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너를 상대로 갑질을 하다.
“몇 개까지 적어도 되겠습니까?”
하정엽이 한록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어이가 없다는, 그래도 예상은 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본인이 생각하는 본인 가치만큼 적으세요.”
“후회하실 텐데요.”
“보통 사람은 그러겠죠.”
‘나는 재벌 2세고, 네가 뭘 요구하든 들어줄 수 있다’라는 의도가 느껴지는 하정엽의 말. 거만하지만, 동시에 당연한 얘기이기도 했다.
한록은 마음 편히 자신의 요구조건을 적기 시작했다.
[CK ENM을 세계 최고의 영화사로 만들어라.]
단 하나의 조건이 적힌 백지 계약서.
그 밑에 한록의 조건이 달리기 시작한다.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한록이 계약서를 내밀었고, 하정엽이 종이를 가져갔다. 그리고 한록이 쓴 조건을 읽기 시작했다.
“차후 영화제작에 결정권을 달라.”
한록이 지금 가장 원하지만, 얻을 수 없던 것. 바로 영화제작에 대한 결정권이었다.
‘앞으로 <식물>의 장편 버전을 제작해야한다.’
차후 CK ENM 최고의 영화가 된 <식물>. 이제는 슬슬 <식물>의 제작에 돌입해야할 때였다. 그리고...
‘그 영화도.’
한록이 영화업계에 발을 들이게 한, 한록이 세상 사람들에게 선보이고 싶어 하는 그 영화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정엽이 한록에게 물었다.
“해외팀 팀장으로는 부족한 겁니까. 제작 권한은 마케팅과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예, 부족합니다.”
그리고 한록이 단호하게 답했다.
자신의 전문분야인 마케팅이 아닌, 제작에 대한 권한을 달라는 한록의 요구.
“걱정하시는 부분은 압니다. 마케팅 포인트와 제작은 상당히 유사한 점이-”
그리고 한록이 하정엽을 설득하려 할 때.
“좋습니다. 다만, 완전한 자율권은 아닙니다. 제작팀과의 조율을 거치세요.”
하정엽이 한록의 말을 듣지도 않고 제안을 수락했다.
회사가 자기 손 안에서 움직이길 바라는 하정엽.
그러다보니 하정엽은 한 사람에게 많은 권한을 주는 걸 좋아하지 않았고, 영화사업본부의 각 팀은 상당히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편이었다.
“이런 걸 좋아하시지 않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싫어합니다. 아마 다른 사람의 요구였다면 거절했을 겁니다.”
그 말은, 한마디로-
“하지만 이한록 과장이라면 생각해볼만 하죠.”
하정엽이 한록을 엄청나게 특별대우하고 있단 뜻이었다.
‘내 생각보다 훨씬 나를 신뢰하고 있다.’
하정엽의 말에 한록이 약간 미소를 지었다.
일에서 인정받는 것. 누구보다 뛰어난 사람이 되는 것. 모든 회사원의 꿈이자, 방금 한록이 이뤄낸 일이었다. 하정엽의 허락은 한록의 생각보다도 훨씬 기분이 좋았다.
하정엽이 한록의 다음 요구조건을 읽기 시작했다.
“그 다음. 해외팀 결성에 완전한 자율권을 달라.”
또 다시 권한에 대한 문제. 이 역시 하정엽이 싫어할 조건이었다. 하지만 방금 일을 거친 한록은 알고 있었다.
“마음대로 하세요.”
이 역시 통과되리란 걸.
지금까지 한록이 제시한 조건들. 이전에는 누구에게도 들어주지 않던 요구사항들을 전부 수락한 하정엽.
‘하지만 이제는 좀 다를 거다.’
그리고 한록의 예상처럼, 마지막 조건을 읽던 하정엽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한록이 제시한 마지막 조건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나를 신뢰할 것.”
하정엽이란 사람 자체에 대한 시험이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를 신뢰하라.’
정말 많은 게 포함되어 있는 한록의 조건. 하정엽이 한록에게 물었다.
“설명해보세요.”
“말 그대로입니다. 앞으로 시상식까지 끊임없는 잡음이 있을 겁니다. 그래도 사장님은 저를 믿고 해외팀을 계속 지원하셔야 합니다.”
2주 뒤 있을 시상식. <도착지>, <수면>, <삼일의 삶>, <지구 특공대> 등 한록이 회귀 후 펼친 모든 마케팅이 그 성과를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문오석이 한록을 공격하기 가장 좋은 순간이기도 했다.
‘내가 시상식 준비에 정신이 없을 때. 그때 문오석이 일을 터뜨릴 거다.’
한록은 문오석이 어떤 식으로 나올지 이미 알고 있었고, 그에 대비할 방법까지 준비해 둔 후였다.
‘그걸 위해서는 하정엽이 끝까지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그 방법의 마지막 카드는 바로 하정엽이었다.
고민하는듯한 하정엽. 그가 잠시 후 말했다.
“이런 식의 계약을 할 순 없습니다. 상황을 제대로 설명하세요.”
