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173화 (154/263)

우리가 성장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해라.

영도를 자신의 사무실로 데려간 문오석.

“최근 영화사업본부에 잡음이 있지. 이미 회사 전체에 소문이 났어. 내가 이 부분을 사장님께 말씀드려볼 생각이야.”

다른 본부 사람이 영화사업본부에 대해 얘기한다.

‘본부장들끼리 제대로 싸움이 붙은 거다. 인수전 때문에 아예 상대를 보내버리려 하는 거야.’

한록과 달리 이런 일에서 눈치가 빠른 편인 영도. 영도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김영도 주임은 그냥, 내 말에 증인이 되어주기만 하면 돼. 사적인 친분 때문에 인사이동이 지시되었다고 말이야.”

그리고 문오석이 자신한테 무엇을 요구하는지도.

‘나보고 영화사업본부에 불리한 증언을 하라는 거야. 절대 엮이면 안 된다. 그리고...형한테도 크게 영향이 갈 거야.’

그렇게 생각한 영도가 문오석에게 답했다.

“이건 제가 낄 얘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만 일어나보겠습니다.”

“이한록은 걱정하지 마.”

하지만 아무리 눈치가 빨라도 28살의 신입이다. 영도는 이미 문오석의 손바닥 위에 올라가 있었다.

“이번 인사이동은 이한록 탓이 아니야. 이한록이 본인 사람들을 챙기지 않은 건 맞지만, 실력 위주로 선발하겠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어. 김영도 주임 얘기도 마찬가지지. 이한록이 잘못한 건 없어.”

문오석이 영도의 반응을 살피며 말했다. 마치, 정말 자신의 목적은 한록이 아니라는 듯이.

“이 일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 건 본부장인 최경준이지. 내가 책임을 물으려는 것도 그쪽이고.”

자신의 목표는 영화사업본부가 아니라 최경준이라는 듯이.

그 말에 영도의 눈이 잠깐 흔들렸고...

‘이거군.’

문오석 미소를 지었다.

‘이런 타입이 원하는 게 뭔지 알고 있지.’

자신보다 한없이 뛰어난 주위의 사람. 그런 사람을 보면 사람들이 하는 생각.

“벌써 입사 3년차인데 갑자기 비서로 발령이라니. 영화사업본부쪽에서 어지간히 김영도 주임을 우습게 봤나 봐.”

열등감.

“말이 좋아 비서지, 이한록의 심부름이나 하란 게 아닌가.”

질투.

“최경준은 지금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있어. 이대로 가다간 최경준만이 아니라 이한록 팀장도 위험해질거고.”

상대가 자신처럼 추락하길 바라는 마음.

“그래서 내가 김영도 주임한테 이런 말을 하는거야. 최경준을 잘라내는 게 이한록 팀장한테 더 도움이 될 테니까. 이한록 팀장은 사장님의 총애를 받고 있으니 이번 일에 타격을 받더라도 그게 오래 가진 않을거라네.”

그리고...

“김영도 주임. 자네가 이한록 팀장을 도울 수 있어.”

그 사람보다 더 대단해지고 싶다는 욕망.

그 말에 영도가 내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이한록을 공격하는 게 아니다. 돕는 거다.

내가 이한록을 도울 수 있다.

내가, 이한록의 실수를 바로잡을 수 있다.

내가.

내가 이한록보다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다.

영도의 눈에 담긴 욕망에 문오석이 미소를 지었다.

‘넘어오겠군.’

거의 절반 이상의 확신을 한 문오석. 그가 영도에게 마지막으로 달콤한 제안을 했다.

“우리 본부에도 법무팀 충원이 필요해. 대리 자리가 비어있고, 마침 김영도 주임이 딱 승진시기군.”

문오석의 온갖 사탕발림. 그리고, 안전에 대한 보장까지.

문오석의 얘기를 듣는 내내 영도는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긴 침묵 끝에 드디어 입을 열었다. 영도의 대답은.

“이 일은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문오석을 거절하는 것이었다.

*

“...일어나겠습니다.”

문오석의 제안을 거절한 영도. 영도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문오석의 눈치를 보다가 사무실 밖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잘 잡아놨군.”

영도가 나간 후, 입술을 깨물고 중얼거리는 문오석.

‘위기다.’

현차장. 김유선. 정부장. 그들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들은 한록과 업무적으로 너무 깊게 얽혀있었기에 일정 부분 이상 불리한 증언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아직 가능성이 있다.’

‘이한록을 돕는 거다’란 말을 했을 때 반응을 보면, 영도는 거절을 말하기 직전까지 흔들렸을 게 분명했다.

무엇보다, 이제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나야. 문오석. 지금 바로 김영도한테 연락해.”

문오석이 바로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말했다.

*

문오석의 사무실을 나선 영도. 영도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생각했다.

‘...위험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문오석의 제안에 흔들렸다.

해외팀에서 두 번이나 탈락한 것. 자신의 팀에서 쓸모없다는 얘기를 들은 것. 그 모두에 대한 분노를 풀 대상이 필요했으니까.

