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136화 (230/263)

다음 능력이 기다리고 있단 뜻이었다.

사람들 앞에 선 한록.

회의실 맨앞에서 마이크를 든 한록과, 그런 한록을 바라보는 사람들.

그들을 보며 회의실 구석에 있던 유선이 중얼거렸다.

“분위기가 무겁네요...”

“응. 우리 회사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들이 모인 거니까.”

최대한 담담하게 말하는 현차장. 그러나 현차장 역시 유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분위기 자체가 다르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평소 회사 구내식당이나 로비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회사 실세 중 한명이던 오과장이 사라졌고, 사장과 본부장이 관리하는 프로젝트가 생겼다.

-그럼 그 자리는 내 자리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 이 기회를 통해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다.

‘이과장, 괜찮을까?’

‘본부장님이 앉아 계시니까...상황이 어려워지면 편을 들어주시겠지?’

한록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는 현차장과 하대리. 반면, 최경준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한록. 이번엔 다른 모습을 보여야 할 거다.’

현차장이나 하대리의 걱정과 달리, 한록이 이들에게 얻어 내야하는 것은 인정이나 호감이 아니었다.

한록은 더 이상 누군가에게 평가받을 위치가 아니었으니까.

최경준은 회의 전 한록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이번 회의에 참여한 사람들은 세 가지 유형이 있을 거라네. 첫 번째는 자네에게 줄을 대기 위한 사람들. 두 번째는 자네가 대체 어떤 사람인지 상황을 보러 온 사람들. 그리고 세 번째는 자네의 자리를 넘보러 온 사람들이지.

이번 회의는 여태 한록이 하던 일과는 많은 것이 달랐다.

한록은 언제나 도전자의 입장이었고, 다른 권력자들을 설득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한록이 도전자를 컨트롤해야 하는 상황.

-그들은 어떻게든 자네를 공격하려 할 거야. 자네가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이 프로젝트를 가져가려고 하겠지.

이제 한록에게 필요한 것은...

-자네는 거기 있는 모든 사람보다 뛰어난 사람이란 걸 증명해야 할 거고.

누군가의 완벽한 리더가 되는 것이었다.

-자네를 죽이려는 사람들. 자네를 존경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둘 중 입장을 정하지 않은 사람들. 그들을 상대로 자네는 어떻게 할 건가.

아직 서른. 뛰어난 능력과 별개로, 사람들에게 얕보이기 쉬운 위치의 한록. 한록이 시도할 방법은-

-가장 먼저 해야할 건 그 셋을 구분하는 거겠군요.

최경준의 질문에 한록이 신중하게 답했다.

-그래, 그렇지. 좋은 판단이야. 그 방법은?

-저는...

“회의 시작하겠습니다.”

-함정을 파겠습니다.

한록의 말과 함께 회의가 시작되었다.

*

“이번 예선전에 참여 의사를 밝혀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미 공고문을 읽고 오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저 역시 여러분의 기획안을 읽었습니다.”

한록의 리드로 진행되는 회의. 한록의 말에서는 어렴풋이 느껴지는 뉘앙스가 있었다.

“이미 내용은 알고 오셨을테니, 이 자리에서는 여러분의 기획안에 대한 얘기를 해보려 합니다. 그리고 방송이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 결정을 내리겠습니다.”

‘이 프로젝트의 리더는 나다. 나는 이 자리에 보고를 받고 결정을 내리기 위해 온 것이다.’

한록의 말 속에서 분명하게 느껴지는 뉘앙스들.

그 말에 회의실 맨 뒤에 앉아있던 최경준이 얼핏 미소를 지었다.

‘생각보다 단호한 구석도 있군.’

‘직원들에게 동기를 부여해야 한다’고 말하던 한록.

리더에게 꼭 필요한 능력이지만, 자칫 잘못하면 부하들에게 휘둘릴 수도 있게 되는 면모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단계를 넘어가자 한록은 이제 강한 리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 역시, 한록의 모습에 속으로 조용히 자기들만의 전략을 짜고 있었다.

