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해피엔딩만 있는 건 아니다.
슬레이트 소리에 시작된 <스타의 하루> 추가 촬영.
한록과 우감독이 CK ENM의 로비를 걷는 장면이었다.
“어! 감독님! 현주야!”
“은솔씨?”
저 멀리서 나타난 이은솔의 말에 우감독이 어색한 목소리로 답했다. 누가봐도 연기 티가 나는 대답이었다.
“여긴 무슨 일이세요?”
“아, 나는 이번에 영화 때문에...여기, 이과장님이랑 같이 하는거야.”
“아, 안녕하세요. 현주랑 <도착지> 하신거요? 그거 다 끝났나요?”
“응. 이제 곧 개봉해.”
“개봉하면 보러갈게요.”
“고마워. 은솔씨는 여기 무슨 일이야?”
“저 오늘 <러빙 고흐> 시사회에서 공연하기로 했거든요.”
“아...언제? 나도 보러가도 되나?”
대본에 쓰인 내용을 착실히 주고받는 우감독과 이은솔. 잠시 후, 김PD가 컷을 외치고 이번 장면의 촬영이 끝났다.
“이과장님!”
그때 다급하게 한록을 부르는 김PD. 한록이 다가가자, 김PD가 카메라를 보여주며 말했다.
“잘 나왔죠?”
“...네.”
김PD는 촬영 전 한록에게 강력히 화면에 나올 것을 요청했다. 물론 한록은 이를 거절했었다.
-이과장님도 무조건 같이 나와야 합니다. 왜냐고요? 잘생겼으니까요.
그래도 굳이 해야하나?
-<도착지>에 홍보가 되지 않을까요?
라고 생각하기엔 너무나 매력적인 제안이었고, 한록은 결국 촬영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 결과가 지금.
‘당분간 구내식당은 못 가겠군.’
한록은 곧 다가올 안타까운 미래에 한숨을 쉬었다.
잠시 후 시작된 두 번째 촬영.
이번에는 최슬아와 이은솔이 사람들 사이에서 <러빙 고흐>를 관람하는 장면이었다.
고흐의 생애와 그림에 대한 열정, 그리고 외로움. 이은솔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살짝 눈물을 훔쳤다.
아마 고흐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이은솔만이 아니라 섭외된 관객들과 우감독 역시 <러빙 고흐>에 흠뻑 빠진 모습이었고, 김PD는 그 모습을 보며 조용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여기까지 가겠습니다!”
<러빙 고흐>가 끝나자 울리는 경쾌한 컷소리.
이제 남은 것은 이은솔과 최슬아의 공연뿐이었다.
한록과 우감독의 등장. <러빙 고흐>를 보며 마치 자신의 얘기처럼 느끼는 이은솔. 그리고 마지막 공연까지.
모두가 기다리는 완벽한 스토리에 김PD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대로만 가면 이번 분기 시청률 1위다!’
그 생각을 하는 건 김PD만이 아니었는지, <스타의 하루> 촬영장은 한껏 들뜬 분위기였다.
“<러빙 고흐> 영상 틀어주세요!”
“자리 좀 바꾸겠습니다. 감독님, 앞으로 와주세요!”
“여기 의자 필요합니다.”
이은솔과 최슬아의 광연을 위해 일사천리로 움직이는 촬영현장.
상영관 앞의 의자에 앉은 이은솔. 그리고 그 옆에 기타를 들고 앉은 최슬아.
둘의 뒤에 걸린 스크린에선 <러빙 고흐>의 장면들이 나오고 있었다.
“시작할게요!”
김PD의 목소리.
조심스럽게 시작된 최슬아의 기타소리.
그리고...
[starry starry night...]
첫 마디부터 갈라지기 시작하는 이은솔의 목소리.
너무 오랜만에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라 긴장한 것인지, 이은솔의 노래에는 실수가 가득했다. 그 모습에 당황해서 이은솔을 바라보는 사람들.
“...컷.”
노래가 끝났고, 김PD가 촬영을 중단시켰다.
“어떡해?”
작게 중얼거리는 사람들과, 애매한 얼굴의 김PD.
김PD가 곁에 있던 한록에게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거 다시 촬영해도 제대로 안 나올 것 같은데.”
그 생각은 한록 역시 마찬가지였다.
