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이룬 적 없는 성과.
“회장님이라. 아직 아버지가 건재하십니다.”
하정엽의 말에 한록이 답했다.
“맞습니다. 여전히 회장님이 CK를 위해 많은 일을 하고 계시죠.”
한록과 하정엽의 무미건조한 대화. 적당한 겉치레가 섞인, 이미 서로의 속마음을 아는 사람끼리 나누는 대화였다.
“하지만, 미래는 언제나 젊은 사람들의 몫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한록은 그런 대화에 만족할 사람이 아니었다.
하정엽이 한록을 빤히 바라보았다. 하정엽은 기가 차고,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역시 건방져.”
아주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
사장실을 나온 한록.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며, 한록은 하정엽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거만하고, 강압적이고, 예민한 성격의 하정엽.
그러나 그는 짧은 시간 안에 정말 많이 변화했다.
‘...생각보다 재밌는 사람이네.’
자신으로 인해 변화하는 사람, 그리고 회사를 지켜본다는 것.
이전 생에서는 절대 경험해볼 수 없던 즐거움에 한록이 잠깐 미소를 지었다.
“이과장!”
그러나 낭만에 젖어있는 것도 잠깐이었다. 문이 열리자, 엘리베이터 앞에서는 GV팀이 한록을 기다리고 있었다.
“회의 시작해야지. 바로 올라가자.”
이제는 미래에 대한 얘기에서 벗어나 당장 눈앞의 예선전을 끝마쳐야 할 때. 그리고 <도착지>가 대상을 타기 위해 마지막 스텝을 준비할 때였다.
이 일이 대체 어떻게 끝날까. 과연 <도착지>는 대상을 탈 수 있을까. 하정엽은 하태준을 어떻게 설득할까.
거기서 또 어떤 새로운 영화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까.
“네, 갑시다.”
자신을 기다리는 수많은 일들을 생각하며 한록이 기분 좋게 답했다.
*
바로 시작된 <도착지>의 GV를 위한 회의.
“허...기가 막히네. 지금 예매율 1위가 <도착지>, 그리고 2위가 <수면>이야.”
현차장이 믿기지 않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던 소규모 가족 영화. 그랬던 <도착지>가 어느덧 예매율 1위를 기록한 게 새삼스럽게 뿌듯한 것이었다.
“관객수도 비슷해요. <수면>은 청소년 관람 불가니까, 둘다 내릴 때 쯤엔 <도착지>가 훨씬 많을 것 같긴해요.”
“예상 관객수는 어느 정도입니까?”
한록의 말에 하대리가 답했다.
“음...GV가 잘 끝나면, 800만 정도 되지 않을까요.”
“그 정도면 제작비의 20배 정도는 들어오겠네요.”
“네. 아마 올해 최고 수익률일 거예요.”
800만 관객. 제작 대비 20배의 수익률. 거기에 평론가들의 평가 역시 꽤 괜찮았다.
“이대로 GV가 잘 끝나고, 시상식까지 간다면...”
한록이 눈을 감고 <도착지>가 이뤄낸 수많은 성과를 생각했다. 그리고 잠시 후 입을 열었다.
그간 자신이 이뤄낸 성과에 대한 한록의 평가는.
“대상은 어렵습니다.”
아주 냉정하고 차가웠다.
한록의 말에 유선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지금 <도착지> 엄청 인기 많은데, 가능성이 꽤 있지 않나요?”
“그냥 인기가 많고, 평가가 좋다고 대상을 탈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역대 한국영화대상 수상작을 생각해보세요.”
그 말에 유선이 역대 대상작들을 떠올렸다.
-추적자. 타짜들. 왕과 남자. 변호사. 아가씨와 하녀.
“아...”
그리고 그 영화들과 <도착지>의 차이점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임팩트가 없네요.”
“그렇죠. 대상은 제일 인기 많은 영화, 제일 잘 만든 영화에 주는 게 아니잖아요.”
오디션과 시상식의 가장 큰 차이점. 영화시상식에서 대상을 받는 영화는 ‘그 해 가장 인기가 많았던’ 영화, 혹은 ‘가장 작품성이 뛰어난’ 영화가 아니었다.
가장 인기가 많아서, 가장 파급력이 컸던 영화.
가장 작품성이 뛰어나서, 영화계의 모두가 인정했던 영화.
