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어떻게 이길 거예요?
할머니의 버킷리스트를 이뤄주려는 가족들의 얘기 <도착지>.
그리고 <도착지>의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한록, 우감독, 유선, 현차장.
그 두 조합에 한록의 머릿속에 영화 한 편이 스쳐지나갔다.
‘영화를 현실로 만들어보자.’
지금 GV팀의 모습은 <도착지>의 가족들과 아주 비슷한 점이 많았다.
<도착지>의 가족들은 할머니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고, GV팀은 <도착지>를 성공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상황.
만약 이연옥이 방금 말한 것처럼 여우 주연상을, 그리고 대상을 꿈꾼다면.
그럼 GV팀은 <도착지>와 똑같이 할머니의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될 것이었다.
-영화를 아주 닮은 얘기가 현실에서 펼쳐진다.
사람들은 그 사실에 의식적으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도착지>란 영화가 가진 서사를 사랑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이 드라마를 사람들한테 전달해야 해.’
사람들은 이 드라마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
한록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게 남아있었다.
<도착지>의 대상. 그리고 이연옥의 여우주연상. 이 목표가 그냥 GV팀의 바램이어서는 안 된다.
영화의 주인공. 그리고 이 드라마의 주인공인 사람. 이연옥이...
‘선생님이 마음을 바꿔야 한다.’
그녀가 다시 꿈을 꿔야 했다.
*
어제, 한록은 퇴근 후 최대리와 함께 회사 근처에서 술을 한잔 마셨다. 그때 최대리가 했던 말이 있었다.
-과장님. 제가 과장님한테 여러 번 도움 받아서 하는 말인데 말이에요.
-네.
-지금 이대로 가면 분명 제가 이겨요.
최대리는 한록에게 조언을 하나 해주었다.
-이연옥 선생님을 메인으로 가져가겠다는 거. 그거 바꾸세요. 그거면 인기를 끌 순 있겠지만 절 이길 순 없을 거예요.
한록 역시 어렴풋이 느끼던 문제였다. 한록이 최대리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이연옥 선생님으로는 오디션에서 제대로 된 서사를 만들어낼 수가 없거든요. 차라리 우감독님이 나을 걸요.
-하지만 이 영화를 상징하는 건 이연옥 선생님입니다.
-그건 중요하지 않죠. 이연옥 선생님은...
그리고 최대리의 답.
-매력이 없거든요.
*
어제는 최대리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최대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연옥에게는 없고, 서감독에게는 있는 것. 사람들이 오디션 프로그램. 그리고 서감독을 좋아하는 이유.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과 아주 강렬한 목표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이연옥에게는 그런 목표가 없었다.
-목표가 없는 사람을 누가 응원해요?
어제 최대리의 했던 말이자, 지금 한록이 가진 최대의 약점이었다.
하지만 그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이연옥 선생님이 스스로 꿈꾸도록 만드는 것.’
왜냐하면 지금은 그 ‘꿈’을 만들기에 너무나 완벽한 환경이고-
“PD님. 저랑 이연옥 선생님 대화 위주로 잡아주세요.”
한록은 그걸 만들어낼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
“백감독님. 이 정도면 잘한 거야. 알지?”
“네...”
촬영장 구석에선 이연옥과 백감독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연옥에게 다가가 말을 걸려고 했던 한록.
“호창씨.”
그러나 서감독이 한록보다 한발 빨랐다. 서감독이 이연옥과 대화중인 백감독에게 다가갔다.
“네, 네.”
서감독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백감독이 당황해서 말했다. 백감독은 서감독이 자신에게 또 비난을 할까 봐 긴장한 모습이었다.
“아이고, 감독님. 아직 안 끝났어요?”
그리고 그건 백감독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이연옥, 아니, 촬영장의 거의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뭐지?’
그러나 한록의 눈에 비친 서감독의 실은 백감독에게 연결되어 있었다.
‘서감독님을 공격하려는 의도가 아닌 것 같은데.’
“작가님. 이 대화 부분 강조해주세요.”
그리고 최대리는 서감독에게서 좀 떨어져서 카메라맨과 함께 그 장면을 촬영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한록이 고개를 끄덕이고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서감독이 백감독에게 다가온 것. 그리고 둘의 대화. 이 모두가 우연이 아니란 생각이 든 것이다.
