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171화 (152/263)

영화계의 새로운 주인이 나타났음을 보여줄 때였다.

“<수면>이 대상을 타지 못했을 때의 상황도 준비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들켰네. 이제 사람 속도 읽으시나요?”

“최대리님이 여기서 끝낼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리고 팀장님이 허튼 소리를 할 사람도 아니고.”

서로를 잘 아는 듯한 한록과 최대리의 대화.

“그래서, 어떻게 절 도와줄 생각이에요?”

최대리가 물었고, 한록이 입을 열었다.

*

최대리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해준 한록.

한록의 계획은, 한마디로...

“최대한 시상식을 띄워보겠다는 말씀이시군요.”

<수면>과 <도착지>를 이용해서, CK 시상식 자체를 재밌게 만들어보자는 것이었다.

“네. 시상식은 해외팀의 첫 출범을 알리는 자리니까요.”

그리고 <수면>은 <도착지>의 최대 라이벌인 동시에, 그만큼 아주 매력적인 자원이기도 했다.

“이 시상식이 최대한 널리 알려졌으면 합니다. 최대리님이 아는 해외 기자들에게 전부 연락을 돌려주세요. 최대한 많은 기자들이 시상식에 방문해야 합니다.”

한국으로는 부족하다. 헐리웃의 모든 언론을 불러오겠다는 한록의 계획.

하지만 한국에서 열리는 시상식에 헐리웃 기자들이 관심을 가질리 만무했다. 실제로 CK측에서 여러 곳에 메일을 보냈지만, 답장은 돌아오지 않았다.

“최대리님이라면 할 수 있지 않으십니까.”

하지만 최대리는 헐리웃에서 크게 신뢰를 받는 사람이었다. 많은 영화사, 언론사들이 최대리의 메일 하나에 영화구입을 결정하는 상황. 최대리라면 기자들을 불러오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제가 과장님한테 지는 걸 전 세계로 송출하라 이거죠.”

최대리와 한록이 대상을 두고 싸우고 있다는 것이었다.

“제가 이걸 받아들일 것 같아요?”

확실히, 보통 사람이라면 받아들이지 않을 제안이었고-

“네.”

한록은 최대리가 어떤 사람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맞아요. 대신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한록의 말에 최대리가 웃으며 답했다.

장난스러운 미소 뒤에서서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있는 최대리. 그는 지금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었다.

‘제안은...나쁘지 않다.’

한록이 제안한 방식은 <도착지>가 대상을 타더라도 <수면> 역시 그에 버금가는 주목을 받을 수 있을 만한 제안이었다.

‘하지만 무모해. 이팀장님답군.’

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성공했을 때의 얘기였다.

“팀장님. 이렇게 기자들을 불러놓고 계획이 성공하지 못한다면...제가 몇 년동안 쌓아온 신뢰가 날아가는 겁니다. 다음부터는 아무리 제 말이라도 기자들이 당장 달려오지 않을 거예요.”

“네,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제가 커리어를 걸고 계획에 참여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말해주세요.”

최대리의 마지막 질문.

“저도, 최대리님도, 혼자서는 할수 없는 일이잖아요. 하지만 둘이 같이 있으면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한 한록의 답은.

“재밌지 않겠습니까.”

최대리가 넘어갈 수 밖에 없는 말이었다.

나와 손을 잡아라. 그리고 당신이 패배하는 순간을 모두에게 선보여라.

대신, 누구보다 멋진 승부의 순간을 만들어주겠다.

한 번도 겪지 못한 일을 보여주는 것.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내는 것.

그래서, 이 사람과 일하는 게 즐겁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점.

최대리가 생각하는 한록의 가장 큰 장점이었으며...

“저는 팀장님한테 대체 몇 번을 지는지 모르겠네요.”

한록의 제안을 거절 할 수 없는 이유였다.

최대리의 말에 한록이 웃으며 물었다.

“합류하시는 겁니까?”

“네.”

