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웃 전쟁
사장실에 도착하자, 하정엽이 한록에게 말했다.
“읽어보세요.”
한록에게 보고서를 하나 넘겨주는 하정엽. PR팀에서 분석한 이번 예선전의 효과 보고서였다.
[KBC 시청률 1위 달성]
[영화 사업본부 전체 매출 10% 증가]
[예선전 참여 영화 평균 매출 20% 증가]
불과 한달만의 결과라고는 믿기지 않는 성과들이었다. 한록이 최경준에게 말했다.
“사장님께서 지원해주신 덕분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본인이 한 거라고 다 알고 있을텐데요. 내 앞에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지마세요.”
한록의 말을 자르는 하정엽. 그러나 냉정한 말과 달리, 하정엽은 꽤 기분이 좋아보이는 얼굴이었다.
[CK ENM 브랜드 인지도 30% 증가]
바로 이 방송으로 하정엽의 인지도가 엄청나게 상승했기 때문이었다.
3화 중에서도 꽤나 평가가 좋았던 장면.
하정엽이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겠다’며 경쟁심에 불을 붙인 장면이었다.
“그때 이한록 과장이 한 말이 맞았습니다.”
하정엽이 과거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3화를 촬영하기 직전, 한록은 보고를 위해 하정엽을 찾았다. 그리고 방송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며 말했다.
-적극적으로 참여하시되, 너무 친근한 이미지를 가져가려 하시면 안 됩니다. 사람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그게 꾸며진 이미지란 걸 바로 알 겁니다. 사장님께서 보여주실 건 그냥 CK ENM의 젊고 카리스마 있는 사장이란 모습입니다. 평소와 같은 모습이요.
젊고, 잘생긴 재벌가의 후계자. 그런 사람이 최고 인기 프로그램에 나와서 유능하게 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누구라도 좋아할 법한 장면이었고, 한록의 예상대로 사람들은 하정엽의 등장에 큰 관심을 보였다.
게다가 3화의 마지막 장면까지.
-우승자는 당연히 <수면>입니다. 하지만, 이변이 있을 수는 있겠죠.
촬영장을 빠져나가면서 본인이 생각하는 우승 후보에 투표를 한 하정엽.
그렇게 말한 하정엽이 스티커를 붙인 곳은...
[왜 안 보여줘!]
[엥 여기서 끝???]
방송에 공개되지 않았다.
‘과연 CK가 밀어주는 영화는 뭐냐.’
‘사장이 뽑은 영화는 뭐였냐.’
하정엽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3화에서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덕분에 하정엽의 이름이 검색어 순위에 오르내리기도 한 상황.
아마 모든 촬영이 끝나고 결과가 공개된다면, 하정엽은 다시 한 번 주목을 받게 될 게 분명했다.
하정엽의 개인적인 목표였던 자신의 인지도 확대. 그게 예선전이 끝나기도 전에 벌써 성공한 것이다.
“내년부터 연예대상에서도 예선전을 도입하겠다고 하는군요. 이번 예선전의 포맷을 사가겠다는 제안이 왔습니다.”
거기에 연예계 전체가 이번 예선전에 큰 충격을 받고, 허겁지겁 CK를 따라하고 있다.
내년부터 각종 시상식에 예선전이 정착될게 분명했으며...
“앞으로는 연말마다 이한록이란 이름이 들려오겠군요.”
그때마다 사람들은 예선전이란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한 한록에 대해 얘기하게 될 것이다.
“그 옆에는 CK란 이름이 있을 거고요.”
그리고 그 옆에는 당연히 하정엽이란 이름도 함께 남을 것이다.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은 하정엽. 하정엽이 아주 만족스러운 얼굴로 한록에게 묻었다.
“이제 일대일 GV가 남았군요.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주요 시상식에선 대상, 주연상, 작품상을 전부 우리 회사가 가져오게 될 겁니다.”
‘모든 시상식을 CK가 제패하겠다’는 한록의 말.
성공하면 한국 영화계의 역사에 남을 기록이 될 게 분명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성과로 봤을 때...
“그렇게 되겠죠.”
한록의 말은 절대 허황된 게 아니었다.
하정엽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한록을 바라보았다.
CK ENM의 인지도 확대. 시상식에서의 압도적인 성공. 한록은 분명 그 모든 걸 이뤄낼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이한록의 무대는 한국이 아니다.
“수고했습니다. 이제 다음 얘기를 해야겠군요.”
하정엽이 드디어 보상에 대한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헐리웃은 회장님의 오랜 숙원입니다. 하지만 예상보다 훨씬 어려운 곳이었고, 회장님은 결국 헐리웃 도전에 실패하셨습니다. 그 후로 헐리웃 진출에 대한 지원이 거의 끊긴 상황이었고, 미국 지사도 철수 직전이죠. 하지만 최근 회장님께서 마음을 바꾸셨습니다.”