‘서감독은 백감독과 싸우려는 게 아니야.’
실을 통해서 예상하건데, 서감독은 백감독에게 아마 조언을 해주려는 것 같았다.
세계적인 감독이 초짜 감독에게 전하는 말.
한록은 그 말이 이연옥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 판단했다.
“과장님. 촬영은 어떻게 할까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자신에게 묻는 카메라맨을 조용히 시킨 한록.
다시 한 번, 서감독이 이 예선전에 강렬한 장면을 만들어 줄 것 같다는 예감이 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서감독이 백감독과 어떤 대화를 나누느냐. 그 내용에 따라 앞으로 오디션의 분위기와 내용이 달라질 것이다.
한록이 만든 오디션. 아마 오랫동안 사람들이 얘기할 영화계의 특별한 이벤트.
그게 과연 어떤 내용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될까.
‘아. CK 예선전. 그거 말이야-’
지금이 바로 오디션의 분기점이었다.
“과장님. 잘나오면 이 부분 예고편으로 넣을게요.”
그런 예감을 느낀 건 한록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조용한 목소리로 한록에게 말하는 송PD. 송PD는 무섭도록 촬영에 집중한 얼굴이었다.
‘아. 지금 중요한 순간이다.’
촬영장의 모두가 느낀 생각 때문인지, 어느새 촬영장은 아주 조용해져 있었다.
-방금 전 백감독을 아주 박살내버린 서감독. 그런 서감독이 무대 아래에 내려와 따로 말을 건다.
‘명장면이 나온다.’
숨죽여 서감독의 말을 기다리는 사람들.
‘제가 준비한 겁니다. 재밌게 보세요.’
그런 표정으로 한록을 바라보는 최대리.
‘네,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오디션이 어떻게 진행될지 지켜보고 있는 한록.
모두의 기대 속에 서감독이 백감독에게 말했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이네요. 내가 한 말 중에 틀린 건 없을 텐데.”
서감독의 말에 이연옥이 놀란 얼굴로 서감독을 바라보았다.
“좋은 시나리오를 골랐고, 본인이 그걸 망쳤잖아요. 그 이유는 별 거 없는 욕심 때문이었고. 틀린 말 있어요?”
서감독의 말투는 무대 위보다 한층 더 날카로웠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나무그늘 아래서>의 담당자인 배과장이 후다닥 감독들에게로 달려왔다.
“감독님. 이 얘기는 나중에...”
“난 지금 대답을 듣고 싶어요.”
그러나 서감독은 물러나지 않았다. 서감독이 백감독에게 다시 한 번 물었다.
“제 말 듣고 하고 싶은 말 없어요?”
“...감독님 말씀이 다 맞습니다.”
그리고 백감독은 아까처럼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맞아요. 제가 시나리오를 망쳤습니다.”
“그래서요?”
“...제 능력이 부족했어요. 욕심이 과했습니다.”
“할 말이 그것 뿐이에요?”
“감독님! 대체 무슨 말을 듣고 싶으신 겁니까?”
백감독을 몰아붙이는 서감독과, 그 모습에 약간 화가 난 배과장. 그러나 백감독은 뛰어난 선배 앞에서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제가 많이 부족했습니다. 선배님하고는 비교하면 안 될 영화를 가져왔어요.”
그 말에 서감독이 백감독을 바라보았다. 누군가는 서감독이 백감독을 완전히 찍어 누르려는 듯한 모습으로 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거 나가면 시청률 15%예요. 그런데 나가도 괜찮겠어요?”
송PD 역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네. 괜찮아요.”
“서감독님 이미지 완전 박살날 겁니다. 전 미리 얘기했어요.”
“아뇨. 안 그럴 거예요.”
“네?”
송PD가 한록의 말에 의아하다는 듯 반문했다. 그러나 한록은 대답 대신 서감독의 실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배로서...아니. 같은 감독으로서 하고싶은 말이 있는데.”
“네.”
서감독은 지금 백감독을 짓밟으려는 게 아니다. 그 증거로 백감독의 손에 얽힌 서감독의 실은 조금도 위협적이지 않았다.
