었다.

현차장이 한록의 상기된 얼굴을 보고 말했다.

“이팀장. 기분 엄청 좋아 보이네.”

“...네. 그렇네요.”

현차장의 말에 한록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손에 들린 시상식 진행지를 바라보는 한록.

[한국 영화 대상 진행 일정]

[신인상 후보: <여름 그 후>, <식물>, <장마>...]

[작품상 후보: <삼일의 삶>, <지구 특공대>, <수면>...]

[감독상 후보: <삼일의 삶>, <수면>...]

[대상 후보: <도착지>, <수면>, <부산열차>...]

회귀 후 한록과 작업했던 많은 영화들이 당당하게 후보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그리고 그 관계자들이 모두 기대에 빛나는 얼굴로 시상을 기다리고 있다.

저마다의 희망과 기대에 부푼 얼굴들이었다.

좋은 영화를 만나는 것. 그리고 그런 영화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영화가, 감독이, 배우가, 성장하는 걸 지켜보는 것. 사람들의 꿈과 희망에 대해 얘기하는 것.

‘이러니까 이 일이 좋은거야.’

항상 해오던 생각을 다시 한번 떠올리는 한록.

어쩌면, 오늘 시상식에서 가장 기쁜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일지도 모른다.

뿌듯함과 애틋함이 가슴을 채우는 기분에 한록이 입을 열었다.

“차장님. 전 정말 이 일이 좋습니다.”

“그 얘기 30번째인거 알지?”

한록의 말에 장난스레 웃으며 말하는 현차장. 그가 무언가를 만지작 거리며 말을 이었다.

“내가 살면서, 배우한테 꽃도 받아보고...”

그에 손에 들린 것은 이연옥이 한록과 현차장에게 주고간 꽃다발이었다.

영화 마케팅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현차장. 하지만 이렇게 누군가에게 감사를 받아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현차장이 말했다.

“이팀장. 있잖아.”

“네.”

“나도 이팀장이랑 일하면서 이 일이 좋아졌어.”

그 말에 한록이 씩 미소를 지었고, 현차장이 쑥쓰러운 듯 너스레를 떨었다.

“나도 앞으로 29번만 더 말할게. 이팀장도 참아야 한다?”

“100번 말하셔도 됩니다.”

“그럼 나도 100번 더 들어줘야해? 혹시 저번처럼 월요일 아침에도 그런 소리할거야?”

“네.”

“그래, 이팀장이 원한다면야...”

잔뜩 들떠서 실없는 소리를 나누는 현차장과 한록.

“헉.”

그때, 옆자리 테이블에서 누군가가 놀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짜 왔다.”

“우와. 통역 누가 하는거지?”

“대체 어떻게 섭외를 했대?”

옆테이블뿐만이 아니었다. 시상식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어딘가를 바라보고, 깜짝 놀라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뭐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본 현차장과 한록.

거기선 이 자리에 모인 영화인 모두가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도착해 있었다.

“알렉산드로 감독이다.”

제롬과 알렉산드로. 그리고 최대리가 도착한 것이다.

*

[오랜만이군요.]

최대리와 함께 한록의 테이블에 앉은 제롬.

<네, 정말 오랜만입니다.>

[우리 스카웃을 거절한 사람들이랑 한 테이블에 앉아있다니. 자존심이 좀 상하네.]

알렉산드로 감독 역시 뼈있는 농담을 건네며 한록이 자리한 테이블에 앉았다.

“야. 윤철아. 저쪽 찍어라.”

“9번 카메라. 알렉산드로 감독 쪽으로 이동해주세요.”

[진짜 제롬이 왔잖아? 어떻게 부른거지?]

[우리처럼 메일보고 온 거 아냐?]

알렉산드로 감독이 등장하자, 수없이 사진을 찍어대는 기자들과 KBC의 스텝들. 그리고 최대리가 부른 외신기자들까지.

‘이것만으로도 시상식은 성공했다.’

제롬과 알렉산드로가 한국에서 열린 시상식에 참여했다.

그 사실만으로도, 이미 올해 한국영화대상은 세계 영화계에서 나름의 주목을 받을 게 분명했다.

지금 열심히 사진을 찍어주는 기자들이 본국으로 돌아가자마자 제롬과 알렉산드로의 사진을 풀어댈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도착지>. <삼일의 삶>. <수면>. 그리고 CK라는 회사를 전세계에 보여주기에 최고의 무대가 마련된 상황.