가장 문제작이어서, 모두들 그 영화에 대해서만 얘기하게 했던 영화.
“대상은 그 해 영화계를 바꿨던 영화한테 주는 거죠.”
대상을 타기 위해서라면, 한 해동안 영화계에서 어떤 ‘충격’을 남긴 영화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조건을 달성한 영화라면 역시...
“<도착지>보다는 <수면>입니다.”
‘아들의 살인을 감추려고 노력하는 어머니’란 소재. 그리고 이를 통해 <수면>이 말하는 것.
[자식을 위해 모든 걸 할 수 있다는 게 모성이라면.]
[그건 일종의 정신병이다.]
<수면>은 누구나 숭고하게 생각하는 모성에 대해 의문을 던졌고, 사회 각지의 사람들이 이에 반응했다.
‘파급력’, 그리고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대상의 전제조건이라면, <수면>을 따라올 영화가 없는 상황.
반면 지금 <도착지>는 좋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진 못했다.
오히려 사람들이 주목하는 것은...
[영화는 어떻게 삶이 될 수 있는가.]
[영화의 스토리를 활용한 영화 마케팅에 대한 분석-CK 예선전과 <도착지>를 중심으로]
[CK 예선전이 보여준 예능과 마케팅의 진화]
한록의 마케팅이었다.
CK 예선전을 주제로 논문을 쓰고싶다는 것부터 시작해, 한록에게 밀려드는 수많은 인터뷰 요청들.
하지만 한록이 원하는 것은 자신의 마케팅이 주목받는게 아니라, <도착지>가 대상을 타는 것이었다.
‘마케팅을 잘해서’, ‘방송이 인기를 얻어서’ 대상을 탄 영화. 한록은 <도착지>에 그런 불명예가 붙는 걸 원하지 않았다.
“첫 번째 단계는 끝났어요. <도착지>가 좋은 영화라는 것은 충분히 증명했습니다. 이제는 <도착지>가 가진 파급력을 보여줄 때예요.”
“<도착지>가 가진 파급력이라...없을 거 같은데. <도착지>가 잘 만든 영화긴 해도 충격적인 영화는 아니잖아.”
“아뇨, 있습니다.”
현차장의 말에 한록이 단호하게 답했다.
이연옥의 유튜브에 달린 수많은 댓글들이자, 시청자들이 3화를 보고 가장 많이 보냈던 반응.
[멋있다.]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
사람들은 자기 꿈을 쫓는 이연옥을 응원했고, 이연옥처럼 되고 싶어했다. 그리고 이게 바로 한록이 사람들에게 <도착지>를 보여주고 싶던 이유였다.
삶에 희망을 주는 것. 어제보다 더 나은 내일을 꿈꾸게 만드는 것.
“그런 영화야말로 대상을 받을 영화죠.”
한록이 생각하는 좋은 영화의 완벽한 조건이었다.
“이연옥 선생님을 보고 미뤄뒀던 일에 도전한다는 사람들이 나오고 있어요. 이 사람들을 부각하는 겁니다. <도착지>가 어떻게 사람들한테 영향을 줬고, 어떻게 사람들이 바뀌고 있는지 보여주는 거예요.”
“어떻게요?”
“앞으로는 영화가 아니라, 관객 위주의 마케팅을 할 겁니다. <도착지>를 보고 새로운 목표를 시작한 사람들을 보여주는 마케팅이요. 인스타그램에서 챌린지도 하고, CK에서 그런 사람들을 지원하는 프로그램도 만들 거예요. 시니어층을 대상으로 교육도 지원할 거고요.”
“스케일이 엄청 커지네요?”
한록의 말에 유선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언제나 상상 이상의 마케팅을 하는 한록이었지만, 이번 마케팅은 정말로 대규모가 될 것이란 생각이 든 것이었다.
“네. 그래야죠. 그냥 영화 하나를 마케팅한다, 그렇게 끝낼 생각은 없어요.”
한록이 유선을 보고 말했다. 한록의 얼굴에 오랜만에 떠오르는 표정. 그건 바로...
“우린 <도착지>를 영화가 아니라 사회 현상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누군가는 말도 안 된다고 할 법한 목표. 그에 대한 기대감이었다.
