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147화 (241/263)

다들 캐릭터 하나는 기가 막히게 짜왔어.

‘이 사람 진짜. 어디까지 준비해온 거지?’

송PD는 영상을 잠시 멈추고 한록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둘은 촬영이 끝나고 다시 전화로 얘기를 주고 받았었다.

이연옥이 이 프로그램의 주인공이 되었으면 한다던 한록. 한록이 말하는 것은 두가지였다.

[3화는 서감독님을 제외하고, 완전히 <도착지> 중심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첫 번째는 <도착지>에 제대로 된 분량을 달라는 것.

[5화 에필로그에는 <도착지>와 <수면>의 경쟁 GV가 방송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바로 프로그램의 마지막 화인 5화에 대한 것이었다.

송PD는 5화를 <수면>특집으로 잡아두었고, 한화 내내 서감독을 내보낼 생각이었던 상황.

그러나 한록은 5화에 이연옥이 모습을 드러내길 원했다.

예선전이 끝나면 남은 가창 큰 이벤트. 바로 <도착지>와 <수면> 경쟁 GV.

이 GV가 방송으로 나온다면, <도착지>와 한록의 마케팅이 TV를 보는 모든 사람에게 전달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송PD에게 그건 남의 일일뿐. 송PD가 한록에게 말했다.

[과장님. 그건 그냥 <도착지>가 잘 되길 바래서 하시는 말씀이시잖아요. 우리 프로그램이랑은 아무 관련이 없어요. 사람들은 이연옥 선생님이 아니라 서감독님 얘기를 보길 원해요. 그럼 우린 주인공에 대한 얘기를 해줘야죠.]

그렇게 한록의 말에 반대했던 송PD. 그때 한록은 촬영 때와 똑같은 얘기를 했다.

[아뇨, 사람들은 이연옥 선생님의 얘기를 원할 겁니다.]

*

통화는 결국 의견을 조율하지 못하고 끝나버렸다. 그런데 그 후 한록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보내온 영상 하나.

[안녕하세요. 배우 이연옥이라고 합니다.]

영상 속에선 이연옥이 혼자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저는 KBC 성우로 연기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외모가 별로니 인기를 얻진 못했어요. 성우로는 먹고 살 수가 없어서 식당 일을 하면서 함께 연기를 했습니다. <도착지>는 제 첫 주연영화입니다. 아마 마지막 주연 영화가 되겠죠.]

담담히 자신의 삶을 말하는 이연옥.

[그리고 저는 우리 영화가 대상을 받고, 저도 이 영화로 여우주연상을 받길 바랍니다.]

그녀가 아주 솔직하게 자신의 꿈을 드러냈다.

‘이렇게 갑자기 들어온다고?’

송PD는 이연옥의 말에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지었다.

CK의 예선전은 이미 이전 한국 영화계에선 본 적 없는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내가 천재다’라고 말하는 감독. 한국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캐릭터였다, 게다가 이젠 무명 배우마저 여우주연상을 받고 싶다고 말한다.

[올해 너무나 대단한 영화들이 있었죠. 그리고 저는 다른 배우들보다 많이 부족하고요. 알고 있어요. 그걸 알면서 왜 상을 노리냐고 말할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래도 ‘욕심은 없다’고 말하고 싶진 않아요. 왜냐면...]

그런데 이상한 건, 그들의 그런 욕망이...

[제가 옥자에게 느꼈던 것처럼, 제 말에도 용기를 가질 사람들이 있을 테니까요.]

아주 매력적으로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연기한 캐릭터를 위해 변하려고 하는 배우. 그녀가 다른 사람들도 자신처럼 용기를 얻길 원한다고 말한다.

“어우. CK가 괜히 영화회사가 아니네. 다들 캐릭터 하나는 기가 막히게 짜왔어.”

송PD는 한록이 이연옥을 위해 마련한 스토리 텔링에 작게 감탄했다.