하태준과 했던 대화에 대해 말해주는 하정엽.
“이한록 과장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대화의 중심은 단연 한록이었다.
“타임스퀘어 광고 이후 회장님이 마음을 바꾸셨습니다. 앞으로 CK ENM은 미국 지사를 위주로 헐리웃 진출에 집중할 겁니다. 그리고 이한록 과장이 미국 지사의 지사장이 될 겁니다.”
지사장. 그것도 미국 지사.
사실상 본부장 바로 아래 급으로, 한 사업본부의 부사장 정도는 되는 위치였다.
‘역시.’
과장에서 지사장으로의 승진이다. 그러나 하정엽의 파격적인 제안에도 한록은 ‘그럴 줄 알았다’라는 표정이었다. 이미 짐작하고 있던 일이기 때문이었다.
‘미국지사라.’
한록은 회귀 전의 일을 떠올렸다.
‘미국지사는 5년 뒤까지 성공하지 못했다.’
“아직 미국 지사는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그룹 차원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을 겁니다.”
하정엽 역시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한록은 미국 지사가 지원이 없어서 실패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출발 자체가 잘못됐다.’
미국 지사는 정말 헐리웃을 타겟으로 만들어진 곳이었고, 오로지 미국에서 성공하기 위한 작품들을 만들었다. 그래서 새로운 영화를 시장에 선보였을 때. 그때 스튜디오B라는 새로운 회사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바로 제롬의 회사였다.
제롬이 우드 엔터테인먼트의 월급 사장에서 벗어나, 처음부터 직접 만든 회사.
스튜디오 B는 제작, 기획, 배급 등 모든 것을 담당하는 종합 영화 회사였고, 만들어진지 3년만에 미국 최고의 영화회사가 되었다.
반면 CK ENM의 미국지사는 강력한 회사의 등장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지사장은 본부장 아래 직급이지만, 본부장급 대우를 해주겠습니다. 뉴욕에 아파트를 지원할거고, 생활비 역시 본부장급으로 맞춰주겠습니다. 동생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박사과정까지의 학비 역시 우리가 지원합니다.”
엄청난 대우를 약속하는 하정엽. 그러나 한록은 하정엽의 말을 한 귀로 흘리고 있었다.
하정엽의 말이 끝나자 한록이 입을 열었다.
“사장님, 전 한국에 남을 겁니다.”
“...이유가 뭡니까?”
“미국 시장을 노리는 건 잘못된 방향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한록이 하정엽에게 솔직하게 답했다.
스튜디오B의 등장으로 미국지사는 빠르게 쇠락의 길을 걸었다.
반면 한록이 국내에서 진행한 <식물> 프로젝트는 대성공을 해서 미국으로 진출하게 된 상황.
그때 한록은 생각했다.
‘좋은 영화는 어차피 세계가 알아본다.’
CK에게 필요한 건 ‘뛰어난 한국 영화’를 만드는 것이지, 헐리웃 회사가 되는 게 아니다.
애초에 한국인이 미국인들을 타겟으로 한 영화를 만들어봤자, 진짜 미국의 회사들과는 승부가 되지 않는다. 그게 한록이 미국지사를 보고 내린 결론이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영화도 이곳에서 만들어야한다.’
게다가 한록이 입사 때부터 꿈꾸고 있는 꿈의 영화마저 너무나 한국적인 영화였다.
‘어차피 이 정도 대우는 한국에 남아있어도 맞춰줄 거야.’
<삼일의 삶>. 그리고 <식물>. 굳이 미국으로 넘어가지 않아도, 곧 CK의 영화들은 헐리웃으로 진출한다. 그런 상황에서 단순히 미국 지사장이란 호칭을 위해 미국으로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제안은 감사하지만, 저는 한국에서 다른 일을 진행하고 싶습니다.”
한록이 하정엽에게 다시 한 번 말했다.
*
“방향성이 잘못 됐다라.”
“네. 이제 CK의 목표는 전 세계다. 그 말씀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저도 시상식이 끝나면 한국이 아닌 세계 시장을 대상으로 하는 영화를 준비하려고 합니다.”
한록이 하정엽의 말에 답했다.
한록 역시 <도착지>가 끝나면 세계 시장으로 목표를 높일 생각이었던 상황. 하지만 미국 지사로 옮기는 것은 그 계획에 포함되지 않았다. 미국 지사의 실패를 눈으로 직접 보고 왔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렇다고 아무 기반도 없는 미국에서 시작을 하겠다는 건 좋은 결정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록의 말에 하정엽은 아무런 답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하정엽의 얼굴. 하지만 기분이 좋지만은 않을 게 분명했다. 이건 일개 사원이 회장과 사장이 내린 결정에 반기를 드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하정엽은 이전처럼 한록에게 결정을 강요하지 않았다.
