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174화 (155/263)

마침내 시상식이 시작되었다.

‘나는 네가 잘하고 있단 걸 알고 있다.’

한록의 말에, 영도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몇 번이나 뛰어넘고 싶던, 그래서 끌어내리고 싶던 사람. 그 사람을 배신하겠다고 다짐했을 때 마지막으로 들은 말.

“네가 잘하고 있단 거. 넌 몰라도 나는 알고 있어.”

그 말을 듣고 있자니 기분이 어땠냐면...

“그러니까 앞으로는 자주 말해줄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

한참 동안 아무런 대답이 없던 영도. 영도가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감싸쥐었다. 그리고 한록에게 말했다.

“형. 나 할 말이 있어. 문오석이 형한테 불리한 증언을 하라고 했어.”

영도의 목소리에는 물기가 어려있었다.

“그래.”

“그리고 나는...문오석의 편을 들려고 했어.”

“괜찮아. 지금 말해줬으니까.”

“그러려고 했어.”

“아니. 안 그랬을 거야.”

한록이 영도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손목을 바라보았다. 몇 번이나 끊어질 것 같던 영도의 실. 그러나 그 실은 결코 끊어지지 않았고, 이제는 아주 따뜻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너 그런 사람 아니야. 내가 알아.”

그리고 그 말에, 드디어 영도의 실이 환한 빛을 내뿜었다.

*

이제 한록과 완전히 이어진 영도의 실.

과거 자신을 배신한 사람이자 한록의 영원한 숙제, 영도. 그가 마침내 한록의 편을 들었다.

그 모습에 한록은 생각했다.

‘봐라. 문오석.’

이 승리는, 이미...

“형. 나 형이 말한 사람이 될게. 진짜 대단하고, 진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될게.”

‘나는 내 방식으로 너를 이겼다.’

자신이 이겼다고.

*

“그래서...아마 시상식 전에 영화사업본부에 일을 터뜨리려고 하는 것 같아.”

한록에게 문오석과 있던 일을 설명해주는 영도. 모두 한록이 예상했던 대로였다. 설명을 마친 영도가 한록에게 말했다.

“형. 이거 바로 사장님한테 말해.”

“위에 말하는 걸로는 안 끝나. 실제로 문오석이 회사에 피해를 입힌 게 없으니까. 더 확실한 증거가 필요하고...”

그 말과 함께 한록이 영도를 바라보았다.

“그러려면 네 도움이 필요해.”

그리고 그 말에 영도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럴게.”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편을 들겠다 약속하는 영도의 말. 영도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한록과 영도의 손목에 연결된 실은 이제 완전히 묶여있었다.

아주 오랜 시간을 거쳐서 만들어온 신뢰. 그리고 성장.

한록이 맞았다는 걸 증명해준 동생.

한록이 영도를 보며 말했다.

“고맙다, 영도야.”

이제 정말로 모든 게 달라졌다는 걸 알게 해준 사람에 대한 감사인사였다.

*

한시간 후. 영도가 문오석의 사무실을 방문했다.

“이한록의 약점이 될 만한 부분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록이 지시한 그대로 말하기 시작했다.

*

“본부장님. 위험합니다. 증거도 너무 없고, 아직 준비가 덜 됐습니다.”

영도가 나간 직후, 문오석에게 다급하게 말하는 비서.

‘그래. 저 말이 맞다.’

문오석 역시 지금 자신이 준비한 카드가 너무 부족한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시상식 전에 최경준과 한록을 무너뜨려야했다.

절체절명의 위기.

‘지금 터뜨리지 않으면...어차피 이대로 최경준이 승리할 거다.’

더 이상 남은 방법은 없었고, 문오석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문오석이 깊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기자들 전부 모아서...”

망설이면 죽는다. 그렇다면.

“CK가 끝장날 거라고 말해.”

마지막 발악이라도 해야하는 법이었다.

*

그리고 다음날.

[CK ENM, KBC 사이의 유착 의혹]

상황이 뒤집히기 시작했다.

