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분명 제대로 보상하겠다고 말했죠.
‘내가 왜 이한록인지 알게 될 거다’란 한록의 발언.
그리고 마이크를 든 이연옥.
서감독은 알아차렸다.
-이한록이 준비한 엔딩이 여기다.
“뭘 할 겁니까.”
서감독의 질문에 한록이 답했다.
“영화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아주 짧은 답이었다.
‘영화 감독 앞에서 영화를 보여주겠다’는 말.
그 말이 가지는 무게를 알았기에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얼마나 대단한 걸 하는지 지켜보겠다.’
서감독이 조용히 이연옥의 소감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
촬영장을 한바퀴 둘러본 한록은 자신의 계획을 점검했다.
무대. 인터뷰. 클라이맥스.
자신이 준비한 영화.
<삼일의 삶>, 그리고 <러빙 고흐>를 통해 한록이 깨달은 점이 있었다. 그건 바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닮은 영화를 사랑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늘 한록은 사람들이 원하는 장면을 보여줄 생각이었다.
아주 평범한 사람들의 삶은 담은, 그래서 우리 주위에서 너무 흔하게 볼 수 있는 얘기인 <도착지>. 어떤 할머니가 꿈을 꾸고, 자기 꿈을 의심하는 영화. 그러나 마지막에는 끝내 꿈을 이루는 영화.
오늘 한록은 그 영화를 현실에서 보여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도착지>를 위한 첫 번째 인물이자, 주인공은...
“선생님. 소감을 말씀해주세요.”
이연옥이었다.
*
이연옥은 아까의 대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선생님이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 보여주세요.
그렇게 말하던 한록.
그리고 촬영장에 도착하자, 이번엔 유선이 말을 걸어왔다.
-선생님, 저기...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바쁘시겠지만 이과장님이 꼭 지금 말씀드려야 한다고 해서...
-무슨 일인데요?
-어...저희 할머니가 선생님을 되게 좋아하세요.
유선은 아주 어렵게 얘기를 꺼냈다. 유선이 무대에서 말했던 ‘정장을 입고 일을 하는 게 꿈이었던’ 할머니에 대한 얘기였다.
-나를? 왜?
-할머니가 예선전을 보셨어요. 그런데 선생님께서 인터뷰에서 ‘여우 주연상을 탈 거다’라고 말씀하시는 게 좋았다고 하세요. 하고 싶은 거 있으면 하고,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남들 눈치 안 보고 하고. 그런 거요.
그 말에 이연옥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유선의 할머니가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유선의 할머니, 그리고 자신의 영상에 댓글을 달았던 사람들은 모두 비슷한 말을 하고 있었다.
-나랑 비슷한 나이인데. 나는 저러지 못하는데. 저 사람은 참 멋있는 거 같다고.
이연옥을 응원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남긴 말.
-저 사람을 보다보면 나도 달라지고 싶다고.
오늘 한록이. 유선이. 그리고 자신의 아들이 해준 말이었다.
‘...내가 멋있는 사람인가?’
아직은 확신할 수 없는 말. 어쩌면 평생을 가도 확신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리고 평생을 가도 지킬 수 없는 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도착지>는 아직 개봉을 하지 않은 상황. 거기에 곧 <수면>과의 라이벌 GV가 남아 있었다.
자신과 영화를 위해 젊은 사람들이 이렇게 노력하고 있는데, 혼자 풀이 죽은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서감독처럼, 혹은 백감독처럼. 그들처럼 젊은 패기를 보여주고, 자신의 매력으로 사람을 끌어올 수는 없다. 그건 이연옥 역시 알고 있었다.
‘나도 뭐라도 해야한다.’
하지만 적어도 영화에 폐를 주고 싶진 않았다.
“아까 했던 말 중에...취소하고 싶은 부분이 있어요.”
마이크를 잡은 이연옥이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어떤 말씀이시죠?”
“아들한테 미안하다고 했던 말,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단 말...그건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말인 것 같네요.”
“왜죠?”
