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138화 (232/263)

그런 아름다운 대답 말고.

“KBC다!”

몇 번이나 CK의 러브콜을 제안한 KBC. 그곳에서 드디어 연락이 왔다.

“아, 팀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CK 예선전 편성 때문에 전화 드렸습니다. 어제 제대로 얘기가 안 끝난 것 같아서요.]

그러나 여전히 뻣뻣한 태도의 KBC. 현차장의 옆에 붙어 통화내용을 듣고 있던 한록이 생각했다.

‘대충 넘어가 줄 순 없지.’

여태 KBC가 편성으로 속을 썩인 시간이 얼마인데 이렇게 끝낼 순 없었다. 한록이 종이에 글자를 적어 현차장에게 내밀었다.

[프라임 타임으로 받아주세요.]

한록의 말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는 현차장. 마치 ‘나만 믿어’라고 하는 듯한...

“나만 믿어. 이놈들 내가 처리한다.”

[네?]

“아하하. 아무것도 아닙니다.”

속마음을 입 밖으로 내버린 현차장이 웃음으로 상황을 무마했다. 현차장이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무슨 얘기가 남았죠? 어제 편성이 어렵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아, 그런데 연말 특별 편성에 변화가 생겨서요. 편성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허어. 어쩌죠. 팀장님이 안 된다고 하셔서 지금 MBS쪽이랑 연락 중인데요.”

MBS라는 카드를 던지는 현차장. 누가 봐도 MBS보다 더 좋은 조건을 부르란 것이었다.

[...MBS에선 뭐라고 합니까?]

“프라임 타임으로 편성해준다고 하네요.”

[무슨 요일이요?]

사실 아직 요일까진 얘기가 나오지 않은 상황. 그러나 한록이 얼른 종이에 글씨를 썼다.

[일요일!]

일요일의 프라임 타임. 모든 시간대를 통틀어 시청률이 가장 높은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시청층이 나이,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하기 때문에 모든 방송사의 핵심 시간대라 말할 수 있는 시간.

워낙 중요한 시간대이다 보니, MBS에도 차마 제안하지 못했던 시간대였다.

“일요일 8시요.”

[일요일이요? 8시? 정말요?]

“네.”

[음...]

KBC는 MBS가 일요일 프라임 타임을 내놨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듯했다.

[그 부분은 저희도 다시 회의하고 전화를...]

자칫하면 전화가 끊기기 직전인 상황.

‘너무 많이 나갔나?’

현차장의 얼굴에 불안이 스쳐 지나갔을 때 한록이 일부러 큰 소리로 말했다.

“차장님. MBS랑 통화 끝났습니다.”

“어...”

“편성은 MBS로 결재 올리겠습니다.”

현차장이 잠시 당황했으나, 곧 상황을 파악하고 말했다.

“어, 그렇게 하자. 팀장님. 그럼 나중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다급하게 전화를 끊으려는 현차장. KBC 편성팀장은 그 말에 방금 전 사장의 고함 소리를 떠올렸다.

‘어떻게든 가져와!’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이과장! MBS에 전화해!”

마치 MBS랑 모든 얘기가 끝난 것처럼 말하는 한록. 다급하게 전화를 끊으려는 현차장.

그리고, 이 모든 얘기를 전화기 너머로 듣고 있을 KBC.

KBC는-

[차장님, 잠시만요!]

“아, 죄송합니다. 지금 급한 일이...”

[일요일 드리겠습니다!]

드디어 패배를 선언했다.

“아, 일요일이요.”

그리고 현차장은...

“저희도 한번 생각해보고 전화 드리겠습니다.”

승자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

그렇게 끝난 KBC와의 통화. 현차장이 전화를 끊자마자 한록의 어깨를 붙잡고 말했다.

“이과장! 이거야, 이거!”

한록에게 양쪽 엄지를 보이는 현차장.

“KBC놈들, 눈치만 더럽게 빨라 가지고. 이과장 없었으면 들킬 뻔했네!”

자칫 실패로 끝날 뻔했던 협상이 한록의 활약으로 잘 끝났다. 현차장은 이에 아주 기뻐하는 얼굴이었다.

“이과장이 이런 것도 할 줄 알았어?”

한록 답지 않은 임기응변에 놀라는 현차장. 그렇게 생각한 것은 현차장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정부장이 한록의 자리를 지나치며 말했다.

“그러게. 너 영악해졌다.”

예전에는 무조건 직진. 꼼수나 장난질 같은 건 전혀 모르던 한록이 이제 KBC를 가지고 놀고 있다.

그에 대한 약간의 놀라움을 담은 말이었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알긴 아네.”

한록에게 눈을 흘기고 화장실로 향하는 정부장. 그때 현차장의 핸드폰에 메시지가 하나 도착했다.

