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이 방송의 명장면이 될 거니까요.
드디어 시작된 <수면>의 예선전 촬영. 촬영 현장에는 예선전을 구경하려는 CK의 직원들이 모여있었다.
“이야. 우리 성공했네. 저번 촬영보다 10배는 많은 거 같아.”
현차장이 주위에 모인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현차장의 말처럼 현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첫 주 방송이 나가고 예선전의 인기가 엄청나게 높아진 것이다.
“이과장. 또 한 건 했네?”
“우리도 뭐 나올 거 없나? 다른 본부 도움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알았지?”
촬영 현장을 지나치며 한록에게 한마디씩 말을 붙여보려는 사람들.
‘이건 분명 대박이다. 아니, 이미 대박이지. 빨리 이한록이랑 뭐라도 만들어 놔야 해.’
‘예선전을 통해 영화사업본부와 이한록이 CK의 실세가 되었다.’ 그 사실을 눈치챈 사람들이 발빠르게 한록에게 줄을 대보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송PD가 능글맞게 말했다.
“과장님, 곧 승진하시겠네요?”
“아닙니다.”
“아니긴 뭘 아니에요. 승진해도 제 연락 받아주셔야 해요. 이거 내년에도 가져와야 된다고 국장님이 엄청 잔소리하고 계시거든요.”
내년의에 있을CK 예선전을 가져가기 위해 방송국들은 벌써부터 경쟁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연말 특집으로 CK 예선전을 베낀 프로그램을 편성 중인 방송국도 있었다.
“진짜 내년부터는 예선전이 정착될 거 같아요. 가요 대전이나 연예 대상에서도 얘기가 나오고 있거든요.”
정말로 한록에 의해 시상식 문화가 바뀌어 가고 있는 상황.
예선전은 이보다 더 성공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결과를 내고 있었고, 하정엽도 이에 크게 만족하는 중이었다.
하정엽. 송PD. 그렇게 모두가 만족하는 상황. 그러나 문제가 하나있다면...
“서감독님!”
이 인기의 절반, 아니 대부분이 서감독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었다.
서감독의 등장에 모두 한곳을 바라보는 사람들. 원래도 팬이 많던 서감독은 이제 거의 연예인 같은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던 현차장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걸 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러게요...”
현차장과 유선. 그리고 GV팀 모두가 걱정하는 것.
“이러다 <도착지> GV 완전 밀리겠는데?”
바로 서감독의 인기가 많아질수록 <도착지>가 불리해진다는 것이었다.
한록이 어쩌면 영화사에 남을수도 있는 업적을 만들어 내고 있다.
예선전이 잘 되는 건 기뻐할 일이지만, <도착지>를 생각하면 또 마냥 좋아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상황.
한록은 어제 공개된 <도착지>팀의 인터뷰의 반응 살펴보았다.
[저 이분 나오는 광고 봤어요!]
[할머니 생각나서 전화드리고 왔어요~]
영상에는 대부분 따뜻한 분위기의 댓글이 달려있었다. 사람들이 그만큼 이연옥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단 뜻이었다.
‘댓글이 너무 적어.’
하지만 댓글은 고작 20개. 일주일 전 공개된 <수면>과 서감독의 인터뷰 댓글이 230개인 것에 비하면 초라한 결과였다.
‘역시. 서감독처럼 사람들의 관심을 끌만한 내용이 필요해.’
‘자신의 재능에 엄청난 자신감을 가진 천재. 그 사람이 우승을 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최대리가 <수면>의 마케팅을 위해 만들어온 드라마였고, 사람들은 서감독이 주인공인 이 드라마를 아주 사랑하고 있었다.
서감독의 이야기는 인터뷰. 방송. 그리고 GV까지 이어질 것이었고, 서감독은 그때마다 매력적인 모습을 보여줄 것이었다. 최대리의 이번 마케팅은 방송이라는 포맷을 아주 잘 활용한 마케팅이였다.
‘나도 이연옥 선생님한테 드라마를 만들어 줘야 해.’
그리고 점점 더 많은 인기를 얻을 서감독을 이기려면 <도착지>에도 서감독만큼 매력적인 스토리를 만들어야 했다.
모두가 사랑할만한 캐릭터. 그리고 그 캐릭터가 강한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는 스토리.
‘도착지에는 어떤 스토리를 만들 수 있을까?’
<도착지>에 드라마를 만들어 줄수만 있다면 기존의 언더독 마케팅에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그렇게 된다면 서감독의 인기도 이길 수 있을지 모른다.