*
“진짜 좋은 아이디어인데 말이야. 그만큼 엄청 어렵겠다.”
현차장이 아주 솔직하게 말했다.
“사람들이 <도착지>로 인해 변한 모습을 보여주겠다. 일단 사람들을 어떻게 자극하고, 어떻게 변한 모습을 보여줄지 생각해봐야겠네. 마케팅이 진짜 중요할 것 같은데...이건 이과장이 잘 할 거고.”
한록에 대한 압도적인 신뢰를 가지고 있는 현차장. 그가 걱정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문제는 말이야. 예산이 너무 많이 들지 않을까?”
바로 프로젝트의 가장 큰 적, 예산.
“그러게요. 사회 현상으로 만든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닌데. 일단, 지원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부터 허가가 나올지 모르겠네요.”
“나오긴 할 거야. 이과장이 하는 거니까. 근데 결과를 낼 수 있을 정도로 나올지는 모르겠네.”
“그러게요. 많아봤자 10명 정도 후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현차장과 하대리가 아주 현실적인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둘의 걱정에 한록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예산 때문에 골머리를 썩는 것. 언제나 열정적인 회사원들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벽이었으며, 한록도 회귀 직후 <지구 특공대>에서 마주했던 문제였다.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세요. 여러분은 그냥 아이디어만 가져오시면 됩니다. 아무리 예산이 많이 들어도 상관 없습니다.”
“정말?”
“네.”
하지만 이제는 얘기가 달라졌다.
“예산이 얼마나 나오든 받아 올 수 있습니다.”
“...어떻게?”
“제가 그 정도도 못해오겠습니까.”
현차장의 말에 한록이 웃으며 답했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그러나 이럴 때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말.
“저 이한록입니다.”
사장과 은밀한 거래를 하고 온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
그날 저녁. 하정엽이 하태준의 사무실을 찾았다.
하태준이 한록의 보고서를 책상에 던지며 말했다.
“이걸 그놈이 보냈다고?”
“네.”
“그놈 뭐, 어디 믿는 구석이 있는 거냐? 어디 회장 아들이라도 되나 보지?”
회장의 결정에 반대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진 한록의 보고서. 하태준은 한록의 패기에 새삼스럽게 놀란 것이었다.
“아닙니다. 그냥 능력 있는 사람이죠.”
한록을 지지해주는 하정엽의 대답.
“그 녀석이 꽤 마음에 드는 모양이군.”
그 대답에, 하태준은 하정엽과 한록의 사이에 깊은 대화가 오갔음을 빠르게 알아차렸다.
하태준이 하정엽에게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냐.”
“이한록 과장의 분석 중 눈에 띄는 부분이 몇 개 있었습니다. 특히, 헐리웃 회사를 만들겠다는 게 우리의 욕심이라는 점. 그 점은 저도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미국 지사에도 투자를 하되, 핵심인력은 본사에 두려고 합니다. 그리고 미국지사와 본사, 양측에서 헐리웃 시장을 노리겠습니다.”
하정엽이 내놓은 새로운 의견. 하태준과 했던 회의에서 많은 부분이 바뀐 내용이었다. 하태준이 하정엽의 말을 듣더니 말했다.
“그 놈은 내 결정에 욕심이라고 말했고, 너는 과장의 보고서 하나 때문에 나랑 내린 결정을 바꾸겠다 이거군.”
하태준의 말에 순식간에 사무실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그러나 하정엽은 꿋꿋이 답했다.
“고작 과장 하나가 아니고, 능력 있는 사람의 합리적인 조언입니다.”
“벌써 부하들한테 휘둘리고 있나? 그것도 새파랗게 어린놈한테? 부하를 다루는 법을 하나도 모르는군.”
하태준의 날카로운 질책. CK의 중역들이 언제나 두려워하는 순간이었으며, 하정엽 역시 항상 숨막히는 긴장을 하던 순간이었다.
그러나 오늘 하정엽의 태도는 평소와 달랐다.
“아버지.”
하태준의 말에 하정엽이 답했다.
“제 사람을 어떻게 대할지는 제가 결정합니다.”
하정엽의 도발적인 말.
‘이한록과의 관계에 조언은 필요 없다.’란 뜻이었다.
그 말에 하태준이 답했다.
