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141화 (235/263)

이래야 서바이벌이지.

CK로비에서 예선전의 촬영이 시작되었다.

“하성씨. 앞으로 좀 나와주세요.”

“서감독님, 하성씨 옆으로 이동해주세요!”

로비에 가득 찬 연예인, 감독, 제작진, 거기에 CK의 직원들.

촬영에 참여하지 않는 직원들 역시 먼발치에서 촬영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예선전 촬영 오늘인가 보네요.”

“박하성이다. 끝나고 싸인 받자.”

“시간이 될까?”

“이거 방영 언제래?”

수많은 사람들이 촬영을 지켜보고 있고, 참여하고 있고, 방송을 기다리고 있다.

자신이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어낸 프로그램. 거기에 회사의 모두가 참여하고 있다.

‘하정엽이 관리하는 프로젝트다. 만약 실패한다면 하정엽이 나를 가만두지 않겠지.’

단순히 영화 하나를 마케팅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무게감.

‘대신 성공한다면 하정엽은 절대 이 프로그램을 버리지 않을 거다.’

그리고 기대감이 들기 시작했다.

예선전이 흥행하고, 사람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는다면. 그렇다면 하정엽은 내년에도 예선전을 적극 활용할 게 분명했다.

-하정엽. 영화 시상식에 예선전을 도입한 사람.

영화계에서 자신의 족적을 남길 수 있는 기회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이 프로그램으로 인해 영화계에 자그마한 변화 하나가 생길수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사람들은 예선전을 볼때마다 CK와 한록의 이름을 떠올릴 것이다.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

그 사실에 한록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

“영화끼리 예선전을 하고, 경쟁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이디어는 좋은데 진행을 어떻게 하죠?”

기획 초기 한록이 부딪혔던 문제점이자, 연말 시상식에 예선이 없는 이유.

바로 영화간의 경쟁을 보여줄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록의 고민은 서감독과의 만남을 통해 해결되었다.

-대상은 내가 받습니다.

몇주 전 옥상에서 한록에게 적의를 드러내던 서감독.

서감독은 한록이 자신의 영화를 거절한 것에 대해 크게 분노하고 있었다.

‘그래, 이거다.’

영화를 두고 ‘내 영화’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영화를 대표하는 사람. 바로 영화의 감독들.

“감독님들끼리 경쟁하는 포맷으로 진행합시다.”

그게 이번 예선전의 내용이었다.

*

“자리 옮기겠습니다!”

오프닝 촬영이 끝났고, 이제 회의실로 자리를 옮겨 감독들의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일렬로 늘어선 의자에 함께 앉은 감독들.

“인터뷰 시작하겠습니다. 편하게 답변해주시면 돼요.”

“네, 알겠습니다.”

“공통 질문입니다. 이번에 예선전에 함께 출연한 영화 중 우승자로 생각하는 영화는 어떤 영화신가요?”

“그야 당연히...”

그 말에 모든 감독들이 같은 대답을 했다.

“<수면>이죠.”

“제 영화입니다.”

심지어 서감독 마저.

“크으. 자신감 봐라.”

서감독의 말에 피식 미소를 짓는 <스캔들>의 고감독.

고감독의 태도는 서감독의 거만함에 화가 나기보다는, ‘이건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반응에 가까웠다.

서감독의 말에 미소를 지은 것은 고감독뿐만이 아니었다. 촬영을 지휘하고 있는 송PD 역시 서감독의 대답에 크게 만족하고 있었다.

‘좋아, 캐릭터 좋고.’

‘감독들끼리 경쟁을 붙이겠다.’ 한록에게 처음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재밌는 기획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서감독 같은 개성 있는 캐릭터까지 나오니 정말 오디션 프로그램을 촬영하는 기분이었다.

-무조건 시청률 1위로 만들겠습니다.

송PD는 예능의 여왕. 그리고 ‘시청률에 미친 인간’이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런 송PD를 데려오기 위해 한록은 꼭 이 방송을 1위로 만들겠다고 약속을 했었다.

그러나 프로그램 단계에서 한록과 의견이 다른 부분이 있었던 송PD.

-서감독님처럼 시청률을 담당할 다른 파트들이 필요해요. 유감독님이랑 정감독님이 예전에 계약 문제 때문에 크게 싸우셨다면서요? 1화에 그 얘기를 넣으려고요.

