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조건을 잊으셨군요.
[시상식에 참여해달라니. 내가 메일을 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나?]
<네, 알고 있습니다.>
[알고는 있군. 고작 2주 남은 일정에 나를 부르다니.]
알렉산드로가 한록에게 웃으며 말했다.
알렉산드로는 지금 제롬과 회사를 설립한 상황.
그냥 회사도 아니고, 모든 영화계가 주목하는 거장 두명의 만남이다. 그리고 이 회사는 5년이 지나면 헐리웃 최고의 영화사가 되는 곳이었다.
[난 요즘 비행기에서만 잘 수 있는 상황이라네.]
알렉산드로의 웃음 섞인 말은 농담이 아닌게 분명했다.
<바쁘실 거라 예상은 했습니다. 시간을 내는 게 아예 불가능하신 겁니까?>
[그래도 삼일의 삶이 수상을 한다면 갈 생각이 있지. 수상은 확실한 건가?]
<확답은 드릴 수 없습니다. 다른 좋은 영화가 있으니까요.>
한록의 말에 알렉산드로가 알겠다는 듯 말했다.
[아, 그래.]
[<수면>이 있지.]
타임지 수상 이후, 이미 외국에서도 유명해진 <수면>.
<수면>은 <도착지>와 대상을 두고 다투는 동시에, 한국영화대상에서 거의 모든 분야에 노미네이트 된 상황이었다.
[<수면>이 상을 타도 꽤 재밌겠지. 하지만 문제가 있어.]
<무슨 일입니까?>
[자네가 우리 회사의 스카웃을 거절했다는 얘기를 들었어. 그런데 내가 자네를 도와주러 가야겠는가?]
겁을 주는 듯한 알렉산드로의 말.
<네. 오셨으면 합니다.>
[어째서?]
<부산영화제만큼 아주 재밌는 걸 준비했거든요.>
하지만 한록은 그를 설득할 방법을 이미 알고 있었다.
수화기 너머로 알렉산드로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알렉산드로 감독이 말했다.
[부산 영화제만큼 재밌는 걸 준비했다라...]
[한이 이렇게 말한다면 갈 수 밖에 없겠군.]
그의 목소리에는 기대와 즐거움이 묻어있었다.
*
-반드시 참여하지. 한도 부산영화제만큼을 보여주겠다는 말을 지켜야 할 거야.
그렇게 성사된 알렉산드로 감독의 섭외.
‘그럼 다음은.’
이제 한록이 시상식을 위해 준비한 두 번째 스텝인-
‘사장님이다.’
하정엽이 남아있었다.
“비서님. 사장님께 연락 부탁드립니다.”
한록이 곧장 하정엽에게로 향했다.
*
사장실을 찾은 한록. 한록은 인사와 동시에 하정엽에게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시상식을 위한 예산 사용처입니다. 허가 부탁드립니다.”
“결재는 결재 라인을 따라서 하세요.”
하정엽이 한록의 돌발행동에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그러자 한록이 답했다.
“마케팅 부서 이한록이 아니라, 해외팀 팀장으로서 올린 결재입니다.”
“그렇군요.”
한록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하정엽. 해외팀 팀장으로서, 한록이 이 회사에서 허가를 받아야 할 사람은 오직 자신 뿐이었다.
하정엽은 한록이 내민 서류를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어느 부분에서 시선을 멈추더니 한록을 보며 말했다.
“시상식을 위한 소요예산....20억.”
한록이 또 한 번 말도 안 되는 금액을 요구한 것이다.
“사용처는?”
“해외팀의 첫 프로젝트인 체험형 영화관을 시상식에 도입해보려고 합니다. 20억은 그걸 위한 비용입니다.”
“시상식이면 비용은 한국영화대상측에서 부담해야 하는 겁니다. 이걸 우리가 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한국 영화대상측은 이걸 지불할 능력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습니다. 전국민이, 아니 전 세계가 보는 앞에서 CK의 프로젝트를 공개할 기회입니다.”
한록의 말에 하정엽은 답이 없었다.
한록의 말은 모두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한국영화대상의 마케팅을 외주받은 입장에서, 오히려 돈을 지불해야한다는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었다.
“한국영화대상측과 얘기해보고 답을 주겠습니다.”
그리고 하정엽이 서류를 돌려주었을때 한록이 답했다.
“사장님. 계약조건을 잊으셨군요. 전 여기 허락을 받으러 온 게 아닙니다.”
“무슨 말을...”