KBC 편성팀장인 김팀장의 메시지였다.

그 메시지를 보며 현차장이 말했다.

“이과장, 이과장은 언제 출근할 맛이 나?”

“담당한 영화가 잘 될 때요?”

“그런 아름다운 대답 말고.”

“인센티브 받은 날...”

“난 이럴 때.”

현차장이 한록에게 핸드폰을 보여주며 말했다. 김팀장의 메시지였다.

[차장님. 꼭 저희 쪽으로 부탁드립니다.]

“덕분에 회사 다닐 맛 난다.”

현차장이 씨익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프로그램 기획의 마지막 단계이자 계속 현차장의 속을 썩이고 있던 편성마저 끝났다.

출연진. 기획. 편성. 이제 모든 게 끝나고 촬영이 시작되기 직전인 상황.

한록은 앞으로의 계획을 점검하고 있었다.

‘앞으로 남은 이벤트는 촬영. GV 관객 선정. <수면>의 개봉.’

촬영은 각 영화의 담당자와 팀장들이 알아서 기획을 만들고 있었고, 여기선 한록이 크게 조율해야 할 부분은 없었다.

문제는 <수면>의 개봉과 GV 관객 선정.

‘이번 주 안에 GV 1차 관객을 선정해야 해. 문제는...서감독님 인기가 너무 많다는 점인데.’

한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감독 중 한 명인 서감독. 심지어 GV는 원래 감독과 영화의 팬들이 오는 행사였다.

아무리 2차 모집에서 <도착지>의 팬으로 비율을 맞추려 한다 해도, <수면>의 팬이 훨씬 많을 수밖에 없는 상황.

‘GV를 보러 올만큼 영화를 좋아하는, 그치만 서감독의 팬은 아닌 사람들이 와야 해.’

<수면>의 GV지만, <수면>의 팬은 아닌 사람이 와야 한다.

말 그대로 그저 영화를 좋아하는 시네필을 모아야 하는 상황.

‘어떻게 해야 하지...’

한록이 이것저것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최대리가 한록의 자리로 다가왔다.

“과장님. 시간 괜찮아요? <수면> 인터뷰 때문에요.”

최대리의 말에 정신을 차린 한록.

다음 주 월요일은 <수면>의 개봉 하루 전인 동시에 TV에 방영되는 감독과의 대담이 있는 날이었다.

“인터뷰 때문에 과장님한테 허락을 받아야 할 게 있어요.”

“허락이요?”

“네. 인터뷰에서 예선전 얘기를 해도 되나요?”

인터뷰에서 예선전에 대한 얘기를 해준다.

그럼 당연히 홍보가 될 거였고, 한록의 입장에선 오히려 환영할만한 일이었다.

최대리 역시 분명 이를 알고 있을 텐데 한록에게 허락을 구한다.

그렇다면 이 ‘얘기’가 그냥 얘기가 아니란 뜻이었다.

“어떤 식으로요?”

“예선전에 대해서 안 좋게 말할 거예요. 왜 이런 걸 하는지 모르겠다. 어차피 우승자는 <수면>이다 라는 식으로요.”

예선전에 대해 일부러 안 좋은 얘기를 흘리겠다는 최대리의 말. 그 말에 한록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이즈 마케팅이군요.”

“그렇죠. 예선전이랑, <수면> 둘 다한테 도움이 될 거예요.”

*노이즈 마케팅: 부정적인 얘기로 관심을 끄는 마케팅.

사람들은 긍정적인 얘기보다 부정적인 얘기에 쉽게 반응한다.

거기에 자신이 출연하는 방송에 대해 대놓고 비판하는 사람이라는 자극적인 장면까지.

확실 노이즈 마케팅은 예선전과 <수면>의 인지도를 올릴 수 있는 가장 쉬운 수단이었다. 그리고...

“<삼일의 삶>때 과장님도 하셨잖아요.”

-자, 다들 보고 와서 욕합시다.

한록이 <삼일의 삶> 때 관객을 모으기 위해 사용한 방법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삼일의 삶>에 대해 극찬하게 만들고, 그에 반대하는 사람들과 싸움을 일으켜서 영화를 보러 오게 만들었던 한록.

“그때 이거 한 번 써먹어 봐야겠다 생각했어요.”

최대리가 아마 그때도 계속 한록을 지켜보고 있던 모양이었다.

“제가 했던 방법을 쓰시겠다고요.”

“사용료라도 내야 하나요?”

“네. 끝나고 술 사세요.”

장난스럽게 말하는 한록. <수면>이 이슈가 될수록 좋으니, 이건 한록에게도 좋은 제안이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서감독님도 동의하신 겁니까?”

