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158화 (139/263)

지금 죽여버릴까.

보고서가 올라가자, 하정엽이 한록을 사장실로 호출했다.

“추가로 배정된 10억은 어디에 쓸 겁니까.”

한록은 이 질문이 ‘그렇게 많은 돈을 어디에 쓸 거냐’라는 질문이 아니란 것 쯤은 알고 있었다.

10억이면 하정엽에겐 아무것도 아닌 금액이니까.

그러니까, 이 질문은...

“앞으로 <도착지>를 어떻게 끌고 갈 건지 궁금하군요.”

이한록이란 사람에 대한 하정엽의 순수한 호기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회사 경영에 많이 참여하는 편이긴 했으나, 이런 세부적인 것까지 물어본 적은 없었던 하정엽.

그런 그가 <수면>도 아닌 <도착지>란 작은 영화에 호기심을 보인다. 아니, 어쩌면 한록 자신에게 보이는 호기심일까.

사장의 달라진 태도에 한록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전부 관객들에게 돌아갈 겁니다. 도착지 챌린지를 열고, 챌린지에 참여한 사람 중 적절한 인원을 골라 장학금을 지원할 예정입니다. 한 명 당 1억 정도로요.”

‘챌린지에 참여했더니 1억을 받았다.’

누군가 들으면 스팸메세지라고 오해할만한 내용이지만, 한록은 그 일을 현실로 만들 생각이었다.

“챌린지가 한층 유명해지겠군요.”

“네. 분명 반응이 커질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고 CK의 이미지에 영향이 오겠고.”

“네, 맞습니다.”

‘CK가 사회환원을 한다’는 긍정적인 반응을 가져올 수 있는 마케팅이기도 했다.

“챌린지가 유명해지기 전까지는 사실을 밝히지 않을 생각입니다. ‘돈 때문에 챌린지가 유명해졌다’는 이미지가 생기면 안 되니까요. 장학금은 챌린지가 이미 충분히 이슈가 됐을 때, 거기에 날개를 달아주는 느낌으로만 들어가야 합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내 허락은 필요 없습니다. 본인 프로젝트니 원하는대로 하세요.”

“아뇨, 사장님의 허락이 필요합니다.”

한록이 하정엽을 보며 말했다.

“그 발표는 사장님이 해주셔야 하니까요.”

하정엽이 그 말에 한록을 빤히 바라보았다.

지금 하정엽이 가장 원하는 것.

형에 비해 부족한 인지도를 끌어올리고, 당당히 CK의 후계자 후보 중 한명이 되는 것.

“발표가 나가면, 반드시 사장님의 성함이 뉴스에 나가게 될 겁니다.”

그걸 위해 하정엽은 예선전을 진행했고, 한록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려 했다.

“CK의 후계자로서 말입니다.”

그리고 한록은 첫날부터 자신에게 완벽한 해결책을 제시해주었다.

완벽한 해결책. 완벽한 마케팅. 그리고 자신의 사람.

만족스러운 결과에 하정엽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주 싸늘하고, 냉정한.

“잘했습니다.”

그러나 진심이 담긴 미소였다.

*

그렇게 하정엽에게 승인을 받은 한록.

이제 도착지 챌린지는 걱정할 게 없었다.

‘반응이 올라오기를 기다리고, 때가 되면 계획했던 대로 실행하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여전히 한록에게는 할 일이 남아있었다.

‘GV를 어떻게 끝낼 것이냐.’

아마 <도착지>와 <수면>의 승패를 가르게 될 GV에 대한 준비.

‘이번 기회에 완전히 문오석을 제거해야 한다.’

계속 자신을 방해하는 숙적을 제거하는 것.

‘해외팀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앞으로 출범할 해외팀을 어떻게 꾸릴지에 대한 전략.

‘영화관 건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화관 건설이라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한록과 손을 잡은 하정엽. 그가 한록이 주최하는 프로젝트에 거금을 지원한다.