한록에게 되묻던 하정엽이 말을 멈췄다. 한록이 한 말의 의미를 깨달은 것이었다.
한록이 해외팀 팀장을 맡으며 요구한 것이자, 백지 계약서에 쓰여있던 것.
‘완전한 자율권.’
“서명해주십시오.”
한록이 다시 하정엽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아무것도 묻지 말고, 내 말을 따라라’고 말하는 사원.
그리고 그를 지켜보는 사장.
지금은 한록이 해외팀 팀장으로서 활동하는 첫 순간이자, 앞으로 한록과 하정엽과의 관계가 어떻게 진행될지 결정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한록과 하정엽의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잠시 후.
“역시. 들어주는 게 아니었어.”
하정엽이 한록이 내민 서류에 서명을 하기 시작했다.
*
“감사합니다, 사장님.”
10분만에 20억을 결재 받은 한록. 한록은 인사를 한 후 사장실을 나섰다.
하정엽은 한록이 나간 문을 보면서 생각했다.
‘당했다.’
-약속은 확실히 지켜주시는군요.
평소답지 않게 아주 즐거워보이던 한록의 얼굴. 그 얼굴을 보자 앞으로 이런 일이 몇 번이나 다시 일어날 것이란 예감이 엄습했다. 그리고...
‘돈을 많이 벌어놔야겠군.’
이한록을 다루기 위해 아주 많은 돈이 필요하겠다는 생각 또한 들기 시작했다.
*
[20억을 쓴다고요? 거기에 알렉산드로 감독이 온다고요?]
송PD에게 시상식의 진전상황을 말해준 한록.
[이거 진짜 대박인데요?]
송PD가 아주 솔직하게 말했다.
송PD의 말이 맞았다. 알렉산드로 감독의 방문. 20억이라는 지원. 그리고 CK와 KBC의 전폭적인 지원.
‘환경은 완벽하다.’
이제 예전처럼 예산에 얽매이거나, 사사건건 방해를 받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한록에겐 해외팀 팀장으로서 막대한 권한이 주어진 상황이었고-
“세상에서 가장 재밌는 시상식을 보여줍시다.”
이제 그 권력을 한번 제대로 써볼 생각이었다.
[좋아요. 한번 역사에 남을 만한 시상식을 만들어보자고요.]
신이나서 답하는 송PD.
‘최고의 시상식을 만들어보겠다.’
한록과 송PD는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한록의 목표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번 시상식을 통해 사람들에게 CK가 짓는 체험형 영화관이 무엇인지 보여주겠다.’
거기에 좀 더 바란다면, ‘<도착지>와 <수면>등 CK의 영화 또한 주목받길 원한다’는 마음 또한 가지고 있었다.
해외팀의 출범을 알리고, CK의 영화가 영화계를 휩쓰는 걸 보여주겠다. 거기에 시상식 역시 세계적으로 주목받게 만들어보겠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걸 위해선 지금부터 또 숨가쁘게 달려야 했다.
한록이 송PD에게 말했다.
“알렉산드로 감독이 그냥 시상을 하고 끝나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알렉산드로 감독이 대상 후보작들에 대해 인터뷰하는 장면을 넣는 걸로 하죠.”
[그분 스케쥴이 될까요?]
“제가 요청해보겠습니다.”
[오, 상무이사 파워. 좋습니다.]
“그리고 수상작이 발표되는 과정도 좀 더 극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오케이. 이건 시상식 담당팀이랑 한 번 얘기해볼게요.]
빠르게 합을 맞춰가는 송PD와 한록. 시상식에 대해 전체적인 윤곽이 잡혔을 때, 송PD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아시죠? 가장 중요한 건 대상이잖아요. 대상에 제일 힘을 줘야해요.]
“네, 알고 있습니다.”
시상식을 장식하는 마지막 순서이자, 그해 최고의 영화를 뽑는 대상. 이에 송PD가 아이디어를 하나 제안했다.
[대상을 마지막에 한 번에 발표하는게 아니라, 시상식 초반부터 끌고 가면 어떨까요?]
“어떤식으로요?”
[대상은 한국영화협회 회원들 투표가 반영되잖아요. 시상식 초반부터 이 사람들이 투표하는 영상을 계속 보여주는 거죠. 그리고 투표수가 카운트 되다가, 마지막에 투표 결과랑 대상이 발표 되는 거예요.]
대상에 큰 영향을 끼치는 한국영화협회 회원들의 투표. 그걸 공개하겠다. 그리고 두 시간 동안 투표수가 벌어지는 과정을 보여주겠다.
