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164화 (145/263)

이 순간을 기다려 왔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태준의 등장으로, 바짝 긴장한 촬영장의 분위기.

[하태준?]

[하태준이다]

[저 할아버지가 누군데?]

[CK 회장입니다]

[헐 ㄷㄷ회장 앞에서 발표해야 하는거임]

[CK가 이 프로그램 어마어마하게 밀어주네요ㅋㅋ]

CK직원들만이 아니라, 시청자들 역시 하태준의 등장에 깜짝 놀란 듯한 반응을 보였다.

그렇게 모두의 시선이 하태준에게 집중되었을 때. 사회자가 다시 멘트를 이어갔다.

“예선전의 마지막 화, 수면 대 도착지가 시작됩니다. 사실 이 승부의 승자가 올해 최고의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겁니다. 그만큼 저희도 별한 투표 시스템을 도입했는데요.”

넉살 좋게 웃고 있던 사회자. 그가 표정을 싹 바꾸고, 무대 위의 <수면>과 <도착지>팀을 보고 말했다.

“조금 더 특별하고, 한층 더 무서워진 방식입니다. 관객 여러분은 지금 당장 버튼을 눌러주세요.”

사회자의 말과 함께, 어두운 객석이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오른쪽은 빨간 불빛. 그리고 왼쪽은 파란 불빛으로 채워진 객석.

“이게 뭐야?”

깜짝 놀란 현차장을 보고 사회자가 웃으며 말했다.

“관객 여러분의 버튼에는 라이트 패널이 달려 있습니다. 이 패널은 여러분이 <도착지>를 선택하면 빨간색, 그리고 <수면>을 선택하면 파란색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이 버튼은 관객 여러분의 선택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합니다.”

객석을 바라보던 사회자가 서감독에게 물었다.

“어디보자. 지금 보니 수면과 도착지가 180대 120이네요. 서감독님. 꽤 앞서고 있는데요. 소감이 어떠신가요?”

“고작 180표 밖에 안 나온게 이해가 안 가는군요. 영화를 제대로 보신게 맞나 모르겠습니다.”

서감독의 날카로운 말. 그리고...

“이런. 160대 140으로 바뀌었네요.”

서감독의 발언으로 순식간에 낮아진 <수면>의 투표수.

눈앞에서, 자신의 말 한마디에 따라 투표수가 달라진다.

출연진들에겐 엄청난 부담과 긴장을 주는 방식이 아닐 수 없었다.

[와씨]

[헐]

[아 개재밌네 ㅋㅋㅋㅋㅋ]

[너무 무서움ㅠㅠ]

[아니 저 앞에 회장 있잖아 ㅋㅋㅋㅋㅋㅋㅋ]

[악마들이다 악마들]

하지만 자극적인만큼 인터넷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자. 현재 스코어 160 대 140. 첫 번째 GV 순서는 <수면>이네요.”

자신을 지켜보는 300명의 관객. 그리고, 한국 영화계 최대의 거물 하태준.

“서감독님. 준비되셨나요?”

그들 앞에서 서감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언제든지요.”

*

그렇게 시작된 <수면>의 GV. <도착지>팀은 모두 무대 아래로 내려갔다.

“게스트 모시겠습니다.”

그리고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무대 위로 족히 7명은 되는 사람들이 오르기 시작했다.

<평론가 루카스 힐던입니다.>

“루카스 힐던 평론가입니다.”

“한국대학교 철학과 교수 이진웅입니다.”

<다큐멘터리 감독 웨이민입니다.>

“웨이민 감독입니다.”

교수, 평론가, 감독. 한국인부터 외국인까지 각 분야 최고 전문가들을 초대한 최대리.

[와 라인업이 후덜덜하네요.]

[이거 무슨 EBS임? 시사교양?]

[섭외를 대체 어케 한 거지..?]

[지금 CK 예선전 나오는 평론가 스펙. JPG]

서감독의 게스트가 나올때마다 인터넷은 그 사람에 대한 얘기로 뜨거워졌다.

<이 영화, <수면>에 나오는 모성애는 강렬하고, 이질적이고, 동양적입니다. 서양에서도 있는 개념이지만, 그 발현방식이 상당히 독특해요. ‘이게 모성애라고? 내가 알던 그 개념이 맞나?’라고 생각하게 만들어요.>

<동양적이라고 했지만, 중국인 입장에서도 똑같이 느껴져요. 굉장히 낯설달까. 의도적인거죠?>

<수면>에 대해 신이 나서 얘기하는 세계 각지의 전문가들.

“네. 우리가 알던 개념을 낯설게 하는 거. 모두가 맞다고 하는 생각에 ‘과연 맞을까?’라고 의문을 가지게 하는 거. 그게 영화가 할 일이죠.”