그리고 최대리가 답했다.

“몇 번이라도요.”

최대리는 아주 즐거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

‘좋아. 준비는 끝났다.’

최대리와의 대화를 마치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 한록.

CK. 그리고 한록의 해외팀을 전 세계에 보여 줄 준비가 완료되었다.

‘시작하자.’

그렇다면, 이제야말로...

“현차장님. 잠깐 대화 가능하십니까.”

문오석과의 악연을 끝내야 했다.

*

“무슨 일이야, 이과...아니, 이팀장? 뭐 고민이라도 있어?”

한록과 함께 아무도 없는 회의실로 향한 현차장. 현차장의 말에 한록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있습니다.”

“뭔데? 말해봐. 내가 도울 수 있는 거면 뭐든 도와줄게.”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현차장과 한록의 손에 묶인 실이 반짝거렸다.

실을 바라보던 한록이 입을 열었다.

“해외팀 구성이 거의 완료되었습니다. 아마 이틀 정도 지나면 공지가 올라갈 겁니다.”

“어...그래. 그런데?”

“현차장님은 해외팀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회사에서 영도를 제외하고는 한록과 가장 친한 현차장.

한록이 오과장과 때문에 고생할 때부터 늘 한록의 편이 되어주었고, 서로를 의지하며 해외팀의 설립까지 함께했다.

그런데 자신이 한록의 팀에서 제외된다.

한록의 말에 현차장의 얼굴에 큰 실망이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그래. 이팀장이 생각이 있었겠지. 미리 알려줘서 고마워.”

현차장은 한록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오로지 한록의 눈에만 보이는, 완벽한 신뢰를 의미하는 손목의 실. 현차장과 한록사이의 실은 여전히 단단히 묶여있었다.

‘현차장님은 절대로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그런 확신과 함께 한록이 입을 열었다.

“앞으로 올라갈 조직개편도는 미끼입니다. 정식개편에는 당연히 차장님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끼라니? 무슨...”

한록의 말에 의아한 듯 묻던 현차장. 그가 말을 멈추고, 알았다는 듯 한록을 바라보았다.

“문오석.”

그리고 지금 한록이 생각하고 있는 이름을 말했다.

“맞습니다. 문오석 본부장님이 저. 차장님. 본부장님. 그리고 영화사업본부 전체를 노리고 있습니다. 저번 <상처>때 처럼요.”

“<상처>때 처럼이면...”

“문오석 본부장님은 우리 사이를 이간질해서 영화사업본부에 스파이를 심을 겁니다. 그리고 제 약점을 잡아서 영화사업본부 전체를 날려버리겠죠.”

한록은 문오석이 어떤 계획을 펼칠지 이미 알고 있었다.

회귀 전. 그리고 <상처>까지. 문오석과 오과장이 어떤 식으로 상대를 공격하는지 너무나 오래 지켜봐왔으니까.

그렇다면.

“그러니까, 우리가 먼저 그쪽을 잡아버립시다.”

한록은 문오석의 방식을 그대로 돌려줄 생각이었다.

“차장님. 제가 말하는대로 따라와 주실 수 있겠습니까.”

한록이 현차장에게 물었다. 그리고 한록은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었다.

“그럼.”

현차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든 돕겠다고 했잖아.”

그의 손목에 묶인 실이 다시 한번 반짝였다.

*

그리고 이틀 후. 해외팀의 조직개편안이 공지되었다.

“어디 보자. 정부장님. 송과장. 최대리. 외부에서도 잔뜩 영입하는 거 같고.”

그리고-

“...뭐야.”

“현차장이 없어?”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

소문이 돈다.

“해외팀 구성 봤어?”

“어. 현차장이 없던데?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이긴. 끈 떨어진 거지.”

소문이 돈다.

“형. 사람들 사이에서 해외팀에 대해서 말 나오는 거...알고 있어?”

“알고 있어. 영도 넌 신경 쓰지 마.”