송PD의 아주 악랄한 제안에 한록이 답했다.
“잔인하네요.”
[그래야 재밌죠. 사람들은 이런 거 좋아해요. 자극적인 거.]
그리고 그 말을 듣자, 한록의 머릿 속에 떠오른 생각이 하나 있었다.
이 시상식에서 나올 수 있는 가장 자극적이고 재밌는 장면.
‘이거다.’
그리고 이 시상식을 끝낼 마지막 장면.
생각을 마친 한록이 송PD에게 빠르게 말했다.
“송PD님. 잠시만요. 생각나는게 하나 있는데, 내부 회의 후 말씀드려야겠습니다. 나중에 다시 통화합시다.”
[어? 뭔데요?]
“죄송합니다. 합의가 필요한 부분이라서요. 확정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대체 뭔데요? 끊지마요! 말해주고 가!]
송PD가 다급하게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한록이 전화도 제대로 끊지 않고 사라진 것이었다.
[이한록!]
송PD가 사라진 한록에게 외쳤다.
*
같은 시간.
서감독과의 미팅을 끝낸 최대리는 회의실에서 생각에 잠겨있었다.
조금 전, 최대리는 서감독에게 솔직한 상황을 얘기해주었다.
-감독님. <수면>이 대상을 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서감독의 반응은...
-알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담담했다.
‘이한록씨. 이 인간은 정말 못 이기겠어.’
명백하게 <도착지>의 승리로 끝난 GV.
[CK예선전은 영화의 가치가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CK예선전, 그리고 <도착지>를 통해 볼 수 있는 관객의 영화수용에 대한 태도.]
[도착지 챌린지가 한국을 넘어 해외에서도 큰 이슈가 되고 있다.]
예선전이 끝나고 GV와 <도착지>에 대해 쏟아지던 기사들.
물론 <수면> 역시 엄청난 반응을 얻고 있었다. 특히 해외에서는 <수면>이 <도착지>와는 비교도 안 될만큼의 성적을 내는 상황이었다.
‘그건 해외 얘기고.’
하지만 한국에서만큼은 <도착지>에 대한 지지가 절대적이었다.
인지도. 사람들의 응원. 그리고 파급력.
그 모든 것이 <도착지>가 <수면>을 뛰어넘은 상황. 심지어 서감독조차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저는 영화를 만들 뿐입니다. 대상을 만드는 건 관객의 선택이죠. 관객의 선택이 어떻게 나오든 받아들일 겁니다.
서감독은 그렇게 얘기했지만...
‘아니. 그냥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지.’
최대리는 서감독과는 생각이 달랐다.
‘꼭 대상을 받아야만 하는 건 아냐. 어떻게든 주목을 받으면 되는 거다.’
사실 ‘대상을 받겠다’는 건 한록과 서감독의 목표였지, 최대리의 목표는 아니었다.
‘나는 이한록처럼 무리한 도전을 할 생각은 없어. 그걸 성공시킬 수도 없고.’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는 최대리. 시상식이 2주도 남지 않은 이 순간, 지금 와서 시상식을 뒤엎을만한 마케팅을 할 순 없었다.
‘<수면>이 대상을 받지 못하더라도, 가장 많은 상을 받으면 되는 거야. 그거면 대상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주목받을 수 있다.’
대상만큼의 파급력을. 아니-
‘어쩌면 대상도 가려버릴 정도로.’
그 이상을 노리고 있는 최대리.
“최대리님.”
그때, 누군가 회의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상대를 확인한 최대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게 누구야.”
상대는 바로-
“<수면>의 원수가 오셨네요.”
한록이었다.
“이과장...아니, 팀장님. 설마 염탐하러 오신 거예요? 우리 정정당당하게 싸우기로 한 거 아니었나?”
한록에게 장난스레 묻는 최대리. 그 말에 한록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아뇨. 싸우러 온 거 아닙니다.”
송PD와의 대화 중 떠오른, 이 시상식을 위한 마지막 장면. 가장 멋진 시상식. 가장 멋진 대상. 그걸 위한 마지막 카드는 바로...
“그럼요?”
“최대리님을 도우러 왔습니다.”
<수면>이었다.
*
“<수면>이 대상을 받은 것만큼의 효과를 낼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한록이 자신의 라이벌에게 한 가지 제안을 건넸다. 그건-
“마지막 마케팅은, 같이 해봅시다.”
이제는 손을 잡자는 제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