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이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요.
객석에서 일어난 중년의 남자. 그를 보고 이연옥이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켰다.
“선생님?”
이연옥의 반응에 의아한 듯 묻는 우감독. 그러나 우감독의 의문은 금방 해결되었다.
“안녕하세요. 이연옥 배우 아들 유태현이라고 합니다.”
그 말에 무대 위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뭔가 있구나.’
대부분 그런 생각을 한 것이 분명했다.
그때, 인터뷰를 마친 서감독이 촬영장에 도착했다. 심상치 않은 촬영장의 분위기를 본 서감독이 최대리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이과장님이 뭐낙 준비했네요. 이연옥 선생님 아드님이라고 하십니다.”
“가족이라.”
평소와 달리 장난기 하나 없이 답하는 최대리. 최대리는 한록이 또 무슨 짓을 할지 긴장한 듯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서감독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서감독은 일어나 있는 유태현을 보더니...
“뻔한 얘기를 하는군요.”
피식 미소를 지었다.
*
촬영장, 그리고 무대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이연옥의 아들 유태현에게 향했다.
“네, 아드님. 어머님께 드리고 싶으신 말씀이 뭔가요?”
사회자의 질문에 유태현이 입을 열었다.
“사실, 어머니보다는 여러분께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그리고 유태현이 객석을 바라보았다. 유태현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방송이 나간 후에...최종 투표가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유태현이 말하는 것은 방송이 나간 후 진행될 인기투표에 대한 것이었다.
예선전에 나온 모든 영화를 포함해서 진행될 인기투표. 사실상 진짜 관객의 선택을 알려주는 투표나 마찬가지였다.
“저희 어머니가 올해로 데뷔한지 40년이 넘으셨습니다.”
유태현은 이연옥의 삶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무명배우, 혹은 40년간 제대로 된 작품을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사람에 대한 삶. 사람들은 자신이 모르던 이연옥의 삶에 대해 귀를 기울였다.
“이 작품은 어머니의 첫 주연 작품입니다. 그 전에도 많은 작품을 하셨지만, 이렇게 큰 영화는 없었어요. 사실 기회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 기회를 포기하셨죠. 다 저 때문이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이연옥에게 한 영화의 조연 자리가 들어왔다. 차후 한국 영화사에 명작으로 남게 될 <서편제>라는 영화였다.
누가봐도 멋진 대본이었고, 이연옥은 영화에 출연하고자 했다.
“그런데 그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그리고 어머니는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영화를 그만두고 가장이 되셨습니다.”
하지만 그때 가정에 들이닥친 불행.
너무나 흔한 얘기였고, 어디에서나 볼 법한 얘기.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이연옥은 자신의 꿈을 따르는 것보다는 가족을 지키는 걸 선택했다.
“저는...이번이 어머니에게 온 두 번째 기회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어머니를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이제 남은 투표도, 방송이 끝나고 앞으로 영화관에서도...조금이나마 <도착지>에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합니다.”
유태현이 그렇게 말하며 관객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어머니. 저한테만큼은 <도착지>가 최고의 영화입니다.”
그리고 이연옥을 바라보며 물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손을 덜덜 떨며 어머니를 도와달라 말하는 중년의 남자.
유태현의 얘기에 사람들이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이연옥 선생님. 아드님이 응원을 하러 오셨는데,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고맙고, 그리고 항상, 미안하고...”
사회자의 말에 이연옥이 마이크를 들고 겨우 입을 열었다. 나이 지긋한 아들을 바라보는 이연옥의 눈에도 눈물이 고여있었다.
“다음에는, 정말 멋진 모습 보여줄게.”
아들에게 약속을 하는 이연옥.
한록은 그 장면을 바라보며 2주 전 송PD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좋아요. 이 얘기, 무조건 넣어요. 백퍼센트 반응 옵니다.’
한록에게서 이연옥과 유태현의 이야기를 전달 받았을 때 송PD가 했던 말이었고, 그 말은 이제 사실이 되었다.
흔하지만 설득력 있는. 그래서 모두가 사랑할 이야기.
‘겨우 이걸 가지고 나한테 덤빈 건가.’
그에 대한 서감독의 실망.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사랑하게 될 거다.’
한록의 생각.