“<도착지>가 누군가한테 미안할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 말에 서감독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 이연옥을 바라보았다.
‘분위기가 달라졌다.’
약간이지만 이연옥의 태도가 달라졌다. 아주 기민한 사람들이라면 알아차릴 정도의 태도.
‘뭐야?’
그런 생각에 송PD가 한록을 바라보았다. 이연옥을 바라보는 한록의 시선. 그 눈빛 속엔 다정함과...
기대감이 담겨있었다.
한록과 송PD의 시선이 마주쳤고, 한록이 입모양으로 말했다.
[인터뷰 다시해요.]
*
-무언가 시작되고 있다.
한록의 눈빛을 본 순간 송PD는 본능적으로 느꼈고, 마이크를 잡아들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사실, 아직 여러분께 말씀드리지 않은 게 있습니다. 이번 인기투표의 1,2위는 다음 주에 일대일 GV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이긴 영화가 예선전의 승자가 될 겁니다.”
아직 구상단계인 내용을 바로 말해버린 송PD. 아마 국장에게 엄청나게 욕을 먹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베테랑 PD인 그녀의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이한록이 무언가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분명 대단한 장면이 나올 것이다.
“일대일 GV?”
“...그럼 <도착지>가 <수면>이랑 붙는 거야?”
갑작스러운 소식에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도착지>는 분명 이번 투표에서 2위를 했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게 말이 되나?”
<도착지>는 절대 <수면>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자, 박하성씨. <도착지>랑 붙게 된 소감이 어떠신가요?”
재빨리 <수면>의 박하성에게 묻는 송PD.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록이 송PD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잘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일대일 경쟁이라. 재밌을 것 같아요.”
“네. 승자는 누구라고 생각하시나요?”
송PD의 말에 박하성이 바로 답했다.
“<수면>이죠.”
그 말에 미소를 짓는 송PD. ‘너한테서 뽑아낼 건 다 뽑아냈다’라는 표정이었다. 송PD가 다음 사냥감을 찾아 몸을 돌렸다.
“그리고 이번엔-”
송PD의 다음 사냥감. 이연옥.
그러나 무대 위의 한록은 다른 곳을 가리켰다.
이제는 두 번째 인물이 활약할 시간이었다.
‘하!’
한록의 손가락이 향한곳을 바라본 송PD는 웃음을 터뜨렸다.
한록이 원하는 두 번째 배우는, 바로.
‘이한록씨. 진심이야?’
촬영장 중앙에서 서 있는 하정엽이었다.
문득 한록이 ‘감독끼리 경쟁을 시키자’고 제안했을 때가 떠오르는 송PD. 그때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뭐, 문제 생기면 이한록이 책임지겠지. 이한록이 시킨 거니까.’
그러나 지금 떠오른 생각은 다른 것이었다.
‘문제가 생길 일은 없다.’
왜냐면.
‘이한록이 시킨 일이니까.’
눈앞에 있는 사람은, 그 말 한마디로 모든 의문을 굴복시킬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사장님. 이번 예선전의 우승이 어디일거라 생각하십니까.”
송PD가 한록의 지시대로 하정엽에게 물었고, 그녀의 말에 객석에 앉은 CK 직원들 모두가 숨을 멈췄다.
“PD님. 잠시 녹화 끊고-”
“그만.”
그리고 하정엽의 곁에 있던 전략기획팀장이 앞으로 나선 순간, 최경준이 손을 들어 전략기획팀장을 막았다.
하정엽이 최경준에게 손을 내밀어 마이크를 받았다.
“우승후보라. 역시 수면이겠죠.”
한록이 만든 판에 기꺼이 발을 넣어주겠다는 하정엽의 태도.
“네, 사장님의 선택은 <수면>인걸로...”
“그리고 우승자에겐 포상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CK그룹 차기 회장 후보의 지원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우승을 한 영화에는 전폭적인 지원을 하겠습니다.”
“전폭적인 지원이면 어느 정도요?”
하정엽의 말에 객석의 CK 직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반면, 촬영을 위해 온 방송국의 사람들 사이에선 침묵이 가라앉았다.
