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135화 (229/263)

135화. 처음 뵙겠습니다. 이한록 과장이라고 합니다.

“이한록.”

아침. 한록이 의자에 앉기도 전 정부장이 말을 걸어왔다.

“사장님이 찾으신다. 지금 당장 다녀와.”

한록이 최경준이 아끼는 사람이란 건 이미 알려진 사실. 하지만 이번엔 최경준도 아닌 하정엽의 호출이었다.

그 말에 정부장 근처에 앉아있던 모두가 직감했다.

‘보통 일이 아니다.’

그런 생각을 한 것은 한록 역시 마찬가지. 한록이 무슨 일이냐고 묻는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

사장실에선 하정엽이 생각에 잠겨있었다.

어젯밤 CK ENM엔 하태준이 찾아왔고-

‘대체 네 놈은 뭘 하고 있는 거냐?’

신문을 던지며 하정엽을 질책했다.

[하정진의 프랑스 방문. 관계자들은 CK의 경영승계를 위한 발걸음으로 해석된다.]

하태준이 던진 신문에 적힌 것은 하정엽의 형, 하정진에 대한 기사였다.

‘이건 우리가 내보낸 기사가 아니야. 신문사에서 알아서 쓴 거지.’

CK가 요청한 기사가 아니다. 그럼에도 경영승계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그 말은 다시 말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정진을 CK의 후계자로 보고있단 뜻이었다.

‘네 형은 외국에 나가기만 해도 기사가 나오지. 그런데 너는? 우리가 내보내 준 것 말고, 네 얘기가 기사로 나온 게 뭐가 있지?’

불만스러운 얼굴의 하태준. 하태준의 말처럼 하정엽의 인지도는 장남인 하정진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다.

그리고 그건 자식끼리 경쟁을 시키려는 하태준의 계획에서 한참 벗어나는 일이었다.

‘사람들이 이름도 모르는 녀석한테 CK를 맡길 순 없다.’

애초에 하태준이 하정엽을 ENM으로 보낸 것 역시, 대중 문화를 활용해서 인지도를 높여보라는 의도였다.

그러나 하정엽이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상황.

‘다음 기사는 네 얘기가 되어야 할 거다.’

이제 하태준의 인내심이 얼마 남지 않았다.

-매출, ENM의 인지도로는 부족하다. 새로운 게 필요하다.

하정엽은 궁지에 몰린 상황이었으나...

‘사장님. 이한록 과장이 회사 전체가 참여하는 프로젝트를 기획한다고 합니다.’

다행히 좋은 기회가 남아있는 듯 했다.

한록이 제안한 프로젝트. 그 소재는 모두가 주목하는 연말 시상식이었으며, 내용은 CK ENM의 사람들에 대한 것이었다.

연예인. 영화. 배우. 시상식. 그리고 CK ENM.

그렇다면.

‘이한록 과장을 불러오세요.’

지금이 바로 하정엽이란 이름을 알릴 기회였다.

*

한록을 앞에 두고 보고서를 바라보는 하정엽.

“좋은 기획입니다.”

하정엽이 짧게 말했다.

한국 최고의 영화와 연예인들. 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경쟁. 그리고 승패.

한록의 기획에는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가 전부 담겨있었다.

이 예선전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거기에 하정엽이 몇 번 얼굴을 비춘다면.

‘내 이름이 알려지는 건 시간 문제다.’

젊고 잘생긴 사장이자 재벌가 후계자인 하정엽. 그런 자신이 직원들과 함께 일하는 모습이 사람들에게 공개된다.

영상이 인기를 끌기만 한다면, 자신의 인지도가 형인 하정진을 능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유일한 문제는 예선전이 사람들에게 충분히 관심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건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CK ENM 최고의 직원이 해결할 일이었다.

“이 기획에 자신 있습니까.”

“네.”

“그 말에 책임을 져야 할 겁니다. 나한테는 지금이 아주 중요한 시기고...”

한록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하는 하정엽.

“이한록 과장에게도 마찬가지일테니까요.”

하정엽의 압박.

한록은 하정엽의 말을 곱씹었다.

‘분명 무슨 일이 있었다.’

‘연말 시상식에서 CK 영화가 대상을 두고 다투는 모습을 보여주겠다.’ 한록이 하정엽에게 약속했던 일이었다. 그리고 그때 하정엽은 대답은 ‘한번 해봐라’ 정도.