‘소문대로네. 건방져.’

‘박과장이 생각보다 말이 통하는 타입이라고 했는데...세게 나오네.’

‘아, 그래. 허세를 부리고 있군.’

한록은 이미 회사에서 유명한 사람이었다. 능력이 대단하거나. 혹은 어지간히 하정엽의 마음에 들었거나. 아니면 운이 좋았거나. 한록이 자신들의 리더가 된 것엔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자. 어떡할까.’

‘어떻게 시작해볼까.’

‘무슨 말을 해볼까.’

하지만 그건 거기까지의 일.

‘어떻게 해야지 저 자리를 삼킬 수 있을까.’

현장에서는 또 다른 힘이 작용하기 마련이었다.

사장의 총애를 받고 있는 서른의 젊은 과장. 그 자리를 넘보는 수많은 전략가들.

“이과장, 잠깐만. 그 전에 얘기해야 할 게 있을 것 같네요.”

그들 가운데 채과장이 가장 먼저 공격을 시작했다.

*

“아직 예선전이 방영될 방송사가 정해지지 않을 걸로 알고 있습니다. 맞나요?”

한록의 말을 자르고, 모두의 시선을 자신에게 집중시킨 채과장.

‘역시 채과장. 선수를 뺏겼군.’

법무팀의 김차장이 채과장을 보며 생각했다.

한록이 채과장의 말에 순순히 대답했다.

“네. 맞습니다.”

‘저기서 저렇게 나오면 안 되지. 역시 어려.’

한록의 답에 혀를 차는 김차장.

‘이 프로젝트에 자기 이름을 올리려는 말이잖아. 채과장은 자기가 방송국과 컨택을 할거라고 말할거다. 그리고 방송국과의 조율을 빌미로 프로젝트 내용에도 개입할 거고.’

“제작보다 중요한 게 편성이지 않습니까. 일단 이 부분에 대한 얘기부터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예전에 CK방송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데, 한번 연락을 돌려볼까요?”

채과장의 말은 두 가지 뜻을 담고 있었다.

최경준 앞에서 아직도 ‘편성도 안 잡고 뭐했냐’고 한록을 공격하는 의도.

그리고 프로젝트의 중요한 파트인 편성을 가져가려는 의도.

‘채과장 혼자 핵심을 가져가게 둬선 안 된다.’

그런 생각을 김차장만 한 건 아닌 모양인지, 법무팀의 양과장이 마이크를 키고 말했다.

“CK방송보단 영화 전문 채널에 편성을 하는 게 좋아보입니다.”

“네. 저도 그게 나아 보입니다.”

거기에 양과장의 편을 드는 윤대리까지.

“아니면 종합편성채널은 어떻습니까. 거긴 연말 영화 시상식이 없으니, 샬롯테측과 문제가 생길 일도 없을 것 같습니다. 시청률도 공중파만큼 나오고요.”

채과장이 물꼬를 트자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손을 들고 의견을 말하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이 회의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듯한 모습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오대리가 짧게 중얼거렸다.

“난장판이군.”

‘이한록. 그 놈이 잘하고 있는지 보고 와.’

한록을 지켜보라는 ‘누군가’의 지시로 이 회의에 참여한 오대리.

그 ‘누군가’는 한록이 리더로 데뷔하는 것에 꽤나 큰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 놈이 그냥 능력있는 걸로 끝나는지, 아니면 큰물에서 놀 준비가 됐는지 보자고.’

“아니면 다른 방안이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건 좀 어렵지 않겠습니까.”

“과장님. 빨리 결정을 내리셔야 할 것 같은데요.”

그러나 회의는 한록이 아니라 차장, 부장들의 손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너무 어려. 직급도, 나이도, 아직은 회사 전체를 통제할만한 사람이 아니다.’

한록은 분명 뛰어난 사람이다. 그러나 한록의 능력과 리더로서의 역량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아직은 부족합니다. 이한록 과장에게는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대리가 그런 결정을 내리려는 순간.

‘...뭐지?’