그리고 그들의 질문에 여유롭게 답하는 서감독까지.

[봐라 이게 K-영화다]

[서감독이 확실히 외국에서 인정받고 있네요~]

[와 들어보니까 모든 장면에 의도를 넣어놨네요.]

한국의 유명한 감독이, 세계의 전문가들에게 인정받는 모습.

<이번 칸 영화제 외국어영화상은 <수면>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엄청난 영광이네요.>

“글쎄요. 칸 영화제에서 인정받는 게 제 목적은 아닙니다.”

거기에 본인은 인정을 갈구하지도 않는다.

[사람이 저렇게 재수 없는데 저렇게 멋있다니]

확실히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장면이었다.

객석에선 서감독, 그리고 게스트가 말할 때마다 <수면>에 투표했음을 뜻하는 파란 불빛이 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객석 맨 앞열에서는 하태준, 하정엽, 최경준이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대를 보며 하정엽에게 무언가 말하는 하태준.

그의 얼굴엔 흐뭇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회장님이 <수면> 무대가 꽤 마음에 드시나 봐요.”

하대리가 한록에게 속삭였고, 한록도 고개를 끄덕였다.

한록이 보기에도 <수면>의 무대는 멋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서감독이란 사람이 멋있게 보인달까.

“최대리님이 정말 열심히 준비해오셨네요.”

한 사람에게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몰아주는 무대. 과연 최대리의 특기를 활용한 무대였다.

그리고 객석의 불빛이 200 대 100으로 바뀌었을 때.

무대 위에서 조용히 객석을 지켜보고 있던 최대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자, 그럼 다음 게스트를 불러볼까요.”

한참동안 이어지던 전문가들의 토론이 최대리의 한 마디에 끝났다. 그리고 마침내, 최대리가 준비한 시간이 다가왔다.

“네. 오늘 최고의 게스트를 불러보죠.”‘

사회자의 말에 무대 뒤에서 나타난 여자 한명이 들어왔다. 최대리가 그녀를 소개했다.

“<타임지> 편집장이신 다이앤 로페즈입니다.”

그 말에 무대 아래 사람들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장비서. 끝나고 다이앤이랑 바로 미팅 잡으세요.”

“네, 알겠습니다.”

다이앤과의 연결고리를 만들어두려는 하정엽. 타임지 편집장이라는 직함은 확실히 CK ENM의 사장도 움직이게 만드는 위치였다.

그런 사람이 지금 이 자리에 왔다.

하태준이 최경준에게 말했다.

“다이앤은 어떻게 데려온 거지?”

“최윤일 대리가 학교에 있을 때 교수님이었다고 합니다.”

“역시, 그놈. 일할 줄 알아.”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하태준.

무대 위에선 다이앤이 얘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이번에 올해의 영화를 선정하고, 표지로 올리겠다고 발표했을 때. 여기 있는 최에게서 바로 메일이 왔어요. <수면>이라는 영화가 있다고, 꼭 봐야한다고. 그러면서 아직 미국에 개봉도 하지 않은 영화의 파일을 보내줬죠. 그리고 전 <수면>을 보고 생각했죠. 이제 헐리웃은 안심할 수 없겠다.>

최대리와 눈을 마주친 다이앤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곧 한국 영화의 시대가 올 거다.>

그 말에, 아직까지 <도착지>의 빨간색으로 남아 있던 오른쪽 객석이 순식간에 파란색으로 물들었다.

“거의...80대 20정도인 것 같아요.”

한순간에 <수면>으로 쏠린 투표수.

“네가 아끼는 놈이 질 수도 있겠구나. 그러게, 최윤일도 데려가라고 하지 않았냐.”

그리고 하태준의 만족과 타박이 섞인 말.

<도착지>와 한록의 위기. 그러나 한록은 여전히 태연한 얼굴이었다.

“과장님. 이 정도면 우리가 이길 거 같아요.”

심지어 유선마저도.

“그럼 마지막 게스트를 모셔보겠습니다.”

그리고...

“이번 심사위원이었던 평론가 존 체이스맨입니다.”

최대리가 자신이 준비한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

최대리의 말에 무대에 올라온 것은 한 외국인 남자.

<타임지> 심사위원 중 유일하게 <도착지>에 혹평을 내렸던 평론가 존 체이스맨이었다.

“저 사람은 <수면>을 안 좋아하던데. 왜 데려왔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묻는 현차장. 반면, 한록은 조금 다른 반응이었다. 최대리가 대체 뭘 위해 이 자리를 준비한 건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 제대로 준비해왔구나.’

