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록씨. 이렇게 될 줄 알았어요?
이연옥은 분명 서감독과 백감독의 대화에 자극을 받은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제 이연옥을 설득하는 건 그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서감독이 아주 멋진 장면을 보여준 상황.
“클로즈업이요? 아까 이연옥씨랑 대화하는거 잡아달라고 하셨잖아요. 대화 안 하시나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재밌는 일이 생길 것 같거든요.”
그렇다면 한록도 이걸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서감독의 드라마를 우리 쪽으로 끌고 온다.’
한록은 서감독과 백감독이 했던 멋진 대화에 이연옥을 연관시킬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방법이 되어줄 사람은...
“감독님. 서감독님 말에 휩쓸리면 안 돼요. 아셨죠?”
눈앞의 배과장이었다.
*
“촬영 다시 시작합니다!”
휴식이 끝나고 다시 시작된 촬영. 사회자가 쉬는 시간동안 진행한 투표의 결과를 공개했다.
“투표 결과가 나왔네요. <수면> 283표. <나무 그늘 아래서> 18표입니다.”
투표수 차이가 엄청났지만, 현장에 모인 그 누구도 투표 결과에 놀라지 않았다. 애초에 답이 정해진 결과였기 때문이었다.
“서감독님. 엄청난 차이로 이기셨는데요. 소감이 어떠세요?”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백감독님은요?”
“저는...”
백감독은 사회자의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좀 아쉽습니다.”
-당신 관객들이라고.
서감독의 말에 백감독은 아까와는 조금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백감독은 여전히 서감독 같은 자신감을 가지진 못했다.
“아쉽다는 건 제가 졌어야 했단 말인가요?”
그런 백감독을 물어뜯는 서감독.
“...배과장. 괜찮은 거지?”
그리고 화가 난 표정의 무대 아래의 배과장.
“어우, 난 <나무 그늘 아래서> 진짜 좋았는데. <부산 열차>보다도 좋았어. 그냥 상대가 너무 세서 그런 거야.”
배과장 곁의 현차장은 마치 자기 일처럼 배과장을 달래고 있었다.
<수면>의 다음 상대는 자신이고, 곧 자신도 배과장 같은 처지가 되리란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배과장이 현차장의 말에 이를 악물고 답했다.
“아니, 근데. 아무리 서감독이어도 그렇지. 남의 영화에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서감독 앞에서 꼼짝도 못하는 백감독과 달리, 배과장은 화가 머리 끝까지 난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내가 제작부터 참여한 영화. 내가 담당자인 영화. 서감독이 그 영화를 하나하나 분해해서 욕하고 있다.’
경쟁 구도와 팀. 그리고 내가 담당한 영화.
그 모든 사실이 배과장을 이 서바이벌에 아주 깊이 이입시켜 버린 것이다.
“뭐, 이게 진짜 시상식도 아니잖아. <나무 그늘 아래서>도 좋은 결과 있을 거야.”
“시상식은 시상식이고, 이건 이거지. 이대로 방송 나가고 끝나면 <나무 그늘 아래서> 이미지가 어떻게 되겠냐고.”
영화를 아주 좋아하고, 마치 자기 일처럼 감독과 영화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들.
영화의 대단한 팬.
‘지금이다.’
-왜 굳이 CK 직원들이 방송에 나와야 하는거지?
-그 사람들이 영화의 팬, 다시 말해 시청자를 대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록이 최경준에게 약속한 모습. 그 모습이 드디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오만한 천재감독. 하지만 그 속마음은 ‘최고의 영화를 보여주겠다’는 의지를 감추고 있다.‘
최대리는 서감독에게서 아주 멋진 드라마를 찾아냈다.
“배과장님.”
“어, 이과장.”
“지금 무대로 올라가세요.”
“어?”
“이렇게 되면 백감독님 한마디도 못하고 내려오실 겁니다. 그렇게 놔두실 겁니까?”
“...”
한록은 그 드라마를 조금 더 멋지게 꾸며주고-
“절대 안 되지!”
