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163화 (144/263)

온 에어.

GV 당일. 회사로 출근한 한록.

“이과장님, 안녕하세요.”

한록이 CK 로비로 들어오는 순간, 누군가가 한록에게 말을 걸었다. 송PD였다.

송PD는 한록에게 인터뷰를 따려는 듯한 모양이었다.

카메라가 뜨자, 출근을 하던 사람들이 모두 멈춰서서 한록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시작이구나.’

라는 듯한 사람들의 얼굴. 한록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송PD와 인터뷰를 시작했다.

“요즘 인터넷에서 <수면> 얘기밖에 안 나오잖아요. 거기에 초특급 게스트도 오고. 어떻게 이기실 생각인가요?”

<수면>얘기를 하는 송PD. 그녀의 뒤로는 CK 로비에 대형으로 걸린 <수면>의 타임지 표지가 보였다.

“우리도 대형 게스트가 있어서요.”

“타임지 편집장. 그 이상인가요?”

“음...”

한록이 잠깐 말을 끊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보다 말했다.

“아니면 오늘 출근 안했을 겁니다.”

무언가 엄청난 걸 준비했다는 게 느껴지는 한록의 말. 송PD가 신이 나서 물었다.

“그게 뭔데요? 대답 좀 해주세요!”

이미 한록이 뭘 준비했는지 다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 묻는 송PD. 인터뷰를 좀 더 재밌게 해보려는 속셈이었다.

그리고 한록은 그 장단에 충분히 맞춰줄 생각이었다.

“홍보모델이랑 관련된 거예요.”

“힌트를 좀 더 주자면?”

“그건...”

한록의 말에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는 송PD. 카메라맨. 그리고 로비에서 한록을 지켜보는 사람들.

한록이 송PD가 아닌 로비에 모인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방송으로 확인하세요.”

그리고 윙크를 하더니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한록이 사라진 자리. 벙찐 얼굴로 한록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송PD가 말했다.

가뜩이나 저번 방송 출연이후로 인지도가 올라가고 있는 한록. 그런데 이 와중에 위트있고, 살짝 건방진 인터뷰까지 나간다.

게다가, 이번 화에서는 한록이 꽤 높은 비중으로 출연할 예정이었다.

그렇다면...

“이한록씨! 이거 끝나고 프로그램 하나 더 합시다!”

한록은 지금보다 훨씬 유명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기 직전. 한록이 송PD에게 웃으며 답했다.

“생각해 보고요.”

*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핸드폰을 확인하는 한록.

방금 송PD에게 말해주지 않은 ‘비장의 무기’가 그 곳에 들어있었다.

[이과장님 감사합니다! -오태우]

한록에게 도착한 누군가의 메일.

‘내가 감사하지.’

한록은 태우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

지금으로부터 몇주 전.

도착지 GV가 끝나고, 챌린지가 시작된 날이었다.

GV팀은 장학금을 지급할 사람을 찾기 위해 매일 SNS를 둘러보는 상황.

그때 한록의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친구가 0명?’

친구 0명. 댓글 0개. 좋아요 0개의 게시글 하나. 아니, 그 계정에 올라가 있는 글 자체가 도착지 챌린지 하나 뿐이었다.

그리고 게시글의 내용은...

[도착지를 한 번 더 보는 것.]

‘대체 무슨 상황이지?’

고작 영화를 한번 더 보는 게 버킷리스트이자 이루고 싶은 꿈이라니. 거기에 프로필 사진은 교복을 입고 있었다.

‘가정 형편이 안 좋은가?’

그렇다면 장학금을 지급하기에 딱 맞는 상황이다.

호기심과 걱정이 담긴 마음으로, 한록은 상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안녕하세요. CK ENM 이한록 과장입니다. 혹시 잠깐 대화 가능하실까요?]

[무슨 일이세요?]

그리고 상대는 곧장 답변을 보내왔다.

