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길 상대가 아니다.
“일이 커지고 있어. 내일 신문에 <실수> 얘기가 나온다더군.”
오후 3시. <실수>에 대한 기사가 올라간 지 한시간만에 최경준이 한록을 호출했다.
인터넷 기사가 아니라 ‘진짜’ 일간지에 <실수>에 대한 기사가 나온다. 그건 이 일이 엄청나게 커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최경준은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자네가 원하던 대로지. 제대로 해볼 수 있겠나.”
한록을 믿기에. 그리고 그의 계획을 미리 들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네. 제작진, 그리고 피해자측 인터뷰를 준비해놨습니다. 프로그램이 강압적으로 진행된 게 아니라 피해자측의 요청이었단 걸 다들 알게 될 겁니다.”
한록이 준비한 상황을 반전시킬 카드.
바로 프로그램 초기단계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피해자 인터뷰였다.
제작진, 피해자들의 심경. 그리고 이들을 걱정하는 장과장의 유대가 고스란히 담긴 인터뷰.
사람들은 상황이 기사에서 떠들던 것과 많이 다르던 것을 이제 곧 알게 될 것이었다.
“그래. 사장님께는 내가 잘 설명 드리지. 자네는 상황을 반전시켜 보게.”
이 일로 일어날 반발을 모두 막아줄테니, 한록은 그저 마음껏 능력을 펼쳐보라는 말.
“자네의 능력을 보여줄 때네.”
최경준은 생각했다.
-문오석의 방해. CK 라는 기업 자체의 이미지가 달린 이번 일.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이한록이 CK 최고의 직원이란 걸 증명할 때다.’
“네. 그리고 한 가지 더 약속드리겠습니다.”
그러나 한록은 거기서 그칠 생각이 없었다.
“...또 뭐지?”
흥미로운듯한 미소를 지은 최경준. 최경준이 한록에게 물었다.
‘이제 더 이상 일 잘하는 직원으로 그칠 생각은 없다.’
오과장, 문오석. 여태까지 한록을 방해한 사람들. 한록은 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가장 큰 자산인 뛰어난 능력을 보여줄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앞으로 제 거처에 대한 논의가 나오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 제가 본부장님의 후계자로 인정받기에는 부족하단 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
“누가 서른 살 과장보고 그런 생각을 하겠는가. 그건 차차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일이야.”
“아뇨. 그때는 늦습니다.”
지금부터 한록이 보여줄 것은-
“오늘부터 보여주겠습니다.”
이한록이 더 이상 견제할 만한 사람이 아니란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한록의 말에 최경준이 미소를 지었다.
“경쟁자들을 굴복시키겠단 건가.”
“조금 다릅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저를 따를 수밖에 없게 만들 겁니다.”
한록이 최경준을 보며 말했다.
“본부장님을 따르듯이 말입니다.”
‘내 능력’을 넘어서, 나라는 사람을 인정하게 만들겠다는 한록의 말.
그 말에 최경준이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말했다.
“그래, 한번 시도해보게.”
*
그날 저녁. 예선전을 위한 긴급 회의가 소집되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되는 거지?’
‘기껏 실적을 올려놨는데. 말아먹는 거 아냐?’
‘우리도 뒤집어쓰나?’
한록이 회의실에 입장하자 느껴진 것은 바로 모두에게 퍼진 불안.
‘이제 와서 어떻게 발을 빼지?’
그리고 한록에 대한 불신이었다.
회의실 앞에 선 한록은 최경준의 말을 떠올렸다.
-나도 한 때 이런 경험이 있었지. 내가 제작에 참여한 영화가 검열에 걸려서 제작이 중단된 상황이었어. 모두의 앞에서 개봉은 문제 없을 거니 제작을 재개하자고 설득해야 했지.
-그래서 어떻게 되셨습니까.
위기의 상황, 그리고 최경준의 답.
-보면 알지 않나.
모두가 주목하는 위기 상황. 이 모든 걸 혼자 책임져야한다. 그건 다시 말해-
-나는 그 영화로 지금 본부장이 되었다네.
모두의 앞에서 자신을 증명할 기회가 온 것이었다.
“회의 시작합니다.”
한록이 회의를 시작했다.
*
“이번 기사로 걱정이 많을 거라 생각합니다.”
한록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혹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한록을 바라보는 사람들. 그들은 모두 ‘이걸 대체 어떻게 할 거냐’란 얼굴로 한록을 바라보고 있었다.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기획 단계부터 이런 일이 생길 수도 있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고, 대비책을 세워놨습니다.”
그 말에 회의실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미리 알고 있었다고요?”
“왜 말을 안 한 겁니까?”
한록에게 쏟아지는 질문들. 그 질문들에 한록이 적당한 진실과 거짓을 섞어 답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논란이 나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다리고 있었다고요?”
“이 논란이 오히려 예선전을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허.”
한록의 말에 누군가 어이가 없다는 듯 탄식을 뱉었다.