거기서 새로운 드라마를 시작해볼 생각이었다.
“감독님, 저 올라갑니다!”
씩씩하게 무대 위로 올라간 배과장. 그리고 놀란 눈으로 한록을 바라보다가 미소를 짓는 최대리.
“또 무슨 짓을 하시려고?”
최대리의 말과 함께 이번엔 한록의 드라마가 시작되었다.
*
“과장님. 진짜 괜찮겠어요?”
‘배과장을 무대로 올려보내자’는 한록의 결정. 송PD는 그 결정이 조금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냥 이대로 진행하는 게 어때요? 그럼 서감독님이 압도적으로 이기는 내용으로 2화 마무리 하면 될 것 같은데.”
“그런 내용은 이미 충분히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래요. 그치만 지금부터는 대본도 없고, 완전 라이브잖아요. 이건 배과장님 말이랑, 서감독님 대답에 따라서 에피소드 내용이 달라질 거란 말이에요. 우리 컨트롤을 완전히 벗어난다는 뜻이죠.”
괜히 배과장을 등장시켜서, 에피소드의 내용이 이상하게 끝날 수 있다. 송PD는 지금 그런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송PD의 말에 한록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게 오디션과 서바이벌의 매력 아닙니까.”
예능의 여왕. 그리고 서바이벌과 오디션의 전문가. 그런 자신을 자극하는 한록의 말.
“...진짜, 말을 너무 잘해.”
송PD는 한록의 말에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여러분. 긴급 상황입니다. 특별 게스트가 오셨어요.”
사회자의 말과 함께 무대로 올라온 배과장. 감독. 제작진. 그리고 방청객인 CK직원들.
모두가 무대 위에 올라간 배과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무 그늘 아래서>의 담당자, 제작부 배과장님이십니다. 할 말이 있으셔서 올라오셨어요.”
“저거 상진씨아냐?”
“헐. 과장님 티비 나오시겠네. 대박.”
익숙한 동료의 등장에 객석에서는 재밌어하는 듯한 반응이 들리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CK ENM 제작부 배상진 과장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인사를 하는 배과장.
배과장은 카메라 수십 대 앞에서 손을 덜덜 떨면서도 누군가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서감독님이 하신 말씀에 대해서 할 말이 있습니다.”
배과장이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바로 서감독이었다.
“뭐지? 뭐라고 하시려나?”
“대신 변명하러 나오신 건가?”
사람들의 호기심 속에서 배과장이 말을 잇기 시작했다.
“서감독님이 <나무 그늘 아래서>에 백감독님의 개인적인 취향이 많이 반영됐다고 하셨죠. 저도 동의합니다. 처음 시나리오에 비해 백감독님 각색이 많이 들어갔죠.”
배과장이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그리고 심호흡을 한번 하더니 서감독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데 그게 뭐가 나쁩니까?”
“...어?”
그의 날카로운 말에 사람들이 고개를 빼고 배과장을 바라보았다.
“감독이 자기 취향에 맞게 시나리오를 수정한게 뭐가 나쁩니까. 남자가 취미가 음악이라면서 사진을 찍는 거요. 그래요, 어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남자가 사진을 찍는다는 설정 덕분에 영화 중간에 계속 아름다운 장면이 나올 수 있는 겁니다.”
배과장은 씩씩거리며 말을 이었다. 모두 서감독이 <나무 그늘 아래서>에 대해 비판한 내용이었다.
“수미쌍관도요. 원형 구조라 변화를 나타내지 못한다.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엔딩에서 말하는 게 꼭 변화와 성장뿐입니까? 저는 남자와 여자가 서로의 추억을 떠올리는 느낌이라 좋았습니다. 사진이랑 추억. <나무 그늘 아래서>랑 잘 어울리잖아요. 시나리오 기승전결이 잘 맞는게 그렇게 중요합니까? 이런 것들은 다 무시할 만큼요?”