*

한록은 대화를 나누며 상대에 대해 알아갔다. 학생의 이름은 오태우. 고등학교 2학년이지만, 현재 반년째 학교에 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유는 아버지의 부도.

[부모님은 두분 다 대구로 일하러 가셨어요.]

[지금 저는 할머니랑 살고 있어요.]

[동생은 삼촌네 있어요.]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고, 큰 충격을 받은 태우는 학교뿐만이 아니라 집밖으로 나가는 것 조차 꺼리게 되었다.

그렇게 집에 틀어박혀서 영화만 본지가 벌써 반년이라고 했다.

[도착지가 보고 싶어서 한 달만에 밖에 나갔어요.]

[그런데 할머니가 너무 좋아하셔서...너무 죄송하고 슬펐어요. 이제 더 이상 집에만 박혀 있으면 안 될 거 같아요.]

[그런데 한 번 더 밖에 나갈 용기가 없어요. <도착지>를 보러 나갈 때도 힘들었거든요.]

[그래도 꼭 할머니랑 같이 <도착지>를 보고 싶어요. 할머니도 저만큼 힘들어 하시는 걸 알거든요.]

누군가에게 용기를 주는 영화. 태우는 한록이 사람들에게 <도착지>를 보여주고 싶던 이유에 딱 들어맞는 사람이었다.

‘이 얘기가 마케팅에 쓰일 수 있다면...’

만약 태우가 자신의 아픔을 극복할 수 있다면.

그리고 GV에서 그 얘기가 공개된다면.

이연옥이 그랬듯, 태우와 비슷한 사람들이 또 한 번 용기를 얻을 것이다.

그래서 한록은 태우에게 한가지 제안을 했다.

[할머니랑 단 둘이 영화를 볼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CK 사무실에 영화관이 있거든요.]

[괜찮으면 한 번 더 나와줄래요?]

태우에게선 한참동안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

‘...부담스러웠으려나.’

그리고 한록이 마음을 접으려고 할 때쯤, 태우의 답장이 도착했다.

[네, 갈게요.]

*

그리고 시간이 흘러, 태우와 태우의 할머니가 CK에 방문했다.

아무도 없는 영화관에서, 서로의 손을 잡고 영화를 보는 할머니와 손자.

“태우야. 저거 봐라.”

그들이 영화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지 한록은 모른다.

“다 괜찮아질 거다.”

다만 영화가 끝날 때 쯤, 할머니가 태우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을 뿐이었다.

*

오로지 두 사람만을 위한 <도착지>의 상영이 끝났고, 태우와 할머니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날.

사람 만나는 걸 어려워 하는 태우를 위해, 온라인으로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할머니가 <도착지>를 너무 좋아하셨어요. 그래서 저도 기뻤어요.]

한록의 걱정과 달리, 태우는 무언가 하고싶은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보람이 느껴지는 태우의 말에 한록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다음엔 엄마랑 아빠한테도 <도착지>를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태수한테도요. 그리고, 인터넷에서 만난 저랑 비슷한 친구들한테도요. 꼭 <도착지>가 아니어도 좋으니까. 위로가 되는 영화를 보여주고 싶어요.]

‘아.’

이어지는 태우의 말. 그 말을 듣고, 한록은 태우가 앞으로 무슨 얘기를 할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을 바꿔준 하나의 영화. 그리고 그런 영화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여주고싶다는 생각...

[그래서 새로운 꿈이 생겼어요.]

보통 영화감독들이 감독의 꿈을 가지게 되는 계기였다.

<도착지>를 보고, 영화감독이 되고싶다는 꿈을 가지게 된 소년. <도착지>와 정말 잘 어울리는 사연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저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좋아. 이거 꽤 괜찮다.’

태우의 말에 한록이 들뜬 얼굴로 이어지는 말을 기다렸다. 이대로 인터뷰를 따서, GV에 삽입하면 된다. 그렇다면 꽤 괜찮은 장면이 나올 것이다-

[과장님 같은 사람이요.]

