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142화 (236/263)

이 게임의 주인공을 바꿀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

하정엽의 말에 하태준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한 자신감이 붙었군.”

“이 정도면 그럴만하지 않습니까.”

“건방지긴. 어디서 그런 말투를 배워왔지?”

하태준은 말과는 다르게 얼굴엔 미소를 띄고 있었다. 하태준이 보기에도 이번 예선전이 준수한 성과를 거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인터뷰 많이 내보내. 네 놈이 한국에도 시상식다운 시상식을 만들었다고.”

“제가 요청하지 않아도 이미 기사가 나고 있습니다.”

“그래. ...잘했다.”

하태준이 아주 드물게 칭찬을 내놓았지만, 하정엽은 예상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보상은 어떤 걸로 주실 겁니까.”

“정말 건방지군. 사장 놀이를 하다보니 회장 정도는 우스운 거냐?”

“원하시는 성과를 냈으니 보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회장님 지론 아니십니까.”

“그건 잘 기억하고 있군. 원하는 게 뭔데?”

그 말에 하정엽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미국 지사에 힘을 실어주시기 바랍니다.”

CK ENM의 미국 지사. CK ENM이 미국 진출을 염두에 두고 설립한 곳이었다.

하지만 미국지사는 계속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못했고, 하태준이 CK ENM에서 관심을 끈 이후로는 거의 방치되고 있는 중이었다.

“거긴 아직 일러. 몇 년 더 두고 봐라.”

하태준이 냉정하게 말했다.

‘한국 문화로 세계를 제패하는 CK.’

하태준 역시 아주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던 목표지만,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양권 시장의 반응은 냉정했다.

하태준은 ‘CK의 영화, 음악, 드라마로 세계를 제패한다’는 목표에 현실성이 없다는 걸 깨달은지 오래.

“지금은 예산과 인력이 부족해서 그럴 뿐입니다. 최고의 인재들을 보내주시고, 남부럽지 않은 대우를 해주십시오. 그렇다면 상황은 달라질 겁니다.”

하지만 하정엽은 그에 동의하지 않았다.

“전세계의 사람들이 CK의 컨텐츠를 알아가고 있습니다. 타임 스퀘어에는 <부산 열차>의 광고가 걸렸고, 알렉산드로 감독이 부산 영화제를 극찬했습니다.”

그 어느때보다 성장하는 회사. 그 중심의 영화 사업본부. 그리고 최경준과 이한록이라는 아주 든든한 인재들.

그렇다면 더 이상 두려울 건 없었다.

“지금은 아시아에 집중해. 아시아에서 최고를 찍은 후 넘어가는 게 안정적이다.”

“회장님.”

하정엽이 하태준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여긴 제 회사입니다.”

내 회사. 내 직원들로 세계에 도전장을 내밀어보겠다.

하정엽의 눈에 비치는 야망.

그 야망을 읽은 하태준은 생각했다.

자신이 최경준과 한국 영화계를 밑바닥부터 만들어갔을 때 다짐했던 생각.

-세계의 모두가 CK의 영화를, 음악을, 컨텐츠를 알게 하겠다.

그걸 하정엽의 CK ENM이 이룰수도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래. 알았다.”

마침내 하정엽에게 허락을 내린 하태준. 하태준이 이어서 말했다.

“네 놈이 이렇게 자신만만할 수 있는 이유를 알겠지.”

“네, 알고 있습니다. 좋은 직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 그 사람들이 없으면 넌 아무것도 아냐. 네가 말했던 것처럼, 보상은 확실히 해라.”

그 말과 함께 하태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문을 나서기 직전 하정엽에게 말했다.

“내가 누굴 말한 건지는 알고 있겠지.”

부산 영화제와 <부산 열차>. 그리고 이 예선전을 만든 사람. 어쩌면 하태준의 오랜 꿈을 이뤄줄 수 있는 사람.

“네, 알고 있습니다.”

하정엽이 하태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

하태준이 나간 후, 미국 지사의 구성을 검토하던 하정엽.

‘아버지가 이한록 과장을 알고 계시군.’