문오석은 그 와중에 대리로 승진을 시켜주겠다는 달콤한 제안을 건네기도 했다.

‘거짓말이야. 형한테 피해가 안 간다는 게 말도 안 되지.’

하지만 지금 자신이 문오석의 편을 들면, 분명 한록에게도 큰 타격이 갈 것이다. 영도 역시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 일에서...형이 잘못한 건 없으니까.’

한록은 실력으로 팀을 선발했다. 문오석의 말처럼 비서 얘기 역시 한록이 꺼낸 얘기가 아니었다.

사실상 이 과정에서 한록이 한 건 아무것도 없었고, 그런 상황에서 한록을 위험하게 할 순 없었다.

그때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영도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리고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자신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김영도 주임.’

‘영화사업본부는 그리 오래가지 못할 거야.’

문오석에 대한 압박과 두려움. 그 감정들이 이제야 밀려오는 것이었다.

‘큰일이다.’

한록에게 정말 큰일이 났다는 생각이 들었고.

‘형한테 빨리 말해줘야...’

어서 이 일을 한록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은-

‘...내가 이걸 말해줘야 하나?’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

‘형은 나한테 잘못한 게 없어.’

영도가 내내 되새기던 생각. 그리고 딱 그만큼 해오던 생각이 있었다.

‘그럼 나한테 잘한 건 있나?’

한록이 해외팀 팀장이 되었을 때. 영도는 당연히 자신이 한록의 팀에 포함되리라 생각했다. 어쩌면 한록처럼 빠른 승진도 가능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한록은 해외팀에 영도를 넣어주지도 않았다. 팀장이 되었다고 영도에게 특혜를 준 적도 없다.

그저 영도가 해외팀에서 두 번이나 떨어졌을 때. 술을 한잔 사주고 위로해주며 앞으로 다른 방식으로 인력충원이 있을 거라 말해준 것 뿐이었다.

한록은 자신을 특별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형한테 이걸 말해줘야 하나?’

그런 의문이 들 때.

그때 영도에게 비서실장의 전화가 도착했다.

[김영도 주임. 인사이동과 관련해서 연락드렸습니다.]

“인사이동은 거절했...”

[이한록 팀장님이 김영도 주임이 비서로 들어오는 것에 동의하셨습니다. 따라서 김영도 주임의 의사와는 별개로 인사이동이 진행될 겁니다.]

[일주일 내로 공지가 내려갈 겁니다.]

그리고 전화가 끊어졌다.

*

영도가 나간 후, 비서와 대화를 하는 문오석.

“...이한록 팀장이 그런 말을 하지 않을거란 건 김영도 주임도 알고 있을겁니다. 무엇보다, 김영도 주임이 이한록 팀장에게 물어보면 바로 끝날 일입니다.”

비서는 문오석의 거짓말에 크게 불안해하고 있었다. 이에 문오석이 싸늘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니. 김영도는 이한록이 뭐라도 말해도 믿지 않을 거야.”

*

엘리베이터에서 통화가 끊긴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는 영도.

‘형이, 내가 비서로 들어오는 것에 동의했다.’

평소라면 믿지 않았을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정상적인 판단이 되지 않았다.

해외팀에서의 탈락. 인사이동. 비서자리를 수락한 것.

한록이 한 일. 혹은, 하지 않은 일. 그 모든게...

‘그래.’

‘이한록은 처음부터 나를 이렇게 생각한 거야.’

한록의 잘못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다.

*

“김영도는 이한록의 말을 믿지 않을거야.”

“그래야 이한록을 쉽게 미워할 수 있으니까.”

문오석이 말했다.

*

‘문오석의 편을 들자.’

영도가 생각했다.

*

그리고 영도가 다시 20층을 누르고, 문오석의 사무실로 향한 순간.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린 순간.

엘리베이터 앞에는-

“영도야.”

한록이 서 있었다.

*

“...형이 여긴 무슨 일이야?”

“사무실 보러왔어. 곧 개인 사무실로 이동한대.”

한록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당황하는 영도. 그리고 영도의 표정이 한록의 ‘개인 사무실’ 이란 말에 다시 한번 굳었다.

“너는?”

“나는...”

문오석이 나에게 최경준을 공격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너에 대한 분노 때문에 그 제안을 받아들이러 간다.

그런 생각을 하며 한록을 바라보던 영도. 영도가 본심을 감추고 말했다.

“나 회사를 그만두고 싶어서. 인사팀이랑 얘기하러 왔어.”

영도는...

“형은 어떻게 생각해?”

한록을 떠보려는 생각이었다.

“무슨 일 있었어?”

“응. 요즘 회사에 이것저것 일이 많잖아.”

“일단 내 사무실에서 얘기하자.”

한록이 영도에게 말했고, 영도는 한록의 뒤를 따랐다.

한록이 사무실 소파에 앉았고, 반대편에 앉은 영도에게 말했다.

