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정말 자네의 판이 됐어.
시간이 지나 월요일.
[감독님. 얼마 전에 파격적인 발언을 하셨죠. ‘<수면>의 상대는 없다’라고요.]
서감독의 생방송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라운지에서 대담을 모니터링 하는 GV팀. 한록이 하대리에게 물었다.
“하대리님. 신청서는 어느 정도 들어왔습니까.”
“470명이요.”
일요일부터 GV 관객을 모집하기 시작한 한록. 신청서는 고작 하루 만에 500여개가 모였다. 서감독의 인기를 증명하는 결과였다.
GV의 신청서를 읽던 현차장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거의 대부분이 서감독 팬이네.”
“원래 GV가 그렇죠.”
원래 GV는 영화의 팬, 그것도 엄청난 팬. 속칭 ‘시네필’과 ‘덕후’들이 신청하는 행사였다. 그러다 보니 관객층이 편향되기 마련.
“이러면 <도착지> 위험하지 않겠어? 차라리 방송 나가고 모집하면 일반사람들도 신청할 것 같은데.”
“그럼 더 서감독님 팬이 몰릴 겁니다. 방송의 중심이 서감독님이니까요.”
“아...이거 어렵네.”
눈을 감고 팔짱을 낀 현차장.
“<수면>을 보러 온 사람이 <수면>의 팬은 아니어야 한다. 이게 가능하긴 한 거야?”
이번 관객의 조건은 너무나 모순적이었고, 한록 역시 이 때문에 오랫동안 고심해왔다.
하지만...
“네. 어느 정도는요.”
이게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되진 않았다.
“어? 정말?”
“네. 오늘 인터뷰 결과를 보면 대충 정리될 것 같습니다.”
며칠 전 떠오른 아이디어가 있었으니까.
*
[<수면>은 내 최고의 작품이고, 대상을 받을 거다. 진심이신가요?]
[당연하죠.]
TV속에서 MC와 대화를 하는 서감독. 현차장이 서감독을 보며 말했다.
“와, 진짜 재수 없다.”
그러나 현차장의 옆에 앉은 하대리는 생각이 좀 다른 듯했다.
“근데 멋있지 않아요? <수면>이 못 만든 거면 모를까, 진짜 대상 받을만한 사람이 저런 소리 하는 거잖아요.”
“그래도 사람이 좀 겸손해야지.”
“능력 없이 허세를 부리는 게 아니잖아요. 전 그런 거 좋아해요.”
“그래? 요즘 사람들은 이런 거 좋아하나? 유선씨는 어때?”
그 말에 유선이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어...저는 서감독님 볼 때마다 생각나는 게 있어요.”
“어떤 거?”
“이과장님 닮지 않으셨어요?”
“으엉? 그런가?”
한록과 서감독의 모습을 곰곰이 떠올리는 현차장.
자기 일에 엄청난 자신감을 드러내는 사람. 그리고 그 자신감의 이유는 누구나 인정할만한 능력 때문이다.
“으음...그런 거 같기도...”
“그쵸? 저도 멋있다고 생각해요.”
“쓰읍. 이과장 타입이라고 생각하니 또 괜찮은 것 같기도 하네.”
한록을 닮았다는 말에 금방 바뀐 현차장의 태도. 그 모습에 한록이 작게 웃고는 말했다.
“차장님. 절 너무 좋아하시는 것 같네요.”
“으윽. 방금 그 말 취소!”
그 말에 웃음을 터뜨리는 하대리와 유선.
‘좋아. 분위기 좋다.’
지금 라운지의 분위기처럼, 인터넷의 반응 역시 크게 나쁘지 않았다.
[진짜 거만하다 근데 매력있음 ㅋ큐ㅠㅠㅠ]
[거 감독 양반 맞는 말만 하시네]
[내가 저 사람이어도 저렇게 말할 듯.]
‘이미지도 괜찮고.’
지난주 ‘선배님’이란 말에 비웃음을 지었단 이유로 사람들에게 엄청나게 욕을 먹었던 서감독.
그러나 오늘 사람들은 서감독에게 비교적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 요즘 사람들은 이런 거 좋아하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사람들은 역시 서감독의 자신만만한 천재 이미지를 사랑하는 것이었다.
[다른 감독들은 이거 보고 무슨 생각 할까?]
[멱살 잡는 상상 하겠지]
[다들 이 갈고 있을 듯ㅋㅋㅋ]
[1화에서 현피 뜨겠네]
그리고 서감독이 활약할수록 뜨거워지는 예선전에 대한 반응까지.
서감독은 이미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해주고 있었다.
“서감독이 어그로 하나는 최고라니까. 그건 나도 인정해.”
“그러게요. 신청서 20개 더 들어왔어요.”
“와. 진짜 인기 많네.”
이제 남은 건 GV의 관객뿐.
“그간 본인의 영화에 점수를 매기신다면 몇 점인가요?”
마침 TV에선 한록이 대본에 손을 댄 부분이 나오고 있었다.