‘이제부터는 예전의 CK가 아니게 될 거다. 내가 그렇게 만들거니까.’

이건 CK내부의 권력구조가 엄청나게 변화하는 일이었다.

앞으로 CK의 모두가 자신의 미래를 위해 여기저기에 줄을 대고, 뛰어다녀야 할 상황.

그리고 누구보다 이 일에 깊이 얽혀있는 사람이 있었다.

영화사업본부의 최고 권력자. 거기서 만족하지 못하고, CK ENM의 최고 권력자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

[이한록. 내 사무실로 와.]

바로 최경준이었다.

*

본부장실에 도착한 한록. 최경준이 한록을 보고 물었다.

“사장님과 대화는 잘 마쳤나.”

“네. 미국 지사가 아닌 해외팀에 남기로 했습니다.”

영화 제작부터 마케팅까지 모두 미국의 입맛에 맞추겠다는 미국지사. 반대로, 한국 영화로 세계에 도전하는 해외팀.

-나도 자네의 의견이 맞다고 생각해. 아직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직접 헐리웃에 뛰어들 순 없어. 차근차근 준비를 해 나가야지.

최경준은 처음부터 미국 진출에 대해 한록과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헐리웃 진출은 오래 전부터 회장님의 염원이었지. 회장님은 자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영화에 애정을 가지고 계시거든. 이런 상황에서 사장님을 설득하긴 어려울 거야.

다만 하정엽과 하태준을 설득하는게 불가능하리라 생각하던 상황.

그런 상황에서, 한록이 하정엽의 마음을 바꿔왔다.

“회장님 역시 당분간 상황을 지켜봐주신다고 합니다.”

최경준이 한록의 말을 듣고 피식 미소를 지었다.

“자네는 정말...사람 마음을 잘 아는군.”

언제나 절대 불가능할 것 같은 상대를 대상으로 원하는 결과를 쟁취해오는 한록.

최경준 자신 역시, 한록에게 홀렸던 사람 중 하나였다.

‘이한록은 이제 그냥 능력만 좋은 애송이가 아니다.’

불과 일 년 전, 오과장과의 트러블에 끙끙대던 사람은 이제 없었다.

“자네는 정말 빠르게 크는군.”

몇 달 전 한록이 자신에게 대적할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최경준.

그 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어쩌면...

‘바로 지금일지도 모른다.’

그 순간은 지금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 어리지.”

그러나 최경준은 아직 한록 쯤은 쉽게 부숴버릴 수 있단 자신감이 있었다.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능력. 거기에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는 방법까지. 지금 한록이 모두의 주목을 받는 이유였다.

“젊을 때 나도 그랬다네.”

그리고 그건 20년 전 자신의 모습이기도 했다.

최경준이 한록의 반응을 살피며 말했다.

“해외팀을 어디까지 키워 볼 생각인가.”

“저는 해외팀이 앞으로 영화사업본부의 핵심 조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 해외팀의 리더가 될 한록이 영화사업본부의 최고 권력자가 될 것이다.

눈앞에 그려지는 미래에 최경준이 자신 앞에 놓인 여러 선택지를 점검했다.

-이한록을 조금 더 키워줄 것이냐.

-아니면, 이쯤에서 기를 눌러서 자신의 아래에 있게 만들 것이냐.

혹은...

‘지금 죽여버릴까.’

경쟁자가 되지 못하도록, 한록이라는 사람을 지금 없애버릴 것이냐.

한록을 탐색하는 최경준. 그런 최경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록이 계속 말을 이어갈 뿐이었다.

“그래서 이번 시상식에서 이벤트를 준비했습니다.”

“어떤 이벤트인가.”

“한국과 미국에 체험 상영관을 건설할 생각입니다.”

“예산은?”

“최소 수천억을 생각중입니다.”

“허가를 받기가 쉽지 않겠군.”

“사장님께서 이미 허락하셨습니다.”

최경준에게 순순히 자신의 계획에 대해 말하는 한록.