‘이걸 이용하려고 했다고? 실패하면 이대로 끝장인데?’
‘배짱이 대체 어느 정도인거지?’
‘이 녀석 뭐하는 놈이야?’
모두가 당황한 사이 한록이 말을 이었다.
“기왕 논란이 될 거라면, 최대한 큰 사건이 되길 바랐습니다. 그래서 <실수>에 대해 이미 여러 논의가 오가고 있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여러분께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며 회의실을 한바퀴 둘러보는 한록.
“제 예상대로 누군가 <실수>에 대해 인터뷰를 했더군요.”
그 말에 회의실 분위기가 눈에 띄게 조용해졌다.
“이 안에 있는 누군가가 우리 프로젝트가 실패하길 바라고 있습니다. 이 책임은 프로젝트가 모두 끝나면 묻겠습니다.”
한록의 말에 눈에 띄게 굳은 표정의 몇몇 사람들. 이번 일의 밀고자들이었다.
그러나 밀고자들 외의 다른 사람들도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한록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한록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한록은 이제 단순히 맡은 프로젝트는 모두 성공시키는 능력 있는 회사원이 아니었다.
지금의 한록은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 무언가를 감출 줄도 알았고, 그걸 이용할 줄도 알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은. 이한록은-
‘내가 이길 상대가 아니다.’
더 이상 자신의 경쟁 상대가 아니었다.
그 생각과 함께 한록에게 다가오는 몇몇 사람들의 실.
“여러분에게 알리지 않고 진행한 일입니다. 책임은 모두 제가 집니다. 여러분은 그저 맡은 일을 끝까지 수행해주시면 됩니다.”
사람들은 이제 착각에서 깨어났다. 이 회의는 한록이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하는 곳이 아니었다.
이미 모든 계획은 준비되어 있었고, 다만 한록은 그걸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회의를 소집한 것이다.
자신의 능력을 알리기 위해.
“하지만 이런 말로 안심이 되지 않을 거란 점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싶지 않은 분은 지금 의사를 밝히십시오.”
그리고 믿고 따라오라고 말하기 위해.
‘원한다면 이 프로젝트에서 빼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안.
그 말에 회의장이 다시 한 번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이 일이 터졌을 때 모두가 한번쯤은 생각했던 일이기 때문이었다.
또 한 번 술렁거리는 회의실의 모습에 한록은 최경준의 말을 떠올렸다.
-자네가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끝까지 자네를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네. 그 사람들을 어떻게 데려가느냐에 따라 자네의 역량이 결정되는 거지.
사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각자 맡은 역할이 있었다.
이제 예선전이 겨우 2화가 남은 상황. 아무리 한록이라고 해도, 지금 와서 프로젝트의 인원이 빠지는 것은 타격이 꽤 컸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록은 강압적으로 불안해하는 사람들을 데려갈 생각이 없었다. 그건 한록이 원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어떻게 사람들을 사로잡을 것인가. 바로 거기서 자네가 어떤 리더인지가 드러날 거야.
“여러분이 프로젝트를 그만둔다고 해도 그 어떤 불이익도 없을 겁니다. 그건 약속할 수 있습니다.”
한록이 하정엽에게, 그리고 최경준에게 언제나 말하던 것. 한록이 원하는 것은 사람들의 의견을 존중할 줄 아는 리더였다. 그리고-
“하지만 계속 프로젝트에 남아있는다면, 이 프로젝트가 여러분 인생 최고의 커리어가 될 겁니다.”
스스로 따르고 싶게 만드는 리더였다.
한록의 말에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이한록을 믿고 여기 남을 것이냐.’
‘지금 그만둘 것이냐.’
모두가 머릿속으로 한록이 믿을만한 리더인지, 아닌지를 가늠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손을 들었고, 한록에게 물었다.
“그걸 어떻게 믿죠?”
최대리였다.
모두가 궁금해 하는 포인트를 정확히 짚은 최대리. 그러나 최대리의 질문은 한록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네 매력을 조금 더 보여 봐라’며 기회를 주는 것이었다.
최대리의 질문에 한록이 미소를 지었다.
한록의 앞에 앉은 사람들. 그들은 위험한 선택을 하는 젊은 리더를 믿어야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과연 어떻게 ‘나를 믿으라’ 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한록은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었다.
“부산 영화제 성공. <퀸> 천이백만. <러빙고흐> 550만. <부산 열차> 천사백만. 그리고 지금 CK 예선전. 시청률 1위. 여태까지 제가 맡아온 프로젝트입니다.”
사람들이 한록에게 가장 매력을 느끼는 부분이자, 다른 누구도 할 수 없는, 자신만이 보여줄 수 있는 강점.
“더 증명해야 할 게 있습니까?”
그건 바로 여태까지 자신이 만들어온 결과 그 자체였다.