“자. 다들 할 말은 끝나셨습니까?”

한록이 미소를 보였다.

*

“편성은 완료되지 않았을 뿐, 방송국들과 이미 얘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얘기를 들은 한록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이미 국영방송인 KBC를 제외한 거의 모든 채널에서 편성 제안이 왔습니다. 저희가 제안하지 않은 채널에서도 먼저 요청이 왔죠.”

그 말에 입술을 씹는 박차장.

‘이 프로젝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한록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연예인. 경쟁. 서바이벌. 연말 시상식. CK 사장의 전폭적 지원.

예선전은 모든 자극적 이슈를 포함하고 있었고, 예선전에 기대를 걸고 있는 건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아직 편성을 완료하지 않은 건 방송국들 사이에 경쟁을 붙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편성은 한국영화대상을 방영하는 KBC에 넘기거나, 피크타임인 주말 저녁 7시를 제안하는 공중파에 넘길 겁니다.”

물밑에선 방송국들 역시 이 프로그램을 가져가기 위한 신경전을 벌이는 상황.

“그런데 여러분은 이 프로그램을 헐값에 넘기려 했죠.”

그 말에 편성에 대해 의견을 냈던 사람들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잘 준비해왔군. 이번 건 실패다.’

편성으로 한록을 공격하려는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다음 기회를 노려야 해.’

모두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한록이 채과장을 불렀다.

“채과장님.”

“네, 이과장님.”

“윤대리님. 양과장님. 박차장님. 김차장님. 송팀장님. 강실장님.”

한록이 눈앞에서 이 회의를 가져가려 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채과장님은 CK방송과 협업하자고 하셨고, 윤대리님과 양과장님은 영화전문채널에 편성을 원하셨죠. 송팀장님은 종합채널에 편성을 말씀하셨고요.”

한록은 자신에게 반대의견을 내놓은 사람의 이름과 발언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의 이름을 나열하는 한록. 그 모습에 ‘다음 기회’를 생각하고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그들 모두에게 느껴지는 같은 감정.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

한록이 회의가 엉망이 되도록 지켜본 이유는 회의를 중재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죄송하지만, 지금 말씀하신 분들은 이 프로젝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계십니다.”

한록은-

“이분들은 담당자에서 물러나주시기 바랍니다.”

살생부를 만들고 있었다.

*

‘이한록이 함정을 팠다.’

회의실의 모두가 그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은 상황.

‘이 프로젝트는 이한록 거야. 고작 과장이라고 해서 함부로 덤빌 상대가 아니다.’

한록을 제거하려는 세 번째 부류. 그들은 더 이상 이 회의에서 입을 놀리지 못할 것이었다.

-가장 어려운 건 두 번째 타입이야. 자네가 어떻게 하는지에 따라서 자네에게 충성할지, 자네를 뛰어넘을지 결정할 사람이거든.

이제 남은 건 최경준이 말한 두 번째 부류.

한록의 태도에 따라 자신의 태도를 결정할 사람들이자, 정말 한록이 사로잡아야 할 사람들이었다.

‘여기는 정공법뿐이다.’

이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멋진 리더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뿐이다. 그렇게 판단한 한록이 최대리에게 물었다.

“최대리님. <수면>은 어떻게 진행되길 바라십니까.”

“박하성씨가 ENM에 찾아올 예정입니다. <수면>에 최대한 비중을 몰아주셨으면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과장님의 <도착지>도 대상을 노리고 있다고 알고 있는데. 괜찮나요?”

“일단 중요한 건 프로그램이 흥행하는 거니까요. 제 개인 프로젝트보다 이 프로그램이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한록과 최대리의 대화와, 그걸 지켜보는 사람들.

‘살벌한 것치곤 제법 말이 통하는데.’

그리고 다시 한번 반짝이는 실.

“과장님. KBC는 국영방송이라 저희 회사의 편을 들어줄 수 없습니다. 편성 조율 얘기를 다시 한번...”

“그 얘기는 이미 끝났을 텐데요.”