방송계의 베테랑. 그들 모두에게 느껴지는 어떤 생각.
“하정엽의 이름을 걸고요.”
그 말에 송PD의 곁에 있던 카메라맨이 중얼거렸다.
“오케이.”
옆에서 들리는 감탄 소리에 대본을 움켜쥐는 송PD.
‘그래. 이거다. 이거야. 이거야.’
등부터 시작되어 온 몸을 타고 오르는 소름. 오늘 한록이 느꼈던 것이자, 일이 완벽히 돌아가고 있음을 알리는 징조였다. 송PD가 빠르게 한록을 돌아보았다.
‘이번엔 뭐예요.’
한록이 가리킨 것은 이연옥의 아들이었다.
*
“아드님. 하실 말씀 없으신가요?”
“저 말입니까?”
“네. 어머니가 <수면>과 일대일 대결을 하게 됐는데요. 응원 한마디 해주세요.”
유태현에게 바로 압박을 가하는 송PD. 송PD의 말에 유태현이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질게 뻔히 보이는 싸움에 어머니를 내보내야한다.
거기서 차마 ‘잘할 거다’라고도, ‘이길 수 있을 거다’라고도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유태현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도착지>는 저한테 정말 좋은 영화였고...”
그리고 아주 진심을 담아 말했다.
“어머니는 저한테 항상 멋진 분이었습니다.”
‘그래, 알겠다.’
이제 송PD는 한록의 계획이 뭔지 알아차렸다.
한록은 단순히 감정을 자극하기 위해 유태현을 데려온 게 아니었다. 한록이 유태현을 섭외한 것은, 꿈을 꾸는 할머니와 그를 응원하는 가족이라는 구도. 즉 <도착지>의 구도를 가져오기 위해서였다.
‘그럼 다음은 누군지 알겠다.’
그리고 송PD의 예상은 적중했다. 마지막으로 한록의 시선이 향한 곳은 송PD가 생각하던 사람이었다.
어쩌면 영화에서 가장 매력적이어야 하는 사람이자, 영화를 이끌어 나가는 사람. 주인공에게 시련을 주고, 그를 통해 주인공을 성장시킬 존재.
라이벌.
“서감독님.”
송PD가 서감독의 이름을 불렀다.
*
“서감독님. 승자는 누구라고 생각하시나요?”
송PD의 말에 서감독이 답했다.
“<수면>이죠.”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도착지>는...따뜻하고, 좋은 영화죠.”
“네, 그렇죠.”
“다정하고. 위로가 되고요.”
“칭찬만 하시네요.”
“칭찬이 아니에요. 불가능한 꿈도 이뤄질 거라는 영화. 누구나 이미 멋진 사람이라는 영화. 그런 영화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죠.”
서감독이 말을 잠깐 멈추고 한록을 바라보았다. 한록은 서감독이 그랬던 것처럼 조용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된다.
“그리고 그건 거짓말이고요.”
영화의 클라이맥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
서감독의 말을 듣는 순간 이연옥은 깨달았다.
말해야한다.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 멋지게 말해야한다.
도착지와 이연옥의 패배를 예상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보고 달라지길 결심한 사람들을 위해, 말해야 한다. 우리 영화는 대단한 영화라고. 우리는 영화에 단 하나의 거짓말도 담지 않았다고.
이 영화의 주인공으로서, 그렇게 말해야 한다.
서감독의 발언. 그리고 이연옥의 굳은 표정.
이제 모든 게 준비됐다.
한록이 송PD를 바라보았다.
‘결말이에요.’
한록의 뜻을 파악한 송PD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이크를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한록에게 손짓을 하며 말했다.
[그쪽이 해요.]
그 말에 한록이 미소를 지었고, 마이크를 들었다.
“선생님. 다들 <도착지>가 <수면>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리고 이연옥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
한록의 질문에 다시 마이크를 든 이연옥.
사람들의 수많은 의심 속에서 그녀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질 수도 있겠죠.”