소문이 돈다.

“현차장이 이한록 오른팔 아니었어? 그런데 현차장은 없고, 라이벌이라던 최윤일이 있네.”

“해외팀이 지금 회사 핵심이잖아. 현차장이 해외팀에 데려갈 만한 급은 아니란 거지.”

“그렇다고 해서 자기 오른팔을 잘라?”

“이한록 원래 그런 놈이야.”

“무서운 새끼...”

소문이 돈다.

“현차장이 이한록한테 정식으로 항의했다는데?”

“그래? 어떻게 됐대?”

“팀 변경 없다 했대. 회사 놀러 오냐고. 전부 실력으로만 뽑은 거라고.”

“와...이제 이러면 누가 이한록 라인 타겠냐?”

“그렇지. 멍청한 짓을 했어.”

소문이 돈다.

“형. 진짜 반응이 너무 안 좋아.”

“걱정하지 말라니까.”

“형.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소문이 돈다.

“사장님. 영화사업본부 조직개편안에 대해 사내 분위기가 좋지 않습니다.”

“가만히 있으세요.”

“하지만 시작부터 이렇게 나간다면, 이한록 팀장도 위험해질 수...”

“나는 이한록 팀장과 계약을 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쪽을 믿는다는 계약이요.”

소문이 돈다.

“문본부장님.”

“최경준 본부장님.”

“미처 몰랐는데, 문오석 본부장님이 예선전에 상당히 관심이 많으셨더군요. 특히 <상처>에 말입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말해주지. 두 번 다시는 허튼 수작 부리지 마.”

소문이 돈다.

“최경준이 전부 알고 있다. 지금 당장 이한록을 쳐야 해.”

소문이 돈다.

“현차장.”

“문오석 본부장님.”

“바쁜가.”

“...무슨 일이십니까?”

그리고.

“안 바쁘면 나랑 잠깐 얘기 좀 했으면 해서.”

드디어 문오석이 그 소문을 물었다.

*

현차장을 자신의 사무실로 데려간 문오석.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는 문오석을 보며, 현차장은 며칠 전 한록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우리 사이에 문제가 생겼단 소식이 들어가면, 문오석 본부장은 바로 차장님께 접근할 겁니다. 그게 문오석 본부장의 방식이니까요.

‘이팀장 말이 맞았어.’

그리고 결과는 한록의 예상대로였다.

“이한록 팀장과 꽤 긴밀한 사이로 알고 있었는데. 꽤 상심이 크겠어.”

-문오석 본부장이 저에 대해 언급한다면. 그럼 너무 적의를 드러내진 마세요. 차장님이 그런 분이 아니란 것 정도는 문오석 본부장도 알고 있을 겁니다.

현차장은 한록의 말을 생각하며 주의 깊게 입을 열었다.

“...실망한 건 맞습니다. 하지만 이한록 팀장 말도 일리는 있죠. 회사는 놀러 오는 곳이 아니고, 친분 때문에 팀을 구성할 순 없는 거니까요.”

“하지만 그런 말까지 하는 건 너무하지. 현차장보다 10살은 어린 녀석이잖아.”

-차장님. 조금만.

“현차장을 얼마나 무시하면 그런 말을 하겠어.”

-아주 조금만, 화가 난 척을 하세요.

“...본부장님과 할 얘기는 아닌 것 같네요. 가보겠습니다.”

한록을 탓하지 않는. 그러나, 감싸주지도 않는 모습. 현차장의 태도에 문오석의 입에 조용히 미소가 걸렸다.

“현차장. 곧 우리가 힘을 합칠 일이 생길 거야.”

현차장이 밖으로 나가기 전, 문오석이 마지막으로 현차장에게 말했다.

“그리고 나는 이한록처럼 동료를 버리진 않아.”

*

문오석과의 만남 이후 곧장 한록에게 상황을 전달해준 현차장.

한록은 이 일을 최경준에게 전달했고, 한록과 현차장, 최경준이 본부장실에 함께 모이게 되었다.