한록의 대답에 최대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꼭, ‘진작 그렇게 말씀하시지’라는 말이 느껴지는 듯한-
“아뇨, 충분하네요.”
아주 만족한 듯한 대답이었다.
*
“내일이 바로 촬영입니다. 담당자 교체를 원하는 분은 지금 바로 말씀하세요.”
사람들에게 묻는 한록. 그러나 아무도 이에 대답하지 않았다.
“없습니다.”
그건 바로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한록을 신뢰할만한 리더로 인정했다는 뜻이었다.
완벽한 결과에 한록이 회의실을 한 바퀴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예선전은 이대로 진행합니다. 여러분이 저를 따르기로 결정하셨으니, 저도 여러분께 약속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믿어준 모두에게 약속했다.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
다음날 아침.
[CK ENM 갑질 파문]
한국 3대 신문사 중 한 곳의 조간신문에 CK의 예선전에 대해 비판하는 뉘앙스의 기사가 실려 발행되었다.
‘아씨, 분위기 한번 살벌하네...’
최악으로 치닫는 상황에 CK ENM의 직원들, 그리고 CK그룹 전체는 경영진들의 눈치를 보며 숨을 죽이고 있었다.
“과장님. <실수> 출연진들 도착했습니다.”
반면 예선전의 촬영장에는 조금 색다른 긴장이 감돌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불안감. 그리고-
“네. 알겠습니다.”
‘과연 이한록이 이걸 대체 어떻게 해결하는지 보자’라는 일종의 기대감이었다.
*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직원들만이 아니었다.
사장실에서 신문을 보고 있던 하정엽이 최경준에게 말했다.
“본부장님. 어제 회장님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오늘 CK그룹 전략기획팀을 보내신다고 합니다.”
회장이 관리하는 전략기획팀이 온다. 그건 그만큼 상황이 심각하단 뜻이었다.
“지금 당장 예선전을 취소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나온다면 오히려 여론이 더 악화될 겁니다. 이한록 과장이 적절한 대처를 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건 우리가 감당가능한 수준이 아닙니다.”
“아뇨,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에 하정엽이 신문을 내려놓고 최경준을 바라보았다. 최경준의 확신하는 태도에 마음이 조금 바뀐 것이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최경준이 말했다.
“예선전이 성공한다면, 앞으로 영화 시상식에 예선전이 필수로 도입될 수도 있습니다. 이건 한국 영화계의 관습을 바꾸는 일입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려면 이 정도 관심은 따라와야 하는 것 아닙니까.”
최경준이 단호하게 말했고-
“-라고 이한록 과장이 말하더군요.”
한록의 이름을 꺼내며 미소를 지었다.
익숙한 이름에 하정엽이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한록 과장을 지나치게 믿으시는군요.”
“그게 상사가 해야 할 일 아닙니까.”
“그것도 정도가 있는 법입니다.”
“이한록 과장이 그 정도를 모를만한 사람은 아닙니다.”
둘의 대화는 짧게 이어졌다. 최경준이 마지막으로 하정엽에게 물었다.
“사장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그 말에 하정엽이 오늘 아침 받은 전화를 떠올렸다.
[네 놈이 어떻게 하는지 두고 보마.]
하태준의 전화.
회장이 직접 사람을 보냈다. 지금 이 상황은 단순히 CK ENM만의 문제가 아니고, CK 그룹 전체가 엮인 일이었다. 그리고 이 일이 잘못 된다면 자신은 후계구도에서 크게 밀려날게 분명했다.
결단을 내려야하는 위기의 상황.
그리고 이한록은.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최경준의 말대로 그 상황을 맡길만한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십시오. 오늘 안에 상황이 바뀔 겁니다.”
“알겠습니다.”
최경준의 말에 하정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
“과장님. 저 어제 국장님한테 불려갔어요.”
촬영이 시작되기 직전, 송PD가 한록에게 말했다. 한록의 계획을 듣고, 지금까지 비밀을 지켜준 송PD. 그녀 역시 어제 한록과 비슷한 일을 겪었을 것이다.
KBC와 CK그룹. 그리고 수많은 대중들. 그들이 한록과 송PD를 지켜보고 있었다.
한록이 웃으며 송PD에게 물었다.
“얘기는 잘 하셨습니까.”
“글쎄요.”
한록의 말에 송PD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무대 위에 올라간 감독들을 보며 말했다.
원래 지금 무대엔 <실수>를 포함해 세 개의 영화가 올라가야 했다.
그러나 지금 무대 위에 <실수>의 제작진은 없었다. 한록이 <실수>만을 위한 무대를 따로 준비했기 때문이었다.
“그건 이게 어떻게 끝나는지에 따라 달라지겠죠?”
한록. 한록을 따르기로 결정한 사람들. 그리고 송PD의 운명이 달려있는 촬영.
“네, 그렇겠죠.”
“우리 과장님 얼마나 믿을만한 분인지. 한번 가봅시다.”
그 촬영이 지금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