그리고-
‘이제부터 내가 왜 천재라고 불리는지 보여주겠다.’
고작 이걸로 끝낼 마음은 없는 한록.
“무대 끝내겠습니다. 잠깐 쉬어갈게요.”
송PD가 모두에게 말했다.
*
무대 아래로 내려온 <도착지>팀. 한록이 바로 이연옥에게 말했다.
“선생님. 저랑 잠깐 얘기 좀 하셨으면 합니다.”
촬영장에서 벗어나 회의실로 향한 한록, 그리고 이연옥.
한록이 회의실에 앉자마자 이연옥에게 물었다.
“선생님.”
“응.”
“아까 아드님한테 하신 말씀이요. 그게 정말 하고싶으신 말씀이셨습니까? 고맙고, 미안하고, 다음에는 더 멋진 모습 보여주겠다는 말이요.”
“그렇지. 다 진심이야.”
한록의 말에 이연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한록은 송PD와 아이디어 회의를 할 때 오갔던 대화를 떠올렸다.
‘아드님이 오시면...이연옥 선생님의 반응은 어떨까요?’
‘글쎄요. 엄청 감동하고 고마워하시지 않을까요? 이겼으면 뿌듯해 하실거고. 졌으면 미안해하실 거 같네요. 보통 그러거든요.’
송PD는 그간 자신이 겪었던 오디션 프로그램의 참가자들을 떠올리며 답했다.
‘미안해 한다고요?’
‘네. 멋지게 이기는 걸 보여주고 싶었는데, 가족 앞에서 진 거니까. 보통 많이 속상해하죠.’
확신에 차서 말하는 송PD. 확실히, 한록이 생각하기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정말 그게 전부일까요?’
하지만 한록은 그게 이연옥의 진심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
“선생님. 정말 그게 전부입니까?”
“그게 전부냐니?”
부모로서의 심정. 고마움. 미안함. 자식 앞에서 이기지 못했다는 부끄러움. 실망. 속상함. 그 모든 것이 이연옥의 진심일 것이다. 하지만 한록은 그게 이연옥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연옥은.
“선생님. <도착지>의 마지막 대사를 기억하십니까.”
“그럼, 기억하지.”
한록의 말에 이연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도착지>의 마지막 대사를 말했다.
“이제 실패 같은건 부끄럽지 않아.”
한록이 생각하는 이연옥. 그리고 옥자란 사람. 불가능한 꿈을 꾸고 실패하는 누군가. 그래서 아주.
[왜냐하면.]
[나는 이미 멋진 사람이니까.]
아주 빛이 나는 사람.
한록의 말에 이연옥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옥자라는 멋진 캐릭터를 연기한, 그리고 자신이 꿈꾸는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한 이연옥. 한록은 그런 그녀가 오늘 아들을 보고 단순히 '미안하다'나 '고맙다'란 생각만 했을 것이라고 느끼진 않았다.
“선생님, 다른 사람한테 알려주셔야죠.”
왜나하면, 그녀는 너무나-
“선생님이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요.”
멋진 사람이었으니까.
*
이연옥의 얼굴에 스쳐지나가는 놀라움, 고마움, 망설임, 그리고...자신감.
그 모습을 지켜보며 한록은 목덜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가슴이 차가워지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짜릿해지는 이 기분.
바로-
“그래, 그래야지.”
자신의 계획이 완벽히 성공하리라는 직감이었다.
*
“과장님.”
다시 촬영장으로 돌아온 한록과 이연옥. 송PD와 얘기를 하는 사이, 누군가 한록에게 다가와 말했다. 서감독이었다.
“준비를 많이 하셨군요.”
“네, 그렇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그 말을 하고 싶으신 게 아닌 것 같은데요.”
늘 그렇듯 단도직입적으로 들어오는 한록의 말. 그 말에 서감독이 조금도 놀라지 않고 말했다.
“가족을 데려와서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한다. 어디서나 잘 먹히는 방법이죠. <도착지>랑도 잘 어울리네요.”
안전하고 영리한 한록의 선택.
“그렇습니까.”
“네. 사람들은 이 얘기를 사랑하겠죠. 그리고 저는...”
그에 대한...
“겨우 이 정도를 준비했으면서 내 라이벌이 되겠다고 한 겁니까,”
서감독의 냉소.