-<도착지>, 그리고 <도착지>를 상징하는 이연옥만이 가질 수 있는 스토리를 만든다.
한록에게 생긴 새로운 과제.
‘되도록이면 <도착지> 촬영 전에 떠올랐으면 좋겠는데.’
“장소 이동합니다!”
잠시 후, 한록의 고민과 함께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었다.
*
“20분 뒤 촬영 시작합니다. 그전까지 자유롭게 대화 나눠주세요.”
예선전의 출연자들. 그리고 방청객인 CK 직원들은 CK ENM 지하의 시사회실로 향했다.
이번 촬영의 내용은 두명의 감독이 서로의 영화를 리뷰하는 것. 그 형식, 내용은 모두 감독의 자유였다.
“아주 그냥 잘근잘근 물어뜯으라고 판을 깔아줬네.”
감독 중 한명이 무대 위에 놓인 두 개의 의자를 보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저 자리에서 서로의 영화를 공격할 서감독. 그리고 백감독.
감독들이 구석에서 이연옥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백감독을 보며 말했다.
“백감독이 데뷔 몇 년차지?”
“아마 3년일 걸요?”
백감독은 이 자리에서 모인 감독들 중 유일하게 서감독의 후배였고, 동시에 가장 어린 감독이었다.
백감독을 지켜보던 감독 한명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백감독 끝나고 우는 거 아냐?”
감독들의 말처럼 백감독은 떨고 있는 게 눈에 보일 정도로 크게 긴장하고 있었다.
“감독님. 지면 어때요. 그냥 하고싶은 말 하고 와요.”
“네, 네...감사합니다.”
이연옥이 백감독을 달래주고 있었지만, 백감독의 긴장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것 같았다.
‘어, 선생님! 저 선생님 광고 봤어요!’
촬영 첫날부터 이연옥에게 친근하게 인사를 하고, 자신의 할머니가 생각난다며 내내 말을 걸어오던 백감독. 백감독에게서 그때의 활기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촬영 시작할게요. 감독님, 무대 위로 올라가 주세요.”
그러나 백감독의 사정을 봐줄 시간은 없었다. 촬영이 시작되었고, 제작진의 재촉에 백감독이 겨우 무대 위로 올라갔다.
“잘하면 좋겠는데. 걱정이 되네...”
그리고 이연옥의 걱정과 함께 GV가 시작되었다.
*
“...이상입니다.”
백감독의 <수면>에 대한 소개는 평범했다.
내용은 수면에 대한 칭찬이 대부분이었고, 어떤 점이 아쉬웠는지에 대한 감상이 아주 조금 섞여있었다.
이미 <수면>의 팬덤이 형성되어있고, 무엇보다 영화가 너무 좋기 때문에 비판할 구석을 찾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럼 이제 서감독님이 말씀해주세요.”
백감독의 차례가 끝나고 시작된 서감독의 차례.
“자, 시작해주세요.”
오늘의 클라이맥스에 송PD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3년간의 로맨스를 다룬 백감독의 영화, <나무 그늘 아래서>.
“우선 가장 먼저 하고싶은 말은, 시나리오가 좋았단 겁니다.”
서감독이 <나무 그늘 아래서>의 리뷰를 시작했다.
“내용도, 소재도, 풀어가는 방식도 모두 좋았습니다.”
그 말에 살짝 미소를 짓는 백감독. 그러나 서감독이 바로 이어 말했다.
“그런데 영화를 보다 보면 시나리오와 동떨어진 부분이 계속 나옵니다. 분명 영화의 초반에 남자가 여자한테 자기 취미는 음악이라고 말하죠. 그런데 남자는 나올 때마다 사진기를 들고 있고, 여자의 모습을 촬영합니다. 반면 음악에 관한 장면은 한 장면이 전부죠.”
서감독의 말에 백감독이 몸을 움찔했다. 무언가 찔리는 구석이 있는 듯한 태도였다.
“오?”
그리고 재밌다는 듯 그 모습을 지켜보는 송PD.
“두 번째로 이상한 건 영화의 결말입니다. 결말부는 초반부와 수미쌍관을 이루죠. 순환의 구조입니다.”
큰 호평을 받았던 <나무 그늘 아래서>의 결말. 그러나 서감독은 이 부분을 지적하고 있었다.
“이 영화의 결말은 등장인물들이 이별하고, 서로의 위치에서 각자 성장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려면 변화의 구조가 필요하죠. 선형구조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왜 순환을 의미하는 수미쌍관이 나왔을까요. 이런 경우는 보통 답이 한가지입니다.”
서감독이 백감독을 보며 말했다.