“난 언제나 내 영화가 최고라 생각해요. 그 이유는 당연히 내가 대단한 영화를 만들어서죠.”
거만하지만 진실일 수밖에 없는 말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서감독.
“그리고 두 번째는 그게 관객에 대한 예의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이어진 말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 말에 백감독이 고개를 들고 서감독을 바라보았다.
“여기 보세요. 당신 영화를 골라준 사람들입니다.”
서감독은 관객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쉬는 시간동안 <수면>과 <나무 그늘 아래서>의 편으로 나뉘어진 관객석.
<나무 그늘 아래서>에는 단 18명의 관객이 앉아 있었다.
그들을 보며 서감독이 말했다.
“적어도 이 사람들 앞에선 내가 부족했다. 내가 실수했다고 말하면 안 되죠. 난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고, 최고의 영화를 만들었다. 그러니 당신들 선택은 실패하지 않았다고 말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 말에 백감독 역시 관객석을 바라보았다.
“당신 영화가 좋다고 여기 모인 사람들이잖아.”
자신 앞에는 고작 18명의 관객이 앉아있었다.
고작 18명의...
“당신 관객들이라고.”
자신의 관객.
“아직 안 끝났어요. 2부는 제대로 하세요.”
서감독은 할 말을 마치고 등을 돌려버렸다.
“과장님. 이거 대박 나겠어요.”
조용히 중얼거리는 송PD. 송PD의 말처럼 촬영장은 서감독의 말 한마디로 분위기가 바뀌어있었다.
“...멋있는 소리를 하네.”
“멋지다. 진짜 예술가네.”
감독들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이고, 관객들은 서감독을 다시 봤다는 표정을 짓는다.
“자. 과장님.”
그리고...
“이건 어떻게 이기실 거예요?”
최대리가 한록에게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
“이건 어떻게 이기실 거예요?”
한록에게 말하는 최대리. 최대리의 선전포고에 한록 역시 미소를 지었다.
“어라. 웃으실 때가 아닐 텐데요. 이거 방송 나가면 서감독님 인기 엄청날 거예요.”
최대리의 말에는 하나도 틀린 게 없었다. 최대리가 준비한 에피소드는 서감독의 매력을 극대화시킨 내용이었다.
오만한 천재가 자신의 영화를 좋아해주는 팬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사람들은 그 메시지, 그리고 서감독에게 열광할 것이 분명했다.
“시청률이 잘 나올 것 같아서요.”
“아, 그건 그렇겠죠. 과장님한테는 이래나 저래나 좋은 일이네요.”
서감독의 인기와 함께 같이 올라갈 예선전의 시청률.
“그치만 이 정도로 멋진 장면을 못 뽑으면 <도착지>는 시작도 전에 질 거예요.”
그리고 예언이 될 지도 모르는 최대리의 말.
어느새 자신의 몫이 된 경쟁에 한록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저도 하나 만들어야죠.”
“자신있으신가봐요?”
“네.”
“아하. 준비하고 있는게 있으시군. 또 언제 이런 걸 만드셨대.”
한록의 당당한 대답에 최대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도 한번 지켜볼게요.”
그리고는 서감독과 함께 무대로 올라가버렸다.
*
서감독이 떠나고 덩그러니 남겨진 백감독. 백감독은 여전히 망설이는 표정이었다.
“감독님. 정신 차리세요. 우리는 그냥 준비한 거 하면 되는 겁니다.”
그리고 <나무 그늘 아래서>의 담당자인 배과장은 약간 화가 나 있었으며-
“...”
이연옥은 객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연옥의 눈에 비치는...
“젊은 건 좋네.”
쓸쓸함.
‘이거다.’
그 모습을 보며 한록은 생각했다.
-오만한 천재 감독.
-아직 서툰 신인 감독.
-그리고 노년의 여배우.
그들의 얘기가 한록의 안에서 얽히기 시작하고, 하나의 형태를 만들어낸다.
“피디님. 지금 이연옥 선생님 얼굴 클로즈업 한번 따주세요.”
한록이 최대리에게 말한 것. 한록이 서감독을 이기기 위해 준비한 것.
한록은 이들로 ‘진짜 드라마’를 만들어볼 예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