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권력의 단맛을 누렸군.
다음날, 회사로 출근한 한록.
“과장님. 챌린지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자리에 앉자, 유선이 한록에게 다가와 말했다.
인쇄해 온 사진을 보여주는 유선.
[안녕하세요. 저도 기사 시험 준비하고 있어요. 같이 힘내봐요!]
[혹시 토익 문제집 필요하신가요? 제가 보내드릴게요. 디엠 주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ㅎㅎ;;혹시 서울 사시면 서로 연기 봐주는거 어때요?]
“네, 잘 되고 있네요.”
아직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의 게시글에 댓글을 다는 걸 어색해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난다면 거부감도 사라질 게 분명했다.
“우리가 좀 더 분위기를 주도해야해요. CK 계정으로 댓글 최대한 달아주고, 바이럴 업체들한테도 게시글이 아니라 댓글을 많이 다는 식으로 진행해달라고 요청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유선이 한록에게 씩씩하게 답했다. 그리고 다른 파일을 건넸다.
“이건 요청하신 CK에 대한 반응입니다.”
한록이 유선에게 부탁했던 것은, 챌린지를 진행하는 CK ENM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
하정엽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반응은...
[CK가 좋은 일 하네요ㅋ. 장학재단을 설립해서 장학금을 지원한다고 합니다.]
[이웃님들도 한 번 신청해보세요~ 어린 학생들만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니라서 더 좋네요.]
[이번에 도착지 챌린지랑 같이 진행하는 거 맞죠? 도착지 챌린지도 좋았는데 간만에 CK 열일하네요 ㅋㅋ]
[아 이게 <도착지>랑 관련된 거예요? 저 예선전 보고 울었음 ㅠㅠ]
“이번 챌린지로 기업 이미지가 엄청 좋아졌어요.”
한록이 예상했던 대로였다.
<도착지>, 그리고 CK에게 상당히 호의적인 반응을 보내는 사람들.
그리고...
[저번에 CK 사장이 인터뷰한거 봤는데 멋있더라고요. 형보다 나은 듯.]
하정엽에 대한 반응까지.
‘사장님이 아주 좋아하시겠군.’
CK의 새로운 후계자가 되고 싶어하는 하정엽. 그가 아주 만족해할만한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500억을 쓴 보람이 있네요.”
“보람 정도가 아니지.”
유선과 대화를 나누는 한록. 한록에게 정부장이 다가와 말했다.
“그룹 홍보팀에서 너랑 인터뷰 한단다.”
“저를요?”
“그래. 장학재단 얘기도 나왔겠다, 이 기회에 제대로 그룹 이미지 관리 해보려는 것 같아. 그럼 간판으로 내세울 사람이 너밖에 없지.”
“그렇긴 하죠. 도착지 챌린지를 만들었으니까.”
“네 메일로 홍보팀 메일 보냈으니까 지금 확인 해봐.”
정부장의 말에 한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홍보팀이 보낸 메일을 살펴보았다.
[...하여, 이한록 과장님과 인터뷰를 진행하려 합니다.]
[챌린지를 구상하게 된 과정과 취지 등 챌린지 전반에 대해 설명해주셨으면 합니다.]
[이는 장학재단 설립 다큐멘터리에 삽입될 것이며, 이외에도 방송 요청이 들어왔을 때 협조 또한 부탁드립니다.]
[바쁘신 것은 알고 있으나, 이한록 과장님의 협조가 꼭 필요한 내용입니다.]
[부서 차원에서의 배려또한 요청 드렸으니 스케쥴에 문제가 있으실 경우 언제든 연락 바랍니다.]
메일을 읽고 있는 한록에게 정부장이 말했다.
“그룹 홍보팀이 이렇게 공손하게 나오는 거 처음 봤다.”
“그러게요. 저도 처음이네요.”
정부장의 말에 한록이 고개를 끄덕였다.
CK그룹 전체의 이미지, 그리고 언론대응을 담당하는 그룹 홍보팀.
언제나 바쁘고, 시도 때도 없이 일이 터지는 분야다. 게다가 홍보팀에게서 연락이 올 때는 보통 부서가 사고를 쳐서 여론이 좋지 않을 때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다보니 홍보팀 사람들은 ‘회계부, 감사팀 다음으로 연락받기 무서운 사람들’로 소문이 나 있는 편이었다.