그러나 지금 예선전에 대한 하정엽의 관심은 단순히 좋은 프로젝트에 대한 관심을 넘어서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 일이 하정엽한테도 영향을 미치는 일이 된 거야.’

대충 짐작해보자면, 아마 어제 기사에 나온 하정진의 뉴스가 하정엽에게 심경의 변화를 가져온 모양이었다.

‘역시.’

그리고 한록의 생각이 맞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반짝이는 손목의 실,

며칠 동안 손목의 실을 관찰하며 느낀 것은, 이 실은 한록이 인간관계에서 통찰력을 발휘하거나 성장을 보였을 때 빛을 내곤 했다.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은-

-하정엽은 이 예선전에 많은 걸 걸고 있다.

그리고 이 일이 어떻게 끝나는지에 따라 앞으로 자신의 회사생활이 결정된다는 것이었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찾아온 하정엽의 시험.

하지만 한록은 이전 하정엽과의 일화를 통해 이 일이 어떻게 마무리 될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하정엽은 냉정하고 무자비한 사람이었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함부로 부하들을 휘두르는 리더였다.

“이 일이 어떻게 끝나는지에 따라 이한록 과장의 회사에서의 위치가 결정될 겁니다.”

“네.”

하지만...

“좋은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동시에 언제나 자신의 시험을 통과할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리더이기도 했다.

한록의 자신만만한 대답에 하정엽이 말했다.

“좋습니다. 앞으로 이 일은 내가 직접 관리합니다.”

그건 아마 첫 번째 시험에 통과했음을 알리는 대답이 분명했다.

*

“앞으로 이 일은 내가 관리합니다. 예산은 무시하고,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세요. 필요한 일이 있으면 나한테 보고하고요.”

하정엽의 말은 자신이 직접 이 프로젝트를 지켜보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정엽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예선전은 TV 프로그램으로 편성시키세요. 2주가 아닌 한 달간 방송하고, <도착지>랑 <수면>의 광고도 지금부터 바로 내보내세요.”

“연말까지 프로그램이 모두 배정되어 있어서 편성은 어렵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아직 상황 파악을 못했군요. 할수 있는 모든 걸 하라고 했습니다.”

하정엽이 한록의 말을 자르고 말했다.

연말까지 편성이 꽉 차 있을 모든 방송사. 아무리 거금을 준다해도 이미 결재가 끝난 편성을 바꾸기는 어렵다.

하지만-

“내 이름을 팔라는 겁니다.”

그게 CK 그룹 차남의 지시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예산. 제작 기간. 편성. 하정엽의 이름 앞에서 불가능한 건 없었고, 이제 한록의 앞에 놓인 장애물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하정엽의 말에 한록은 깨달았다.

“앞으로의 모든 일은 내 이름을 걸고 진행하세요.”

자신의 예상보다 몇 배는 판이 커졌다는 것을.

*

“김PD. 저번에 ENM이랑 작업했지?”

“어? 그랬지.”

“거기서 이번에 일 좀 칠 거 같은데?”

“왜?”

“예산이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까 시상식 직전에 프로그램 좀 편성해달라 그랬대.”

한국 영화계에서 최고의 회사라 말할 수 있는 CK ENM.

그곳에서 연말 시상식을 위해 무언가 큰일을 꾸미고 있다는 사실은 금방 여러 업계로 퍼져나갔다.

“CK가 저러고 있는데 우리 회사는 뭐하는 거야? 이대로 연말 시상식 전부 CK 영화에 밀릴 거야?”

“죄송합니다. 오늘 내로 회의해서 대응방안을 마련해오겠습니다.”

영화계.

“사장님. 박하성씨는 다음 영화 때문에 스케쥴이...”

“전부 취소시켜. 지금 ENM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데 다음 영화가 문제야?”

연예계.

“국장님. CK에서 급하게 편성 요청 들어왔습니다.”

“무조건 편성해. 사장님이랑 얘기했는데, 그거 중요한 일이다.”

“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뭔데?”

“다른 방송국들도 전부 요청에 응했다고 합니다.”

방송계.

그리고..

“그 녀석이 이제야 일을 해보려 하는군.”

하태준까지.