최대리의 활약에 한록이 오늘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손끝부터 타고 올라오는 짜릿함과, 약간의 긴장.

‘이 정도는 해야 싸울맛이 나지.’

바로 강한 승부욕과 기대였다.

[저 아저씨는 누구임?]

[타임지 심사위원 중 수면에 유일하게 반대하던 사람]

[왜 반대했대요?]

[원래 아시아 영화 안 좋아함.]

[근데 왜 왔대?]

[싸우려고 온 듯? 이번에 <수면> 혹평했다가 미국에서도 엄청 욕 먹었음.]

서감독의 최대의 적수. 그의 등장에 인터넷은 한층 더 달아올랐다.

[CK 예선전 안보는 사람은 없나요?]

[이건 거의 모래시계급 시청률인듯ㅋㅋㅋㅋ]

이제 어느 사이트를 가든, <수면>과 예선전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 상황.

거의 전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존이 서감독에게 말했다.

[오랜만이군요. 반갑습니다.]

“네, 반갑습니다. 여기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누가봐도 전혀 반갑지 않은듯한 두남자의 재회.

[내가 왜 여기에 온 줄 아십니까?]

“모릅니다.”

숨 막히는 긴장.

[당신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러 왔습니다.]

“무슨 기회 말인가요?”

영화계 거장 둘의 신경전.

[내가 당신 영화에 혹평을 내리지 않았습니까. 이번에야말로 날 설득할 기회입니다. 물론, 설득될지 말지는 모르는 일입니다.]

존의 말에 서감독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서감독의 미소를 본 순간, 송PD는 생각했다.

‘아.’

‘너무 재밌다.’

그리고...

“나는 당신 인정 같은건 필요없는데.”

서감독의 답.

그 말에 송PD가 살짝 떨어진 곳의 한록에게 말했다.

“이한록씨. 당신 위험해요.”

한록에 대한 안타까움, 그리고 서감독에 대한 놀라움이 담긴...

“<수면>이 이길 것 같아요.”

그녀의 아주 솔직한 감상이었다.

그때, 한록이 송PD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송PD에게 빠르게 걸어오더니 말했다.

“지금 당장 전체 투표하세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지금 투표하면 <도착지>에 불리할텐데-”

“괜찮아요. 빨리, 지금 당장이요.”

그러나 한록은 송PD의 걱정 같은건 신경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 사람, 대체 무슨 생각이지? 본인이 질 거란 생각은 안 하나?’

그리고 송PD가 잠시 다른 생각을 할 때, 한록이 송PD에게 외쳤다.

“PD님. 명장면이 나올거예요.”

“...!”

그 말에 송PD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객석을 돌아보았다. 객석의 관객들은 이미 서감독의 매력에 흠뻑 빠져있었다.

한록이 말한 명장면.

그게 무엇일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송PD가 관객들의 이어폰으로 통하는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지금 당장 선호하는 영화에 투표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 말에 서서히 바뀌기 시작하는 객석의 불빛들.

그리고...

[지금 투표 뭐임????]

[와 대박]

[저거 뭐냐?]

거의 모든 객석에서 빛나고 있는 파란 불빛.

“295 대 5입니다.”

스텝의 보고를 받은 송PD가 한록에게 말했다.

단 5명을 빼고, 모두가 <수면>에 투표를 했다.

그 모습을 관객도. 시청자도. 그리고 하정엽과 하태준도 지켜보고 있다.

“이한록씨. 정말 괜찮겠어요?”

송PD가 정말 걱정이 된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러나 한록은 여전히 침착한 얼굴이었다.

‘아니, 아니다.’

한록의 얼굴에서 보이는 건 침착함이 아니었다. 한록의 얼굴에서 보이는 건...

“<수면>이 이 정도는 해줘야죠.”

모든 것을 예상했다는 태연함이었다.

‘대체 뭘 준비한 거야?’

송PD는 한록이 뭘 준비해 온 건지, 왜 이 상황에서 이렇게 태연한 건지, 왜 상대방이 돋보이도록 투표를 지시한 건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확실한 건 지금 <수면>의 압도적인 승리마저 한록이 바라던 일이라는 점. 이 모든 것이 한록이 계획이라는 것.

그리고 한록은 이 상황을 뒤집을 카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도착지> 대체 어떡하냐?]

모두가 그런 생각을 할 때 한록이 말했다.

“PD님. <도착지> GV로 넘어갑시다.”

한록의 얼굴에서 빛나는 자신감과 승부욕. 그 모습을 본 송PD는 생각했다. 이한록은, 그러니까,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단 태도였으며-

"지금 장면은 기억도 안 날만큼 명장면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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