사실 그녀도 안다. 아니, 세상 모두가 안다. 한록마저 알 것이다. <도착지>는 <수면>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한록은 자신에게 몇 번이나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누군가는 자신처럼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제는 말해야 한다.
이제는 진짜 결말을 보여줘야 한다.
“그렇다고 포기할 거면 이 영화에 나오지도 않았을 거예요.”
우리 영화는 거짓말이 아니라고. 그걸 내가 증명할 거라고.
한록이 다시 한 번 이연옥에게 물었다.
“선생님. 아드님한테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나요.”
이연옥은 한록의 질문에 방금 전의 대화를 떠올렸다. 아들에게 했던 말. 미안하다, 고맙다.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사람들은 그런 말을 듣고 싶은 게 아닐 거다.
“누가 나한테 이 말을 시키던데. 우리 영화 마지막 대사야.”
이연옥이 잠시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연옥의 침묵. 스텝들을 조용히 시키는 송PD.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는 한록.
아주 빠르게 이어지는 순간들과 쌓여가는 감정.
그 모습을 보던 서감독이 문득 생각했다.
도착지라는 진부한 신파 영화.
꿈꾸는 할머니. 할머니를 돕는 사람들. 그리고 그 꿈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누군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얘기고, 서감독이 가장 싫어하는 얘기였다.
그런데 이 얘기가 지금 이 현장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 숨을 쉬고 있다.
영화가 되고 있다.
서감독은 방금 전 한록이 했던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영화를 보여주겠다.’
한록은 이 현장에서 도착지라는 영화를 재현하고 있었다.
“이제 실패 같은 건 부끄럽지 않아.”
이연옥이 <도착지>의 대사를 읊었고 서감독은 <도착지>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렸다.
<도착지>의 엔딩에서 바리스타가 된 옥자. 그녀는 마라톤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하기 위해 카페 문을 나서며 말한다.
“그러니까 너한테 말하고 싶은 건...”
그리고 이연옥은 자신의 아들. 유선의 할머니. 그리고 자신을 응원해준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며 말했다.
[이제 실패 같은 건 부끄럽지 않아. 왜냐하면. 나는 이미 멋진 사람이니까.]
[나는 멋진 사람이야.]
“네 말이 맞아. 나는 멋진 사람이야.”
[모든 꿈은 이뤄질 것이다.]
“내 꿈은 이뤄질 거야.”
[그리고 당신의 꿈도 그럴 것이다.]
“나만이 아니라, 다들 그럴 거야.”
영화와 현실을 오가는 대사.
“아니라는 사람이야말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야. 내 말을 믿어.”
극적인 순간. 아름다운 대사. 그리고.
“난 이 영화의 주인공이고, 우리 영화의 결말은 이거야.”
성장하는 주인공.
*
영화를 현실로 만들어낼 줄 아는 남자 이한록. 그리고 그가 보여준 한 편의 영화.
<도착지>의 엔딩을 경험한 서감독은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도. 아주 조금은...
“...천재란 말이 아깝진 않네.”
<도착지>를 좋아하게 될 지도 모른다고.
*
이연옥의 인터뷰로 끝난 촬영장.
“이한록씨. 이거 방송되면 저 승진할 것 같습니다.”
송PD가 입이 귀에 걸린 채로 한록에게 말했다.
송PD뿐만 아니라 촬영장 전체가 묘한 흥분으로 들떠 있는 게 한록에게도 느껴질 정도였다.
그 속에서 한록은 촬영이 모두 끝난 현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길고 길었던 예선전과, <도착지>를 현실로 끌어오겠다는 목표. 한록은 오로지 이 한 장면을 만들기 위해 그 시간들을 거쳐왔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아마...
‘나쁘지 않을 거다.’
한록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서감독이 한록에게 다가와 말했다.
“왜 이한록이라는지 알겠네요.”
그리고 짧은 말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짧은 소감과 함께 사라진 서감독. 분주하게 자리를 정리하는 촬영팀. 그리고, 이연옥의 주위에 몰려든 사람들.
그 모습을 보며 한록은 생각했다.
