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우리 회사의 모든 부서가 제 마케팅에 참여했으면 합니다.
그 말에 최경준을 빤히 바라보는 하정엽. 하정엽이 최경준에게 말했다.
“본부장님께서도 최근 음악사업본부가 타임지에 나왔다는 사실을 아실텐데요.”
얼마 전 아시아판 타임지에 소개된 음악사업본부의 연말 콘서트.
KPOP 가수들이 모두 총출동하는 콘서트인만큼, 아시아 전체가 음악사업본부의 활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영화사업본부가 좋은 활약을 보여주고 있단 건 압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음악사업본부를 무시할 순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최경준은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영화사업본부는 타임스퀘어에 CK의 이름을 올렸습니다. 그게 타임지에 밀린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이 만들어 온 성과는 그 이상이니까.
음악사업본부가 타임지에 언급되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나는 미국 한복판에 회사의 이름을 알리고 왔는데.
뒷짐을 지고 선 최경준에게서 느껴지는 자신감. 그리고-
“광고와 타임지는 얘기가 다릅니다. 타임스퀘어의 광고는 우리 돈으로 건 겁니다.”
“네. 회장님이 직접 지시하셨죠.”
광고에 얽힌 회장이라는 존재까지.
<부산 영화제>, <부산 열차> 그리고 더 서울까지.
지금 하태준은 확실히 영화사업본부를 주목하고 있었고, 후계자 자리를 노리는 하정엽에게 하태준의 눈에 드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였다.
전례 없는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있는 음악사업본부. 그리고 회장이 지켜보는 영화사업본부.
‘누구 손을 들어주느냐.’
둘 모두가 각자의 장단점이 있다. 그렇다면 이때부터 필요한 건 전략적인 판단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하정엽이 최경준에게 말했다.
“방송국을 가져가신다면, 영화사업본부의 운영은 누구에게 맡기실 생각이십니까.”
“이한록 과장입니다.”
하정엽 역시 예상했던 이름. 그러나 막연히 ‘그렇습니까’라고는 말할 수 없는 이름이었다.
“이한록 과장이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인 건 압니다. 하지만 아직 한계가 있습니다.”
능럭, 외모, 커리어. 모두가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한록.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한록이 과장일 때의 얘기였다.
“이한록 과장은 너무 젊습니다.”
그에 따라 당연히 이어지는 단점.
“영화사업본부의 모두가 따를만한 리더십을 가진 사람은 아니죠.”
그 말에 최경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록의 나이는 서른. 평범한 사람이라면 대리, 아니면 신입 정도의 직위를 가질만한 나이다.
그런 한록에게 본부장의 자리를 주겠다고 말한다.
한록의 능력과는 별개로, 그게 쉽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결정이란 건 최경준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저 역시 바로 본부장 자리를 넘기겠다는 건 아닙니다. 정민석 부장을 위로 올리고, 이한록 과장은 그 밑에서 몇 년 배우는 방식도 생각 중입니다.”
“그래봤자 5년 아닙니까. 그때면 서른 다섯입니다.”
한록의 나이마저 알고 있는 하정엽. 하정엽의 말에 최경준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금 사장님과 같은 나이가 되겠군요.”
그 말에 하정엽이 차가운 얼굴로 최경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나를 이한록 과장과 비교하는 겁니까.”
“리더십엔 나이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아니, 오히려 젊은 리더가 필요한 상황도 있죠. 지금의 ENM처럼 말입니다.”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을 듯 말 듯 하정엽을 도발하는 최경준의 말. 그리고 ‘한번 해 봐라’ 라는 태도로 최경준을 지켜보는 하정엽.
최경준은 조금도 긴장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저도 관리자의 입장입니다. 현장에서 손을 뗀 지는 오래됐죠. 하지만 매일 직원들을 만나다보면 느껴지는 게 있습니다.”
정부장, 그리고 오차장. 두 사람의 활약으로 살벌하기 그지없던 마케팅 부서의 분위기.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마케팅 부서의 분위기는 변해가고 있었다.