대부분의 오디션 프로그램이 그렇듯, 송PD는 감독간의 불화를 통해 시청률을 끌어오려 했다.

-그건 너무 지나친 것 같습니다. 그냥 서로의 영화를 비판하는 정도에서 끝나는 게 좋겠네요.

-그게 더 지나치지 않아요?

-영화 얘기는 원래 감독님들끼리 자주 하시는 얘기입니다. 크게 싸워도 시간이 지나면 금방 화해하세요. 하지만 방송에서 개인사를 얘기하는 건 좀 다르죠.

그러나 한록은 끝까지 송PD의 제안에 반대했다. 결국 1화의 기획은 한록의 제안대로 ‘영화 얘기’로 끝내기로 한 상황.

‘업계 사람이라 감독들 눈치를 보는 건가? 이래서 어떻게 시청률 1위를 하려고?’

송PD는 한록의 결정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촬영을 진행하며 금방 사라졌다.

‘허세는 아니었네.’

지금 서감독을 보니 한록의 그 말이 괜한 말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대본을 바라보는 송PD.

-영화 얘기로 끝냅시다.

‘그래요, 이한록씨. 이게 얼마나 통하는지 봅시다.’

송PD가 감독들에게 다시 한번 질문을 던졌다.

“그럼 두 번째 질문 드리겠습니다. 예선전 중에서 감독님이 제일 좋아하는 영화는요?”

“<스캔들>이요. 최고의 상업 영화죠.”

“<삼일의 삶>? 개인적으로 많이 위로가 됐어요.”

“이것도 <수면>이죠. 서감독은 천재라니까.”

사석에선 서로의 영화에 대해 가차 없는 비판을 하면서, 인터뷰에선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대답하는 감독들. 아무래도 방송이다 보니 이미지 관리를 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감독들을 지켜보던 한록이 송PD에게 말했다.

“경쟁치곤 분위기가 너무 밋밋하지 않나요?”

“1화잖아요. 아직 승부욕이 불타오르기는 이르죠. 그리고 질문들도 많이 남아있고.”

송PD는 감독의 인터뷰에 꽤 만족하는 얼굴이었다.

‘아니야. 더 재밌게 갈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만족할 수 없는 한록. 한록이 알고 있는 감독들은 더 화끈하고, 과격한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한록이 송PD에게 말했다.

“PD님. 오늘 마무리 질문, 개인 인터뷰가 아니라 지금 하는 걸로 합시다.”

“지금요? 원래 개인 인터뷰 때 질문하고 1화 마지막에 반전 형식으로 넣자고 결정하지 않았나요?”

“그러면 초반이 너무 지루해질 것 같습니다. 지금부터 분위기를 끌어올려야 할 것 같아요.”

“음...”

한록의 말에 송PD가 대본을 바라보았다.

[사전 질문에서 고감독님이 감독님의 <재회>를 최악의 영화로 뽑으셨어요.]

대본 맨 끝에 적힌 질문. 그 질문은 한록이 개인사에서 영화 얘기로 교체한 질문이었으며-

[자, 감독님.]

[이게 맞는 평가라고 생각하시나요?]

감독들이 쓰고 있는 가면을 벗기는 질문이었다.

1화의 마지막을 위해 마련한 질문. 한록은 지금 그걸 앞당기자고 하는 것이었다.

“이거 지금 들어가면 안 돼요. 다 같이 모여있는 상황이라서 아무리 기분 나빠도 솔직하게 대답 안 할걸요. 자극적으로 뽑으려면 개인 인터뷰에 넣어야 해요.”

송PD가 한록의 말에 다시 한번 반대 했다. 그러나 한록은 자신 있게 말했다.

“아뇨. 그런 걸 신경 쓸 분들이 아닙니다. 워낙 성격들이 강하셔서요.”

한록의 말에 생각에 잠긴 송PD.

“PD님. 이제 진행해야 해요.”

“송PD님. 시청률 1위 만들어야 하지 않습니까.”

옆에선 작가가 재촉을 하고 있었고, 또 그 옆에선 한록이 확신에 차서 자신을 설득하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망하면 이한록이 책임지겠지.’