처음 시도해본 프로그램. 여러 사람들로 만들어낸 드라마. 그 결과는.
‘나쁘지 않다.’
아니.
‘완벽하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었다.
*
촬영이 끝나고, 하정엽이 최경준에게 말했다.
“올라가겠습니다.”
하정엽이 촬영장을 나가자, 카메라맨 한명이 주저하면서 하정엽의 뒤를 따랐다. 하정엽이 망설이는 카메라맨에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찍으세요.”
하정엽은 아직 자신의 역할이 남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역할은 이 영화에 최대한의 재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촬영장 앞에는 CK ENM 로비에 놓인 설문조사 판넬이 하나 놓여있었다.
[이번 예선전의 우승 후보는?]
“사장님은 어느 영화가 이길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말에 하정엽이 미소를 지었고, 판넬 앞의 스티커를 집어들었다.
“당연히 <수면>입니다.”
하정엽이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리고 판넬에 붙은 <도착지>의 포스터를 바라보더니-
“이변이 있을 수는 있겠죠.”
어딘가에 스티커를 붙였다.
*
그리고 삼일 후. <도착지>가 개봉하였다.
[영화 너무 좋네요. 가족이랑 다 같이 보고 왔어요.]
사람들의 반응은 회귀 전에 비하면 매우 뜨거웠으나, 절대 <수면>과는 비교할만한 수치가 아니었다.
“사장님. <도착지>의 개봉 성적은 기대 이하입니다. 하지만 조금 더 시간을...”
“<도착지>에 대한 보고는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십니까.”
하정엽에게 말하는 최경준.
“이한록 과장을 믿으니까요.”
그리고 하정엽의 답.
*
그리고 일주일 후...
[아드님한테 하고 싶으신 말씀은요?]
예선전이 방영되었다.
*
“사장님이다...”
예선전을 모니터링하는 GV팀은 모두 잔뜩 긴장을 한 상태였다
몇 달이나 준비한 프로젝트. 거기에 사장이 직접 출연하기까지 한 프로그램의 결과가 나오는 순간.
[가족찬스 ㅠㅠ이걸 어떻게 이겨]
[하 진짜 우리 엄마 생각나네]
[근데 너무 신파네요]
[오디션이 다 그렇지]
예선전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거의 초단위로 바뀌었다.
-그건 거짓말이죠.
[오늘도 싸가지 레전드]
[뭐...서감독 입장에선 할 수 있는 말인 듯. <도착지>가 좀 진부하긴 하잖아요.]
[그건 그렇죠. <삼일의 삶>이 있는데 <도착지>가 2위한 것도 논란의 여지가 있죠.]
그리고 <도착지>에 대한 불만이 쌓였을 때쯤 나온...
-우리 영화의 결말은 이거야.
이연옥의 대사.
그 대사가 나온 순간, 하대리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아, 씨.”
“하대리.”
하대리의 거친 말에 깜짝 놀란 것 같은 현차장. 그러나 하대리는 현차장의 말 같은 건 신경도 쓰이지 않는 듯한 얼굴이었다. 하대리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이거 대박이에요.”
그리고 잠시후.
하대리의 말처럼...
[영화랑 똑같았던 오늘 예선전 결말]
[오늘 명대사 터진 오디션.JPG]
[지금 <수면>이랑 양대산맥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영화]
[오늘 CK 예선전 보신 분?]
[우리 영화의 결말은 이거야.]
[<도착지> GV 신청하러 갑시다]
사람들은 모두 이연옥이 보여준 결말에 대한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
그리고 그 순간 걸려온 전화 한통.
[이한록 과장.]
익숙한 목소리로 반말을 해오는 사람 때문에 한록은 잠시 생각의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잠시후에야 상대가 누군지 깨달았다.
낮은 목소리에 오만한 말투. 이건 바로-
[하정엽입니다.]
하정엽이었다.
사장에게서 직접 걸려온 전화 한통. 수화기 너머의 하정엽이 말했다.
[내가 분명 제대로 보상하겠다고 말했죠.]
아주 확실한 보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