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놈들 반응이 궁금하네.
‘이건 엄청난 능력이다.’
누군가와의 인연을 보여주는 손목의 실. 그런데 그 실이 이제 자신과 다른 사람의 인연만이 아니라, 남의 인연까지도 보여주고 있다.
물론 능력이 모든 사람에게 통하는 건 아니었다.
정부장과 인연을 가진 사람은 수백명일텐데, 지금 한록의 눈에 보이는 것은 최경준의 실 하나.
‘가장 강력한 실이 보이는 건가?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서?’
짐작하기에, 이 실은 아마 한록이 알고 있는 사람끼리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서로의 마음을 숨기고. 누가 누구의 편인지 알 수 없는 회사생활.
‘역시 정부장님. 얌전히 본부장님 뒤를 따를 생각은 없으시군.’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최경준과 정부장의 실은 한록에게 연결된 것처럼 얌전히 손목에 감겨있는 것이 아니었다.
정부장의 실은 최경준의 뒤를 마치 미행이라도 하는 것처럼 따라다니고 있었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면 내 편이고, 자신의 앞을 가로막으면 넘어야 할 벽이다.
그런 정부장의 마음을 보여주는 실.
‘이 실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확인해야 할 사람이 있었다.
‘문오석.’
이제 문오석의 첩자가 누군지 알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었다.
*
그날 밤. 음악사업본부.
문오석은 누군가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그래. 이한록이 그렇게 나온다라.”
하정엽이 이번 시상식에 많은 걸 걸고 있다는 소식은 당연히 다른 사업본부에게까지 전해진 상황.
문오석은 이에 큰 위기를 느끼는 중이었다.
“시상식이 잘 끝나면 방송국은 영화사업본부한테 넘어갈 거야. 아니, 이제 방송국 같은 건 문제가 아니지.”
이 시상식이 잘 끝나면 하정엽은 없는 자리를 만들어서라도 최경준을 ENM의 실세로 만들 것이다.
이미 본부장끼리의 권력 경쟁은 끝났다. 자신은 최경준을 이길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최경준이 왕관을 차지하는 것을 막아야 했다.
‘시상식은 분명히 성공할 거다. 그 전에 논란을 만들어야 해.’
시상식과 예선전. 이한록이 진행하는 일이고, 문오석이 보기에도 괜찮은 아이디어였다. 시상식은 절대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판단한 문오석이 눈앞의 상대에게 말했다.
“앞으로 네 역할이 중요해지겠군. 시상식에 관한 모든 정보는 나한테 바로 가져와.”
“네, 알겠습니다.”
“들키지 않게 조심하게.”
단단히 당부하는 말.
그 말에 문오석의 앞에 선 사람이 답했다.
“네, 절대 그럴 일 없을 겁니다.”
*
같은 시간. 한록은 회의를 마치고 영도와 회사 근처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영도는 뚫어져라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영도의 실은 핸드폰에 감겨있었다.
‘중요한 사람이랑 연락하나 보네.’
그 모습을 보니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최근 영도의 연락이 뜸해졌다. 거기에 귀찮을 정도로 술을 마시자고 조르던 모습도 많이 줄어든 상황.
이건 분명...
“너 여자친구 생겼냐?”
“으헉!”
깜짝 놀라 핸드폰을 떨어뜨릴 뻔한 영도. 영도의 반응으로 보건데, 한록의 추측은 정답인 듯했다.
“어...어떻게 알았어? 형 이런데엔 눈치 더럽게 없잖아.”
“예전의 내가 아니다, 임마.”
“어...그러게. 진짜 예전의 이한록이 아니네. 진짜 어떻게 알았지?”
“다 방법이 있지.”
신기한 듯 한록을 이리저리 살피는 영도. 그러나 영도의 눈에는 실이 보일 리 만무했다.
‘좋아. 문오석의 사람을 알아내는 건 시간 문제다.’
정부장과 영도를 통해 알아낸 사실은, 이 실이 정말 상대방의 인연을 보여주는 것이란 사실이었다.
그리고 아마 그 실은 ‘지금 그 사람이 가장 신경쓰고 있는’ 사람의 실.
‘의심이 가는 사람들 앞에서 문오석에 대한 얘기를 해보자. 그럼 사람들의 실이 보일 거야.’
문오석이 자신의 뒤를 캐고 있는 건 확실하지만, 아직 이렇다 할 움직임은 없었다.
