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변했다는 걸 증명해라.
“자네가 누군지 모두에게 알려주고 와.”
최경준의 말에 한록이 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는 한록의 말. 그 말에 최경준이 미소를 지으며 한록을 바라보았다.
이제 CK ENM, 그리고 영화사업본부를 말하면 모두가 최경준을 떠올리는 시기는 지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제대로 싸우고 오게. 내가 부끄럽지 않도록.”
“본부장님. 제가 한 번이라도 본부장님을 부끄럽게 한 적이 있습니까.”
“아니, 단 한 번도 없었지.”
자신에게 누구보다 강한 동료가 생겼다는 뜻이기도 했다.
*
본부장실을 나선 한록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마케팅 부서로 향했다.
‘본부장님을 대신해서 시상식에 나선다.’
이제 영화사업본부를 대표하는 사람은 자신이란 걸 보여주는 일이다.
그러나 부담감이나 두려움 같은 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최대한 기자들을 모아야겠군.’
기분좋은 긴장감이 들 뿐이었다.
“최대리님. 오늘 메일 보냅시다.”
마케팅부에 도착한 한록은 곧장 최대리를 찾았다. 최대리가 한록을 보더니 물었다.
“팀장님. 기분이 좋아보이시네요.”
그 말에 한록은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았다.
살짝 달아오른 손. 지나칠 정도로 선명한 감각들.
“네. 좋은 일이 있거든요.”
한록은 앞으로 다가올 승부에 몸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최대리가 미리 저장해둔 메일을 켜고 한록에게 물었다.
“제가 아는 모든 기자들이에요. 만약 시상식이 제대로 못 끝나면, 이 사람들은 전부 절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지금 과장님한테 제 커리어를 절반 쯤 건 거예요.”
말투는 장난스러웠으나, 최대리가 말한 내용은 대부분 사실이었다.
자신이 몇 년동안 만들어온 네트워크를 한록에게 제공해준 최대리.
하지만 여기에 많은 걸 건 사람은 최대리만이 아니었다. 한록이 최대리에게 말했다.
“걱정마세요. 저도 커리어를 걸었으니까.”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번 시상식에서 제가 본부장님을 대신해서 수상을 할 겁니다. 그리고 해외팀의 출범을 알릴 거예요.”
한록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최대리를 바라보았다.
“시상식이 제대로 끝나지 못하면 최대리님이 아니라 제 커리어가 날아갈 겁니다.”
많은 걸 걸어야 하는 승부를 앞두고 있는 한록.
“하...그래요.”
최대리가 한록을 바라보다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갈 데까지 가봅시다.”
그리고는 자신이 적었던 메일을 모두 지우고, 한록에게 노트북을 내밀었다.
“팀장님이 쓰세요. 뭐든, 원하시는 만큼.”
헐리웃에서 가장 유명한 기자들. 그들에게 뭐든 하고 싶은 말을 하게 해주겠다는 최대리. 그 말에 한록이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이런 건 처음이네요.”
언론, 혹은 관계자들과 소통하는 것. 그건 최대리의 특기지, 한록의 주 업무는 아니었다. 한록의 특기는 어디까지나 대중과 소통하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뭐라고 써야할지 아주 명확히 알 것 같았다.
한록이 최대리의 노트북에 아주 짧은 문장을 남겼고, 그 글을 본 최대리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한록이 최대리의 모든 메일을 지우고 남긴 문장은 단 하나.
[직접 와서 보세요.]
‘우리가 무슨 일을 할 건지, 직접 와서 보라’는 말 뿐이었다.
“괜찮습니까.”
“절대 안 괜찮죠. 건방지다고 엄청 욕 먹을 걸요.”
한록의 말에 최대리가 단호하게 답했다. 그러나 말과는 달리 최대리는 웃는 얼굴이었다. 왜나햐면...
“그리고 욕하면서 보러 올 거예요.”
저 문장의 효과가 얼마나 강력할지, 이미 짐작이 가기 때문이었다.
“팀장님이랑 제 커리어. 한 번 걸어봅시다.”
최대리가 기자들에게 메일을 전송했다.
*
“팀장님. 저한테 고마워하세요.”
한 시간 후. 최대리가 한록에게 다가와 말했다.
최대리가 내민 것은 메일 답신 목록이었다. 최대리가 보낸 50개의 메일. 그에 대해 모두 답장이 도착해있었고...
[전원 참석.]
모두가 이번 시상식에 참석의사를 밝혔다.
“네, 감사합니다. 저도 제대로 해보겠습니다.”
“아니, 이건 우리 거래니까 고마워할 거 없어요. 제가 고마워 하란 건 이거예요.”
그렇게 말한 최대리는 두 번째 서류를 내밀었다. 서류에는 아주 익숙한 이름이 적혀있었다.