하태준은 저번 <러빙 고흐> 이후로 계속 한록을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냥 기억하고 있는 것 뿐만 아니라, 나름대로 호감을 가지고 있는 듯한 것 같기도 했다.

‘자리를 한번 만들어야겠군.’

한록은 앞으로 CK의 미국 진출에 큰 역할을 할 것이었다. 따라서 그 전에 하태준에게 인사를 시켜둬야 했다.

‘아버지는 건방진 사람을 좋아하시니까.’

-건방지긴. 어디서 그런 말투를 배워왔지?

오늘 하태준이 자신에게 한 말.

‘당신이 좋아하는 그 사람한테서 배웠습니다.’

그리고 CK ENM에서 가장 뛰어나고, 가장 건방진 직원,

분명 하태준이 한록을 마음에 들어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

다음날, 마케팅 부서.

[과장님. <실수> 제작진측과 인터뷰 완료했습니다.]

“네, 수고 많으셨습니다.”

한록은 정과장과 <실수>에 대한 마지막 뒤처리를 하는 중이었다.

완벽한 뒤처리를 위해 <실수>와 관련된 방송이 한 주 밀린 상황.

스케줄이 변경되자 다른 곳에서도 재미있는 변화가 일어났다.

며칠 전 예선전이 방영되자마자 올라온 한 기사.

[CK가 불러온 연말 영화 시상식의 변화.]

[특집 기사로 3주간 연재되며, 2부는 ‘예능의 무게’라는 제목으로 업로드 됩니다.]

누가 봐도 <실수>를 타겟으로 한 기사 내용이었다.

‘여기가 문오석의 수족들이군.’

문오석은 예상한 것처럼 <실수>로 한록을 공격하려는 모양이었다.

‘늦었어.’

하지만 이미 모든 대비가 끝난 상황.

2주만 기다리면 문오석은 한록이 판 함정에 그대로 걸려들어올 것이었다.

‘실수는 이제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중요한 건 앞으로 예선전이 잘 돼야 하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모니터를 바라보는 한록.

모니터에는 유튜브에서 공개할 인터뷰들이 틀어져 있었다.

‘이 프로그램에 많은 게 걸려있다.’

이 프로그램이 시상식의 전통을 바꿀 수 있겠느냐. 이번 연말 시상식을 CK가 가져갈 수 있겠느냐. 그리고 <도착지>가 우감독의 소박한 은퇴작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대상을 거머쥘 수 있겠느냐.

그 모든 게 예선전의 흥행에 달려 있는 지금.

이번 주 촬영은 프로그램의 중심인 서감독과 <수면>이었다.

“과장님. 인터뷰 어때요?”

최대리가 모니터를 보더니 한록의 곁에 앉아 말했다.

가장 먼저 공개된 <수면>의 인터뷰.

모니터 안에선 배우 박하성이 서감독에 대한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서감독이라는 사람 자체를 <수면>의 마케팅 포인트로 내세운 최대리. 최대리가 늘 애용하는 스타 마케팅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솔직히 말하면...

“좋네요.”

정말 괜찮았다.

‘인터뷰 컨셉이요? 무조건 서감독님이 멋지게 나와야죠.’

유튜브에 올릴 인터뷰 기획을 만들라고 하자 최대리가 한 말.

‘<수면>에 대한 얘기는 안 넣으십니까?’

‘그건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해주고 있잖아요. 서감독님이 어떤 사람인지 알릴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 없죠.’

최대리의 말처럼 <수면>의 인터뷰에는 영화 스토리에 관련된 얘기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오로지 박하성이 서감독에 대해 얘기하는 내용만 이어질 뿐이었다.

모니터 속 <수면>의 인터뷰.

-이번 영화로 이미지 변신을 시도하셨죠.

-그렇죠.

최대리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는 박하성.

-힘든 점은 없으셨나요?

-많았죠. 사실 영화에 출연하는 걸 결정하는 것 자체가 가장 힘들었어요. 감독님한테 저 말고 다른 사람을 찾아보시라고 말하기도 했죠.