아시아뮤직어워드가 잘 되고 있는 상황에서 문오석 역시 영화사업본부를 건드릴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하정엽이 시상식에 합류했다.’
그러나 하정엽의 등장으로 상황은 문오석의 컨트롤을 벗어났고, 이제 문오석은 다른 수를 쓸 게 분명했다.
‘문오석이 시상식에 어떤 짓을 할지 밝혀내야 한다.’
이제 남은 것은 문오석의 사람을 밝혀내는 것. 문오석에게서 시상식을 지키는 것. 그리고...
‘전부 회사에서 쓸어낸다.’
이 질긴 악연을 끝내는 것이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한록에게 영도가 물었다.
“형. 왜 갑자기 말이 없어?”
“일 생각 중이었어.”
“시상식? 회의 잘 끝났다며? 아. KBC랑 얘기는 됐어?”
“아니, 아직.”
영도의 말에 고개를 흔드는 한록.
영도의 말처럼, 지금 한록에게 남은 것은 예선전의 방송국 편성뿐.
KBC는 한국 최고의 영화시상식인 영화대상이 열리는 방송국이었고, 유일하게 CK 예선전에 러브콜을 보내지 않은 곳이었다.
‘예선전은 반드시 KBC에서 내보내야 한다.’
한록은 지금 다른 방송사의 러브콜을 모두 뒤로 하고 KBC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일주일 내내 KBC의 입장은 변함이 없었다.
“KBC는 포기하는 게 낫지 않나? 거기 공영방송인데 괜히 우리 회사랑 엮이고 싶지 않을 걸.”
그리고 그 이유는 모두가 알다시피 KBC가 대표적인 공영 방송사이기 때문이었다.
공영방송이 재벌그룹인 CK의 프로그램을 편성했다고 비판을 들을수도 있는 상황.
‘죄송하지만, 저희는 편성이 어렵습니다.’
영도의 말처럼 KBC는 CK 예선전에 별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은 영화대상과 좋은 시너지가 있을 겁니다.’
‘그러면 더 안 되죠. 영화 대상에 CK 영화만 나오는 것도 아니고. CK측 편의를 봐줄 순 없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귀찮은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우리가 왜 이걸 해야하냐’는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한마디로 KBC는 전혀 아쉬울 게 없고, 오히려 CK측의 편성요구가 귀찮기만한 상황.
한록이 술을 한 번 마시고 영도에게 말했다.
“그래도 영화대상을 하는 곳이잖아. 좀 기다려 봐야지.”
“언제까지?”
“3일.”
“그...그렇게 짧게? 위에 결재도 안 올라가겠는데?”
“3일이면 충분해.”
“엥?”
당황한 영도와 달리 한록은 태연한 얼굴이었다.
“아마 그쪽이 먼저 연락이 올 거야.”
“왜? KBC에서 싫다고 했다며? 나도 그쪽이 엄청 싸가지 없게 나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왜냐면...
“곧 입장이 바뀔 걸.”
기다리고 있는 이벤트가 있기 때문이었다.
*
그리고 3일 후 목요일. 오늘은 한록이 말한 데드라인이었으며, 예선전의 예고편이 공개되는 날이었다.
예선전의 예고편은 CK의 유튜브에 공개되었다.
[대상이라...너무 과분한 말씀이죠. 그래도 기회를 만들어주셨으니 노력할게요.]
<부산 열차>의 주인공 배우 이인호.
[음...글쎄요. 쟁쟁한 영화들이 많지만...그래도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스캔들>에 출연한 인기 아이돌.
[우리가 대상은...좀 어렵지 않을까요?]
[그렇지. 무슨 욕심을 내.]
<도착지>의 우감독과 이연옥.
[우리 영화가 대상이라. 감독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누가 대상을 받을 거 같으세요?]
<수면>의 박하성.
[저 말고 누가 있죠?]
다리를 꼬고 앉은 서감독까지.
예고편은 배우와 감독들의 포부가 담긴 영상이었고, 각자의 성격이 드러나는 식으로 편집되어 있었다.
그러나 예고편의 핵심은 마지막의 추가 영상에 담겨있었다.
예고편의 맨 끝. 촬영 뒷얘기처럼 삽입된 장면 하나.
[감독님. 이 인터뷰 진짜 내보내도 돼요?]
최대리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서감독에게 묻는 장면이었다.
[어떤 거요?]