배과장은 어지간히 화가 난 모양인지 거의 숨도 쉬지 않고 말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백감독은 조금 뒤에서 그런 배과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단 18표를 받은 자신의 영화.
분명 그 중 한 표를 던졌을 배과장.
“서감독님 비판은 알겠어요. 그래도 <나무 그늘 아래서>는 좋은 영화였습니다.”
서감독이 아니라 자신을 선택해준...
“적어도 저한테는요.”
자신보다 더 자신의 영화를 사랑해주는 관객.
그 말에 백감독이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이제야 서감독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에 잠긴 백감독. 그리고 무대 아래서 이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 한록과 송PD.
모두의 주목 아래 서감독이 입을 열었다.
“다 끝나셨습니까.”
*
“다 끝나셨습니까.”
주의깊게 배과장의 얘기를 듣고 있던 서감독의 질문.
“...”
배과장은 아직 한참 할 말이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물러나야 할 상황이다.
“네. 끝났습니다.”
배과장이 겨우 감정을 억누르고 서감독에게 답했다. 그러자 서감독이 배과장이 아닌 백감독을 보며 말했다.
“그럼 감독님도 할 말이 있으실 텐데요.”
그 말에 배과장이 백감독을 돌아보았다. 백감독이 마이크를 달라는 의미로 배과장에게 손을 내밀었다.
배과장이 잠시 머뭇거리다 백감독에게 마이크를 건네주었다. 배과장은 백감독이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백감독이 마이크를 받아들었고, 천천히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배과장의 걱정과 달리 백감독은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
“...배과장님 말씀처럼 이 영화는 서사구조가 아니라 연출에 중심을 두고 만든 영화입니다. 그 연출이 많이 부족했어요. 서감독님 말씀 다 이해합니다.”
“그래서요. 하고 싶으신 말이 뭡니까.”
백감독의 입을 틀어막는 서감독의 질문. 아까와 같은 질문이었다.
그리고.
“하지만 그래도 누군가한텐 <수면>보다 좋은 영화일 겁니다.”
이제는 달라진 백감독의 대답.
-경쟁. 그를 통한 성장.
백감독의 말에 서감독이 씩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좋아요. 그 점은 인정하죠.”
-그리고 누군가의 인정.
“아...”
오디션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멋진 장면. 눈앞에서 그 장면이 펼쳐지는 모습에 송PD가 중얼거렸다.
“짜릿해.”
*
오디션에 꼭 필요한 장면이 서감독과 백감독 사이에서 탄생했다. 송PD가 한록에게 물었다.
“이한록씨. 이렇게 될 줄 알았어요?”
그 말에 한록이 자신있게 답했다.
“네.”
“어휴, 진짜.”
송PD는 한록의 대답에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대체 무슨 확신으로 이런 프로그램을 만들고, 일반인을 투입하고, 거기에 무대에 올려 보내기까지 한 건지. 아직까지도 한록의 마음을 다 파악하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하지만 확실한건 방금 한록이 명장면을 탄생시켰단 점.
그리고 이 장면이 아주 오래 사람들의 기억에 남으리란 점이었다.
*
경쟁. 성장. 인정. 한록이 CK 예선전에 만든 드라마. 송PD의 반응을 보건데, 이 드라마는 아주 훌륭히 만들어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제는 <도착지>의 드라마를 사람들에게 선보일 때였다.
한록은 감독들 곁에서 앉아있는 이연옥을 바라보았다.
이연옥의 눈에는 서감독의 변화에 대한 충격. 그리고 백감독의 성장에 대한 대견함이 담겨 있었다.
마치 오디션 프로그램의 관객 같은 이연옥의 모습. 그러니까...
저게 자신이 될 리는 없다는 생각을 하는 모습.
그러나 한록은 이연옥을 주인공으로 만들기로 마음 먹은 후였다.
예선전. 서감독. 그 모든 드라마의 결말이 될 영화, <도착지>.
‘이제부터 당신의 드라마가 시작된다.’
“PD님. 지금부터 나오는 대화들, 3화 예고편으로 넣어주세요.”
한록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