박하성은 로맨스 영화의 남자 주인공을 도맡는 배우였다.

그런 사람이 이번에는 어머니의 발목을 잡는 수상한 아들로 변신했다. 그 과정에서 아마 많은 이야기가 있었을 것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결정을 내리셨나요?

-서감독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나는 천재다.’

-정말요?

-네, 정말요.

-그걸 듣고 결정하셨다고요?

-네. 그 뒤에는 이렇게 말씀하셨거든요.

-뭐라고요?

-‘나는 천재고, 실패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하성씨 스스로를 믿을 수 없다면 나를 믿어라.’

스스로에 대한 엄청난 프라이드, 그리고 리더십이 느껴지는 말.

‘분명 사람들이 좋아할 거다.’

인터뷰를 보자마자 한록이 했던 생각이고, 그 예상은 현실이 되었다.

[간지]

[멋진 꼴값 인정합니다.]

[하 저렇게 말하면 나라도 출연하겠다고 할 듯;;;]

[너를 못 믿겠으면 나를 믿어라? 올해의 명대사 가자]

[싸가지 없기만 한 줄 알았는데 든든한 면도 있네요]

짧은 인터뷰에 열광적인 반응을 보내는 사람들.

-와, 서감독님 진짜 매력 있다. 연말에 영화 대상말고 연예 대상에서도 상 하나 받을 수 있겠는걸요?

서감독의 인터뷰를 보고 극찬하던 송PD의 말에 한록 역시 공감할 정도였다.

거기에 서감독 덕분에 예선전 또한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었다.

‘다음주 시청률이 기대되는군.’

서감독이 나오는 다음 주 방영분은 아마 시청률 1위를 할 게 분명했다.

‘서감독이라는 사람을 통해 예선전의 인지도를 올리겠다’는 한록의 목표는 이미 성공한 것이었다.

다만 문제는...

‘...이거 <도착지>가 크게 밀릴 수도 있겠다.’

목표가 너무 성공해버렸다는 것.

서감독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한록이 <도착지>의 마케팅을 걱정할 정도였다.

“촬영 땐 더 멋지게 나가야 해요. 서감독님 위주로 편집해주세요.”

“네, 당연하죠.”

서감독이라는 멋진 인물로 자신의 전문 분야를 적극 활용하고 있는 최대리. 확실히 최대리의 마케팅은 그 어느 때보다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런데 과장님. 왜 퇴근 안 하세요?”

“<도착지>인터뷰 때문에요.”

“아하. 저 봐도 되죠?”

“네.”

한록이 최대리를 위해 <도착지>의 인터뷰 영상을 틀어주었다.

-감독님, 그리고 이연옥 선생님. 두 분의 이번 목표는 어떻게 되시나요?

화면 속에서 밝은 목소리로 말하는 유선. 유선의 말에 우감독이 답했다.

-우승이죠.

그 말에 이연옥이 미소를 지으며 우감독에게 물었다.

-정말이야, 우감독?

-...마음은 그렇단 거죠.

-우리 감독님. 아직도 혈기왕성하셔.

-그럼 선생님은 목표가 어떻게 되시는데요?

-나는 그냥 여기 나온 것 만으로도 만족해. 내가 또 언제 젊은 친구들이랑 이런 걸 해보겠어?

-그래도 선생님. 첫 주연작품 이시잖아요. 대상도 받으시고, 여우주연상도 타시고, 그래야 좋지 않겠습니까.

-그럼 좋지. 그치만 더 대단한 젊은 친구들이 많은 걸. 나는 그 친구들이 탔으면 좋겠어.

우감독의 말에 손사래를 치는 이연옥.

인터뷰를 보던 최대리가 한록에게 물었다.

“이거 진짜예요? 아니면 이미지 관리?”

“정말 생각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정확히는, 실감이 잘 안나시는 것 같아요.”

한록은 광고 촬영 때문에 이연옥과 몇 번 만난적이 있었다.

-정말 내가 광고를 찍는 거야? 이런 걸 누가 봐?