가족. 어머니의 희생.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이제 어머니를 응원하는 아들.
평범하고, 사랑스러운 이야기. 아무도 싫어하지 않을 이야기였다.
“배우의 불쌍한 점을 팔아보겠다. 그래서 표를 한 장이라도 더 팔아보겠다. 대단하신 천재의 발상이 이거군요.”
서감독은 한록이 준비한 이야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이번 무대가 마음에 안 드시나 보군요.”
“뻔한 얘기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얘기니까요. 이게 과연 얼마나 효과가 있을거라고 생각합니까?”
서감독의 말은 사실이었다. ‘아픈 과거를 가진 노년의 여배우’ ‘그를 응원하는 아들’.
오디션에서 인기를 끌기엔 충분한 요소지만, <도착지>라는 영화를 <수면>의 경쟁상대로 만들 수 있을만한 방법은 아니었다.
“아까 말했듯이 사람들은 이 얘기를 사랑할 겁니다. 그리고 오디션이 유명해질테니 관객도 많이 들어오겠죠. 700만은 가능하겠네요.”
서감독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게 끝일 겁니다. <도착지>는 사람들에게서 잊혀질 거예요.”
평범하고, 누구나 사랑할 법한 이야기.
그래서 기억에 남을 수 없는 이야기.
그게 서감독이 <도착지>와 한록에 대해 하고 있는 생각이었다.
“그건 두고 봐야 알겠죠.”
서감독의 말에 한록은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답할 뿐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중간 투표 끝났습니다. 다들 무대 위로 올라와주세요!”
그리고 서감독이 한록에게 물으려 할 때, 송PD가 모든 출연진들에게 말했다.
*
<실수>를 제외한 모든 영화를 대상으로 하는 인기투표. 그 1차는 현장에 있는 관객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서감독과 우감독. 그리고 이연옥을 비롯한 모든 출연진이 무대에 올라갔다.
“지금부터 예선전의 중간 성적을 공개합니다!”
그리고 사회자의 말과 함께 스크린에 점수가 공개되기 시작했다.
[1위. <수면>.]
[득표율: 총 투표 중 60%]
압도적인 표차이로 1위를 차지한 수면.
“자, 중간 결과가 공개되었네요. 1위를 하신 서감독님. 소감을 한 번 들어볼까요?”
“우선, 투표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서감독이 아주 드물게 누군가에게 감사를 전했다.
‘내 감사를 받을 수 있는 건 관객뿐이다.’
서감독의 거만함, 그리고 관객에게 보내는 존중이 잘 드러나는 말이었다. 그 말에 서감독의 곁에 앉아있던 최대리가 슬쩍 미소를 지었다.
“<수면>이 이렇게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만 만들 수 있는 영화니까요.”
그리고 이어진, 누가 봐도 <도착지>와 한록을 겨냥한 듯한 서감독의 말.
“아무나 할 수 있는 거. 누구나 만들 수 있는 얘기.”
그 말을 하며 서감독은 한록을 바라보았다.
“전 그런 영화는 안 만듭니다.”
“하하, 서감독님다운 말씀이네요. 그럼 다른 영화들도 볼까요.”
사회자가 자연스럽게 서감독의 말을 받았고, 그 다음으로 다른 영화들의 점수가 공개되었다.
[2위. <도착지>. 득표율 13%]
[3위. <삼일의 삶>. 득표율 12%]
결국 2위를 한 <도착지>.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스크린을 향했을 때. 서감독이 곁에 앉은 한록에게 말했다.
“만족스러우시겠습니다.”
서감독이 비판했던 이연옥의 얘기. 그 얘기를 팔아서 <도착지>는 기어코 2위까지 올라왔다.
누구나 사랑할 법한 얘기. 아무도 싫어하지 않을 얘기. 그리고 고작 거기서 그칠 이야기. 투표는 서감독이 생각하던 대로의 결과였다.
-하지만 서감독이 모르는 게 하나 있었다.
“그럴리가요.”
자신의 곁에 앉은 사람이...
“그럴 거면 제가 이한록이 아니겠죠.”
자기만큼이나 대단한 프라이드를 가진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도착지>팀, 소감 말씀 부탁드립니다.”
사회자의 말에 이연옥이 마이크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