그렇게 생각한 송PD가 결국 입을 열었다.

“자, 감독님들. 지금부터 아주 중요한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저희가 감독님들한테 미리 예선전 중 최악의 영화가 뭔지 여쭤봤었죠.”

“...이거 익명이라 하지 않았어요?”

송PD의 말에 몸을 움찔하는 감독들. 그러나 송PD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최악의 영화. 양감독님, <스캔들>. 고감독님과 서감독님, <재회>. 이감독님 정감독님, 박감독님, <여름의 우리>. 나머지 분들은 기권하셨어요.”

누군가 자신의 영화를 최악의 영화로 뽑았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지금 바로 자기 옆에 앉아있는 사람이다.

그 사실에 감독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최다 투표를 받은 <여름의 우리> 주감독님. 소감이 어떠세요?”

그리고 송PD는 촬영장에 마지막 불씨를 던졌다.

송PD의 말에 <여름의 우리>의 주감독이 어두운 표정으로 마이크를 들었다.

“...동료들의 평가니까요. 받아들여야죠.”

‘아이고. 내가 이렇게 될 거라 했죠, 이한록씨.’

그 말에 송PD가 한숨을 한 번 쉬었다. 그리고 한록에게 속삭였다.

“제가 말했죠? 개인 인터뷰도 아니고, 서로 얼굴 보고 얘기하던 중이잖아요. 영화 얘기 정도로는 분위기 못 바꿔요. 이제 어떡하죠?”

그리고 송PD가 얼른 한록의 실수를 무마하려 할 때.

“그런데 정감독.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네가 할 말은 아니지 않나? <재회>는 손익분기점도 못 넘었잖아.”

주감독이 이를 악물고 말했고-

“선배님.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정감독이 마이크를 들었다.

“다른 사람 영화를 최악으로 뽑기 전에 자기 영화를 돌아보라는 거지.”

“네. 그런데 그 말을 할 사람이 너무 많지 않나요? 저만 <여름의 우리>를 최악으로 뽑은 게 아니잖아요.”

감독들이 사석에서 늘 그러하듯 순식간에 싸움이 붙은 인터뷰 현장. 그리고 익숙한 일이라는 듯 둘을 바라보는 다른 감독들까지. 그 모습을 보며 송PD는 생각했다.

‘이거 진짜 시청률 1위다.’

거기에 바로 이어진 생각이 있었다.

‘...근데 이렇게 싸우면 뒷감당 가능한가?’

그런 걱정에 송PD가 한록에게 물었다.

“이과장님. 이거 괜찮겠어요?”

“네. 자주 있는 일이에요. 술자리 몇 번이면 금방 풀리실 겁니다.”

이 정도 다툼은 늘 있는 일이란 것처럼 말하는 한록. 한록의 모습을 보며 송PD는 자신이 영화 업계에 대해 정말 잘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또 한가지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한록은 감독들 눈치를 보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그러기는커녕-

‘이 인간...’

“제 생각보단 덜 싸우시네요. 오늘 기분이 좋으신가.”

‘무서운 인간이다!’

진짜 시청률에 미친 인간은 따로 있었다고.

*

그로부터 며칠 후, 일요일.

GV팀은 일요일이지만 회사에 모여 예선전을 모니터링 중이었다.

현차장이 한록에게 잔뜩 화가난 목소리로 말했다.

“일요일인데 그냥 집에서 보게 하지. 아무리 신경쓰는 프로젝트라고 해도 그렇지, 사장님 정말 너무한 거 아니야?”

“차장님. 사장님께서 주휴수당 세 배에 대체 휴무 이틀, 인센티브는 또 따로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사장님 정말 최고 아니야?”

하정엽의 파격적인 지원에 금방 말을 바꾸는 현차장. 현차장의 어깨에 갑자기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저녁 8시.

[지금부터 <영화 서바이벌>이 시작됩니다.]

드디어 예선전의 1화가 시작되었다.

[오 <영화 서바이벌>한다]

[그게 머임?]

[CK에서 영화 가지고 오디션 만든 거. 수면 나옴]

[이제 영화도 오디션이 나오냐? 오디션의 민족이다 진짜]

[지금 KBC 서감독 나옴 고고]

[ㅋㅋ감독들 이렇게 많이 모인 건 처음 보네요]

하나둘씩 올라오는 1화에 대한 반응들.