[촬영은 이한록 과장님이 편하신 시간대로 언제든 맞추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한록에게 온 메일은 엄청나게 공손하고, 동시에 호의적이었다.
“좋은 일로 연락받으면 이렇게 나오나보네요.”
“아니. 그게 아니지. 뒤에 메일 하나 더 왔어. 그거 자세히 읽어봐.”
정부장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한록은 지금 오해를 하나 하고 있었다.
본사그룹팀이 친절한 이유. 그건 한록이 대단한 성과를 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인터뷰에 회장님 오신단다.”
바로 이 인터뷰가 회장이 직접 지시한 것이기 때문에.
“아마 회장님이 너 부르라고 하신 모양이야.”
그리고 회장이 한록에게 관심을 가지는 게 눈에 보이기 때문이었다.
“진짜...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건지.”
정부장이 ‘너는 대체 뭐 하는 놈이냐’라는 시선으로 한록을 바라보았다. 놀라움, 약간의 질렸다는 느낌, 그리고 감탄이 한데 섞인 얼굴이었다.
“회장님이랑 독대하고 나면 보통 임원 올라가더라. 좋은 기회다.”
한록을 툭 치며 지나가는 정부장. 담담하지만, 강력한 메시지가 담긴 말이었다.
-회장님과 독대를 하고 나면 임원에 올라간다.
임원승진. 이미 해외팀 발령이 확정이 난 한록에게는 다른 의미를 가진 말이었다.
‘그래. 정말 좋은 기회다. 해외팀이 탄력을 받을 수 있겠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유선이 한록에게 물었다.
“...과장님. 방금 부장님이 회장님이라고 하신거죠?”
“네.”
“회장님...회장님.”
넋이 나간 얼굴로 말을 반복하는 유선. 한록이 당황해서 유선을 불렀다.
“유선씨.”
“회장님이...과장님을..독대...임원...”
“왜 이래요, 유선씨.”
“지금 제가 과장님이랑 대화해도 괜찮은 건가요...? 제가 감히...임원과 대화를...? 해도 되는 건가요...?”
“유선씨. 일단 앉아요.”
“네, 회장님...아니, 과장님.”
겨우 유선을 자리로 돌려보낸 한록.
그리고 메신저를 열자, 쪽지가 잔뜩 도착해있었다.
[최대리: 최대리...임원과 싸우게 되다.]
[현차장: 이과장!!! 방금 그거 무슨 일이야?!회장님이라니?!]
[영도: 혀엉!!!형 임원 된다며?!]
[송과장: 이과장. 혹시 점심 끝나고 커피 한 잔 할까?]
[회계부 부장: 이한록 과장. 나 회계부 김철환인데. 오늘 점심 같이 먹을래?]
회장이란 얘기에 깜짝 놀란, 그리고 한록에게 줄을 대보려는 사람들로 가득 찬 쪽지함.
‘당분간 귀찮아지겠군.’
한록이 쪽지를 읽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건너편에 앉아있던 공대리와 유과장이 동시에 일어나며 말했다.
“과장님, 카페에서 커피 사올까요?!”
“이과장. 뭐 막히는거 있어?!”
한록의 마음에 들기 위해 경쟁하는 사무실의 사람들.
“괜찮습니다.”
“아니! 무슨 일인데 그래!”
“제가 커피 사오겠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한록의 한숨이 더욱 커졌다.
*
공대리와 유과장을 물리치고, 사무실을 나선 한록.
‘괜찮다니까요.’
‘그래도 같이 커피 한 잔...’
‘지금 본부장님을 뵈러 가야 합니다.’
‘앗, 네. 죄송합니다!’
공대리는 본부장이란 말에 한발자국 물러섰다. 그리고 반짝거리는 눈으로 한록을 바라보았다.
‘회장님에 이어 본부장님까지!’
라는 생각이 그대로 전해지는 눈빛. 그 눈빛에 부담을 느끼던 한록에게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공대리님. 혹시 한가하십니까?’
‘네! 예고편 촬영까지 시간이 좀 남아서요.’