[시상식에 얽힌 검은 그림자]

[CK ENM과 KBC의 영화대상에 모종의 계약이 있던 것으로 밝혀졌다.]

[CK ENM은 예선전 당시 여러 방송국의 요청을 거절하고 KBC와 계약을 맺었다.

[또한, CK ENM측은 영화대상을 위해 20억대의 금액을 지출했다.]

CK ENM과 KBC. 그리고 시상식에 대해 나오는 기사거리들.

[그리고 현재 한국영화대상의 주요 노미네이트 작품은 모두 CK ENM이 담당하는 영화이다.]

CK ENM이 시상식을 위해 KBC측에 뇌물을 접대했다는 뉘앙스의 기사들.

[무대설치비라던 20억, 사실은 그 사용처도 불분명해...]

[익명의 제보자는 ‘시상식은 한국영화대상 측에서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 관행’이라며, 20억의 사용처에 대한 강한 의문을 남겼다.]

[또한 다른 제보자는 ‘회사 측에서는 지출을 반대하였으나, 새로 부임한 팀장이 강력하게 20억을 지출하기로 주장했다’라고 전했다.]

[제보자는 ‘시상식을 위해 20억을 지출한다는 것 자체가 이해할 수 없다. 실제로 그만큼의 비용이 드는 일인지, 아니면 어떤 다른 용도로 사용된 것은 아닌지 검토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그 기사들은 이제 한록을 공격하고 있었다.

빠르게 올라오는 기사를 체크하고 있던 하정엽. 그가 비서에게 말했다.

“이한록 팀장에게 지금 당장 올라오라고 전하세요.”

*

“무슨 일인지 설명하세요.”

하정엽이 한록에게 물었고, 한록이 바로 답했다.

“지금 시상식을 망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전부 해명이 가능한 부분입니다. 아직 기사가 나온 초반이니, 우리 측에서 빠르게 대응하면 곧 반응은 잠잠해질 겁니다. 사장님께서 PR팀에 직접 지시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걱정은커녕, 하정엽에게 아주 당당하게 요구를 하는 한록.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고 있었다는 태도군요.”

“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 왜 진작 막지 않은 겁니까.”

“상대는 반드시 시상식을 방해하려 했을 겁니다. 무슨 이유를 들어서라도 터질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해명이 가능한 부분에서 일어나는 게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모든 일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 준비가 완료 되어있다.

한록이 20억을 사적으로 사용했다는 얘기가 오가는 와중에, 하정엽의 입장에서는 믿기 어려운 말들이었다.

“시상식을 방해하려는 사람이 누굽니까.”

“문오석 본부장입니다.”

그리고 이 일의 원흉이 자신의 부하라는 말은 더더욱 믿기 어려웠다.

“...문오석 본부장이 영화사업본부를 견제하기 위해 이런 일을 벌였다는 겁니까.”

한록의 말에 하정엽이 눈을 감고 책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하정엽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이한록이 지금 나한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라면. 이한록을 믿었다가 일이 더 커질 수가 있다.’

지금은 그 어느때보다 한록을 의심해야 하는 상황.

하정엽이 눈을 뜨고, 한록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한록에게 물었다.

“내가 당신 말을 믿어야 하는 이유를 말해보세요.”

“문오석 본부장님이 시상식을 망치기 위해 고의로 기사를 퍼뜨렸습니다. 예선전 때 <상처>로 생긴 논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외에도 CK에서 있던 많은 일에 문오석 본부장이 얽혀 있을 겁니다.”

“그건 그냥 주장일 뿐이지, 증거가 되지는 못합니다.”

“증인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장님이 믿지 못하신다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건 얘기를 들어보고 결정할 일입니다.”

“사장님. 저는 제가 아는 모든 것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사장님은 저에게 약속을 하셨습니다.”

한록을 위협하듯, 한록의 목 근처를 배회하는 하정엽의 실. 그러나 한록은 이제 하정엽의 실 같은 건 신경도 쓰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를 믿겠다고 하시던 약속.”

한록이 하정엽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다.