그러나 태우의 답변은 한록의 생각과는 달랐다.

*

태우의 새로운 꿈은 영화 감독이 아니라-

[저도 과장님처럼, 좋은 영화를 필요한 사람들한테 전달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바로 한록처럼 되는 것이었다.

[과장님. 저희 할머니가 정말 좋아하셨어요. 저도 그렇고요. 과장님이 아니었다면, 내년에도 계속 집에만 박혀있었을지도 몰라요.]

[그건 태우 학생이 용기를 내서 그런거죠. 그리고 <도착지>가 도움을 준 거고요.]

[아뇨. 챌린지가 없었으면...그리고 과장님이 나오라고 하지 않았으면 용기를 내지 못했을 거예요.]

화려한 영화계. 그러나 그건 일부분에 해당되는 일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화 마케팅이란게 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록은 이 일을 정말 사랑했다.

한록이 원하는 건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게 아니라, 정말 필요한 사람들에게 좋은 영화를 전달하는 것이었으니까.

[감사합니다, 과장님.]

그리고 오늘. 처음으로 관객이 자신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CK ENM 최연소 과장에 이어, 최연소 임원이 될 한록.

누군가는 태우의 감사가 여태 한록이 이뤄낸 것에 비해 아무 것도 아닌 일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한록은 생각이 달랐다.

살면서 처음으로 받아보는 관객의 감사. 한록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아준 유일한 관객.

태우의 메시지에, 한록의 머릿속에 지난 10년의 세월이 스쳐지나갔다. 회귀 전의 삶. 오과장. 구과장. 이 일을 하면서 만났던 수많은 어려움과 고난들.

[저도 고마워요, 태우 학생.]

그 모든 것이 태우의 한 마디에 전부 보상받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거다.’

‘이거면 반드시 <수면>을 이길 수 있다.’

<도착지>의 결정적 카드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

[태우 학생.]

[혹시 부탁 하나 들어줄 수 있을까요?]

한록이 <도착지>의 마지막 계획을 위해 태우에게 물었다.

*

“태우? 그 인터뷰 한 애? 걔를 홍보에 쓰겠다고?”

“네. 본인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좋은 선택 같지는 않은데. 일반인잖아.”

“아뇨, 부장님.”

태우에게 <도착지>의 홍보에 중요한 역할을 맡기겠다는 한록의 결정.

정부장은 떨떠름한 표정이었지만, 한록은 단호했다.

“이건 최고의 결정이 될 거고, 영화 업계 모두가 기억하는 마케팅이 될 겁니다.”

“...네가 한다니까 말릴 수는 없지.”

한록의 말에 결국 정부장이 두 손을 들었다.

*

그리고 시간은 흘러 오늘. GV 당일.

‘그래. 이건 반드시 성공할거다.’

한록은 그런 생각을 하며 엘리베이터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눈앞에는...

“과장님.”

태우가 있었다.

불과 몇주전과는 다르게 눈에 띄게 밝아진 모습의 태우. 그리고, 태우가 준비해준 카드.

‘이거면 됐다. 반드시 <수면>을 이긴다.’

그런 생각을 하는 건 한록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유선이 한록의 곁에 다가와 말했다.

“과장님. 송PD님이 우승소감 준비해 놓으래요.”

송PD의 말을 전해주는 유선의 얼굴에도 역시나 자신감이 쓰여있었다.

“난 벌써 준비해놨지.”

그리고 그건 현차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런 걸 준비해왔는데, 우리가 질 수가 없다.’

GV팀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할때, KBC의 스텝이 마케팅 부서로 찾아와 말했다.

“촬영 참여하시는 CK 분들. 이제 1층으로 내려가주세요.”

*

지하 1층의 시사회실로 향한 한록과 GV팀 사람들, 그리고 태우.