-사람들이요. 다들 좋아하고 있습니다.

-허어. 정말?

-그럼요.

-신기하네...고맙기도 해라.

자신이 주인공인 영화를 찍었다. 그 영화를 위해 단독 광고만 4개를 찍었고, 한록은 영화를 대상으로 만들겠다고 얘기하는 상황.

-대상? 내가? 어유, 그건 무리지.

이연옥에겐 이 모든 게 그저 놀라울 뿐인 것 같았다.

*

인터뷰를 다 본 최대리의 첫마디.

“그러니까...저랑 서감독님은 이런 분이랑 붙어야 한단 말이죠?”

최대리는 약간 질렸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과장님은 가끔 치사할 때가 있어요. 저랑 서감독님은 국민 할머니를 상대로 대결을 해야 하는 거잖아요.”

최대리의 말처럼, 이번 <도착지>의 인터뷰는 한록이 원했던 ‘갑작스럽게 오디션에 출연하게 된 우리 할머니’란 이미지를 보여주는 내용이었다.

앞으로 나갈 3개의 광고. 그리고 인터뷰까지.

사람들은 분명 이연옥을 보고 자신의 어머니, 그리고 할머니를 떠올릴 것이다.

“서감독님 이미지 큰일나겠어요.”

“그럼 그 전에 기권하셔도 좋습니다.”

“아뇨, 절대 안 되죠.”

한록의 말에 최대리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결과는 우리가 이길 것 같거든요.”

“한번 두고 봅시다.”

그리고 역시나 웃으며 답하는 한록.

“그래요. 봐주는 거 없습니다.”

최대리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비웠다.

“...하아.”

혼자 남은 한록은 인터뷰 영상을 두 번 더 돌려보았다. 뚫어져라 인터뷰를 바라보는 한록에게 현차장이 물었다.

“이과장. 왜 그래? 인터뷰에 뭐 문제 있어?”

“아뇨. 잘 나왔습니다.”

한록의 말처럼, 인터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한록이 바라던 대로 완벽하게 나와주었다.

“그럼 왜 그래?”

“그냥, 더 끌어낼 수 있는 요소가 있을 것 같아서요.”

한록이 서감독의 인터뷰를 보고 느낀 생각.

‘이거, 우리도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모두가 서감독에게 열광하는 이유. 그건 바로 서감독에게서 느껴지는 강렬한 매력 때문이었다.

한록은 그걸 이연옥에게도 심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한록의 고민을 전해들은 현차장이 말했다.

“음...그렇다고 이연옥 선생님이 서감독처럼 말하고 다닐 순 없잖아. 이건 어쩔 수 없는 거 아닐까?”

“그건 그렇죠.”

현차장의 말이 맞았다. 이연옥이 서감독처럼 ‘나는 천재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대상은 나다’라고 승부욕을 태울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 건 최대리가 잘하는 거고. 우리는 우리가 정한 마케팅을 하면 되는 거 아닐까?”

“네, 맞습니다.”

결국 현차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한록.

하지만 여전히 서감독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뭐라고 해야 할까.

‘정말 캐릭터를 잘 잡아왔다.’

최대리에 대한 감탄.

‘이대로라면 <수면>을 이길 수 없을지도 모른다.’

조금의 걱정.

그리고 가장 큰...

‘이것만 해결 되면 이연옥 선생님이 서감독만큼 인기가 많아질 것 같은데.’

이 게임의 주인공을 바꿀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

자신이 가장 잘하는 마케팅으로 승부를 걸어 온 최대리. 그리고, 그 마케팅을 한 번 시도해 보려는 한록.

‘사람들이 이연옥 선생님한테 열광할 만한 모습. 그게 뭐가 있으려나.’

아무래도 이 승부의 중요한 갈림길이 될 지점.

‘...모르겠다.’

아직은 그 답이 명확히 보이지 않았다.

*

그리고 다음 날.

“<수면> 촬영 시작합니다. 서감독님 무대 위로 올라가 주세요!”

예선전의 하이라이트이자, 모두가 기다리는 <수면>의 촬영이 시작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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