최대리가 메일을 보낸 사람은 한록이 가장 넘고 싶은 사람. 5년 후면 영화계 최고의 권력자가 될-
“제가 개인적으로 메일을 보냈어요. 바로 답장이 오더라구요.”
[참석자: 제롬 앤더슨.]
스튜디오 B의 사장, 제롬 앤더슨이었다.
제롬 앤더슨. 그가 다시 한국에 온다.
“팀장님. 제롬이 팀장님한테 전해달래요.”
“뭐라고요?”
“‘기다리고 있었다’라고요.”
한록이 준비한 일을 목격하기 위해.
*
한록이 준비하는 헐리웃을 향한 출사표. 그걸 보기 위해 제롬이 한국에 방문한다.
‘제롬의 앞에서, 헐리웃에 도전장을 내민다.’
이제 ‘진짜 싸움’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저도 모르게 손을 움켜쥔 한록. 그때 한록에게 메시지가 하나 도착했다.
[이팀장.]
발신인은 현차장이었다. 그리고, 그 내용운...
[문오석 본부장이 영도에 대해 물어봤어.]
한록이 준비한 마지막 스텝이었다.
*
영도에 대한 정보가 적힌 파일을 바라보고 있는 문오석.
‘이한록과 같은 고등학교, 같은 대학교 졸업. 꽤 절친한 사이군. 입사는 이한록보다 빠르고...’
그가 어느 부분에서 시선을 멈추더니 아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직급은 한참 밑이군.’
“나야. 문오석.”
문오석이 영도의 파일을 덮었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
다음 날 아침. CK ENM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 영도.
잠시 후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고, 영도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엘리베이터에서는 사람들이 해외팀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박과장. 그거 들었어? 제롬 앤더슨이 우리 회사를 방문한대.”
“왜?”
“그, 해외팀 때문에.”
‘...요즘 어딜 가나 형 얘기네.’
그리고 사람들의 얘기를 듣던 영도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박과장. 해외팀 지원서 넣었었지?”
“그거 안 넣은 사람도 있나.”
영도 역시 한록의 해외팀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었다.
한록의 첫 조직개편안에 포함되지 않았던 영도.
‘그래. 아직 내가 필수인원은 아니니까.’
약간의 기대가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첫 번째 개편안은 현차장도 포함되지 않은 구조였다. 영도는 빠르게 아쉬움을 접었고, 곧이어 열린 해외팀 모집 공고에 신청서를 넣었다.
‘...어. 영도씨 없네?’
그리고 한번 더 팀에서 제외되었다.
왜라는 의문은 들지 않았다. 개편안에 포함된 사람들은 모두 자기와 비교도 하기 어려울 정도로 쟁쟁한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아직 부족하니까. 어쩔 수 없지.’
한록에게 이에 대해 어떠한 불만도 얘기하지 않은 영도. 그래선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한록에게 그런 말이 통하지 않을 것이란 점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상하네.’
마음을 스치고 지나가는 아쉬운 감정은 어쩔 수 없었다.
‘...설에 내려가면...또 형 얘기만 하시겠네.’
한록과 집안끼리 아주 어린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인 영도.
-한록이는 장학금을 받았다더라.
-한록이는 수석입학이라더라.
-한록이는 벌써 대리래.
그리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자신과 한록을 비교하는 부모님의 말.
-영도가 한록이 반이라도 했으면 좋겠네.
그게 좀 더 가혹해질 것이란 게 너무나 자명해진 상황이었다.
서른의 나이에 임원이 된 한록. 한록이 만든 팀에 두 번이나 떨어진 자신.
한록의 능력. 연봉. 위치. 앞으로 누릴 혜택. 그 모든게...
‘...부럽다.’
부러워서 미칠 것 같았다.
그때, 경쾌한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음, 아냐. 이런 걸로 삐지면 안 돼.’
그리고 영도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영도는 한록과 거의 형제처럼 지내왔다. 영도는 한록이 오과장 때문에 괴로워할 때 곁에 있어주었고, 모든 사람이 한록을 욕하는 지금도 한록의 편을 들고 있었다.
한록을 향한 질투. 그리고 한록을 응원하는 마음. 그 모든 것이 영도의 진심이었다.
‘형 지금 한참 잘 되고 있는데, 괜히 나 때문에 이상한 말 나오면 안 되지. 그래서 그런 걸 거야.’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고 엘리베이터를 빠져나온 영도. 영도는 17층에 위치한 자신의 사무실로 향했다.
그리고 영도가 법무팀에 들어가자마자...
“영도씨. 잠깐 얘기 좀 하자.”