[<수면>말고 대상 받을 영화 없다는 거요. <스캔들>이랑 <부산열차>면...감독님 선배님들이시잖아요.]
[아...]
그리고 그 말에 서감독이...
[선배님이라.]
작게 비웃음을 흘리는 모습.
*
목요일 아침이 밝자마자 유튜브에 업로드 된 예선전의 예고편.
“차장님. 유튜브 반응은 어떻습니까?”
한록의 말에 인터넷 반응을 확인하던 현차장이 말했다.
“어...”
한국 최고의 미남배우 박하성. 그리고 아이돌이 나오는 만큼, 예고편의 파급력은 대단했다.
예고편은 업로드 된 지 10분만에 인터넷 이곳저곳으로 퍼지고 있었다.
“서감독 인기 많네.”
그러나 댓글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건 단연 서감독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이거 진짜 인터뷰예요?]
[싸가지 대박]
[다 대본이겠죠~다들 너무 과몰입 하시네요]
[악마의 편집 한 두 번 보나]
[뭔...누가 이런거 가지고 악마의 편집을 해요 ㅋㅋ]
처음엔 가벼운 감상으로 시작된 인터넷의 반응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서감독의 발언에 대해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진짜 너무 무례하네요.]
[근데 솔직히 <수면>이 타야하는 건 맞음. 무례한 거랑은 별개 ㅇㅇ]
[<수면> 개봉도 안 했는데요?]
[예고편만 봐도 명작인데?]
[그래 <수면>이 타겠지 근데 왜 말을 저렇게 하냐고]
[그럼 선배님~당연히 선배님이 짱이에요 이래야 함? 아시아 최고 감독이?]
아직 예고편만 공개되었는데도, 서감독 덕분에 예선전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뜨거운 상황.
[실시간 영화감독 인성.JPG]
[올 연말에 방영된다는 국내 최초(?)영화 서바이벌]
[자 지금부터 서로 죽여라]
[방금 인성논란 터졌다는 영화계 근황.]
“유선씨. 이제부터는 서감독님 위주로 작성해주세요.”
“네!”
물론 이 상황을 만든 것 역시 마케팅 부서 사람들이었다. 서감독에 대한 얘기로 난리가 난 인터넷을 보며 현차장이 말했다.
“와, 우리 서감독한테 절해야겠다. 어그로 장난 아니야.”
“다 제 덕분이죠.”
현차장의 말에 근처를 지나가던 최대리가 답했고, 그 말에 한록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덕분입니다.”
최대리. 서감독. 유선. 우감독.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자리에서 행동해준 덕분에 예선전은 방영도 전에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었다.
“음...완벽하네.”
현차장의 말처럼 모든 일이 완벽하게 풀리는 상황.
“이과장. 사장님이 오늘 오전까지 편성 결정하라고 하신 거 알고 있지?”
이제 남은 것은 방송국 편성뿐이었다.
“네. 알고 있습니다.”
“MBS가 방금 예고편 보고 프라임타임 주겠다고 했어. 여기로 넘기자. MBS도 더 미루면 진짜 편성 어렵다고 하더라.”
방송국과의 의견을 조율하고 있는 현차장은 편성이 많이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한록의 태도는 여전히 태연했다.
“제가 사장님한테 말씀드리겠습니다. KBC 한테 연락이 올 것 같으니 점심까지만 기다려봅시다.”
“어? 정말? 내가 어제도 연락했는데, 샬롯테 때문에 편성 어렵다고 했었거든. 따로 연락 오기로 한 거 있어?”
“아뇨. 그래도 이걸 보면 연락이 오겠죠.”
한록이 그 말과 함께 모니터를 가리켰다.
지금은 CK 예선전에 대한 얘기, 그리고 서감독에 대한 얘기가 인터넷 전체를 뒤덮은 상황.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현차장과 한록의 핸드폰에는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방송국의 문자가 쌓이고 있었다.
[현차장님. CBC 이도은입니다. 프라임타임 편성과 재방송 편성까지 결재 받았습니다.]
[MBS 이은성입니다. 프라임타임 편성, 편성비용 절충가능합니다.]
[JTBS입니다. 잠시 통화 가능하신가요?]
“그래. 다들 이렇게 나오는 걸 보면 KBC에도 얘기가 나오긴 하겠다. 근데 아무리 그래도 오늘 안에 결정이 나긴 어려울 것 같은데.”
“이게 끝이 아니잖아요.”
“또 뭐가 있더라? ...아!”