최대리와 한록. 두 사람은 서감독과 이연옥이라는 출연자가 가진 매력을 아주 극대화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수면>이 버티고 있는데 대상 받고 싶다는 할머니라. 그래. 이거면 댓글 이 정도 달릴만하다.’

송PD가 드디어 이 댓글수의 진실을 알겠따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연옥은 오늘 이 영상으로 예선전에 출사표를 던졌다.

아주 솔직하게 상을 타고 싶다고 말하는 노년의 여배우.

아마 ‘꿈이 너무 지나치다’, ‘대상은 어려울 것 같다’는 댓글이 대부분이겠지만, 어쨌든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만한 내용이긴 했다.

절대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1인자에게 대항하는 도전자가 나타난 것이니까.

‘서감독이랑 비슷한 컨셉으로 나오시겠다 이거죠? 그런데 이한록씨. 이러면 인기는 있어도 주인공이 되긴 어려워요. 원조는 서감독인걸.’

한록이 사람들이 사랑하는 서감독의 당당한 모습을 빌려왔다고 생각한 송PD.

[솔직히 말하면, 이런 말하기 좀 무서워요. 내가 가능할까? 나이만 먹고 주책을 부리는 게 아닐까? 란 생각이 계속 들거든.]

그러나 이어진 이연옥의 말에 송PD는 자신의 예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이 영상의 댓글이 300개가 넘어간 이유.

[그러니까, 여러분도 여기에 댓글로 여러분의 꿈을 적어줬으면 좋겠어요. 음, 그걸 보면...]

사람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영상. 그리고...

[이 할머니도 좀 힘이 날 것 같아.]

아무 생각 없이 영상을 보던 사람들을 순식간에 자기 편으로 만들어 버리는 이연옥의 말.

[여러분도 나를 좀 도와줄 수 있겠어요?]

화면 속에서 이연옥이 아주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얼른 스크롤을 내려 본 송PD.

영상에 달린 댓글은 송PD의 예상과는 달리 모두 이연옥을 응원하는 내용이었다.

[도전하는 모습이 멋집니다.]

[할머니 저는 미대에 가고 싶어요. 진로를 너무 늦게 결정해서 걱정이 많았는데 할머니 영상을 보니 저도 용기가 납니다.]

[최근에 은퇴하고 카페를 창업했습니다. 자식들한테 손 벌리지 않을 만큼만 벌었으면 좋겠네요.]

사람들은 각자 자기가 이루고 싶은, 이루지 못했던 꿈을 말하며 이연옥을 응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누군가의 댓글을 본 순간, 송PD는 한록이 필승전략을 가져왔다는 걸 깨달았다.

-오디션에서 끝내 승리하는 사람들. 그건 사실 대단한 실력자도, 처음부터 우승 후보로 꼽히는 사람도 아니다.

오디션의 우승자는 대부분.

[무섭다는 말...너무 공감이 가는 말입니다.]

시청자 자신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들이다.

[ㅠㅠ이분 볼 때마다 저희 할머니가 생각나요..]

[이연옥 씨보다 조금 더 할아버지인 사람입니다. 이연옥씨를 보니 옛날 생각이. 저도 배우는 아니지만. 가수를 꿈꿨습니다.]

무명배우. 주위에서 흔히 볼법한 할머니. 아무것도 없지만 도전하는 사람.

서감독과 달리 이연옥은 사람들이 정말 자기 자신처럼, 혹은 가족처럼 여길만한 모습을 많이 가지고 있었고, 한록은 그 점을 아주 적극 이용하고 있었다.

‘이연옥을 주인공으로 만들겠다고 했지. 괜한 소리를 하는 건 아니네.’

한록의 말처럼, 사람들에게 인터뷰와 이 영상으로 이연옥에 대한 호감이 많이 올라온 상황.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이미 3화 대본 다 짜놨고, 섭외도 끝났어. 서감독 위주로 가야해.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어진 영상에 송PD의 생각이 다시 한 번 바뀌었다.