정부장. 현차장. 유선. 최대리. 많은 사람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의욕적으로 일하고, 자유롭게 의견을 내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건 한록이었다.
“주위 사람들이 이한록 과장을 아주 잘 따릅니다. 공연사업본부, 더 서울과의 협업은 말할 것도 없죠. 이한록 과장의 리더십이 크게 부족하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더 서울 얘기가 나오자 하정엽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하정엽이 생각에 잠겼을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그래. 다른 회사랑 이 정도 협업을 추진하는 건...그건 확실히 과장급이 할 만한 일은 아니다.’
최경준은 조용히 하정엽의 고민을 지켜보았다.
젊은 나이에 비해 권위적이고 냉정한 리더인 하정엽. 최경준 역시 입사 2년차 한록이 하정엽을 설득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하정엽이 이 정도로 고민을 하는 것 자체가 최경준에게는 놀라운 일이었다.
‘이한록 과장이 사장님께 꽤나 좋은 인상을 남겼나 보군.’
첫 번째 카드가 생각보다 더 뛰어난 역할을 해주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두 번째 카드.
“그리고, 좀 부족하면 어떻습니까.”
누구라도 절대 거절할 수 없을 카드.
“이한록 과장의 뒤에는 제가 있을텐데요.”
바로 자기 자신.
영화사업본부의 절대 권력자. 한국 영화의 아버지. 사장에게 선생님이란 소리를 듣는 최경준이란 사람이었다.
“...”
최경준의 말에 하정엽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선생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일단 결과를 지켜보겠습니다.”
그러나 하정엽은 여전히 검지 손가락으로 작게 책상을 두드리고 있었다. 여전히 생각할 일이 남아있다는 뜻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최경준이 물었다.
“사장님. 다른 생각을 하고 계시는군요.”
“아까 이한록 과장이 약속을 지켰다고 하셨습니다. 설명해주시죠.”
최경준의 질문에 하정엽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그리고 이는 최경준이 가져온 오늘의 용건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이한록 과장이 ‘더 서울’과 <러빙 고흐>를 함께 마케팅할 거라고 말씀드린 걸로 알고 있습니다.”
“네. 그렇게 날 설득했죠.”
“사장님을 실망시킬 순 없는 모양인지, 이한록 과장이 약속을 지키려고 꽤 많은 노력을 했더군요.”
이번 <러빙 고흐>에서 다양한 시도를 해 본 한록. 이는 하정엽에게 한록의 활약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였다.
‘자, 어떻게 말해볼까.’
최대한 인상 깊게. 최대한 하정엽의 마음에 남게.
최경준이 이 순간을 음미하며 입을 열었다.
“가장 먼저 <러빙 고흐>와 ‘더 서울’의 통합 광고를 걸었습니다. 사람들이 이 광고를 궁금해할 거라고 하더군요.”
하정엽 역시 도시 이곳저곳에서 본 해바라기 광고.
“더 서울의 1인 관람은 더 서울이 모움 미술관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고 말했습니다.”
더 서울을 겨우 설득해서 <러빙 고흐>의 영상을 삽입한 1인 관람.
“그리고 사장님께 말씀드린 것처럼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러빙 고흐>로 500만을 달성하겠다고 했습니다.”
“저번주 성적이 200만이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러빙 고흐>의 성적을 주시하고 있는 하정엽. 하정엽 역시 한록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었다.
“네. 독립 영화로 500만이라. 사실상 불가능한 약속이었습니다.”
“그 말을 하기 위해서 절 찾아온 건 아니실텐데요.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하정엽의 질문.
그리고 한록이 해 온 약속의 결과.
“어제 더 서울에서 연락을 해왔습니다. 고흐전이 아시아 아트 어워드에 후보로 선정되었다고 합니다.”
“아시아 아트 어워드면...”
“모움 미술관이 수상했던 곳입니다.”
그 말에 하정엽의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갔다.
“그런데 백부장은 다른 얘기를 더 좋아하더군요.”