[뭐야 생각보다 재미 없네]

[서감독은 여기 아니고 힙합 오디션 나가야 할 것 같은데?]

[공중파라 그런가...다들 좋은 말만 하네요]

[걍 연말 시상식 보는 것 같다]

“반응이 생각보다 안 좋은데요...”

늘어지는 초반부 때문인지, 방영 전 화제성에 비해 <영화 서바이벌>의 반응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너무 지루함.]

[언제 싸우냐]

[ㄴ너라면 저 나이 먹고 싸우겠냐?]

[서감독 하드캐리]

시간이 갈수록 더욱 악화되는 인터넷의 반응.

“이한록. 내일 본부장님한테 할 말 생각해둬라.”

그리고 정부장이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연 순간, 한록이 준비한 비장의 질문이 시작되었다.

-최악의 영화로 뽑힌 소감이 어떠세요?

[오?]

[훅 들어오네]

송PD의 질문에 빠르게 올라오는 게시글.

-그런데 정감독.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네가 할 말은 아니지 않나?

[헐]

[대박]

[싸운다]

[진짜 싸우는거?]

[싸운다!]

[진짜임? 아님 대본??]

[이래야 서바이벌이지.]

확 달아오른 사람들의 반응과-

-과장님.

-지금 순간 시청률 1위요.

송PD의 문자.

*

오늘 막 1화가 방영된 프로그램. 그러나 시작부터 순간 시청률 1위를 할 정도로 예선전은 큰 반응을 불러왔다.

[아니 근데 진짜 쇼미더머니 보는 줄 알았음]

[거긴 랩으로 싸우지 여기는 현피뜨려 하더라]

[감독들 원래 그럼 ㅋㅋㅋ기 완전 쎔]

나이 지긋하고, 나름 예술가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감독들. 그들이 진심으로 서로를 비판하고 이기려고 악을 쓴다.

그 사실이 대중들에게 꽤나 흥미롭게 다가온 모양이었다.

예선전에 반응하는 건 대중들뿐만이 아니었다.

“우리가 가져왔어야 했는데!”

예선전의 시청률을 보고 분통을 터뜨리는 MBS.

“그거 내년부터 정규편성 될 거 같지 않냐? 올해부터 CK에 연락 넣어봐. 내년엔 우리가 가져오자.”

이미 예선전의 정규편성을 확신하는 다른 방송국들.

“이대로 가면 시상식 전멸이야. 뭐해! 우리도 빨리 기사 내보내!”

경쟁자의 독주에 초조해하는 샬롯테측과-

“이번 건 괜찮네.”

하태준의 반응.

*

1화가 방영된 다음 날 CK ENM에 찾아온 하태준.

그는 저번에 하정엽을 크게 질책했던 것과 달리, 오늘은 만족스러운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예선전 봤다. 꽤 괜찮던데.”

“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정엽 역시 그때와는 다르게 아주 당당한 태도였다.

“겨우 1화짜리 결과물 가지고 기고만장해졌군.”

그 이유는 바로-

“겨우 1화짜리의 결과물이니까요.”

예선전은 이제 시작이기 때문에.

진짜 경쟁은 이제부터다. 거기에 <수면>은 개봉 이후로 점점 인지도가 높아지는 중이었고, 한록의 <도착지> 역시 3차 광고까지 제작해두고 개봉만 기다리고 있는 상황.

“다음 주부터는 본격적인 경쟁이 시작됩니다. 3주차는 서감독의 <수면>이 나오고, 마지막 주에는 이한록 과장의 <도착지>가 방영 될 예정입니다. 연말 시상식의 대상 후보작들이고, 그에 맞게 최대한으로 예산을 투입했습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하태준의 질문에 하정엽이 고개를 들었다.

-앞으로 남은 것은 천재 감독의 등장. 감독들의 싸움. 그리고.

‘이한록 과장. 이번 일은 나한테도 중요한 프로젝트입니다.’

‘네, 사장님.’

‘맡겨주십시오.’

자신이 아는 가장 유능한 직원.

“지금보다 더 기대하시길 원한다는 말씀입니다.”

하정엽이 하태준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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