[선생님. 인터뷰 시작하겠습니다.]

이연옥의 인터뷰에 이어진 짧은 오프 더 레코드 영상. 거기엔 이연옥이 인터뷰 전 준비를 하는 모습이 담겨있었다.

[잠시, 잠시만.]

한록을 말리며 물을 마시는 이연옥.

이연옥의 포부가 느껴지던 인터뷰와는 달리, 이번 영상에서 이연옥은 많이 긴장을 한 듯한 모습이었다.

두려움과 망설임이 담긴 이연옥의 얼굴.

그리고...

[할 수 있다.]

스스로를 다독이는 모습.

그걸 보는 순간, 송PD의 마음에 이연옥이란 사람에 대한 공감과 연민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연옥’이라는 사람. 이 사람이 그냥 TV에 나오는 연예인이 아니라, 나처럼 고민하고 망설이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생각.

한록은 이연옥의 멋진 포부를 보여주고, 그 뒤에는 곧장 이연옥의 두려움과 떨림, 그리고 용기를 보여주었다.

이렇게 나온다면 당연히...

[할머니 힘내세요!]

[응원합니다.]

[시청자 투표는 없나요..ㅠㅠ]

그 사람을 사랑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이한록.’

사람들의 댓글.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찬찬히 살펴보던 송PD가 생각했다. 이한록은...

‘이 치사한 인간아!’

절대 질 수 없는 전략을 가져왔다.

*

영상이 공개된지 두 시간 후. 한록에게 송PD가 전화를 걸어왔다.

[과장님. 진짜 대단하신 분이네요.]

감탄. 그리고 ‘진짜 지독하시네’라는 뉘앙스가 섞인 송PD의 말.

[회의 끝났어요. 3화는 서감독님이 아니라 이연옥씨 위주로 갑니다. 그래서 촬영이 미뤄졌어요. 2화가 나간 후 촬영을 할 거고, 2화 엔딩도 이연옥씨로 편집할 겁니다.]

송PD는 한록에게 대폭 수정된 진행방안을 알려주었다.

[그래도 전체 엔딩이랑, 5화는 무조건 서감독님 중심으로 갈 겁니다. 국장님이 절대 바꾸면 안된다고 하셨거든요.]

5화를 모두 서감독에게 할애하겠다는 송PD의 결정은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근데, 과장님이라면 분명 또 3화에 대단한 걸 준비하셨겠죠?]

이렇게 묻는걸 보면, 송PD 역시 마음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송PD의 말에 한록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대단한 건 아닙니다. 이연옥씨의 아드님을 부르려고 해요.”

오디션의 또 하나의 필살기. 가족 얘기를 가져오겠다는 한록의 말. 그 말에 송PD가 답했다.

[진짜 할 수 있는 건 다 하시네요.]

“네. 선생님을 주인공으로 만들어드리겠다고 약속했거든요.”

[하...]

한록의 말에 송PD가 한숨을 쉬었다.

한록은 지난주부터 계속 이연옥의 비중을 늘려달라고 말하고 있었고, 송PD는 서감독이라는 멋진 캐릭터를 두고 이연옥을 선택하는 모험을 하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면...

“송PD님. 서감독님만큼 멋진 장면 하나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한록의 말을 들을 때마다. 그리고 한록이 결과를 보여줄 때마다 점점 마음이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과장님. 제가 문제가 아니라요. 국장님 결재가 끝났다니까요?]

그리고 한록의 답.

“PD님이라면 설득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누군가가 보면 대책도 없고, 책임감도 없다고 할 만한 말이었다.

하지만 송PD는 알고 있었다. 여태까지 한록이 이뤄낸 결과들을 봤을 때. 한록이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진짜 서감독님보다 멋진 장면 뽑을 수 있다는 거죠?]