“자세히 말해봐.”

모두가 진실을 알지만, 이에 대해 절대 언급하지 않는 대화.

“무슨 일인데?”

진심을 숨긴 대화가 시작되었다.

*

“그냥, 형도 알잖아. 나 3년이나 됐는데 아직도 회사에 적응 못하고 있는 거. 계속 여기 남아있어도 미래가 없을 거 같아.”

한록에게 사실을 감추고 말하는 영도. 한록은 영도가 지금 자신을 떠보려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해외팀도 떨어지고 말이야.”

그리고 자신을 시험하고 있다는 것도.

‘미안하다고 말해라.’

‘실수였다고. 내가 필요하다고. 지금 당장 날 데려가겠다고 말해.’

‘그럼 한 번 더 생각해보겠다.’

그런 눈으로 한록을 바라보는 영도.

영도와 한록 사이의 실은 이제 끊어지기 직전이었다.

한록이 영도와 자신 사이의 실을 보며 생각했다.

‘영도는 흔들리고 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자신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어쩔 줄 모르는 영도. 그러나 영도가 흔들리는 것은 영도 때문이 아니었다. 상황이 그렇게 영도를 몰아가고 있었다.

‘영도의 탓이 아니다.’

언제나 한록이 하는 생각.

‘하지만 본인이 이겨내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이걸 감당하는 건 영도가 해야할 몫이었다.

‘앞으로도 끊임없이 나와 비교되는 일이 생길거다. 영도가 그때마다 이렇게 마음을 바꾼다면, 그럼 영도를 곁에 둘 수 없다.’

영도에게 남은 숙제. 그 숙제를 한록이 대신 풀어줄 순 없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대신, 한록은 다른 방식을 시도해 볼 생각이었다.

영도를 어떻게 할 것인가. 앞으로 어떤 식으로 사람을 대할 것인가. 누구를 믿고, 누구와 함께 해야할 것인가.

회귀 후 내내 그런 고민을 가지고 있던 한록. 그리고 이제는 이 생각의 결말을 낼 때였다.

“영도야.”

“응.”

한록의 말에 영도가 고개를 들었다. 한록을 탐색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네가 하고싶은 대로 해. 넌 여기서도, 밖에서도 잘 할 거야. 내가 도와줄 일이 있으면 말하고.”

“그러면 해외팀에 날 넣었어야지.”

“그런 식으로 도와줄 순 없어. 인사이동 기준이 있었고, 그걸 넘은 사람들을 선발한 거야. 너한테만 특혜를 주는 건 너한테도, 나한테도 좋은 일이 아니야.”

“아, 내가 부족했다. 그래서 탈락했다.”

어느새 빈정거림이 담긴 영도의 말.

그 말에 한록이 오랫동안 생각해오던 일을 행동으로 옮겼다.

회귀 후, 영도와 처음 대화를 했을 때. 유선을 위로했을 때. 현차장과 실이 연결되었을 때. 그때를 떠올리며.

“영도야.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마지막 도전을 시작했다.

*

한록은 생각했다.

‘문오석. 끝까지 흔들어 봐라.’

주위 사람을 압박하고. 누명을 씌우고. 질투를 부추기고. 모든 것을 해봐라.

‘나는 내 방식대로 싸워보겠다.’

그렇다면 나는 내 방식으로 널 이겨보겠다.

“영도야. 이번 해외팀에 뽑힌 사람들은 전부 5년 차 이상이야. 넌 3년차고.”

“그래서?”

“네가 부족해서 떨어진 게 아니야.”

“어쨌든, 형 기준에 만족스럽지 않았단 거잖아.”

한록에게 아주 공격적으로 말하는 영도. 그러나 한록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영도야. 나는 달라졌다.’

“해외팀 합격이 중요한게 아니야. 넌 지금도 잘하고 있어.”

그 말에 영도가 짜증을 멈추고 한록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너를 추궁하지도, 나무라지도 않겠다.’

“저번에 말한 저작권 교육. 그거 정말 좋았어. 이번에 실무 큐앤에이도 좋았고.”

“...팀장님은 쓸데없이 예산만 들어갔다고 하셨어.”

“교육은 실적으로 연결되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교육 들었던 사람들은 다들 좋아했어.”

‘나도, 너도. 그때는 잘못된 선택을 했다.’

“지금 네 성과가 마음에 안 들겠지. 알아.”

‘하지만.’

“그치만 너. 계속 발전하고 있잖아.”

‘사람은 성장할 수 있다.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다. 그게 내가 이번 생에서 배운 거다.’

영도야. 나는 달라졌다.

“너 잘하고 있어. 아직 시간이 필요한 것 뿐이야. 다들 아는데 너만 모르는 거야.”

“아무도 그렇게 생각 안 해.”

“아니. 내가 그렇게 생각해.”

그러니까 너도 네가 달라졌다는 걸.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우리가 서로를 통해 성장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해라.

“날 믿어야 해, 영도야.”

한록의 말에 영도가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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