‘그럼 도착지 챌린지 좀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까? 댓글을 계속 달아야 하는데, 인원이 부족해서요.’
‘그럼요, 물론이죠!’
평소라면 ‘왜 저한테 이런 걸 시키세요?’ 라고 나왔을 공대리의 엄청난 변화. 그 변화에 한록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네, 감사해요. 돌아오면 커피 한 잔 합시다.’
‘아뇨! 제가 감사하죠!’
공대리는 오히려 한록에게 약간이나마 도움이 됐다는 것에 크게 기뻐하고 있었다.
사무실을 나와 걸으며 생각에 잠긴 한록.
‘이게 바로 회장님 파워군. 이렇게 세 명만 더 꼬시면 챌린지에 크게 도움이 되겠어.’
늘 인력이 부족해서 한록이 야근을 도맡아 하는 GV팀. 거기에 챌린지라는 손이 많이 가는 일을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회장의 등장은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이과장님. 혹시 오늘 점심 약속 있으세요?]
다만, 5분 간격으로 메세지와 쪽지가 도착한다는 부작용이 있기는 했다.
한록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아침의 일을 떠올렸다.
사실, 지금의 귀찮음은 전적으로 정부장 탓이었다.
‘부장님은 왜 사람들 다 있는데서 회장님 얘기를 하시고...’
정부장이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오늘은 사람들이 다 있는 앞에서 대놓고 회장에 대한 얘기를 했다. 그러다보니 회사 전체에 소문이 도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띵!
잠시 후,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는 사람들이 가득 타 있었다.
조금씩 움직이면 한 사람이 탈 만한 공간이 남아있었지만, 모두의 눈총을 받아야 하는 상황.
‘절대 안 비켜주겠지.’
한록이 이번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은 포기하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올라가세요.”
“어...이한록 과장님.”
그때 엘리베이터 안 누군가가 한록을 알아보고 말했다. 그리고, ‘이한록’이란 말에...
“이과장님?”
사람들의 표정이 변했다.
“뒤로 조금만 가 주세요.”
“부장님. 잠시만요.”
‘이한록’이라는 이름. 그 이름이 들리자, 놀랍게도 사람들은 한록을 위해 자리를 마련해주기 시작했다.
“뭐야. 왜 밀어?”
“부장님!”
그리고 불만을 말하는 사람에게 귓속말을 하는 누군가와, 귓속말을 듣고 깜짝 놀라서 얼른 물러나는 사람까지.
“이과장님. 얼른 타세요.”
“...네.”
결국 한록은 억지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리고 오늘 정부장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에 대한 진실을 알아냈다.
정부장이 경솔해서 ‘회장이 이한록을 지켜보고 있다’란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린 게 아니다. 정부장은 그저 그 사실을 숨길 필요가 없다는 걸 알고 있을 뿐이었다.
‘어차피 회사 모두가 알고 있구나.’
-회장이 직접 누군가를 호출했다.
-그 사람이 곧 회사의 실세가 될 거다.
아무리 숨겨도 반나절, 아니 한 시간 내에 CK ENM 모두가 이 사실을 알게 될 테니까.
본부장실에 도착하기까지 내내 한록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들과, 한록에게 얽힌 그들의 실.
‘멋있다.’
‘이한록이라고? 얼른 친해져야 한다.’
‘새파랗게 어린 놈이 회장님과 인터뷰를 해?’
‘대체 얼마나 능력이 좋은 거지?’
‘내가 차기 이한록이다!’
각자의 꿍꿍이를 담고 한록을 바라보는 사람들. 그 속에서 한록은...
‘앞으로 엘리베이터 타기 쉬워지겠는데?’
의외의 장점을 발견하였다.
*
“회장님의 새로운 관심사가 등장하셨군.”
“본부장님도 그런 말을 하십니까.”
한록이 도착하자, 인사 대신 회장에 대한 말을 건네는 최경준. 최경준의 말에 한록이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기쁜 일은 자주 말하는 게 좋지. 자네도 기쁘지 않은가.”
“기쁩니다. 그런데 조금 피곤합니다.”
“하하. 그렇게 얘기할 줄 알았지. 하지만 장점이 더 많은 일 아닌가.”