“일단 알겠습니다. 들어가보세요.”
-한록은 절대 자기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네, 좋은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음에 없는 소리는 하지말라고 했습니다."
하정엽의 말에 한록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한록이 사장실을 나서기 직전, 하정엽이 말했다.
“미국 지사의 가능성에 대한 부분은 자세히 작성해서 보고서로 올리세요.”
-그리고 자기 말이 정답이 아닐 수 있는 사실을 이제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한록 과장의 의견이니, 회장님과 다시 논의해보겠습니다.”
특히나 그게 이한록이 한 말이라면.
이전과 한층 달라진 하정엽의 반응에 한록이 미소를 지었다.
미국지사가 아닌, 한록이 그려가는 또 다른 방향. 그리고 한록이 정말로 얻고 싶은 자리. 그 자리를 얻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그리고...
“내 결정에 대해 비판적인 내용이어도 좋으니, 최대한 솔직하게 작성하세요.”
이 사람이 정말 많이 변했단 생각도.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한록이 하정엽에게 진심으로 말했다.
*
하정엽과의 면담 후 사무실로 돌아온 한록. 그런데 마케팅 부서의 분위기가 무언가 이상했다.
끊임없이 타자를 치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불편한 표정의 정부장.
‘뭐지?’
한록이 의아해하며 자리에 앉았을 때, 최대리가 바로 한록에게 다가와 물었다.
“사장님이랑 무슨 얘기 하셨어요?”
“앞으로 GV 진행에 대한 보고를 드렸습니다.”
“에이, 아닌 거 아는데. 그래도 그만 물어볼게요. 사장님 얘기보다 더 놀랄만한 일이 있거든요.”
한록은 최대리의 말에 피식 미소를 지었다.
CK ENM이 미국 지사를 전폭 지원할 거라는 점. 그리고 자신이 지사장 제안을 받았다는 것보다 더 놀랄만한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은 것이다.
“무슨 일인데요?”
그러나 한록의 예상은 틀렸다.
“그게...”
있었다. 지사장 제안보다 더 놀랄만한 일이.
“제롬이 새로 회사를 설립했대요.”
바로 스튜디오B의 등장이었다.
앞으로 5년 후면 세계 최고의 영화 회사가 될 스튜디오 B의 등장.
새로운 회사의 등장에 한록은 생각했다.
‘드디어 왔구나.’
영화계의 지각변동이 시작되고 있었다.
*
“저는 스카웃 제의받았어요. 과장님도 개인메일 확인해보세요.”
최대리의 말에 한록은 메일함을 확인했다.
과거보다 훨씬 빠르게 일어난 스튜디오 B의 설립. 거기에 전세계로 보내는 스카웃 제의까지. 제롬은 이전보다 훨씬 공격적으로 사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스튜디오 B-입사 제안]
당연히 한록에게도 스카웃 메일이 도착해있었다.
메일에는 스튜디오 B의 대략적인 비전과, 한록에게 제안할 위치가 적혀있었다.
그러나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제롬이 자신을 눈여겨보고 있다는 것, 그리고 각별한 대우를 하고 있다는 건 한록도 알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한록이 집중한 건 메일의 마지막 문장. 스튜디오B가 아니라...
[곧 전화하겠습니다. 한.]
[당신에게는 따로 제안할 게 있습니다.]
제롬 로페즈가 이한록에게 보낸 말이었다.
*
그리고 그 날 저녁. 약속대로 제롬에게서 전화가 도착했다.
[반갑습니다.]
“오랜만입니다, 제롬.”
제롬의 전화를 받은 한록이 반갑게 답했다.
[요즘은 한에 대한 소식이 안 보이더군요.]
“지금은 국내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한국 시상식에서 대상을 타려는 영화가 있습니다.”
[당신이 고작 한국 시상식에 집중하고 있다라. 어느 시상식입니까.]
“어느 한 곳이 아니라, 모든 시상식에서 대상을 타려 합니다.”
[역시 재밌는 걸 하고 있었군요.]
한록의 말에 제롬이 즐겁다는 듯 말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말했다.
[하지만 역시, 당신을 그곳에 두긴 아깝단 생각이 드는군.]
이제 본론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자신감, 그리고 위압감이 느껴지는 제롬의 목소리. 그 말에 한록이 귀를 기울였다.
[당신이 한국 영화에 애착을 가지고 있단 건 알아.]
차후 세계 최고 영화회사의 오너가 되는 남자.
[그래서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가져왔지.]
그가 오직 한록만을 위해 준비한 특별한 제안을 말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