그리고 한록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현차장.
“그래, 올 수밖에 없겠네!”
방송국이 드라마, 다큐멘터리, 뉴스, 예능을 만드는 근본적 이유. 방송국을 먹여 살리는 것. 방송국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바로-
“광고!”
광고.
“네. 오늘 12시에 예선전과 <도착지> 광고 시작됩니다.”
오늘은 <도착지>의 광고가 시작되는 날.
“맞아. 그랬지. 이과장이 거기에 못된 짓을 해놨지.”
그리고 한록은 KBC가 거절할 수 없을만한 장치를 해둔 상황이었다.
*
“KBC는 광고가 나오자마자 연락을 할 겁니다.”
“맞아. 짤리기 싫으면 그럴 거야.”
한록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현차장.
KBC와 연락을 하며 계속 마음고생을 하던 현차장. 그 때문인지, 현차장의 얼굴엔 사악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놈들 반응이 궁금하네.”
“그러게요.”
한록 역시 KBC의 반응이 궁금한 건 마찬가지인 상황. 그러나 지금은 KBC말고도 신경써야 하는 일이 있었다.
“우감독님이 오셨습니다. 전 내려가보겠습니다.”
“어어, 그래. KBC 연락 오면 바로 전화할게.”
“감사합니다.”
한록이 인사와 함께 1층의 로비로 향했다.
*
로비에서 우감독을 만난 한록. 둘이 향한 곳은 4층의 1인 시사회실이었다.
그곳에서 <수면>을 함께 관람하는 한록과 우감독.
오늘은 <수면>과의 공동 GV를 위해 준비 작업을 하는 날이었다.
“여기 카메라 워킹 좋네요.”
“네. 강물이 가지는 의미도 상징적이고요.”
“강물이라...그래서 <수면>이구나. 제목도 잘 지었어.”
한 장면 한 장면을 뜯어보며 <수면>을 분석하는 한록과 우감독. <수면>이 모두 끝나자 우감독이 감탄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 친구가 영화를 참 잘 만들긴 해요.”
분명 <수면>을 공격할 포인트를 찾기 위해 영화를 관람한 것이지만, 그 목적은 잊고 <수면>에 빠져버린 우감독.
“...그건 맞습니다.”
한록마저 동의할 정도로 <수면>은 대단한 영화였다.
“그래도 저희는 <수면>과 싸워서 이겨야하는 입장입니다. 칭찬만 할 순 없어요. <수면>을 비판하지는 못해도, <수면>에는 없고 <도착지>에는 있는 강점을 어필하는 정도는 해야합니다.”
“음, 맞아요. 그렇죠. 이건 계속 얘기를 해봐야겠어요.”
“네. 생각해보시고, 나머지는 내일 다시 얘기하죠.”
“그래요.”
한록과 우감독은 자리를 정리하고 시사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다시 로비에 도착한 둘.
“이과장님, 우감독님.”
둘의 앞에 나타난 것은 최대리와 서감독이었다.
“시사실 다녀오시는 거죠?”
그 말과 함께 손에 든 시사실의 열쇠를 보여주는 최대리. 최대리와 서감독 역시 GV의 준비를 위해 <도착지>를 보러 가는 것이었다.
“서감독도 <도착지> 보러 가는구나.”
지금 내 눈앞의 상대방. 이 사람은 내 영화를 이기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다.
“재밌게 봐줘.”
“네.”
그 사실을 깨달은 우감독과 서감독 사이에선 묘한 경쟁의식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로비에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광고 소리.
[이거 다 들고 갈 수 있겠어요?]
그 소리에 무심코 뒤를 돌아본 우감독이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도착지>예요.”
로비 중앙의 대형스크린에서 나오는 영상은 장을 보는 이연옥의 모습.
바로 <도착지>의 광고였다.
“아. 과장님이 말씀하신 광고구나.”
“네. 보고 가세요.”
“...좋아요”
한록의 말에 최대리가 고개를 끄덕이고, 팔짱을 낀 채 화면을 바라보았다.
“뭐야?”
그리고 주위를 지나가던 사람들 역시 스크린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자식, 그리고 손자를 위해 장을 보는 이연옥의 모습. 이연옥이 무겁게 장을 보고, 요리를 시작하는 모습.
언젠가 한번쯤은 봤을 어머니, 할머니의 모습에 로비를 지나가던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스크린 앞에 모인다.
[우리 애 왔네.]