그러나 기쁜 소식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더 서울이 15년만에 모움의 관람객수를 추월했다고 합니다.”
‘더 서울이 모움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될 거다’ 란 말을 이뤄낸 한록.
‘저 녀석은 나중에 여기로 데려와도 좋겠군.’
하정엽은 하태준이 고흐전을 둘러보며 한록에 대해 한 말을 떠올렸다.
하태준과 하정엽이 사랑하는, 그러나 회사 입장에선느 애물단지나 마찬가지인 더 서울. 그런 더 서울이 15년만에 라이벌인 모움 미술관을 이겼다.
“고생했다고 전해주세요.”
그렇다면 <러빙 고흐>가 500만을 달성하지 못한 것도 크게 흠이 될 일은 아니었다.
벌써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하정엽.
'지금이다.'
<러빙 고흐>의 결과를 보여주기에 이보다 더 좋은 상황은 없었다. 그렇게 판단한 최경준이 하정엽의 책상에 무언가를 올려놓았다.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먼저 보셔야 할 게 있습니다.”
최경준이 꺼낸 것은 방금 전 한록이 최경준에게 보낸 보고서. 그리고 최경준이 이곳으로 오게 만든 이유였다.
하정엽이 보고서를 가져가 읽기 시작했다.
[러빙 고흐 관객수 추이]
보고서에 적힌 것은 <러빙 고흐>의 관객수였다. 첫 장은 하정엽이 확인한 대로 200만 관객이었으나, 두 번째 장은 못 보던 내용이 적혀있었다. 아마 오늘 추가 된 내용이 분명했다.
[<스타의 하루> 추가분 방영 이후 일일 관객수 4배 상승]
[현재 관객점유율 1위]
[<스타의 하루>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으로 볼 때, 차후로도 비슷한 예매율이 유지될 것으로 예상됨.]
[현재 관객수: 350만]
[예상 관객수:]
이미 하정엽의 예상치를 넘은 수치. 그리고 보고서의 결론.
[500만.]
한록이 얘기했던 바로 그 관객수였다.
500만이라는 숫자를 한참 바라보던 하정엽이 최경준에게 물었다.
“본부장님도 이렇게 진행될 거라고 예상하십니까?”
“아뇨. 보수적으로 측정한 수치라, 550만도 가능하리라 봅니다.”
그 말에 하정엽은 한달 전 한록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더 서울. 모움. 하태준의 관심. 500만.
하정엽에게 허황되기 그지 없는 미래를 말하던 한록.
그러나 지금 그 미래는 모두 사실이 되었고-
"이 정도면 약속을 지켰다고 할만하지 않습니까."
한록은 자신이 한 약속을 전부 지켜왔다.
하정엽 역시 믿지 않던, 그저 기회를 준 것뿐이었던 제안들을 모두 사실로 만들어온 한록.
“또 말도 안 되는 일을 해 왔군.”
보고서를 덮은 하정엽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
<러빙 고흐>의 보고서를 본 하정엽. 기쁜 소식임에도 불구하고, 하정엽의 고민은 한층 깊어진 상황이었다.
‘이한록이 본부장이라.’
하정엽도 사실 한록이 본부장이 되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진 않았다. 한록은 아주 젊지만, 최경준의 말처럼 한록의 라인을 위로 올려서 차근차근 승진을 해가면 되는 일이니까.
하정엽이 최경준의 제안에 미지근한 반응을 보이는 진짜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아직은 어리다.’
그 생각보다 더욱 강하게 드는 생각은 바로-
‘이 사람을 괸라자로 올리는 게 맞나?’
한록을 실무가 아닌 위치로 보내는 게 옳은 선택인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한록의 빛나는 천재성. 그리고 언제나 자신을 놀라게 하는 결과물.
그러나 관리자는 일을 하는 자리가 아니라 책임을 져야하는 자리다.
직원과 사장 사이에서 회사를 조율하고, 회사의 운영방식을 결정하는 위치. 본부장.
“이한록 과장이 본부장의 자리에 올라간다면...마케팅에서는 손을 떼야겠군요.”