“역시 주위 사람을 포섭하려 드는군. 자네 말이 맞았어.”

현차장의 얘기를 전해 들은 최경준이 한록에게 말했다. ‘어떻게 알았냐’라는 마음이 담긴 최경준의 눈빛. 그러나 한록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게 문오석 본부장이 가장 잘하는 일이니까요.”

바로 자신이 오과장과 문오석의 수법에 몇 번이나 당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문오석은 계속 차장님을 지켜보고 있을 겁니다. 그때까지는 저와 사이가 좋지 않은 척을 계속 유지해야 합니다.”

“그래, 알겠어.”

한록의 말에 현차장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최경준이 현차장에게 말했다.

“이팀장과 얘기해야 할 일이 있네. 잠시 나가주겠나.”

“네,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자리에서 일어난 현차장.

현차장이 완전히 나가는 걸 확인한 최경준이 한록에게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현차장이 이 일에 참여할 줄 몰랐네.”

현차장은 누가 봐도 선량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이런 식의 꿍꿍이에는 절대 엮이지 않았다. 그러나 현차장은 지금 누구보다 열심히 한록을 위해 움직여주고 있었다.

“게다가 자네를 위해 움직이고 있는 게 현차장만이 아니지.”

현차장, 유선, 정부장에게 이 상황을 알려준 한록. 그 셋은 모두 한록과 얘기를 마쳤고, 문오석의 접근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또한 하대리와 송과장 등 몇몇 사람들은 ‘한록에게도 사정이 있을 거다’라며 은근히 한록의 편을 드는 상황.

이제 문오석의 공격은 예전처럼 한록을 무너뜨릴 수는 없을 게 분명했으며-

“하지만 명심하게. 이게 끝이 아닐 거야.”

문오석 역시 이를 알고 있을 것이었다.

“문오석이라면 아마 마지막 한 방을 준비해두겠지. 자네와 가장 가깝고, 자네에게 가장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말이야.”

최경준이 말하는 ‘누군가’.

한록과 가장 가까운.

한록에게 가장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지금 한록의 머릿속에 떠오른 그 사람.

“네, 알고 있습니다.”

한록은 최경준이 생각하는 그 사람이 누군지 이미 알고 있었으며-

“어떻게 할 생각인가.”

“시험을 해볼 생각입니다.”

“그 녀석을?”

“아뇨, 저를요.”

“스스로를 시험한다라.”

“네. 제가 과연 얼마나 달라졌는지 알고 싶습니다.”

이제 자신의 과거를 극복해볼 생각이었다.

낮고, 날카로운 한록의 목소리. 한록의 목소리를 들으며 최경준은 생각했다.

아마 한록은...

“이미 준비는 끝났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이 순간만을 기다려온 게 분명했다.

*

“문오석을 어떻게 할 생각인가.”

“다시는 이곳에 발도 붙이지 못하게 만들겠습니다.”

한록의 눈에서 보이는 야망, 그리고 분노. 그 모습에 최경준은 기다리던 순간이 왔음을 직감했다.

‘이제 때가 됐다.’

능력만 뛰어나고, 인간관계에는 서투르던 대리.

그때의 한록은 이제 없다.

능력과 상황 대처도 뛰어나지만, 독기가 부족하던 과장.

그때의 한록도 이제는 찾아볼 수 없다.

이제 한록은 능력과 야망, 모든 분야에서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상대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한록.”

“네, 본부장님.”

“이번 공로상 수상은 나 대신 자네가 대리수상을 하는 게 좋겠군. 수상소감도 나 대신 진행하게.”

“그 말씀은...”

“해외팀의 출범을 자네가 발표하란 거야.”

그렇다면, 이제는.

“CK를 대표해서 시상식에 서게. 그리고 자네가 누군지 모두에게 알려주고 와.”

영화계의 새로운 주인이 나타났음을 보여줄 때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