‘긴 슬럼프에 빠져있던 가수가 아름다운 노래로 컴백을 알린다.’
모두가 바라는 영화 속 한 장면. 그러나 그런 일이 현실에서 일어나진 않았다.
이은솔의 실력은 녹슬었고, 3년간의 공백이 많은 실수를 가져왔다. 촬영을 다시 한다 해도 이은솔이 예전보다 더 뛰어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뽑아낼 수 없을 것이었다.
“그냥 여기서 끝내는 게 좋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한록의 말에 김PD가 이은솔에게 말했다.
“은솔씨. 이제 쉬세요.”
그 말에 이은솔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영화관 밖으로 달려갔다. 차마 눈앞의 관객들을 마주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도망치는 듯한 이은솔의 뒷모습. 그리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은솔을 바라보는 우감독의 얼굴.
그 둘의 모습을 보며 한록은 생각했다.
‘모든 게 해피엔딩일 순 없구나.’
삶은 절대 영화가 아니고, 영화처럼 언제나 아름다운 결말만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PD님. 철수하지 말고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제가 은솔씨랑 얘기 좀 해보겠습니다.”
엔딩이 없기에 삶에는 다음 기회가 존재하는 것이었다.
*
<스타의 하루> 대기실로 사용되고 있는 휴게실로 향한 한록. 휴게실의 문을 노크하자, 최슬아가 문을 열어주었다.
“촬영 때문에 이은솔씨랑 얘기를 좀 해야해서요.”
그 말에 망설이다가 결국 자리를 피해주는 최슬아.
지친 얼굴의 이은솔이 한록에게 물었다.
“...남은 촬영이 있나요? 공연을 다시 하긴 어려울 것 같아요.”
최대한 감정을 절제해서 말하고 있지만, 이은솔은 방금 있었던 일로 충격이 큰 것 같은 얼굴이었다.
3년만에, 그것도 친구의 도움으로 겨우 출연한 공연을 망쳤다.
어쩌면 이은솔은 <스타의 하루>를 촬영하기 전보다 더 안 좋은 상황에 처한 걸지도 몰랐다.
한록은 이은솔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일단 <러빙고흐>는 문제가 없는데...’
최슬아와 이은솔이 함께 <러빙 고흐>를 관람했고, 노래도 불렀다.
이은솔의 실수는 음원파일로 덮으면 되는 거고, 방송은 이은솔의 공연이 아름답게 마무리 된 걸로 편집해서 나가면 되는 일이었다.
한록의 애초 목표였던 <러빙 고흐>의 마케팅은 잘 마무리 된 상황.
다만 아쉬운 건, 이 상황을 지켜보는 우감독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저도 감사해요.’
그런 말을 들었는데, 여기서 이은솔을 외면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은솔씨.”
팔짱을 끼고 있던 한록이 이은솔의 앞에 앉았다. 그리고 이은솔에게 말했다.
“다시 공연을 할 필요는 없어요. 어차피 편집해서 나가면 되니까.”
“네, 죄송합니다. 다음에는...”
이은솔은 그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나한테 다음이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한 이은솔. 그리고 그건 우감독이 하고 있는 생각이기도 했으며...
‘여기서 실수하면 다음은 없다.’
회귀 전 한록이 자주 하던 생각이기도 했다.
내가 너무나 부족하다는 생각.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 여기서 버티지 못하면 끝이라는 생각.
예전의 자신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들.
어쩌면 그건 한록이 계속 우감독과 이은솔에게 마음을 쓰고 있는 이유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두 번째 삶을 살다보면 느끼는 것은, 세상이 그렇게까지 잔인하지만은 않다는 것이었다.
실수하면 안 되는 순간들이 있고, 스스로가 부족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생각되는 날들도 분명 있었다.
그러나 그게 마지막은 아니었다.
다음 영화. 다음 일. 다음 작품. 다음 사람. 다음 회사. 본인이 알지 못했을뿐, 언제나 삶에 있던 많은 다음 기회들.
‘...내가 말로 해봤자 안 와닿겠지.’
하지만 한록 역시 두 번째 삶이란 기회를 얻기 전에는 몰랐던 것들.
이은솔도, 우감독도, 직접 보기 전까지는 깨닫지 못할 일들이었다.
‘보여줘야 한다.’