하정엽의 말은 한록이 듣기에도 타당한 말이었다. 하지만, 한록의 계획 중에는 아직 하정엽에게 밝힐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았다.
“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침묵에 빠진 하정엽.
“사장님. 지금까지 제가 만든 결과를 생각하신다면...”
그리고-
“이 정도는 감수하셔야 합니다.”
한록의 말.
한록의 협박에 가까운, 그러나 동시에 진실이기도 한 말에 하정엽이 답했다.
“이건 사기야.”
차분한 분노가 담긴 하정엽의 말.
그리고 하정엽은...
“하지만 알면서도 속을 수 밖에 없군.”
계약서의 맨 끝에 싸인을 하고 한록에게 내밀었다.
*
한록의 모든 조건에 동의한다는 의사를 밝힌 하정엽.
그가 내민 계약서를 보며 한록은 생각했다.
-앞으로 있을 문오석과의 전투. 그리고 해외팀을 꾸려나가기 위해 거쳐야할 관문들.
‘이겼다.’
자신은 이미 그 싸움에서 승리했음을.
*
한록 또한 하정엽처럼 계약서에 싸인을 했다. 그러자 하정엽이 다시 계약서를 읽으며 말했다.
“내가 예상했던 것들은 없군요. 연봉 같은 것들 말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으니까요.”
“역시 이런 부분은 미숙하군요.”
하정엽은 그렇게 말하며, 계약서에 마지막 조항을 추가해주었다.
[네 번째. CK ENM 최고 대우를 약속한다.]
자신이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주겠다는 말. 그 말에 한록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최고대우라면 구체적으로 어디까지입니까?”
“자녀의 경우 박사까지 학자금 지원. 연봉과 별개로 품위유지비 3억 지급. 그리고 차는...”
한록은 이미 회사 소유의 BMW와 벤츠를 타고 있었다. 잠시 생각하던 하정엽이 말했다.
“보통은 법인 차량을 사용하지만, 본인 명의로 새로운 걸 지급하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록의 가장 큰 관심사.
“자택은 회사 근처 30평대까지. 금액의 상한선은 없습니다.”
집.
“5년까지는 회사 소유라 매매가 제한되고, 5년 만근부터 본인 명의로 전환됩니다.”
강남 한복판 30평대 자가 아파트가 한록의 눈앞에 떨어졌다.
“그 전에 퇴사는 꿈도 꾸지 마세요.”
하정엽의 말에 한록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절대 그럴 일 없습니다.”
그것도 아주 진심을 담아서.
*
계약을 마친 한록. 한록이 나간 후, 하정엽은 다시 한번 계약서를 살펴보았다.
[CK ENM을 최고의 영화사로 만들 것.]
자신이 내 건 조건은 단 하나. 반면 한록에게는 조건이 네 개나 달려있었다.
‘이건...’
피식 웃은 하정엽은 생각했다.
이한록이 CK, 아니 한국 기업 역사상 최초로...
“불공정계약이잖아.”
오너를 상대로 갑질을 했다고.
*
하정엽과의 미팅 후. 사무실로 내려간 한록.
“과장님. 시상식 대비용 기사 나왔습니다!”
“이한록. 본부장님이 부르신다.”
[해외팀 구성은 완료했나?]
시상식. 문오석과의 결전. 그리고 해외팀의 출범.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잔뜩 쌓여있었다.
“좋네요. 초안 이대로 잡고, 완성본 작성해서 내일 다시 얘기해요.”
하지만 자신에겐 든든한 동료가 있었으며-
“내일이요? 과장님 어디가세요?”
“네.”
“어디요?”
“집 보러 갑니다.”
세상에서 가장 급한 일이 있었다.
*
한록은 오후 반차를 내고 회사 근처 부동산으로 향했다.
“사장님. 매매 알아보러 왔습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월세, 전세가 아닌 귀한 매매손님. 사장이 환한 미소로 한록을 반겼고, 한록에 대한 기본 정보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몇평대 보고 계세요?”
“30평대 보고 있습니다.”
“신혼부부 맞죠? 어우, 사장님 얼굴도 잘생겼는데 능력도 좋은가봐.”
“아뇨. 혼자 살 겁니다.”
혼자살 집으로, 강남 30평대 집을 구하는 젊은 남자. 하지만 입고 있는 옷은 그저 평범한 직장인 같다.
‘뭐하는 사람이지? 진짜 집 보러온 거 맞나?’
혼란스러움에 빠져있던 부동산 사장이 한록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얼마까지 생각하시는데요?”
그리고 한록이 답했다
“금액은 상관없습니다.”
한록의 답에 사장은 생각했다.
‘미친놈.’
“기왕이면 비쌀수록 좋겠네요.”
사장은 이어진 한록의 답변에 금방 생각을 고쳤다. ‘집값이 비쌀수록 좋다’고 말하는, 눈앞의 새파랗게 젊은 남자. 이 남자는 그냥 미친놈이 아니라...