최경준의 말에 한록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한록. 하지만, 거기엔 확실한 이점도 있긴 했다.
“네. 맞습니다.”
예를 들어 엘리베이터라던가, 엘리베이터라던가.
“벌써 권력의 단맛을 누렸군. 하지만, 진짜 권력을 발휘해야 할 일이 있다네.”
최경준이 그렇게 말하며 지난 밤 본부장 회의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예상대로야. 문오석을 필두로 다른 본부장들이 영화관 건설에 방해를 하고 있어.”
“정확히 어떻게 반대를 하고 있습니까?”
“영화관 건설 자체를 막진 못해. 사장님 결정이니까. 다만, 서울 한 복판에 새로운 부지를 매입하는 건 너무 리스크가 크다고 나오더군. 대신 강남 아트씨네를 체험 상영관으로 바꾸자고 했어.”
강남 아트씨네.
소규모 독립영화, 혹은 예술 영화를 전문으로 상영하는 영화관이었다.
“사장님은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생각해보신다고 하셨지. 그런데 아마 그쪽의 편을 들 수도 있어.”
“예산은 저와 이미 얘기가 끝난 부분입니다.”
“그래, 예산의 문제는 아니야. 사장님은 지금 독립영화관이 있는 위치를 꽤 맘에 들어 하셔.”
강남 한복판에 자리한 아트씨네. 확실히, 아트씨네의 자리는 CK가 가진 영화관 부지 중 최고의 명당이기는 했다.
하정엽 입장에서는 오히려 영화관 건설에 힘을 실어주겠다는 생각.
“하지만 독립 영화관을 뺏어서 새로운 상영관을 건설한다고 하면, 영화인들 사이에서 큰 논란이 생길 겁니다.”
“그래. 맞는 말이지. 사장님은 그런 것쯤은 무시하라고 하실 테지만.”
영화인인 최경준과 한록은 알고 있지만, 기업인인 하정엽은 모르는 부작용. 한록은 그 부분에 대한 우려를 하고 있었다.
“이 부분은 내가 사장님을 설득할 수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 다만, 이 얘기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는 게 중요해. 그럼 영화관을 만들기도 전에 괜히 안 좋은 이미지가 생길 테니까.”
최경준 역시 한록과 똑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
“아직도 걱정이 되나. 나를 못 믿는 모양이야.”
“아닙니다.”
최경준의 말에 한록이 고개를 저었다.
최경준은 하정엽을 설득할 수 있다. 그리고 최고의 방법을 찾아낼 것이고, 전 세계 모두가 한번쯤은 방문하고 싶은 영화관을 건설할 것이다.
한록 역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왜 그런 표정이지.”
그리고 한록은, 지금 걱정이 아닌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본부장님.”
“그래.”
“이번 기회에 완전히 물갈이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갈이라니, 어디를 말인가.”
한록이 하고 있는 생각은, 바로.
“CK ENM 말입니다.”
문오석을 이용해 CK ENM 전체를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본부장님. 제가 해외팀을 만들어달라고 요청했던 때 한 생각이 있습니다.”
사실은 그보다도 훨씬 전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회귀 당시 한록의 목표. 그리고 언제나 한록이 원하던 것.
“더러운 수를 쓰는 사람과는 일하지 않겠다는 생각입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었다.
“너무 이상적인 얘기야.”
“지금은 아닙니다.”
최경준의 말에 한록이 단호하게 답했다.
지금. 영화사업본부가 최고의 권력을 잡고 있는 이때. 문오석이 자신과 최경준을 이기기 위해 마지막 발버둥을 치는 이때.
지금이 한록의 숙적인 문오석을 제거할 기회였으며...
“본부장님. 이 일이 끝나면, 회사에는 우리의 편만 남게 될 겁니다.”
한록이 원하는 회사를 만들 시간이었다.
사내정치의 메카. 각각의 본부가 서로를 견제하고, 발목을 잡기 위해 온갖 수작을 부리는 회사 CK ENM. 그리고 그 수작의 중심, 문오석.
이 모든 일을 한 번에 정리해버릴 생각인 한록.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일단 말해보게.”
한록이 최경준에게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