“감독이 시나리오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고쳤을 때의 결과입니다.”
그 말에 고개를 숙이는 백감독.
백감독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어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주인공의 설정이 들쭉날쭉한 것. 얼핏보기엔 아름다운 결말이 시나리오에 잘 맞지 않는 것. 모두 자신이 시나리오를 수정한 부분이었다. 그리고 서감독은 그걸 전부 파악했다.
“이 영화에 대한 제 감상은 이겁니다. 감독님. 시나리오를 보는 눈이 좋으시네요. 좋은 시나리오를 고르셨습니다.”
서감독이 백감독에 대해 칭찬했지만, 촬영장에 모인 모두가 칭찬이 이 말의 핵심이 아니란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좋은 시나리오를 망치셨죠.”
서감독의 단호한 말.
“이과장님. 이 부분 예고편으로 들어갈게요.”
즐거움을 넘어서 짜릿하단 표정으로 한록에게 말하는 송PD.
그리고...
“...네. 감독님 말씀이 맞습니다.”
단 한마디도 반박을 하지 못하는 백감독.
“명장면 나왔네요.”
송PD가 한록에게 말했다.
*
“서감독님 말씀이 맞습니다. 어색하다고 말씀하신 부분들...다 제가 시나리오를 고친 부분입니다. 각색 과정이 미숙했어요. 맞는 말씀입니다. 다음 작품에서는 더 잘해보겠습니다.”
반쯤 넋이 나간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백감독.
“제가 다 혼나는 거 같아요...”
GV팀에게 친근하게 굴던 백감독이 궁지에 몰린 모습에 유선이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렸다. 하대리가 그에 답했다.
“그러게요. 마음이 안 좋네요. 그래도 백감독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오셨겠죠.”
“그렇겠죠?”
“그럼요. 설마 백감독님이 서감독님을 이기겠다고 생각하고 왔겠어요.”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하대리. 하대리의 말에 곁에 있던 이연옥이 말했다.
“그건 모르는 거지.”
“어...그런가요?”
“그래. 아무리 못나도 자기가 만든 건데. 자기 눈에는 제일 이뻐 보이겠지.”
쓸쓸한 목소리로 말하는 이연옥.
이연옥의 말에는 삶의 많은 미련과 후회가 들어있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듣자 한록에게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할머니의 버킷리스트를 이뤄주기 위해 노력하는 가족들의 모습을 그린 영화 <도착지>.
그리고...
“감독이면 대상을 바라고, 배우라면 주연상을 바라지. 그건 당연한 거야. 한때 나도 그랬어.”
한때 여우주연상을 바랬다는 이연옥의 말.
-대상이라. 욕심을 부리면 안 돼.’
-내가 무슨 여우 주연상이야.’
-나는 그런 거 안 바래.
인터뷰에서 여러 차례 큰 꿈을 꾸지않는다고 말하던 이연옥. 그녀의 진심이 그게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선생님.”
“응?”
한록의 부름에 이연옥이 뒤를 돌았다. 그러자 한록이 이연옥에게 물었다.
“그럼 지금은 어떠십니까?”
“뭐가?”
“지금은 여우주연상을 타고 싶다. 내 영화가 대상을 받았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 안 하십니까?”
“그럼, 당연하지.”
“왜요?”
그 말에 이연옥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야...”
그리고 이연옥이 대답을 하려는 순간.
“잠깐 휴식하겠습니다!”
송PD가 크게 외쳤고, 촬영이 잠시 중단되었다.
이연옥이 한록을 보고 말했다.
“이과장, 잠시만. 나는 잠깐 백감독 좀 보고 올게.”
그렇게 자리를 떠난 이연옥. 한록과 이연옥의 대화는 제대로 된 대답을 듣지 못하고 끝나버렸다.
“PD님.”
“네, 과장님.”
“지금부터 저 촬영해주세요. 이연옥 선생님이랑 대화하는 거 위주로요.”
하지만 한록은 그 답을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지금부터요? 왜요?”
“왜냐면-”
백감독과 대화를 하는 이연옥. 그리고 둘에게 다가가는 서감독.
-이제는 꿈을 꾸지 않는다고 말하는 노년의 여배우.
-할머니의 꿈을 이뤄주기 위한 가족들의 모습을 담은 영화.
“이게 이 방송의 명장면이 될 거니까요.”
사람들이 사랑하는 드라마를 만들 방법이자, <도착지>라는 영화를 현실로 이끌어낼 방법.
한록은 서감독에게 대응할만한 이연옥의 무기를 찾아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