양과장의 말을 자르는 한록. 그 말에 또 한번 반짝이는 실.

‘강하게 나갈 줄도 알고.’

“<부산 열차>는 1300만 관객을 달성하는 장면 중심으로 진행하려 합니다. 회사 내부 얘기가 아니라 관객들 반응 위주로 영상을 기획하겠습니다.”

“네, 그렇게 하세요.”

‘그런데 의견 반영은 또 잘 되는 편이고...’

또다시 반짝이는 실.

실은 한록이 사람들과 대화를 주고 받을 때 마다 한 번씩 반짝이고 있었다. 한록이 목표로 하는 세 번째 부류. 그들이 한록의 모습에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 사람, 괜찮은데?’

시간이 지날수록 한록을 다르게 보기 시작하는 사람들.

한록은 자기를 위협하는 사람에게 함정을 팔 줄도 알았고, 또 반대로 사람들의 말을 잘 들을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이한록은 고작 서른의 능력만 좋은 애송이가 아니다.’

‘이한록은...’

‘꽤 따를 만한 사람이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그런 생각이 퍼져나가고 있을 무렵.

“과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을 정면으로 반박할 일이 시작되었다.

*

“네, 말씀하세요.”

손을 든 것은 법무팀의 장과장. 의료사고 피해자들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 <실수>의 담당자였다.

“<실수>는 애초에 이 프로젝트와 안 어울립니다.”

그리고 그는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담당자를 맡는 것을 거절하던 사람이기도 했다.

-장우진이 <실수>의 담당자를 거절했다.

-그런데 이한록이 기어코 담당자를 시켰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는 소문. 그 소문의 주인공들이 회의에서 만났다. 사람들은 바짝 긴장해서 장과장과 한록을 바라보았다.

“<실수>는 실화 소재 영화입니다. 애초에 이런 가벼운 프로젝트랑은 맞지 않는 영화예요. <실수>가 대상을 받게 해달라고 홍보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됩니다.”

방금 전 한록이 살생부를 적었고, 칼을 휘둘렀다. 그런데 한록의 말에 대놓고 반대를 한다.

장과장은 정말로 이 프로젝트에 참여할 마음이 없는 것이었다.

자신의 프로젝트에 반대하는 사람. 심지어...

“이 프로젝트와 <실수>는 서로에게 독이 될 겁니다.”

그 이유는 사사로운 감정 때문이 아니라 정말 일을 위해서다.

그런 사람을 대체 어떻게 다뤄야 할 것인가.

‘진짜 ‘시험’이군.’

최경준이 즐거운 미소를 지으며 한록을 바라보았다.

*

프로젝트에 불만을 가진 사람이 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지적하는 부분이 꽤나 타당하다.

‘이한록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

‘이한록이 여기에 뭐라고 답할까.’

‘과연 이 사람은 내가 넘볼 수 있는 사람인가. 아니면, 내가 복종해야 하는 사람인가.’

진짜 리더로서의 자질을 시험받게 된 한록.

‘바라던 바다.’

그리고 그건 한록이 계획한 두 번째 일이었다.

한록이 장과장에게 말했다.

“과장님. <실수>의 인지도가 올라갈수록 실제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 역시 올라갈 겁니다.”

‘그냥 찍어누르는 게 아니라 설득을 선택했구나. 어려운 길인데.’

한록의 선택에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고, 누군가는 혀를 찼다.

‘미리 얘기를 할 수도 있었을텐데. 왜 굳이 이 자리에 장과장을 데려온 거지?’

그리고 오대리는 한록의 속마음을 파악하고 있었다.

모두가 자신에게 도전을 하는 회의. 지금 한록은 그런 사람들의 공격을 받아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한록은 압도적인 권력자의 모습을 보여주기는 커녕, 장과장의 지적을 받고있는...

‘아. 그래. ‘굳이’ 지금 데려온 거다.’

‘사람들 앞에서 장과장이 설득되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거야.’

자신은 어떤 리더인가. 당신들이 합당한 이유로 반대할 때, 나는 어떤 모습을 보일 것인가.