-이 부분 수정합시다. 다른 영화를 평가하는 부분은 빼고, 서감독님의 자신감을 더 드러내는 쪽으로 가요.
그런 말과 함께 대본을 수정한 한록. 서감독이 한록이 작성해준 대본을 말하기 시작했다.
“<올드맨> 90점. <범죄전쟁> 85점. <수면>은 100점입니다.”
서감독의 대답.
“100점이 쉽게 나오는 점수는 아니잖아요. 동의하지 않는 분들도 계실 텐데요?”
MC의 질문.
“그렇겠죠. 그런 분들은 곧 GV가 있으니까 거기 찾아오셨으면 좋겠네요.”
“GV에요? 왜죠?”
그리고...
”왜 100점이 아닌지 들어야겠거든요.“
도발.
그리고 잠시 후.
인터넷에 글 하나가 올라왔다.
[ㅇㅋ 접수.]
서감독의 도발에 대한 응답이었다.
*
“어. 지금 신청서 엄청 들어오고 있어요.”
서감독의 인터뷰 후 갑자기 밀려 들어오는 GV 신청서.
[서감독이 얘기한 GV가 이거 같네요. 관심 있으신 분들은 신청해보세요.]
[저 신청 했습니다 ㅋㅋ진짜 100점인지 한 번 보고 오겠습니다]
[저도 대체 몇 점인지 보러감ㅋㅋ]
[다들 현피 뜨러 가시는 건가요?]
사람들이 서감독의 도발에 곧장 반응한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인터넷 커뮤니티 역시 서감독에 대한 얘기로 뒤덮이고 있었다.
[이번 영화 엄청 자신 있나 보네요?]
[서감독이 저렇게 말할 정도면 ㄷㄷ 대단한가 봄]
[근데 저렇게 말하고 재미없으면 어떡하죠]
[서감독이니까 재미는 있겠죠. 근데 100점일지는 모르겠네요ㅎ]
[진짜 엄청 재밌지 않으면 큰일날 거 같은데ㅋㅋㅋ]
“반응 잘 나오고 있습니다.”
서감독에 대해 쏟아지는 기대와 빈정거림 사이에서도 최대리는 편안한 얼굴이었다.
<수면>을 걱정하는 건 오히려 현차장 쪽이었다.
“최대리. 이거 뒷감당 가능하겠어?”
“뒷감당은 <수면>이 할 겁니다. 영화가 좋으니까 괜찮아요.”
태연하게 답하는 최대리. <수면>에 대해 엄청난 자신감이 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리고 최대리의 말처럼...
[CK인지 서감독인지 머리 잘 썼네요ㅋㅋ 지금 <수면>이 예매율 1위입니다.]
<수면>에 대한 반응과 함께 올라가는 예매율.
“와. 이 정도면 거의 연예인인데. 신청자 1000명 넘겠어.”
게다가 GV 역시 서감독의 덕을 보고 있었다.
[신청 사유: 진짜 100점인지 확인하려고]
[신청 사유: 감독이 먼저 불만있음 찾아오랬음]
[신청 사유: 얼마나 대단한지 보려고]
[신청 사유: 재밌을 거 같아서!!]
새로 GV를 신청한 사람들은 서감독의 도발에 흥미를 가진 사람들이지, 서감독의 팬들은 아니었다.
한록과 최대리가 원한 것처럼 누군가의 팬이 아닌 아주 중립적인 사람들.
GV의 내용에 따라 <수면>의 편을 들 수도, <도착지>의 팬이 되어줄 수도 있는 사람들이었다.
신청서를 읽던 최대리가 한록에게 말했다.
“과장님. 이제 졌다고 관객 탓하시면 안 됩니다?”
그 누구도 ‘내가 불리하다’고 말할 수 없게 된 상황. 최대리의 말에 한록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최대리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그들을 설득하는 건 한록과 최대리의 몫이었다.
*
회사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 한록.
식당의 TV에선 CK 예선전의 예고편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TV를 보며 말했다.
“어. 저거 KBC에서 하나보다. 너 저거 봤어?”
“봤지. 서감독 무슨 래퍼인 줄 알았어. 거의 깡패야.”
“대본이겠지?”
“이게 뭐 아이돌 오디션도 아니고...이런 것도 대본이 있나?”
“있을 만하지. 저게 요즘 아이돌 오디션보다 더 인기 많아.”
서감독의 활약으로 CK 예선전은 어느새 연말 최고의 이벤트가 되어있었다.
‘예선전은 잘 될 거다. 문제는...’
그리고 CK 예선전이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수록 한록이 시급하게 처리해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문오석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바로 궁지에 몰린 문오석이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는 것.
회사로 돌아와 사내 메신저를 하나하나 살펴보는 한록.
‘의심 가는 사람이 너무 많아.’
최근 영화사업본부에서는 오과장의 사람들이 대거 쓸려나갔고, 새로운 얼굴들이 권력을 잡고 있었다.