“수천 억이라. 쉽지 않을 거야.”

생각보다 훨씬 큰 규모의 프로젝트에 최경준의 실이 한록의 몸을 감기 시작했다.

위협적이고, 은근하게 몸을 조여오는 실. 한록에 대한 최경준의 긴장이 나타나는 실이었다.

그러나 한록은 여전히 태연하게 자신과 하정엽의 관계를 과시했다.

“괜찮습니다. 사장님이 저를 크게 믿어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저는 상영관을 성공시킬 거란 자신도 있습니다.”

한록의 당당한 말에 최경준은 생각했다.

‘내가 너무 대단하게 여긴 건가. 너무 흥분했어.’

아직은 자신보다 강한, 그러나 곧 자신의 경쟁자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 앞에서 포부를 얘기한다.

한록은 그 사실이 얼마나 위험한지 아직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아직은 견제할 상대가 아니다. 대신, 기를 좀 죽여둬야겠어.’

“이한록. 자네가 주의해야할 부분이 있어.”

그렇게 최경준의 실이 목에 닿은 순간.

“본부장님. 그 전에 먼저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그 순간, 한록과 최경준의 눈이 마주쳤다.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한 한록의 시선.

‘...또 꿍꿍이가 있었군.’

최경준은 ‘이한록이 젊은 치기에 사장과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고 있다’는 가설을 폐기했다. 그러기에 한록의 눈빛은 지나치게 차분했다.

한록이 최경준에게 말했다.

“저는 이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해외팀의 리더가 될 겁니다. 앞으로 해외팀의 핵심이 될 영화를 만들고. 제 본업인 마케팅까지 진행하게 되겠죠. 이것만으로도 제게는 버겁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버겁다기보단 영화 이외의 일을 맡고 싶지 않은 것에 가까웠다.

CK ENM 내부의 사내정치. 헐리웃의 동태를 파악하고, 이에 맞게 사업을 확장하는 것. 문오석을 비롯한 경쟁자들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 그런 것들은 한록의 관심사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CK ENM을 세계 최고의 영화사로 만들기 위해선. 그리고 회사를 바꿔나가기 위해선 꼭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니 이 프로젝트는 다른 사람이 맡아주어야 합니다. 이 프로젝트만이 아니라...앞으로 CK ENM을 위해 필요한 많은 일들을 맡아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한록은 그 일에 누구보다 적합한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영화 업계에 대해 아주 잘 아는 사람. CK ENM의 미래를 맡길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제가 믿을 수 있는 사람 말입니다.”

그 말에 최경준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게 누군가.”

최경준은 한록의 입에서 나올 답변을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영화 업계에 대해 아주 잘 아는 사람.

CK ENM의 미래를 맡길 수 있는 사람.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한록이 믿을 수 있는 사람.

“본부장님이십니다.”

*

향후 5년간 CK ENM의 목표가 될 프로젝트를 가져온 한록. 그러나 그 진행은 최경준에게 맡긴다.

그리고 자신은 오로지 영화에 집중한다.

귀찮은 일은 남에게 맡기는 동시에, 하정엽과 최경준 모두에게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는 선택지였다.

한록의 영악한 선택에 최경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내 생각보다 훨씬 멀리 보고 있었군.”

웃음소리와 함께, 한록에게 향하던 최경준의 실이 모두 뒤로 물러났다. 이제 남은 것은 한록의 손목에 묶인 실 하나 뿐이었다.

한록에게 몇 번이나 얽힌 최경준의 실. 그러나 이 실은 절대 유선이나 현차장처럼 굳건한 신뢰를 주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 게 분명했다.

‘최경준이란 사람 자체가 누구에게도 진심을 주지 않는 사람이니까.’

최경준은 한록이 위험한 상대가 되면 언제든 칼을 빼들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쓸모없는 상대가 된다면, 오과장처럼 내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네는 정말 어디까지 성장할지 궁금한 사람이야.”

이 실이 풀릴 날은 오지 않을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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