-나는 적어도 당신의 말을 무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처음 모습을 드러낸 리더로서, 사람들이 신뢰할 수 있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한록의 계획.

‘...상당히 머리가 좋군.’

드디어 한록의 계획을 알아챈 오대리가 흥미롭게 둘의 대화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장과장님 말을 듣고 <실수>의 피해자측과 연락을 해봤습니다. 장과장님처럼 투표에 대해 걱정하시더군요. 사람들에게 투표를 받기 위해 홍보한다는 것 자체가 영화를 가볍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다만, <실수>가 사람들에게 알려질 수 있는 기회라는 점에는 굉장히 긍정적인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

그 말에 답이 없는 장과장.

공중파에서 한달동안 자기 영화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이는 영화를 홍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장과장 역시 예선전이 투표의 형식만 아니라면 적극적으로 참여했을 것이었다.

“저희가 생각해야할 건 이 투표가 <실수>에 미치는 영향을 줄이는 거지, <실수> 자체가 예선전에 불참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선전이라는 기회를 활용할.

하지만, 투표라는 방법은 피해갈 수 있는 방법.

한록은 그 방법을 알고 있었지만 먼저 얘기하지는 않았다.

지금 중요한건 한록의 능력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장과장이 스스로 참여하도록 만드는 것이니까.

“그냥 놓치기에는 <실수>에게도 아까운 기회입니다.”

한록의 말에 장과장이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한록의 말처럼 이번 예선전은 잘 활용하기만 한다면 <실수>에도 좋은 기회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실수>를 맡고 싶지 않으시면 받아들이겠습니다. 다만, 저는 여전히 장과장님이 <실수>의 적임자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은 계속 한록의 의견에 반대한다. 그러나 한록은 여전히 장과장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길 바라고 있었다.

이쯤되면 장과장 역시 의문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장과장이 결국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한록에게 물었다.

“이유가 뭡니까?”

“<실수>에 이런 문제점을 지적한 분이 장과장님 뿐이시거든요.”

그리고-

“장과장님만큼 이 영화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얘깁니다.”

지금 장과장을 설득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대답.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장과장님.”

한록의 질문에 장과장은 한참동안 답이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장과장이 입을 연 순간.

“제가 하겠습니다.”

그 순간 오대리는 생각했다.

‘회장님. 이 사람입니다.’

그리고 한록의 실이 다시 빛을 뿜기 시작했다.

*

“더 하실 말씀 있는 분 계십니까.”

“없습니다.”

회의는 끝났고, 결국 모든 것은 한록이 계획한 대로 흘러갔다.

회의에 참여했던 모두는 서로 다른 생각을 하며 자신의 사무실로 향했다.

‘큰일 났다. 만만하게 볼 놈이 아니었어.’

오늘 한록의 살생부에 오른 사람들.

‘젠장. 틈을 하나도 안 주네.’

한록에게 줄을 대기 위해 온 사람들.

‘같이 일해볼만 한데?’

한록을 지켜보기 위해 온 사람들.

그들을 지켜보던 최경준이 마지막으로 회의실을 나가며 한록에게 속삭였다.

“오늘 자네의 편이 된 사람이 많을 거야.”

그 말에 한록은 지금 자신의 손목에서 빛나고 있는 실이 우연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장과장이 한록의 말에 동의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마치 한록의 확인이라도 바라듯 빛을 내고 있는 손목의 실.

‘...무슨 일이 생길까?’

한록이 실을 어루만지자, 실은 저절로 손목에서 풀어지더니 한록의 주위를 떠다니기 시작했다.

실이 나타난 후 처음으로 손목에서 풀린 상황이었다.

‘그래. 내 생각이 맞았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실의 변화에 한록은 여태 자신이 해 온 생각이 맞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건 분명 레벨 업. 혹은 ‘다음 단계’.

‘...나한테 연결되는 게 아니야?’

그리고-

‘정부장님의 실이 본부장님한테 연결되어 있다.’

다음 능력이 기다리고 있단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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