시상식에 대한 뜨거운 관심은 CK ENM 내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번에 이한록이 하는 시상식 예선있잖아.”

“어.”

“그거 사장님이 직접 관리하신대.”

‘사장이 이 프로젝트를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ENM 사람들이 이 소식에 대해 가지는 무게감은 다른 업계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소식이 CK ENM 모든 직원들에게 전해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이틀.

그 이틀동안 CK ENM 사람들은 각자의 전략을 취하기 시작했다.

[와. 이한록 과장 진짜 사장님 눈에 들었나 본데요.]

[그분이랑 입사 초기에 싸웠는데 기억하시려나요..;]

한록에 대한 놀라움과 질투의 시선.

“최과장. 이한록 과장 연락처 알아?”

한록에게 줄을 대려는 사람들.

“...이러다 정말 이한록이 본부장이 되겠는데.”

“그렇게 놔둘 순 없지.”

한록에게 라이벌 의식을 가지는 사람들.

[오대리님. 저번에 <스캔들> 담당하셨잖아요. 저거 지원하셨어요?]

그리고 직접 예선전에 참여해보려는 사람들까지.

각자의 위치에 따라 다른 태도를 취하고 있지만, 결국 ENM의 모두는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미 회사에서 소문이 자자한 한록. 그런 한록이 진행하는 프로젝트에 사장이 ‘자신의 이름을 걸라’고 말했다.

이건 다시 말해-

‘이 일 이후로 CK ENM의 권력 구도가 바뀔 거다.’

누군가에게는 인생 역전의 기회가 왔다는 것이었다.

*

회의실의 GV팀. 현차장이 예선전에 참여하고 싶다고 의견을 밝힌 사람들의 지원서를 보다가 말했다.

“이 정도면 동기부여는 충분한 거 같지 않아?”

“그러게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한록.

한록이 예선전을 기획하던 시절, 최경준에게 한 말이 있었다.

‘왜 자신이 이 일을 해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그 이유가 너무 명확해졌다.

사장이 지켜보고 있으니까. 여기서 한몫하면 출세의 길이 열릴테니까.

한록처럼 사장의 눈에 들고 싶어하는 젊고 유능한 야심가들부터, 임원 승진을 위해 자신의 기반을 마련하려는 잔뼈 굵은 관리자들.

그리고 한록의 독주를 두고 볼 수 없는 영화사업본부의 중역들까지.

CK ENM에서 ‘능력있다’고 불릴만한 사람은 모두 이번 예선전에 나름의 전략을 가지고 참여하는 상황.

“이제 설득은 필요 없겠네요.”

모두가 의욕을 가지고 예선전에 참여하는 상황에서, 더 이상의 설득은 불필요했다.

한록의 지휘 아래에서 움직일, 한록의 기획을 성공시키고자 하는, 그러나 결국 한록을 물리치고 하정엽의 눈에 들고 싶어하는 사람들. 한록이 시키지 않아도 자신들의 영화를 우승시키고자 할 사람들.

이제 그들과 해야하는 것은...

“한번 제대로 싸워봐야겠습니다.”

CK ENM 최고의 직원들 사이에서 <도착지>를 주인공으로 만드는 것 뿐이었다.

*

그리고 이틀 후.

방송국 섭외, 그리고 참여자 선정이 완료되고 어느 정도 예선전의 준비가 끝난 상황.

CK 최고의 야심가들이 모인 첫 회의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갑시다.”

한록은 GV팀과 함께 회의실로 향했고, 회의실의 문을 연 순간 아주 익숙한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시아 최고의 천재감독인 서감독을 발굴했던 제작부의 채과장. CK ENM의 가장 핵심부서인 전략기획부의 유망주 오대리. 하정엽의 고등학교 동창인 글로벌 기획팀의 박과장.

그리고 가장 마지막에 앉은 최대리까지.

회사 최고의 야심가, 엘리트. 그들이 사장의 눈에 들기 위해 자신의 최고의 무기를 가지고 이 회의실에 앉아있다.

마치 부산영화제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회의실.

그러나 자신은 더 이상 다크호스가 아니었으며, 이제는 이들을 이끄는 위치에 서있었다.

자신에게 도전장, 혹은 러브콜을 보내는 수많은 사람들. 자신이 이끌어야 할 사람들.

그 사람들 앞에 선 한록이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한록 과장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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