노이즈 마케팅의 문제는 한번 생긴 부정적인 이미지를 되돌리기 어렵다는 것.

한록은 최대리가 오로지 이슈를 위해 서감독을 이용하는 게 아닌지 걱정이 된 것이었다.

“당연히 제일 먼저 물어봤죠. 좋아하시던데요.”

“정말요?”

“네. ‘안티랑 팬은 많을수록 좋다’고 하니까, 맞는 말이라고 하셨어요.”

영화만 좋으면 자신의 언행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사람들은 자신만만한 서감독의 모습에 환호할 것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오만한 천재를 사랑하기 마련이니까.

그 부분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최대리와 서감독.

“이게 이번 예선전 컨셉이군요. 이래서 GV에도 비판적인 관객을 섞어달라고 하신거고요.”

“들켰네요.”

한록의 말에 최대리가 순순히 인정하는 기색을 보였다.

‘자기가 최고인 줄 아는 천재라...’

오디션이나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언제나 한 명쯤 있는 캐릭터.

그런 캐릭터는 프로그램의 흥행을 보장하는 동시에, 사람들에게 가장 큰 관심을 받는 인물이기도 했다.

“재밌겠어요.”

처음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재밌고 치열해질 것 같은 예선전의 모습, 그 모습에 한록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내일 인터뷰도 최대한 자극적으로 나갈 거예요. 예선전 말고 다른 영화 얘기도 하려고요.”

“다른 영화요?”

“네. 서감독님이 다른 영화에 대해 평가하는 식으로요.”

“안 좋은 쪽으로 말하시는 겁니까?”

“그렇죠?”

최대리의 말에 생각에 잠긴 한록.

-서감독이 함께 프로그램에 나오는 영화들에 대해 비판적인 얘기를 한다.

확실히 예선전을 시청률 1위로 만들 수도 있을 만한 자극적인 장면이었다.

“다른 영화에 부정적인 영향이 갈 텐데요.”

하지만 한록은 예선전과 <도착지>를 위해 괜히 다른 영화를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았다.

“뭐...그럴 수도 있겠죠? 그런데 거기까지 신경 써야 하나요? 우리 담당 영화도 아닌데.”

“신경 써야죠. 우리 담당은 아니어도 누군가한텐 정말 중요한 영화일 거 아닙니까.”

“과장님 진짜 영화 좋아하시는구나.”

최대리가 한록에게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내 담당이 아닌 영화더라도, 다른 영화가 안 좋게 보이는 것은 싫다.’

그 말에 한록이 정말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란 것을 새삼 깨닫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한록은 오히려 이게 당연하다는 태도였다.

“최대리님도 누가 <부산 열차>에 대해서 욕한다고 생각해보세요. 기분 나쁘잖아요.”

“전 별 상관없어요. 기억 안 나세요? 애초에 인터넷에서 <부산 열차> 바이럴 하지 말라고 욕 먹인 것도 저였는데.”

“...그렇네요.”

부정적인 이미지가 생기든 말든, 일단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게 최우선이라는 최대리의 마케팅 신념.

최대리가 마음을 바꾸지 않을 것이란 걸 눈치챈 한록이 다른 방식을 시도했다.

“서감독님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다른 감독님들 불만이 대단할 거예요. 그럼 제가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어려워집니다.”

“...에잇. 그건 그렇네요. 알겠어요.”

드디어 한록의 주장을 받아들인 최대리. 최대리가 아쉽다는 듯 말했다.

“인터뷰 대본 미리 짜뒀는데, 바꿔야겠네요. 혹시 모르니까 다 쓰고 가져와 볼게요.”

“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잠시 후. 최대리가 한록에게 인터뷰의 대본을 보내왔다.

‘작정했군. 안 말렸으면 큰일 날 뻔했네.’

최대리의 대본을 본 한록의 첫 생각이었다.

[<부산열차> 80점. <스캔들> 50점. 봄날의 꽃밭 <30점>. <삼일의 삶> 80점.]

예선전에 함께 출연하는 영화들에 대해 아예 점수를 매긴 서감독.

감독들뿐만 아니라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들까지 기분이 상할만한 내용이었다.

[<올드맨> 90점. <범죄전쟁> 85점. <수면>. 100점.]

그래놓고 자신의 영화들에 대한 평가는 후하다. 거기에 <수면>에 대한 평가는 100점이기까지 했다.

그걸 보니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수면>이 명작이긴 한데. 그래도 100점을 받을 정도인가?’

<수면>에 대한 의문.

‘GV에서 밀리면 안 되니까...다시 한번 보고 와야겠네.’

이미 몇 번은 본 영화인 <수면>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아, 그래.’

‘이거다.’

서감독의 팬이 아닌 사람도 GV로 불러올 전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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