“이제 그걸 지키실 때입니다.”

그 말과 함께 한록은 사장실을 나가버렸다.

*

한록이 나간 사장실. 그 곳에 두 번째 손님이 하정엽을 방문했다. 바로 하태준이었다.

“지금부터 내가 시키는대로 해.”

지금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예선전과 도착지. 거기에 시상식까지 모두 피해를 보게 된 상황. 그러다보니, 하태준이 직접 이 일에 뛰어든 것이다.

“당장 담당자 전부 교체했고, 조사 들어가겠다고 공지 올려. 그러면 시간을 벌 수 있다. 시상식이 끝나고 일주일만 지나도 사람들은 전부 이 일을 잊을 거다.”

일단 담당자를 전부 교체하고 시간을 벌라는 말. 그렇게 된다면, 당연히 이 사건의 중심인 한록도 교체되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를 믿겠다고 하시던 약속. 이제 그걸 지키실 때입니다.’

그리고 하정엽은 오늘 한록과 한 대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이한록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가.

‘나는 이한록을 얼마나 믿고 있는가.’

하정엽의 생각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하태준이 입을 열었다.

“하정엽. 부하를 잡는 것과 부하에게 속아 넘어가는 건 다른 문제다. 내가 몇 번이나 얘기했을텐데.”

그리고 하정엽은 하태준의 말에 드디어 결정을 내렸다.

‘난 이한록을 믿는가.’

‘아니다.’

“회장님.”

내가 믿는 것은 이한록이 아니라.

“여긴 제 회사입니다. 이 문제는 제가 컨트롤 합니다.”

이한록을 신뢰하기로 한 내 결정이다.

“ENM의 일에 더 이상 참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말에 하태준이 하정엽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엄청나게 사나웠으나-

“감당 가능하겠느냐.”

“네. 제가 컨트롤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제대로 끝내라.”

그 속에는 대견함 또한 담겨있었다.

*

하태준이 돌아간 직후, 하정엽은 최경준을 불렀다.

“이 일은 어떻게든 덮으세요.”

그리고 잠시간의 고민 후 말했다.

“시상식은 이한록 팀장이 계속 진행합니다.”

*

“CK ENM입니다. 방금 올라간 기사 때문에 전화드렸는데요.”

“허위사실은 강경히 대응하겠습니다.”

“네. 입장문 방금 메일로 보내드렸습니다.”

하정엽의 지시로 영화사업본부, 그리고 CK ENM 전체가 기사를 무마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야. 지금 CK 반응 장난 아니야. 일단 숙여.”

그리고 CK의 이례적인 대응에 신문사들은 빠르게 발을 빼기 시작했다.

[CK ENM. ‘허위 사실은 강경대응 결정’.]

[정정보도. ‘CK ENM과 KBC의 유착 의혹’에 대한 정정을 알립니다.]

하나둘씩 사라지는 기사.

‘...왜. 왜 이렇게 나오는 거지?‘

하정엽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한 문오석.

“네. 설치는 내일까지 마무리해주시기 바랍니다.”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는 시상식 준비와...

“팀장님.”

“제롬이 도착했대요.”

기다리던 손님이 등장했다.

유선의 말에 한록은 창문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밖은 아주 어두워져 있었다.

오늘은 시상식 하루 전.

“무대 리허설도 끝났어.”

“송PD님이 인터뷰 편집 끝났다고 전화주셨습니다.”

“외신컨택도 끝났습니다.”

여기저기서 준비가 끝났음을 알려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었다. 한록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에게 말을 거는 사람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정부장. 현차장. 유선. 최대리. 송과장. 이 일을 위해 달려온 모든 사람들. 그리고 이 일에 얽혀있는 수많은 사람들과 사건들.

이제 내일이면 이 모든 게 막을 내린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퇴근 합시다.”

한록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모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호기심과 두려움. 아쉬움. 그리고.

“내일 뵙겠습니다.”

기대가 담긴 말이었다.

*

그리고 다음날.

[제 74회 한국영화대상을 시작합니다.]

마침내 시상식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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