과연 그들 중 누가 문오석과 연관이 있는 사람인가. 아직까지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문오석이 수를 쓰기 전에 내가 먼저 상대를 알아내야 한다.’
그때 최경준의 호출이 도착했고, 한록은 본부장실로 향했다.
*
“함정을 잘 팠더군.”
한록에게 말을 건네는 최경준. 이전의 회의를 언급하는 최경준의 얼굴에는 미소가 어려있었다.
“자네에게 덤벼들었던 녀석 중 문오석 본부장쪽 라인이 몇 명 있었어. 오과장 때문에 내 줄을 잡지 못하자 그쪽에도 발을 뻗었던 모양이야.”
한록과 똑같은 생각을 한 것인지, 최경준 역시 문오석에 대한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회의에서 문제가 있었던 사람이라면...채과장님 말씀이십니까?”
“맞아. 그리고 박차장까지. 제작부의 횡령 사건 역시 채과장이 언론에 제보한 것 같아.”
2년 전 영화사업본부에서 있었던 횡령 사건.
최경준은 이 일을 내부에서 처리하려 했지만 누군가의 제보로 인해 사건은 결국 뉴스에 나오게 되었다.
“이 일로 내가 꽤 고생 했었지.”
당시는 하정엽이 사장으로 부임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다.
따라서 하정엽의 리더십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최경준이 모든 책임을 지고 잠시 본부장 자리에서 물러났던 일.
그게 바로 문오석의 짓이던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방심하고 있었지. 첩자가 있다고 해도 큰 위협을 줄 순 없으리라 생각했어. 하지만 문오석 본부장은 쥐새끼를 활용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더군.”
오과장, 그리고 채과장. 자신의 사람들을 이용해서 상대를 공격하는 문오석의 스타일.
“자네도 조심해야 할거네.”
그리고 문오석의 다음 타겟은 한록과 예선전이 분명한 상황이었다.
“예선전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될 만한 내용이 있으면 미리 말해두게. 언제 어떻게 기사가 나갈지 모르니까.”
최경준의 말에 한록은 여태까지의 상황을 점검했다.
“문제가 될 만한 내용이 있다면 KBC만 광고를 제외한 것. 그리고 KBC에 편성을 한 것. 마지막으로 <실수>가 예선전에 포함된 것 정도입니다.”
“KBC와의 관계를 물고 늘어지진 않을 거야. 그건 CK그룹 전체 이미지에 문제가 되는 거니까. 문오석도 거기까지 손을 뻗진 못하겠지.”
“네, 저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남은 건 <실수>뿐이군.”
장과장의 우려이기도 했던 <실수>의 예선전 출연.
“<실수>에 대해선 장과장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사회 고발 영화가 예능에 나와서 상을 타겠다고 홍보하는 모습이 되는 거니까요. 그걸 안 좋게 볼 사람이 분명 있을 겁니다.”
“그래. 확실히 나올 법한 말이지.”
한록의 말을 듣고 최경준이 생각에 잠겨 중얼거렸다.
하정엽이 얽히지 않은, 오로지 영화사업본부의 실수. 거기에 장과장이 우려하는 일을 한록이 추진시켰다.
<실수>는 분명 한록과 최경준의 명성에 흠집이 갈 수도 있을 법한 소재였다.
“<실수>는 예선전에서 제외하는 게 좋겠어.”
생각을 마친 최경준이 한록에게 말했다.
누가 문오석의 첩자인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위험요소가 명백한 <실수>를 빼고 가자는 말이었다.
“아뇨. 저는 오히려 <실수>를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록은 최경준과 생각이 달랐다.
“왜지?”
“논란을 만들지 않고 가져갈 방법이 있습니다. 저희가 먼저 손을 쓴다면 <실수> 때문에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겁니다.”
“문제가 뻔히 보이는 영화를 안고 간다라. 문오석의 시선을 <실수>로 돌리겠다는 거군.”
“네, 맞습니다.”
문오석의 공격을 예상 가능한 범주로 잡아두기 위해. 그리고-
“앞으로 이 문제에 접근하는 사람들을 파악해두겠습니다.”
함정을 파기 위해서였다.
-문제의 소지가 있는 <실수>.
-그리고, 여기서 한록의 오판을 끌어내려는 누군가.
“그 사람이 아마 문오석 본부장의 첩자일 겁니다.”
문오석의 사람이 누군지 밝혀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다시 한번 함정을 파보겠다라...”
문오석에게 놀아나는 게 아니라, 먼저 공격을 시도하겠다는 한록의 말. 그 말에 최경준이 조용히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많이 변했군.”
회귀 후 한록이 자주 듣는 말.
“이제 정말 자네의 판이 됐어.”
어느새 훌쩍 성장한 한록에 대한 인정이 담긴 말이었다.
*
그리고 다음 날.
<수면>이 개봉하였으며-
“예선전 TF팀 전체 회의 시작하겠습니다.”
한록의 판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