“네, 맞습니다.”

정말 엄청난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하...]

깊은 고민 끝에 송PD가 말했다.

[일단 2화 반응보고...제가 국장님께 말씀드려 볼게요.]

드디어 떨어진 조건부 허가. 그 허가에 한록이 미소를 지었다.

*

그리고 이틀 뒤. KBC의 유튜브에 예선전의 2차 예고편이 공개되었다.

<‘수면’의 엄청난 몰표. ‘할 말 없냐’고 몰아세우는 서감독.>

유튜브 영상에 달리는 댓글들.

[또 싸워?]

[이거 레슬링 프로그램인가요?]

[서감독님 이번 화는 좀 그렇네요 ㅠ_ㅠ;;저분 아직 신입감독이라는데 저렇게까지 화낼 필요가 있는 걸까요..]

[서감독 개 빡친 거 같음]

[근데 왜 화가 난 거임?]

사람들은 역시 서감독과 백감독의 대결에 집중하고 있었다. 대부분은 서감독이 너무 지나치다는 식의 의견이었다.

“예고편엔 싸우는 것만 내보내고, 본편에서 이미지 반전 시킬 거예요.”

서감독에게 좀 더 극적인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한 최대리의 전략. 사람들의 반응으로 볼 때, 그건 잘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았다.

[제발 서감독이 졌다고 해주세요]

조금 지나칠 정도로.

*

그렇게 시작된 예선전 2화.

-저한테 할 말 없습니까?

[아니 서감독 인성;;]

[저 감독한테 화풀이하는 거 같은데?]

[저런 식으로 말하는 건 좀 아니죠. 감독이라 그런가. 사회생활 안 해본 티가 나네요.]

백감독에 대한 서감독의 맹공격에 사람들은 크게 분노했다. 서감독의 질책이 너무 지나치다는 것이었다.

[박하성 인터뷰에선 엄청 멋있게 나오던데 뭐가 진짜냐]

[ㄴ둘다 진짜임 원래 저런 성격]

[원래부터 싸가지 없었음 이번에 TV 많이 나오면서 포장이 잘 된 거임]

[이사람 앞으로 계속 나옴? 그럼 그냥 안 볼래]

[거의 주인공 같던데 ㅋㅋㅋ]

[무슨 감독도 PD픽이 있냐 이게 말이 되냐]

2화에는 4개의 영화가 나왔으나, 인터넷에서는 온통 서감독에 대한 욕만 쏟아지고 있었다.

심지어는 서감독 때문에 더 이상 예선전을 보고 싶지 않다는 사람도 있었다.

“...과장님. 이거...괜찮겠죠?”

사람들의 반응을 모니터링하다가 한록에게 초조한 얼굴로 묻는 유선.

그만큼 인터넷에서 서감독에 대한 여론은 돌이킬 수 없는 수준이 되고 있었다.

“너무 발언이 셌나? 사람들 너무 스트레스 받고 있는데?”

역시나 당황한 듯한 얼굴의 현차장. 정부장 또한 현차장의 곁에서 굳은 표정으로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서감독은 이 프로그램의 상징적 인물이었고, 앞으로도 계속 큰 비중으로 나올 사람이었다.

그런 서감독이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는, 어찌보면 프로그램 전체에 위기일수도 있는 상황.

“네, 괜찮습니다.”

그러나 한록은 아주 태연한 얼굴이었다.

서감독에 대한 엄청난 분노와 짜증. 이 반응들은 사람들이 서감독의 행동을 주의깊게 보고 있다는 것.

“조금만 기다리면 분위기가 반전될 겁니다.”

다시 말해, 그만큼 서감독이란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이 사람들 앞에선 최고의 영화라고 말해야죠.

한록이 기다리던 영상 후반부이자, 서감독의 평가를 완전히 바꿀 부분.

-당신 관객들이잖아.

서감독과 백감독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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