[자네가 보여주겠다고 말한 거. 그게 뭔지 몰라도 기대하고 있네.]

“으...이팀장. 나 너무 떨려.”

[수상하면 꼭 팀장님 얘기 하겠습니다.-윤감독]

저마다의 생각이 오가는 가운데...

[지금부터 한국 영화대상을 시작하겠습니다.]

시상식이 시작되었다.

*

그렇게 시작된 시상식. 시상식의 초반부는, 한마디로...

“편집상. <수면>.”

“음악상. <수면>.”

“시나리오상. <수면>.”

“여우조연상. <수면>.”

<수면>의 압승이었다.

거의 모든 부문에서 노미네이트 되고, 중요한 부분마다 수상을 거두고 있는 <수면>.

“이러다 <수면>이 상 다 쓸어가는 거 아냐?”

“8개 받으면 신기록이래.”

“...다음부턴 <수면>이랑 겹치는 시기는 피하자.”

서감독을 두려움 반, 존경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 그러나 정작 서감독은 태연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있었다. <수면>이 이 모든 상을 받는 게 당연하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수면>이 상을 타지 못한 첫 부문.

“감독상. <삼일의 삶>의 윤정우 감독.”

바로 감독상이었다.

감독상이 발표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윤감독. 시상을 위해 무대 위로 이동한 알렉산드로가 윤감독에게 트로피를 건넸고, 윤감독이 양손으로 트로피를 건네받았다.

“우선...우선 우리 가족. 가족들한테 너무 고맙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영주. 영주야. 수능이 이번만 있는 건 아니야. 너무 실망하지 말고 재수 열심히 하자. 그리고, 어, 우리 예쁜 첫째 딸 지수. 취직 축하한다. 고생 많았어. 그리고, 아, 죄송합니다. 무엇보다 관객분들한테 정말 감사 드린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또 누가 있지. 죄송합니다. 아! 그리고 무엇보다 촬영에 나와주신 두 출연자분께 감사드립니다.”

당당하게 무대에 오르던 모습과는 다르게 횡설수설하며 수상소감을 이어가는 윤감독. 그는 눈에 보일 정도로 손을 떨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영화를 살려주신 이한록 팀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한록과의 약속을 지켰다.

한록을 향해 꾸벅 인사를 하는 윤감독과, 자리에서 살짝 일어나 고개를 숙이는 한록.

‘<삼일의 삶>은 애초에 개봉이 불가능 했는데, 이한록에 의해 부산영화제까지 출품을 했다.’

그 사실을 아는 영화인들은 따뜻한 시선으로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눈여겨보는 또 한명의 사람. 제롬.

‘오늘 마지막으로 스카웃 제안을 하려 했는데.’

사실 그가 이 자리에 온 이유는 한록, 그리고 최대리에게 마지막 제안을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한록과 윤감독이 서로에게 인사를 하는걸 본 순간, 제롬은 한록에게 다시 한번 스카웃을 제안하려던 마음을 완전히 접었다.

“저도 감사합니다, 감독님.”

그렇게 중얼거리는 한록의 얼굴이 너무나 기뻐 보였기 때문이었다.

한록은 오늘 정말 기분이 좋아 보였고, 자신이 담당한 영화가 언급될 때마다 들뜬 눈빛으로 무대를 지켜보았다.

한록이 한국영화에 대해 보여줬던 애정과, 지금 이 순간 느껴지는 영화 업계에 대한 애착.

‘허탕을 쳤군.’

제롬이 한국에 오기로 결심한 것에는 세가지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한록을 스카웃 하기 위해. 두 번째는 최대리를 데려가기 위해. 마지막으로는 한록이 말한 ‘그 장면’을 보기 위해.

‘이한록은 절대로 넘어오지 않을 거야.’

하지만 이한록은 절대로 한국을 떠나오지 않을 것이다. 제롬은 드디어 그 가설에 확신을 내렸다.

게다가, 최대리 역시...

‘윤일. 한국은 어떻습니까.’

‘음...’

‘재밌어요.’

쉽게 스카웃을 수락할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한록이 말한 ‘그 장면’의 관객이 되는 것 뿐이다.

[한. 한이 말한 ‘부산 영화제보다 재밌는 순간’은 얼마나 기다려야 합니까.]

아쉬움을 뒤로한 제롬이 약간의 장난기가 섞인 목소리로 한록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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