법무팀 팀장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
영도를 기다리고 있던 법무팀 팀장 이창섭. 그는 영도를 회의실로 데려갔고, 영도는 아무것도 모른채 이창섭을 따라갔다. 의자에 앉은 이창섭이 말했다.
“이번에 해외팀 인사이동을 신청했잖아. 해외팀 대신, 다른 곳으로 오퍼가 들어왔어.‘
“다른 곳이면 어디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리고 영도의 의문에 곧 답이 내려왔다.
“이한록 팀장 비서 자리가 아직 비어있대.”
인사이동을 한다.
해외팀이 아니라, 한록의 비서로.
그 말에 어쩐지 귀가 멍멍해지는 기분이었다.
“이한록 팀장이 비서를 몇 번이나 거절하고 있대. 부담스럽다나. 그래서 비서실에서 기존에 친분이 있는 사람을 넣고 싶다고 하더라고. 영도씨는 아직 큰 프로젝트 하고 있는 게 없으니까, 본인만 원한다면 언제든지 가도 괜찮아. 비서실이랑도 얘기 끝났어. 아마 3개월 정도 교육받고 이한록 팀장 쪽으로 가게 될 거야.”
너는 지금 법무팀에 필요한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널 보낼 준비가 되어있다.
네가 있을 자리는 여기가 아니다.
“영도씨가 법대 나오고, 로스쿨도 준비했고. 이쪽에 의욕이 있다는 건 아는데...그래도 여기서는 할 일이 별로 없으니까.”
너는.
“해외팀 두 번이나 떨어졌잖아. 이렇게라도 들어가는 거 나쁘지 않다고 봐.”
이렇게가 아니면, 너는 이한록을 따라갈 수 없는 사람이다.
그때부터는 귀에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
“생각해보고 말해줘.”
한참이나 영도를 설득하던 이팀장. 이팀장의 말이 끝나자 영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안 갑니다. 절대 안 가요.”
그리고는 무작정 사무실을 뛰쳐나왔다.
“김영도 주임. 잠시 할 말이 있는데.”
그때, 영도를 불러세운 누군가.
“영화사업본부 인사이동에 대해서 할 말이 있어.”
문오석이었다.
*
“인사이동이 좀 부당한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 같아서.”
영도에게 건넨 문오석의 미끼.
“자리를 좀 이동해볼까.”
흔들리는 영도의 눈동자와.
“...네.”
영도의 대답.
문오석은 생각했다.
‘이한록. 네가 상상도 못한 일이 벌어질 거다.’
*
문오석의 본부장실이 위치한 20층으로 향한 영도와 문오석. 그리고, 잠시 후 엘리베이에서 내린 누군가.
“앞으로 팀장님이 사용하실 방입니다.”
바로 비서실장과 한록이었다.
“시상식이 끝나는 대로 자리를 옮기시게 될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한록이 비서실장 윤태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곧 자신이 사용하게 될 팀장실을 한번 둘러 보는 한록.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윤태주가 물었다.
“곧 비서배정도 완료될 예정입니다.”
정말 지나가는 듯, 오로지 일처리를 위해서인 것처럼 느껴지는 사무적인 말투. 그러나 그의 말에는 은근한 가시가 숨어 있었고...
“최대한 팀장님이 불편해하지 않으실 사람을 선정하겠습니다.”
윤태주의 실은 문오석에게로 뻗어있었다.
비서실장 윤태주. 현차장에게 영도에 대해 물은 문오석.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문오석을 향해 뻗어나간 윤태주의 실.
‘이거군.’
문오석은 아마 비서실장을 통해 영도를 자극하고 있을 것이다.
상황을 모두 파악한 한록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이제 나가 주시기 바랍니다.”
그 말에 윤태주가 짧게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향했다.
*
텅 빈 방에 혼자 남은 한록. 한록은 의자에 앉아 손목의 실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오석이 움직였고, 영도가 미끼를 물었다.’
문오석의 접근. 그리고 그에 흔들리는 영도. 겉보기에는 상황이 과거와 똑같이 흘러가고 있었다.
‘더 해봐라. 완전히 실이 끊어질 때까지 해봐.’
하지만 이제는 이 모든 것이 한록이 꾸민 일이었다.
영도. 과거 한록에게 가장 큰 상처를 준 사람. 문오석. 그 일을 사주한 사람.
이제는 그들이 자신의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다.
한록은 자신의 손목에서 뻗어나간 여러 실들을 만지작거리다가 강하게 움켜쥐었다.
누가 누구를 배신하느냐.
누가 자신의 편이 되느냐.
누가 자신의 적이 되느냐.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죽일 것인가.
이제 그걸 결정할 사람은...
‘영도야. 마지막 기회다.’
‘네가 변했다는 걸 증명해라.’
바로 자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