“내 앞에서 말을 바꾸려면 뭐라도 결과를 가져왔어야지. 남의 말에 휘둘리지 말고 미국 지사에 집중해라.”
얼핏 들으면 거절처럼 느껴지지만...
“할 수 있겠냐. 아주 대단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 이상, 내 맘이 바뀔 일은 없다.”
사실은 한번 기회를 주겠다는 말이었다.
“감사합니다. 기대하시는 걸 가져오겠습니다.”
하태준의 말을 이해한 하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하태준이 말했다.
“내가 바라는 건 네 놈들이 실패하는 거야.”
“그렇다면...”
하태준은 하정엽과 한록에게 새로운 기회를 줬고,
“회장님의 생각이 틀렸다는 걸 보여드리겠습니다.”
하정엽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
하태준의 사무실을 나선 하정엽. 하태준이 하정엽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눈에 띄게 성장하고 있는 하정엽의 모습. 그리고, 그 뒤에 서 있는게 분명한 누군가.
“역시 그놈을 닮아가고 있군.”
하태준이 한록을 떠올리며 혼잣말을 했다. 그리고 자신과 최경준의 과거를 떠올렸다.
좋은 부하는 언제나 윗사람을 성장시키는 법. 그리고 좋은 상사는 그에 대한 보답을 하는 법이었다.
한록과 하정엽이 그릴 미래를 상상하는 하태준. 그가 아직 하정엽에게는 하지 않은 말을 중얼거렸다.
“해외팀 팀장이라. 아직도 배포가 작군.”
만약 하정엽과 한록이 이번 기회를 잘 잡아낸다면, 그는...
“그 정도로는 부족할 거다.”
그들이 바라는 것 이상의 보상을 줄 생각이었다.
*
하태준과의 회의 후, 하정엽은 바로 한록을 호출했다.
사장실에 도착한 한록. 한록이 책상 앞에 서자 하정엽이 말했다.
“회장님께서 기회를 주셨습니다. 미국 지사가 아니라 본사만으로도 헐리웃에 도전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합니다.”
하태준의 말. ‘해외팀만으로도 성과를 낼 수 있을 거란 근거를 가져와라.’
그 말에 숨은 뜻은, 바로-
“우리가 준비한 최고의 성과를 보여줄 때입니다.”
‘네 놈들을 얼마나 믿을 수 있는지 보여봐라’란 뜻이었다.
“회장님을 설득할 수만 있다면...해외팀에 미국 지사 이상의 지원이 들어올 겁니다.”
“생각하고 계신 일이 있으십니까.”
“이번 CK 예선전이 큰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시상식에서 최경준 본부장이 공로상을 수상하게 될 겁니다.”
영화계에 뛰어난 발자취를 한 사람이자, 원로 영화인에게 주어지는 공로상.
한록의 예선전으로 인해 CK ENM은 영화계 전체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었다. 다만 한록은 아직 나이가 너무 어렸고, 딱히 이렇다 할 업적을 남기진 못한 상황.
이에 CK를 대표하는 공로상의 수상자로 최경준이 선정된 것이었다.
“그 곳에서 뭔가를 보여줘야 합니다.”
그리고 하정엽은 최경준의 수상소감으로 CK ENM의 해외팀 출범을 알릴 생각인 듯 했다.
“최경준 본부장이 앞으로 CK ENM의 행보에 대해 말할 겁니다. 하지만 CK ENM이 헐리웃에 진출할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회장님이 만족하실만한 결과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한록이 하정엽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정엽이 드디어 자신의 목적을 말하기 시작했다.
“한국 영화계. 최경준 본부장. 그리고...아버지.”
하정엽이 바라는 것은 간단했다.
“그들 중 누구도 이루지 못한 성과를 가져와야 합니다.”
아무도 의심하지 못할 결과를 가져올 것.
하정엽의 무리한 요구에 한록은 미소를 지었다.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성과를 가져와라.’는 하정엽의 요구. 그리고, <도착지>를 사회현상으로 만들겠단 한록의 목표.
모든게 아주 완벽히 들어맞고 있었다.
“할 수 있겠습니까.”
“네.”
하정엽이 하태준이 자신에게 했던 질문을 되물었고, 한록은 그 말에 답했다.
자신감이 넘치는. 그리고...
“언제나 그렇지 않았습니까.”
이미 결과로 증명했음을 보여주는 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