3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객석은 꽉 차있었으며, 시사회실 곳곳에는 이전보다 2배는 많아진 스텝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오늘 방송은 생방송입니다. 편집 같은거 안 들어가니까, 다들 정말 조심해 주셔야 해요. 돌발 상황 같은건 절대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평소와 달리 아주 엄격한 목소리로 말하는 송PD까지.

[출연진 무대로 올라가주세요!]

송PD의 말에 서감독. 최대리. 그리고 우감독과 이연옥, 한록과 GV팀이 무대 위로 올랐고, 눈부신 조명이 켜졌다.

[스텝들 전부 위치로.]

그 말에 모든 스텝들이 자신의 자리를 찾아 돌아갔다.

[게스트분들 대기해주시고요.]

그리고 객석 1열에 앉은 태우와 서감독의 게스트들.

모든 준비가 끝났고, 촬영 현장을 한 번 둘러본 송PD가 말했다.

[촬영 시작합니다.]

CK 예선전의 마지막화. 절대 돌발상황 같은건 일어나서는 안 되는 생방송. 그리고...

“회장님!”

그 순간 돌발상황이 발생했다.

*

“다들 자리에 앉아. 일하는 중인 거 아니었나?”

서슬퍼런 하태준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ck직원들이 모두 움직임을 멈췄다. 그 중엔 하정엽 또한 있었다.

하정엽 역시 하태준이 촬영장에 방문하리란 것을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송pd와는 미리 약속이 된듯, 여유롭게 하태준에게 다가가는 송pd. 제작진은 이미 이 일을 알고있는 모양이었다.

“촬영장엔 무슨 일로 방문하셨나요?”

송pd의 말에 하태준이 말했다.

“ck 최고의 이벤트 아닙니까. 회장이 빠지면 안 되지.”

예선전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온 듯한 하태준의 말.

확실히, ck회장이 등장했단 점에서 예선전은 또 한번 화제를 얻게 될 게 분명했다.

그러나 하정엽, 그리고 자신에게 아무런 상의가 없이 왔다는 점. 그 점에서 한록은 하태준의 진짜 속내를 알 수 있었다.

"우리 직원들이 얼마나 잘하는지도 좀 보고."

하태준은 이곳에 한록, 최대리, ck직원.

그리고 하정엽을 시험하러 온 것이다.

하정엽의 얼굴에 잠깐 스친 긴장. 그리고 이어진 '기회가 왔다'라는 표정.

“이렇게 압박을 주시다니. 회장님도 너무하시지.”

한록의 옆에서 중얼거리는 최대리. 그러나 다른 사람과 다르게, 그의 얼굴엔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래서 싫으십니까?”

그건 한록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록의 말에 최대리가 답했다.

“그럴리가요. 이게 어떤 기회인지 아시잖아요. 여기서 잘하면...”

최대리의 말이 맞았다. 이건-

“과장님에 이어서 저도 임원을 노려볼 수 있을 것 같은데.”

회장앞에서 직접 활약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였다.

“연봉도 한, 3억쯤은 뛸 거 같고. 이사 준비해야겠네요.”

“안 될 것 같은데요.”

“왜요. 회장님이 그 정도 배포는 있으실텐데.”

최대리의 넉살 좋은 말에 한록이 피식 웃더니 말했다.

“그건 제가 가져갈거라서요.”

'해외팀을 두고보겠다'고 말하던 하태준. 그에게 자신의 실력을 보여줄 절호의 기회.

자신이 이 자리에서 어떻게 활약하냐에 따라 앞으로 해외팀의 규모가 결정될 것이었다.

“과장님은 이미 3억 받으시잖아요. 저한테 양보하세요.”

“안 돼요. 이제 원룸은 지겹고, 30평대 아파트로 가고 싶거든요.”

그리고 하정엽이 마련해줄 집의 규모 역시 마찬가지였다.

“둘 중 누가 이사갈지 두고 봅시다.”

한록의 말과 함께...

“<수면> gv 시작합니다.”

많은 게 걸린 방송이 다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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