그리고 그 말에 무언가 생각하는 듯 하더니-
“응. 엄마. 밥 먹었어?”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사람들의 반응은 한록의 예상대로였다. 그러나 한록은 사람들보다는 최대리의 반응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걸로 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렇게 말하던 사람이 과연 이 광고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최대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광고가 끝났고, 서감독이 아무 말 없이 등을 돌렸다. 그리고 시사실로 향하기 시작했다.
“서감독님은 광고가 마음에 드셨나봐요.”
장난스레 말하는 최대리. 최대리의 말처럼,
서감독에게도 <도착지>의 광고는 꽤 깊은 울림을 남긴 모양이었다.
지금 서감독의 태도는 누가봐도 ‘좋은데 좋다고 말하기 싫다’는 모습이었으니까.
“대리님은 어떠십니까.”
그리고 최대리는...
“저는...”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지금 당장 <도착지>가 보고 싶어졌어요.”
그러나 바로 한록이 원하던 반응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과장님이 치사하다는 생각도 좀 했습니다. 이걸 어떻게 이겨요.”
가볍게 말하고 등을 돌린 최대리.
로비에는 이제 서감독과 한록, 점심을 먹으러 가는 사람들만이 남아있었다.
“어어...무슨 일은. 엄마한테 전화하는데 무슨 일이 있어야하나.”
사람들은 하나같이 <도착지>의 광고를 보고 가족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우감독이 한록에게 말했다.
“과장님. 과장님이 아까 말씀하신 거 있잖아요. GV에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수면>을 이길만한 <도착지>만의 장점이요.”
“네.”
“찾았어요.”
자신의 영화 때문에 가족들에게 전화를 거는 사람들.
-난 밥 먹었지.
-할머니. 오랜만이에요.
그리고 그들의 얼굴에 걸린 미소.
“이거예요.”
우감독이 아주 기쁜 얼굴로 한록에게 말했다.
“내 가족이 생각난다는 점이요.”
*
12시에 공개된 <도착지>의 광고.
한록은 모든 방송사에, 딱 점심시간에 맞춰 광고를 송출할 것을 요청했다.
[간만에 시골 부모님한테 전화 드렸습니다.]
[밥 먹다 갑자기 울뻔했다;]
[추석에 못 내려간 불효자 계신가요]
그 전략은 꽤나 잘 먹혔는지 <도착지>의 광고 자체가 이슈가 된 상황.
[근데 저거 무슨 광고예요? 공익광고?]
[CK 영화 광고인 듯?]
[아 저것도 예선전에 나오나봐]
광고와 <도착지>에 대한 얘기는 빠르게 인터넷에 퍼져나갔고, KBC에도 흘러 들어갔다.
그리고 KBC의 사장실.
“이팀장.”
“네, 사장님.”
“이 광고 알지?”
그곳에서도 <도착지>의 광고에 대한 얘기가 나오고 있었다.
“...네. 압니다.”
그러나 KBC의 사장이 <도착지>에 대한 얘기를 하는 이유는 대중들과는 다른 것 때문이었다.
사람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고 있는 광고. 거기에, CK가 막대한 돈을 풀어 모든 방송사에 똑같은 시간을 요청한 광고. 그리고...
“이 광고 우리만 없다는 게 진짜야?”
KBC만 제외된 광고.
“...네. 맞습니다.”
“왜?”
“CK 측에서 불만이 있는 것 같습니다.”
“불만? 무슨 불만?”
“...그게, 저희가 CK 예선전을 거절해서...”
“CK 예선전? 지금 인터넷 난리난 그거?”
“...예.”
광고에 살고, 광고에 죽는 방송국. 그런데 KBC만 CK그룹의 광고에서 제외됐다.
심지어 시청률이 확실히 보장된 CK 예선전을 거절해서.
편성팀장의 말에 KBC 사장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망했다. 귀찮은 일이 생길거라고 대충 넘기면 안 되는 거였어.’
상사의 얼굴을 보고 자신이 실수를 했음을 깨달은 편성팀장.
“뭐하고 있어?”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는 편성팀장에게 KBC의 사장이 소리쳤다.
“지금 당장 CK에 전화해!”
*
“네. CK ENM 현주훈 차장입니다.”
잠시후. CK ENM.
아무 생각 없이 전화를 받던 현차장이 상대를 확인하고 씩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수화기를 가린 채 한록에게 말했다.
“KBC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