“네. 신경써야 할 다른 일이 많으니까요.”
한록이 본부장이 된다면, 앞으로 이렇게 짜릿한 결과물을 받아볼 일은 드물어지게 될 게 분명했다.
그 말에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하정엽.
“아쉽군요.”
회사를 책임지는 본부장. 뒤는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천재성을 발휘하는 마케팅 부서의 직원.
한록에게 그 두 가지 길을 모두 마련해주고 싶다는 마음에 하정엽이 다른 가능성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몇 년만 기다리면 미국지사로 보낼만한데.’
헐리웃을 공략하기 위해 만들어진 미국지사.
미국지사는 CK가 헐리웃에게 던진 도전장 같은 것이었고, 회사로 따지면 일종의 스타트업이라 말할 수 있는 위치였다.
여느 스타트업이 그렇듯, 대표가 직접 발로 뛰며 회사의 틀을 만들어나가야 하는 해외지사. 그리고 대표의 역량에 모든 게 달렸다고 볼 수 있는 스타트업.
만약 한록이 미국에 나간다면, CK가 단순히 ‘한국 최고의 영화기업’에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그러나 미국 지사가 제대로 된 역량을 갖추려면 5년 정도가 예상되는 상황.
한록이 한국을 뒤로하고 험지 그 자체인 미국으로 갈 것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실무. 회사를 이끌어 나가는 사람. 그 모든 역할을 할 수 있는 위치.
한록이 새롭게 향할 곳을 고민하고 있는 하정엽에게 최경준이 말했다.
“저 역시 이한록 과장이 실무에서 손을 떼는 건 아쉽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한록 과장이 관리자로서 보여줄 역량도 많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 말에 하정엽이 고개를 끄덕이는 하정엽. 그러나 하정엽이 최경준의 말을 따르기로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이 부분은 나중에 다시 얘기합시다.”
본부장. 지사장. 혹은 그냥 회사원.
한록이 어느 곳에 가서, 어떻게 활동할 것인가.
그리고 자신은 어떻게 한록을 활용할 것인가.
그 결정으로 인해 많은 것이 달라지리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네. 이한록 과장에게도 언질은 해두겠습니다.”
그 결정은 결국 한록이 할 것이란 사실도.
*
하정엽과의 대화 후, 본부장실로 한록을 부른 최경준.
“사장님께서도 자네가 본부장 자리에 올라가는 걸 반대하시지 않아. 다만...자네가 마케팅에서 물러나는 걸 아쉬워하시더군.”
“...네.”
최경준의 말에 한록이 신중하게 답했다. 하정엽의 고민은 한록 역시 가지고 있던 생각이기 때문이었다.
“빨리 결정을 내리게. 어쨌든, 결과는 자네가 원하는 대로 가게 될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이제 그 결정을 내릴 날이 머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한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고. 또 할말이 있다며.”
“네. 연말 시상식 때문에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고민에 잠겨있을 때가 언제냐는 듯, 일 얘기가 나오자 번쩍 고개를 들고 대답하는 한록.
‘어쩌면 사장님 말씀이 맞을 수도 있겠군.’
문득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 그 생각을 가볍게 무시하며 최경준이 한록에게 물었다.
“어떤 부탁이지?”
“연말 시상식을 위해 CK의 모든 영화를 마케팅하려고 합니다. 이번 시상식은 CK의 영화들이 가져가야 하니까요.”
“그래, 예전에도 얘기했었지. 그래서 부탁하려는 내용은?”
연말 시상식에서 승리하기 위해. 음악사업본부를 누르기 위해. 타임스퀘어에 광고를 올린 것보다 더 큰 성과를 알리기 위해 한록이 만들어 온 계획.
CK ENM을 최고로 만들기 위한 한록의 계획은-
“우리 회사의 모든 부서가 이번 마케팅에 참여해 주었으면 합니다. 물론, 그럴만한 내용으로 만들어 왔습니다.”
오늘도 최경준이 스스로의 귀를 의심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