세상이 당신을 몰아세우기 위해 있지만은 않단 것을. 누군가는 당신을 비난하더라도, 또 누군가는 당신을 응원하고 있다는 것을.
이은솔이 스스로 보고 깨닫게 해야했다.
그렇게 생각한 한록이 이은솔에게 말했다.
“공연은 안 해도 되지만, 들어가서 인사는 해야할 것 같네요.”
한록의 말에 이은솔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공연을 망치고 돌아온 직후에, 다시 관객들을 보러 가라는 말. 지금 이은솔이 가장 외면하고 싶은 상황이었다.
“...그냥 끝내면 안 될까요?”
“관객 대부분이 이은솔씨를 보기 위해서 온 사람들이에요. 은솔씨 팬클럽들도 많이 있고요. 인사는 하고 끝내야죠.”
여전히 망설이는 이은솔.
‘안 통하려나.’
그런 이은솔을 보며 고민하던 한록이 마지막으로 설득의 말을 건넸다.
“지금이 아니면 다음 번에는 더 용기가 필요할 거예요.”
그 말에 한참이나 고민하던 이은솔이...
“네. 들어갈게요.”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
그리고 상영관의 문앞.
창백한 얼굴로 문을 바라보던 이은솔이 한록에게 물었다.
“사람들이 실망했겠죠?”
그에 대한 한록의 답.
“네, 그랬겠죠.”
“...괜찮아요. 받아들여야죠.”
“은솔씨.”
그리고-
“전 은솔씨가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한록의 말과 함께 열린 문.
문이 열렸고, 상영관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이은솔을 바라보았다. 이은솔은 질끈 눈을 감았다.
‘받아들여야 한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내가 한 일이다.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 생각과 함께 눈을 떴을 때 귀에서 들려오는 소리.
사람들의 박수소리였다.
“왜...”
믿기지 않는듯한 얼굴로 객석을 바라보는 이은솔에게 한록이 말했다.
“받아들여야죠, 은솔씨.”
이은솔은 모르는 것. 우감독도 모르는 것. 너무나 절박한 상황이면 쉽게 놓치고는 하는 것.
“당신을 응원하는 사람도 있다는 걸.”
그 말에 이은솔이 고개를 숙이고 울기 시작했다.
*
한록은 이은솔에게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이은솔은 잠시 후 눈물을 멈추고 객석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스텝에게 마이크를 건네받더니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울음 때문에 아까보다도 더 실수가 많은 이은솔의 노래.
하지만 사람들은 노래를 듣는 내내 이은솔에게 박수를 보내주었다.
“다음에는 꼭 더 좋은 모습으로 돌아오겠습니다.”
노래를 마치고 사람들에게 약속을 하는 이은솔.
그리고 그 모습을 객석에서 계속 지켜본 우감독.
-더 이상 관객들에게 외면받는 게 두려워서 은퇴를 말한 감독.
-그래놓고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 시나리오를 보내온 감독.
잘못된 선택을 하고 과거를 후회하는 사람.
한록은 우감독이 과거의 자신과 같은 선택을 하지 않길 바라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감독님. 정말 <도착지>가 적당히 끝나시길 바랍니까?”
한록의 말에 흔들리는 우감독의 실. 우감독의 실이 한록의 새끼손가락부터 시작해 손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우감독이 한록에게 물었다.
“과장님. 왜 자꾸 절 설득하시려는 겁니까.”
왜 내게 자꾸 무리한 선택을 하게 하는지. 왜 겨우 접은 미련을 다시금 꺼내오게 하는지.
우감독의 질문에 한록은 이제야 제대로 된 답을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제가 하고싶은 말은...”
이은솔은 사람들의 박수에 다시 한번 노래를 불렀고, 꼭 돌아오겠다고 모두에게 약속했다.
그런 이은솔의 모습을 보니 느껴지는 게 있었다. 지금 우감독에게 필요한 말은 <도착지>가 대상을 받을 수 있다거나, <도착지>의 작품성이 <수면>에 밀리지 않는 다는 말 같은 게 아니었다.
지금 우감독에게 필요한 말. 그리고 한록이 해야했던 말은.
“제가 좋아하는 영화니까요.”
당신을, 아주 많이...
“그게 전부예요.”
응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었다.
*
잠시 후, 어두운 상영관 안에서 우감독의 실이 반짝였다.