‘미친 금수저다!’
아주 미친 부자가 분명했다.
*
그날 저녁. 부동산 투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한록.
‘마음에 드는 곳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디든 여기보단 훨씬 낫군.’
갑작스레 찾아가서인지, 회사와 가까운 곳에는 마음에 드는 집이 없었다. 그래서 몇 번 더 부동산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던 한록.
하지만 자신이 지금 살고 있는 광명의 원룸으로 들어오니, 새삼 그 으리으리한 집들이 거의 궁전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30평이면...너무 큰가?’
지금 자신이 있는 12평짜리 원룸. 이 3배가 넘는 곳으로 집을 옮긴다.
한록은 살면서 그렇게 큰 집에 살아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건 가족들 역시 마찬가지일게 분명했다.
한록이 평생 자신과는 연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집들. 그런 집을 계약서 한 장으로 한록에게 선물한 하정엽. 한록은 오늘 그를 보며 생각했다.
‘해외팀이 출범하면 본가도 사 달라 해야겠다.’
바로 하정엽에게서 최대한을 받아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일하자.’
그런 생각을 하자 갑자기 애사심과 근로의욕이 마음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한록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책상으로 향했고, 노트북을 켰다.
‘다음 영화.’
한록이 노트북으로 보고 있는 것은 <도착지> 이후 마케팅할 영화였다.
한록이 생각하고 있는 해외팀의 역사적인 첫 작품. '이게 바로 한국 영화다'라고 세계에 선보일 작품.
그리고 회귀 전, 역대 한국 영화 최초의 기록을 달성한 작품이었다.
‘<도착지>가 천만을 찍으면..그때 바로 마케팅에 들어간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한록에게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최경준 본부장님.]
최경준이었다.
*
“한국영화대상측과 협의 끝났네. 시상식에 우리가 원하는 게스트를 초대하기로 했어.”
한록이 시상식을 위해 최경준에게 부탁했던 것. 바로 게스트를 섭외하는 것이었다.
<삼일의 삶>, <지구특공대>, <수면>, 그리고 <도착지>. 한록이 담당한 CK의 작품이 이번 시상식을 휩쓴다.
거기에 시상식에 헐리웃의 유명한 배우나 감독으로 섭외하고, 그 장소에서 헐리웃에게 해외팀의 출범을 선전포고한다.
영화계에서 CK ENM의 인지도를 크게 상승시킬 전략이었다.
“이제 2주 뒤면 전 세계 영화계가 CK란 이름을 알게 될 거야.”
최경준의 말처럼, 2주 뒤면 한록이 CK를 위해 준비한 모든 일들이 끝나고...
“애들 장난은 끝이야.”
헐리웃, 그리고 세계를 대상으로 한 ‘진짜 무대’가 펼쳐질 것이었다.
“앞으로 단단히 준비해두게.”
“네, 알겠습니다.”
결의를 다지는 한록과 최경준. 그때 최경준이 약간의 장난기가 섞인 목소리로 한록에게 말했다.
“그리고 자네가 준비해야할 게 하나 더 있지. 아마 시상식보다 더 어려울 일이라네.”
시상식이 2주 남고, 해외팀 발표 역시 2주 남은 지금 이 순간.
“내일 자네의 승진 공지가 올라갈 거야.”
이제는 모든 게 밝혀질 순간이었다.
“자네는 CK 그룹 최연소 임원이야. 내일부터 대대적으로 기사가 나갈 거니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해두게. 회장님과의 인터뷰 외에 언론 인터뷰도 하나 준비되어있네.”
“제 개인 인터뷰입니까?”
“그렇지. 앞으로도 종종 인터뷰가 있을 거야. 서른살에, 연예인처럼 잘생긴 임원. 이보다 좋은 홍보모델이 어디있나.”
내일부터 한록에게 벌어질 일을 설명해주는 최경준. 그는, 어쩐지...
“이제 예전의 이한록으로는 살 수 없을 거야.”
즐거워 보이는 목소리였다.
*
그리고 다음날.
[영화사업본부 조직개편공지.]
“해외팀? 해외팀 중심으로 개편된다고?”
공지에는 유명무실하던 해외팀이 영화사업본부의 주축으로 올라오게 된다는 사실이 적혀있었다. 그리고...
“이한록이 팀장?”
한록이 그 리더가 될 것이란 내용이었다.
[이과장. 지금 공지 봤어?]
[형형형형 드디어 올라왔다!]
[이한록. 오늘 출근하자마자 내 자리로 와라.]
[이한록 과장님 안녕하세요.]
[이한록 과장. 제작팀 장민수입니다.]
사람들의 끊임없는 연락과..
[CK ENM, CK 그룹 최연소 상무이사급 임원 발탁]
[이한록 과장은 CK예선전, 부산영화제를 진행하였으며, 입사 2년만에 4개의 천만영화를 만들어낸 인재로 전해진다.]
뉴스기사들.
“야. 저기.”
“이한록이다.”
그 사이에서 한록의 첫 출근이 시작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